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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예사
우리나라에 한자가 들어온 시기에 관해서는 확실한 문헌이 없으나 대체로 B.C. 2-4세기 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의 문자 자료는 현재 전해지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며 다만 전한(前漢)시대의 명문(銘文)에 새겨진 동경(銅鏡)이 평양지방에서 발견된 일 이 있고, 그후 낙랑군(樂浪郡)유물로서 와당(瓦當)이나 전(塼) 등이 출토된 바 있다.
우리나라의 서예는 당초부터 중국의 직접적 인 영향을 받아 발전되었으며, 왕희지(王羲之), 구양순(歐陽詢), 안진경(顔眞卿), 우세남(虞世南) 등은 많은 영향을 끼친 서가들 이다.
1. 삼국시대
가) 고구려
고구려는 중국의 문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나라이다.
한인(漢人)들은 낙랑(樂浪)시대부터 5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의 일부에서 행정을 펴고 있었고 그들이 물러간 뒤에도 육지로 연접되어 고구려는 문화교류가 아니면 무력적 공방으로 그들과의 접촉이 끊일 사이가 없었다.
그러므로 문화예술면에 있어서도 그들의 직접적인 영향을 민감하게 받아 들였다. 그러나 당(唐)에 의 하여 왕조(王朝)가 없어지고 문화적 전승자가 없었기 때문에 문헌으로 전해져야 할 고구려의 역사마져도 겨우 왕의 세계(世系) 를 알리는 정도에 그치고 대부분의 사료는 오히려 중국 측 자료에 의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고구려 서법(書法)을 알려줄 수 있는 자료로는 예서(隸書)로 쓴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와 해서(楷書)로 묵서(墨書)한 {년두루묘지(年頭婁墓誌)}와 행서인 {평양성벽석각(平壤城壁石刻)} 그리고 최근에 발견된 {중원비(中原碑)}와 북지(北地)에서 발굴한 고분벽서(古墳壁書) 수점이 있다. 광개토왕릉비는 동서고금에 유례가 없는 거비(巨碑)로서 자체는 한자의 크기가 30cm에 달하며 높이 7m의 4면에 빈틈없이 꽉 차여져 있다. 이 시기는 414년으로 중국에서는 해서가 상용되고 예서는 많이 쓰이지 않았다. 같은 시기의 것인 년두루묘지도 해서를 쓴 것으로 보아 역시 해서를 상용하였을 것이며 왕릉에서 예서를 쓴 것은 특별히 정중과 장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 예서는 파임과 삐침이 없고 고구려에서 형성된 독특한 서풍을 이룬 자체이다. 얼마 전에 발견된 중원비는 글자의 짜임 해는 능비(陵碑)와 공통된 것이 많으나 자체는 해서였고, 년두루묘(年頭婁墓)의 벽서(壁書)는 필력에 박력이 넘쳐흘러 생동함을 보여주었다. 평양석각은 성벽에 있는 것으로 행서인데 자체는 육조(六朝)의 특징을 잘 살린 힘찬 명품이다. 이는 상무적(尙武的)이고 진취적인 고구려인의 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다.
나) 백제(百濟)
백제는 서법을 살펴볼 자료가 거의 없는 형편으로 현재까지 발견된 것으로는 공주 무녕왕릉의 {매지권(買地券)}과 부여지방에 서 발견된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의 2종 뿐이다. 고구려가 중국의 북조의 문화를 받아 들이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백제는 남 조와의 접촉이 많았다. 무녕왕릉비는 순수한 남조풍을 띤 명풍이다. 그러나 사택지적비는 북조의 풍미가 있기도 하다.
이로 미루 어 백제는 남북조문화를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나 생각된다.
유려하면서 기품있는 왕릉지(王陵誌)의 필치는 당시의 수준높은 문화 를 나타내고 있으며 이 밖에도, 불상명(佛像銘), 와전명(瓦塼銘) 등이 유물로 남아있다.
