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동정

[인천의품격] 열혈 문화운동가 ‘동정 박세림’

10기 송암예술아카데미 ‘인천 근현대 예술인의 삶’
4편 권상호 동방문화대학원 교수 ‘동정 박세림’ 강의

 

 

인천투데이=이형우 기자 l 인천이 배출한 절정의 서예가는 검여만 있는 게 아니다. 인천 문화 발전을 위해, 인천의 혼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 사람. 일필휘지, 글씨를 단숨에 써 내리는 서법으로 알려진 사람. 한국 서예계에서 검여와 어깨를 나란히 한 사람. ‘동정 박세림’ 선생이다.

권상호 동방문화대학원 교수가 송암미술관이 주관한 송암예술아카데미 ‘인천 근현대 예술인의 삶’에 출연해 인천 서예의 봉우리 동정 박세림 선생의 삶을 얘기했다. 아래는 강의 내용 일부를 정리한 글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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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 박세림. (사진제공 권상호 서예-도정문자연구소 블로그)

“스스로 학문과 서예를 수학하다”

동정은 1925년 4월 20일 강화도에서 태어났다. 3대 독자로 태어난 그는 가족들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다. 동정은 6살 때부터 뛰어난 서예가인 할머니에게 천자문과 한글, 동몽선습(조선시대 아동용 교재)를 배웠다. 동정의 부친은 독립운동가다. 그의 부친은은 향토사 ‘강도지’를 저술할 만큼 당대 문호로서 시문에 능했다.

동정이 8살이 되던 해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동정은 부친을 따라 한문과 서예 학습을 시작했다. 인천 해성중학교(인천남중학교)에서 현대적인 학문을 접하며 공부했다. 하지만 동정 나이 15살, 매정하게도 부친마저 세상을 작고했다.

동정은 이에 굴하지 않고 사숙(私淑, 어떤 사람의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배우고 싶은이의 작품 등을 스스로 익힘)하며 한문과 서예에 정진했다. 당나라 구양순과 안진경의 해서를 주로 연습했다.

어린 나이에 이별한 할머니와 아버지의 가르침이 뿌리가 되고 스스로 배우려는 의지가 줄기가 돼 동정의 서예는 피어 올랐다.

1947년 동정은 23살에 인천예술인협회 총무부장, 대동서도협회 회장, 대동서도협회 공모전 심사위원 등을 맡았다. 또 문총구국대 인천지무 총부부장을 맡았고 대동서화동연회 사무국장을 7년간 역임했다.

동정은 작품 활동도 적극적이였다. 대동서도협회 전람회에 8점, 제1회 대동서화동연회전에 5점, 제2회 전시회에 7점을 출품했다.

동정 박세림. (사진제공 권상호 서예-도정문자연구소 블로그) 

“시암과 검여를 만나며 동정의 서예가 완성되요”

동정은 스승 시암 배길기를 만나 큰 변화가 생긴다. 구양순 해서를 위주로 배우며 서예 실력이 빠르게 성장했다. 제2회 국전부터 출품하기 시작해 6회 국전까지 연속으로 입선했다. 7·8회 국전에서 동정은 특선도 이룬다.

동정은 서예에 더 집중하기 위해 1954년 서울한의과대학을 중퇴했다.

동정은 1958년부터 1960년까지 3년동안 매년 개인전을 개최했다. 그 과정에서 동정은 등석여와 조지겸의 글씨를 익히는 등 자신의 서예 세계를 넓혔다. 특히 검여와 자연스럽게 교류하며 검여의 영향을 받았다. 동정은 검여의 북위풍의 맛을 곁들이면서 동정만의 서체를 완성했다.

국전에 8차례 출품한 후 동정은 국전 초대 출품, 대동서예협회전, 대동서화동연회전, 동정서숙전 등으로 성실하게 작가 활동을 펼쳤다.

1960년 동정은 제9회 국전에서 문교부 장관상을 수상햤다. 출품작 작풍은 황정견과 구양순의 필의가 가미된 북위서풍 글씨이다. 당시 소전 손재형에게 첨삭지도를 받았다.

그밖에도 동정은 인천시 문화상, 경기도 문화상을 수상하고 동정서숙 창설, 인천문총 대표최고위원 역임, 예총 경기지부 부지부장 역임 등 단체 활동도 끊임없이 했다.

반야심경(동정, 1973).반야심경(동정, 1973).

“조심스럽지만, 과로가 단명의 원인일지도 모를 일이에요”

동정은 1965년 예총 경기지부 지부장을 맡으며 많은 심사와 작품 출품으로 바빠진다. 세상에 이름을 떨친 동정은 지부장을 5회 연임하고 대학, 회사, 은행, 방송국 등에 많은 강의 요청을 받았다.

같은 해 동정은 서울 종로에 서실을 냈다. 또 인천시사 편찬위원과 경기연감 편찬위원을 역임하면서 제14회 국전 서예분과 심사위원과 제5회 동정서예개인전을 모두 소화했다.

동정은 파월장병지원 대책위원, 5.16민족상 이사, 인천시 행정자문위원, 반공연맹 경기지부 운영위원, 인천시 감사장, 민주공화당 중앙위원회 농어촌분과위원 등을 역임하며 정치 행보도 보였다.

그밖에 동정서숙을 개칭한 동정한묵회 이사장, 인천문화원장, 국전 서예분과 심사위원장, 강화문화재 고문, 전국문화원연합회 이사, 기서문화 향토사연구회 회장 등을 맡았다.

동정은 교육 활동도 힘썼다. 인천교육대학 강사, 인천소년교도소 재소생 서예지도위원, KBS방송국 서예반 지도 강사 등 강의에 나섰고 동정한묵회에서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대표적인 제자로 청람 전도진, 송암 정태희를 손꼽는다.

동정은 서예 외에도 종교, 문화, 정치, 교육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많은 활동을 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많은 활동을 했던 탓일까. 키 182cm와 몸무게 95kg로 호방하고 건장했던 동정은 1975년 자신의 집 안방에서 돌연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동정은 해방과 분단, 전쟁 속에서 서예의 맥을 잇고 자신의 제자를 양성했다. 동정 스스로 정리 정돈 하는 깔끔한 성격이 그의 서체에 담겨 있다.

이런 동정의 정신을 인천은 품지 못했다. 동정의 제자 청람 전도진이 인천에서 그의 예맥을 계승하고 있지만 인천은 무관심했다. 동정 유족이 동정의 작품과 유품을 인천에 기증하려 했지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동정의 제자가 교편을 잡고 있는 대전대학교에 동정의 작품과 유품을 기증했다.

인천에 국립문자박물관과 시립미술관이 들어설 예정이다. 추사의 예맥을 잇고 한국을 대표하는 걸출한 서예가를 배출한 고장은 인천이다. 검여와 동정은 모두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란 대한민국 대표 서예가다. 하지만 두 서예가의 영혼이 찾아와 쉬고, 시민들이 두 사람의 법고창신 정신을 공감할 수 있는 공간이 인천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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