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이 엮은 <한정록閑情錄>에는 왕휘지에 대한 일화가 몇 가지 실려 있다. 중국 동진 때의 서예가로 그는 저 유명한 왕희지의 다섯째 아들이다. 그는 산음(山蔭)에서 살았다. 밤에 큰 눈이 내렸는데 한밤중 잠에서 깨어나 창문을 열자 사방은 눈에 덮여 온통 흰빛이었다.
그는 일어나서 뜰을 거닐며 좌사(左思)의 ‘초은시(招隱詩)’를 외다가 갑자기 한 친구 생각이 났다. 이 때 그 친구는 멀리 섬계라는 곳에 살았는데, 서둘러 작은 배를 타고 밤새 저어 가서 날이 샐 무렵 친구집 문전에 당도했다. 그러나 그는 무슨 생각에선지 친구를 부르지 않고 그 길로 돌아서고 말았다.
어떤 사람이 이상하게 여기고 그 까닭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흥이 나서 친구를 찾아왔다가 흥이 다해 돌아가는데, 어찌 꼭 친구를 만나야만 하겠는가.”
흥이란 즐겁고 좋아서 저절로 일어나는 감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흥은 합리적이고 이해 타산적인 득실이 아니다. 그 때 그 곳에서 문득 일어나는 순수한 감정이 소중할 따름이다.
매사를 합리적으로만 생각하고 손익 계산을 따지는 요즘 사람들은 눈이 내리는 날, 밤을 새워 친구를 찾아나선 그 흥겨운 기분과 마음을 삶의 향기로운 운치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 때 만약 친구집 문을 두드려 친구와 마주하고 담소를 나누며 아침을 얻어먹고 돌아왔다면, 그 흥은 많이 줄어들고 말았을 것이다. 시와 산문의 세계가 다른 점이 바로 이런 데에 있다.
전통적인 우리네 옛 서화에서는 흔히 ‘여백의 미’를 들고 있다. 이 여백의 미는 비록 서화에서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끼리 어울리는 인간 관계에도 해당될 것이다. 무엇이든지 넘치도록 가득가득 채워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여백의 미가 성에 차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나 두루 헤아려 보라. 좀 모자라고 아쉬운 이런 여백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숨통이 트일 수 있지 않겠는가.
바람직한 인간 관계에는 그리움과 아쉬움이 받쳐 주어야 한다. 덜 채워진 그 여백으로 인해 보다 살뜰해질 수 있고, 그 관계는 항상 생동감이 감돌아 오랜 세월을 두고 지속될 수 있다.
등잔에 기름을 가득 채웠더니 심지를 줄여도 자꾸만 불꽃이 올라와 펄럭거린다. 가득 찬 것은 덜 찬 것만 못하다는 교훈을 눈앞에서 배우고 있다.
- 법정, ‘등잔에 기름을 채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