다) 신라(新羅)
신라가 본격적으로 중국와 왕래를 시작한 것은 6세기 초엽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는 비교적 많은 유적이 금석문(金石文)에 남 아 있다. 율주에 있는 선사 시대의 유적으로 보이는 암각화가 있는 암벽 하부의 마애기(磨崖記)는 가장 연대가 오래된 것인데 법 흥왕 때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진흥왕 때 세운 창녕척경비(昌寧拓境碑)와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 3 군데의 순수비(巡狩碑) 가 있으며 진평왕 때의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최근에 발견된 단양 적성비가 있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은 순수비로서 이 비는 신라에서 한문화를 받아들인 이후 법에 맞는 글자 글씨로 작성된 최초의 작품이다. 문장이 병려체(騈儷體)의 형식을 사용하면서 도 전중건엄(典重健嚴)하여 왕가의 품위를 나타내기에 충분하였고 글씨도 육조풍을 띠고 있다.
신라의 서법은 자유분방하게 운필 한 가운데에도 장중하면서 유아한 품격을 지니고 있으면서 신라 특유의 유연하고 견인한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은 삼국시대의 특성을 정리해 보면 고구려는 웅건강용(雄健剛勇), 백제는 우아유려(優雅流麗), 신라는 전중질실(典重質實)함을 알 수 있다.
2. 통일 신라 시대
백제는 660년에, 고구려는 668년을 전후하여 신라와 당에 의해 망하고 신라가 통일된 왕조를 이루었다.
이 시기에는 당의 문화 를 받아들이면서 학술, 문화, 정치, 제도 등 모든 분야에서 당의 색채를 띠었다. 또한 당으로 유학을 가는 승려, 관료의 자제들 도 많았으며 그 곳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이 시기에는 서법(書法)도 발달하여 많은 유적을 남겼다. 남 북조시대는 자체가 예서에서 해서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기였기 때문에 그 서풍(書風)이 자유분방하며 고박(古朴)한 맛이 짙어 예술적인 풍격은 매우 높지만 자획(字劃)과 결구(結構)에 대한 기본적인 법칙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당초의 명가들에 해법( 楷法)의 규범이 정립되었고 서가들이 개성있는 독자적 서풍을 형성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서적으로는 최근에 발견된 사본화엄경(寫本華嚴經)과 일본 정창원(正倉院)에 전해오는 고문서가 있을 뿐이다. 금석문(金石文)은 상당수가 남아있다. 초기에는 대체로 남북조시대부터 내려오는 왕희지체가 주축을 이루었고 뒤에는 당의 구양 순체를 많이 썼다. 이 시기의 유명한 서가로서 제일로 꼽을 수 있는 김생(金生)은 당시 서적(書蹟)으로 남은 것이 없다. 고려 초 기에 와서 그의 글씨를 집각(集刻)한 낭공대사비(朗空大師碑)가 김생의 글씨로 유일한 금석인데, 그의 서법의 전형은 왕희지에서 나왔다 할 것이나, 왕의 글씨는 온화한데 비하여 김생은 그 전서가 유동미(流動美)와 여율감(旅律感)이 생동하는 변화를 여러모 로 살려서 한 획을 긋는 데에도 굴곡과 거세(巨細)를 달리하였다.
또한 자의 결구(結構)에 있어서도 상호조응(相互照應), 음양향 배(陰陽向背)의 묘를 마음껏 섭취하는 등 그의 천재적 예술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정말 신품의 세계를 독점하고 있다. 김생의 글씨는 낭공비 이외에 법첩으로 전하는 전유(田遊), 엄산가서(嚴山家序), 당시첩(唐詩帖) 등이 전한다.
말기의 최치원(崔致遠)은 시문(詩文)에서 뿐 아니라 글씨에 있어서도 한 시기를 대표하는 명가(名家)이다. 그의 자선자서(自選自書)인 진감선사비(眞鑑禪師碑)는 구양순(歐陽詢)의 아들인 구양통(歐陽通)의 도인법사비(道因法師碑)와 비슷한 신품이다.
