중간 멘트
문화란 인간의 영혼을 담는 질그릇이다. 서예라는 문화의 질그릇에 우리들의 맑은 영혼을 담아보자. 다양한 서체는 그릇의 모양이요, 작가의 정신은 그릇 속의 내용물로 나타난다.
언제나 평온한 화선지 위에 용트림하는 붓질, 그것은 바쁜 현대인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심원한 놀이요, 예술일 것입니다.
서예는 은근하고 지속적인 즐거움을 주는 오랜 전통 문화로서, 자극적이고 즉흥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요즈음의 세태에 더욱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발놀림의 극치가 축구라면 손놀림의 극치는 서예라고 생각한다. 스포츠의 꽃인 축구, 문화의 꽃인 서예. 이 두 가지는 각각 실외와 실내에서 피는 꽃이다.
손으로 쓰는 글씨가 아니라, 마음으로 쓰는 글씨여야 한다. 이른바 心書......
내 육신의 고향이 지보 수월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수월하게 태어나 수월하게 살아가다가 죽기도 수월하게 하리라는 뜻에서 한글 호를 ‘수월’로 쓰고 있다.
태어날 때에는 불알 두 쪽밖에 없었는데, 지금의 나는 아내와 아들딸, 그리고 붓 등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호를 ‘도정’놈이라 붙였다.
線일 줄 알고 썼더니 알고 보니 劃이었고, 단순한 평면예술이려니 했는데 시간과 공간이 혼효된 입체예술이었다.
형태뿐이려니 했는데 그 속에 뼈와 근육과 피와 살이 있었다. 守白하니 知黑이요, 守黑하니 知白이었다. 흑백의 격조 높은 앙상블......
낭창낭창하고 원만하게 생긴 붓털이 빚어내는 강하고 질긴 획질(劃質)! 심간을 깎는 아픔의 붓질을 통한 먹울림! 이러한 잔잔한 감동들 때문에 서예는 인류 역사와 궤를 같이 하였고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혹독할 정도로 애호하고 있다.
화선지는 대지요, 먹물은 빗줄기이다. 화선지는 늘 건조한 상태에서 빗줄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갈증에 허덕이는 화선지의 절규가 들린다. 비 내려야지, 비 내려야지…….
글씨를 보면 그 사람의 인품과 교양을 짐작할 수 있고, 좋은 글씨가 걸려있는 집에 들어가면 집안에 삶의 향기와 운치가 느껴져 아늑한 행복을 맛보게 된다.
글씨가 오래되어 낡고 찢어지고 부서져 한 조각만이라도 남아있더라도 그 한 조각이 작가의 전체 예술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어느 한 부분인들 소홀히 할 수 있으랴.
글씨란 씨도 종이에 떨어져 썩어야만 한다. 썩어야 열매 맺고 그 열매는 다른 감상자의 입맛을 돋울 수 있다. 그 글씨 열매에서 배어 나오는 묵향은 내용과 어울려 시공을 초월하여 메아리쳐서 대를 잇게 된다.
그대, 칠흑같이 캄캄한 시골 방에서 봉창 틈을 비집고 내리꽂히는 달빛의 산뜻함을 기억하는가? 그리고 어느 늦가을 아침, 잠에서 어렴풋이 깨어나는 순간 문틈으로 새어드는 햇살이 방안의 뽀얀 먼지를 흔들며 머리맡에 쏟아지던 그 상큼한 순간을 기억하는가? 은빛의 부드러운 화선지 위에 까맣게 윤기 넘치는 먹물이 흐드러지게 퍼져나가는 그 맛 역시 영원히 놓칠 수 없는 오싹한 전율이다.
운동장에서는 잘잘못을 떠나 누구든 공을 찰 수 있고, 노래방에서는 점수에 상관없이 누구나 노래를 부를 수 있듯이, 아무나 붓을 잡으면 붓글씨를 쓸 수 있다. 그대 또한 서재에 혼자 앉아 또 다른 내면의 자아와 대화를 나누면서 붓질을 즐길 수 있다.
번잡한 세상일수록 지고한 붓과 지순한 종이와 더불어 지내다 보면 생각은 어느새 가을 물처럼 맑아진다.
조자룡이 무딘 칼을 탓하던가? 연장타령, 기분타령, 날씨타령……. 반주 없어 노래 못할까. 꿩 잡는 것이 매이다.
먹빛은 천년 간다고 하였것다. 당장 지필묵(紙筆墨)을 잡아보면 어느덧 공해 속의 자신은 잊어버리고 신선이 된 기분을 만끽할 것이다. 혼자서도 흠뻑 빠질 수 있는 취미활동 중에 이보다 멋스러운 것이 어디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