통일 신라시대는 비록 고려시대에 비하여 양적으로 미치지 못할지라도 격에 있어서는 단연 우리 서예사상 결정에 달한 시기라 할 수 있겠다.
3.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과거제도가 당에서 도입되었다.
제술(製述)과 명경(明鏡)이라는 두 개의 과(科)를 두었는데 제술(製述)은 시(詩), 부(賦) 등 문학작품으로 응시하는 것이지만 글씨도 따라서 선을 보이게 되므로 서학(書學)의 수련을 게을리 할 수 없는 상황이 었고 이외에 잡과(雜科)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서업(書業)이라는 서사전문직(書寫專門職)이 있어 설문(說文), 오경(五經), 자양( 字樣)의 기본과목 외에 진서(眞書), 행서(行書), 전서(篆書)의 실기과목이 있어서 그야말로 서예의 발전과 보급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도 진적은 극히 드물어 금석(金石)은 비갈(碑喝)과 묘지(墓誌) 등이 많이 남아있다. 이 시대의 서법은 당 초기 대가의 필법을 주로 따랐으며 특히 구양순체(歐陽詢體)가 많았다.
구양순체는 자획이 방정건엄(方正健嚴)하여 한 자 한 자를 쓰는데 순간이라도 정신이 흐트러짐을 용인하지 않는 율법적(律法的)인 서법이므로, 특히 구체(歐體)가 많이 쓰인 듯하다. 고려시대의 명가로는 구족달(具足達), 한윤(韓允), 민상제(閔賞濟), 안민후(安民厚), 임현(林顯), 오언후(吳彦候) 등이 있고 우 세남(虞世南)에 능한 이로서 이원부(李元符), 장단설(張端說) 등이 있으며 이 외에 김원(金遠), 채충순(蔡忠順) 등이 있다.
고려시대 중엽에 이르러 탄연(坦然)(1070 1159)이라는 대서가(大書家)가 출현했다. 탄연은 고승인 동시에 명필가인데 그의 법명 은 대감(大鑑)이고 속명은 손씨이다. 일찌기 유학의 경전에 통하였고 불법에 들어가서 뒤에 왕사(王師)까지 되었다.그는 고승이 었지만 서예로서 그 이름이 더 높았다. 대표적인 그의 글씨로는 문수원비(文殊院碑)가 있는데 행서로서 왕희지의 성교서(聖敎書) 와 일맥상통하는데가 있으면서 일면 당대 이후로 전승되어 온 사경풍(寫經風)의 필법(筆法)이 합하여 새로운 일체(一體)를 형성 한다. 그의 서는 유려하면서도 강철같이 굳센 골(骨)이 있다고 하여 김생과 더불어 신품이라고 일컬어진다.
이 무렵의 서가로 승혜소(僧慧素)가 있는데 그는 당대로 부터 전해져 온 사경(寫經)에 바탕을 두고 세해(細楷), 대자(大字)에 모두 뛰어났는데 대표적 작품으로서 영통사(靈通寺) 대각국사비음기(大覺國師碑陰記)가 있다.
고려시대 후반 무신난이 일어난 뒤에는 정권이 무인(武人)의 손에 넘어 갔고 문인들은 도피하거나 무인에 붙어사는 처지로 전락 되었다. 그리하여 전반적인 문화, 예술은 퇴보하게 되었고 글씨도 마찬가지의 운명이었다. 그러나 고려말기 원나라와의 밀접한 관계가 생기면서 활발한 교류가 전개되었다.
충선왕은 원의 북경에 만권당(萬券堂)을 지어놓고 있을 때 당시 서가중 최고인 조맹 부와의 교류가 많아서 당시 왕을 따라 원에 간 문인들은 조의 서체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이군해(李君孩), 이제현(李齊賢) 같 은 이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말기의 서가로는 예서에 능한 권중화(權仲和), 한수(韓脩) 등이 있었으나 초기에는 미치지 못했다.
고려 시대에는 비갈(碑喝)외에도 경판(經板), 사경(寫經)등이 적지 않은데 특히 묘지(墓誌)는 200여점을 헤아리고 있다. 연대로 는 초기에서부터 말기에 이르기 까지 400여년에 걸친 모든 것이 나타나 있어 더욱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이 묘지(墓誌)들은 일반 비석과는 달리 자유스럽게 행필하여 친말감을 갖게 하고 서체도 다양할 뿐 더러 공굴(工掘)의 차도 심하고 정확한 연대가 기록되어 있어 시대에 따른 변천과정을 알 수 있는 커다란 가치가 있다.
4. 조선시대
고려와 조선의 왕조교체는 문화적인 면에서 고려의 말기적 폐단을 척결하고 학자를 우우(優遇)하고 문치(文治)를 국시(國是)로 하여 서(書)의 왕성한 발전을 이루었다.
초기에 있어서의 조선의 서(書)는 고려시대의 서풍을 이어받아 조맹부의 서풍이 풍미하 였다. 조맹부는 원나라의 서예가로 호를 송설(松雪)이라 하여 그의 서체를 송설체라 하였다. 이는 충선왕때에 직접적으로 그에게 서 배워온 관계도 있고 그의 진적(眞蹟)이 대량으로 유입되어 그대로 교본이 되었고 법첩(法帖)으로 간각(刊刻)한 것도 적지 않 았기 때문이다.
초기의 유명한 서예가로는 정도전, 권근, 황희, 맹사성 등이 있으나 이중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은 안평대군(安平大君)이었다. 안평대군은 고려의 계승과 유습(遺習)을 새로운 기운(氣運)으로 쇄신하려는 기세와 고유한 민족기질을 농후케 하려 는데 집중하고 계속적으로 서(書)의 연원을 탐구하는 한편, 진수(眞粹)를 체득하여 구현하려 하였따. 또한 안평대군은 서(書)에 만 능한 것이 아니라 문학에도 통달하여 시에도 능하였으며 박식(博識)은 고금에 통철(通徹)하고 도덕과 도량과 풍채에 뛰어났으 며, 사리에 통하여 많은 이의 존경과 귀감이 되었다.
중기에 이르게 되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게 되고 서예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를 보이게 된다. 먼저 송설체의 쇠퇴를 들 수 있는데 이는 송설체가 균정미(均整美)에 치중한 결과, 힘이 유약하고 여러 가지 자형(字樣)이 판에 박은 듯이 변화가 없기 때문이 다. 그리고 왜란 동안에 많은 힘을 입었던 명나라의 서풍이 많이 받아들여지게 됨에 따라 문징명, 동기창, 축지산 등의 서풍이 유행하게 되었다. 또한 유학의 복고사상에 따라 왕희지의 서법으로 환원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론적 근거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에 왕희지의 법첩으로 전하는 것은 모두 위작이거나 몇 차례의 모필을 겪은 것이어서 진적과는 거리가 멀었다. 중기의 서법이 현저하게 쇠퇴한 원인이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이 시기의 유명한 서예가로는 석봉(石峰) 한호(韓濩)를 들 수 있다. 한석봉은 왕희지의 글씨를 이어받아 일생동안 공을 쌓아 능 숙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서품(書品)이 낮고 격조와 운치가 결여되어 외형의 미만 다듬는데 그쳤다. 이것이 그대로 궁궐의 서사정 식(書寫程式)을 이루어 중국에서 말하는 천록체(千祿體)로 전락되고 말았다. 이 영향은 오랫동안 후대에 미쳐서 석봉체를 본받은 사람의 수가 많았고 서법이 쇠퇴하게 되었다.
후기의 서(書)를 알아보면 영조 이후에 일어난 자아각성으로 문예부흥적 기운이 농후하여 문화 전반에 걸쳐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 시기의 서(書)는 한국 서예의 원천으로서 또 그 방향과 운명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유명한 서예가로는 백하(白下), 윤순(尹淳)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각체에 능하였고 특히 행서에서는 각 서예가의 장점을 잘 조화시켜서 스스로 일가 (一家)를 이루었다.
18세기 후반부터 한국의 신진 학자들은 청나라에 가는 사신을 수행하여 그 곳 학자들과 지식을 교환하는 가운데 많은 지식을 넓 혔다. 서법에 있어서도 청나라의 새로운 사조들을 많이 받아들여 올바른 서법이론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청대의 학술은 다양하 였으나 주축을 이룬 것은 고증학이었다. 이 때문에 금석학이 발달되었고 전서와 예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으며 특히 비(碑)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여 졌다. 당시의 유명한 서예가로는 완원(阮元), 김정희(金正喜), 신위(申緯) 등을 들 수 있는데 특히 김정희 는 그의 독특한 서체로 이름이 높았다.
다. 漢契書藝
한글 서예가 시작된 것은 세종대왕 28년(1446)에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글을 창제한 이후이다. 한문서예가 고대 문자의 생성과 그 역사를 같이 하는 것과는 달리 한글 서예는 불과 550여년 전에 만들어졌으며 조형상, 구조상에서 한문 서예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한문서예가 사물의 모양을 본따고 의미를 합성한데 반해 한글서예는 天, 地, 人 삼재에 근거를 두고 만든 상형 분자이며 동시에 표음 분자이다.
조선 시대 이래로 한글 서예는 한문 서예에 밀려 그 연구와 발전이 저조했었고 요즈음에도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조선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아녀자나 글을 모르는 서민들이 쓰는 글로 생각했었고 일제의 수난기를 거친 후에도 사대사상에 밀 려 겨우 명목만을 이어왔었다.
근대에 이르러 서양의 문물이 유입되면서 동양의 전통적 문자 표현의 재료와 도구 및 방법이 급격히 변화됨에 따라 자연히 글씨 를 쓰는데 대한 인식과 가치가 바뀌게 되었다. 여기에 한글의 예술성과 실용성이 이원화되면서 이른바 한글서예라는 전통적 근 대미술을 배태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우리나라 한글서예 근대화의 결정적 시기라고 할 수 있는 금세기의 전반은 일제의 침략과 6.25동란에 다른 미군정의 영향으로 인하여 전통 서예문화에 많은 왜곡과 굴절을 초래하게 되었다.
해방이후 경재적 재건과 더불어 부흥되기 시작한 서예문화는 주로 국전이라는 사회적 제도를 통하여 급속히 발전한 반면 학교 교육에 있어서는 사실상 형식에 그쳤을 뿐 체계적이고 학문적인 받침없이 오늘에 이르러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다.
단적으로 공적인 교육기관이나 연구기관이 없었다는 것이다.
80년대 후반에 들어 공적 교육기관으로서의 서예관의 건립, 대학에서의 서예과의 신설, 그리고 사회적인 서예학술단체의 활동 은 21세기 한국서예의 확고한 위상정립은 물론 한글 서예계 발전의 획기적 요인이 될 것으로 기대 되나, 현재에는 아직 필체 및 서체의 명칭통일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에 이르러 내세우는 몇몇 서체명칭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위와 같은 분류들은 아직 분류개념 및 분류 위계도 불분명하다.
이상의 분류를 정리하여 한글 고전 자료를 분석해 보면 판본서체에도 전서, 예서, 정자, 반흘림, 흘림체가 있을 수 있고 궁중에 서도 전서체, 정자체, 반흘림, 흘림체가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전서체형만의 판본체와 정자 흘림체만의 궁체라는 개념이 고쳐져야 한다. 그런데 한글 고전자료에서 순수한 예서체형의 글씨는 아직까지 발견되고 있지 않다.
한글 서예는 크게 나누어 훈민정음의 창제와 더불어 생성된 판본체와 궁중에서 체계화되고 여성사회에서 발전시킨 궁체 그리고 가장 긴 생명력을 가지고 독특한 개성을 충분히 살려 우리 민족의 얼과 더불어 오랜 세월동안 숨쉬어온 민체등으로 구분해 생각 할 수 있다.
한글서체와 한문서체를 비교해 보면 판본체에 있어서 원필과 방필은 한문서예의 전서와 예서에 해당하고, 궁체의 정자와 흘림 은 한문서예의 해서와 행서 그리고 봉서 혹은 서찰은 초서에 해당된다.
판본체는 문자의 효용면에서 그 기능을 다했을 뿐 서예술로서 계승 발전되지 못했다. 판본은 판각된 형태이므로 각공에 의해서 판각되는 과정에서 글씨의 생명력이 상당히 저하되고 판각되기 이전의 원글씨가 지녔던 생동감이 거의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성격이 다소 상실되어 그 형태와 획이 도식적이고 단순한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한글서예는 판본체의 획의 묘를 살려서 쓴 고체와 궁궐안에서 쓴 궁체 그리고 (서)민체가 있다. 이중에서도 궁체는 한국적 고유미를 가장 잘 표현하고 완벽에 가까우리만큼 그 조형미가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궁체의 발달은 약 350년간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그것은 필사된 서찰과 서책의 유품에 의해 증명된다. 서찰은 주로 왕후와 상궁 그리고 궁녀들의 필적 인데, 능숙한 필치로 단아하고 자유분방하게 씌어진 것이 그 특징이다. 서책은 궁중의 내서인데 미려하고 우아하며 한결같이 고르다. 궁체가 발달된 이유는 왕실과 외척사이에 편지 왕래가 잦았기 때문에 봉서를 쓸 기회가 많았으며 또 왕후와 공주의 교양서 로 책을 많이 필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궁중의 문화가 외부로 나와서 귀족계급에 파급되었다. 그리고 한문을 모르던 여성들에게 파급되어 보존되고 닦여졌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궁체가 정제되어졌다.
궁체는 그 글자 구성이 한문 문자에 비해 단순한 만큼 서선내의 함축미와 글씨 짜임에 있어서 고차원의 균형미를 요구한다. 필 법에서 중봉행필을 엄수하고 붓털의 오묘한 탄력을 활용할 수 있을 때 까다로운 궁체의 균형에 틈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궁체는 너무 곡선미가 짙고 여성적이며 지나친 기교로서 미서에 이어지는 흠이 있다. 또한 서법이라는 준비된 질서 속 에 구속되어 일률적이고 개성이 없으며 그 조형성과 예술성의 격조가 낮은 느낌이 있다.
민체는 궁체와 더불어 필사본으로 되어있는 한글류의 책들에서 나타난 서체이다. 이는 서예작품으로 쓴 것이 아니고 소설, 가사 , 서간 등 읽고 기록하기 위한 목적으로 쓴 것이다. 글씨로 쓴 민체는 필사자, 필사연대를 간혹 밝힌 것도 있으나 대부분 명시되 어 있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다만 궁중 이외의 백성들에 의해서 필사되었다는 것과 조선 중기에서 말기에 간행된 것이라는 정도 밖에 추측할 수 없다.
민체의 특징은 각기 개성이 뚜렷하며 자유분방하게 서사(書寫)함으로써 우리민족의 넋과 얼이 살아 있다는 것이며, 고구려의 광 개토왕비와 울진 봉평비 등에서 느낄 수 있는 우리민족의 예술성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민체의 형식은 자유롭고 구속됨이 없이 작자의 시간별로 달라지는 슬픔과 기쁨 넉넉함과 배고픔의 뜻을 표현하고 있으며 그때 그 자리에서 그 자신의 표현인 즉 통일성, 강조, 균형, 비례, 선, 형태, 재질감, 공간의 환영리 등의 조형성이 잘 나타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민체는 민간에서 정립되지 않은 채 기록된 것이다. 다시 말하여 '체(體)'라 일컬을 만한 기준이 서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우리 나라 고유의 민화가 우리서민의 감정과 생활상을 깊숙히 반영하고 있다고는 하나, 이를 하나의 통일된 기준으로 정립된 화풍으로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편, 조선 중.말기에는 서사상궁의 글씨 쓰기 교육용으로 연습교본이 있었으나 한글 글씨쓰기를 정식으로 교본화 한 것은 1910년에 한서 남궁억이 쓴 신언문체법이 최초인 것으로 알려진다.
1958봄에 갈물 이철경은 갈물 한글 서예 단체를 발족하고 가을에 제1회 갈물한글서예회 회원전을 열었는데 이는 행사 이전에 많 은 후학들에게 한글 궁체쓰기를 지도한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1959년에 동방연서회(이사장 김충현)가 창립되어 후진양성에 치중하는 한편 서예 특강, 학생휘호대회 등을 통하여 한글 서예 보 급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한글 서예에 대한 연구는 70년대에 이르러 비교적 깊게 이루어 졌으나 일부인만이 참여하는 실정적인 것인데 반해 80년대에는 많은 서가들이 다양한 형태로 한글서예 교본을 출간하는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상과 같이 알아본 한글서예에는 많은 과제가 남겨져 있다.
현대문 표기가 가로 행을 하고 있으므로 장법에 있어 가로 쓰기를 연구해 보아야 겠으며, 한글 서예를 보다 발전시키기 위해서 는 그 내용이 되는 문학성(국문학)에 대한 연구와 형식이라고 할 수 있는 조형성(미술)에 대한 이해가 같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 등이다.
한글서예는 자칫 조형화하기 쉬운 한문서예에 비하여 많은 과제와 함께 가능성과 장점을 갖고 있는 우리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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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호
우리나라에 한자가 들어온 시기에 관해서는 확실한 문헌이 없으나 대체로 B.C. 2-4세기 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의 문자 자료는 현재 전해지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며 다만 전한(前漢)시대의 명문(銘文)에 새겨진 동경(銅鏡)이 평양지방에서 발견된 일 이 있고, 그후 낙랑군(樂浪郡)유물로서 와당(瓦當)이나 전(塼) 등이 출토된 바 있다.
우리나라의 서예는 당초부터 중국의 직접적 인 영향을 받아 발전되었으며, 왕희지(王羲之), 구양순(歐陽詢), 안진경(顔眞卿), 우세남(虞世南) 등은 많은 영향을 끼친 서가들 이다.
1. 삼국시대
가) 고구려
고구려는 중국의 문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나라이다.
한인(漢人)들은 낙랑(樂浪)시대부터 5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의 일부에서 행정을 펴고 있었고 그들이 물러간 뒤에도 육지로 연접되어 고구려는 문화교류가 아니면 무력적 공방으로 그들과의 접촉이 끊일 사이가 없었다.
그러므로 문화예술면에 있어서도 그들의 직접적인 영향을 민감하게 받아 들였다. 그러나 당(唐)에 의 하여 왕조(王朝)가 없어지고 문화적 전승자가 없었기 때문에 문헌으로 전해져야 할 고구려의 역사마져도 겨우 왕의 세계(世系) 를 알리는 정도에 그치고 대부분의 사료는 오히려 중국 측 자료에 의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고구려 서법(書法)을 알려줄 수 있는 자료로는 예서(隸書)로 쓴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와 해서(楷書)로 묵서(墨書)한 {년두루묘지(年頭婁墓誌)}와 행서인 {평양성벽석각(平壤城壁石刻)} 그리고 최근에 발견된 {중원비(中原碑)}와 북지(北地)에서 발굴한 고분벽서(古墳壁書) 수점이 있다. 광개토왕릉비는 동서고금에 유례가 없는 거비(巨碑)로서 자체는 한자의 크기가 30cm에 달하며 높이 7m의 4면에 빈틈없이 꽉 차여져 있다. 이 시기는 414년으로 중국에서는 해서가 상용되고 예서는 많이 쓰이지 않았다. 같은 시기의 것인 년두루묘지도 해서를 쓴 것으로 보아 역시 해서를 상용하였을 것이며 왕릉에서 예서를 쓴 것은 특별히 정중과 장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 예서는 파임과 삐침이 없고 고구려에서 형성된 독특한 서풍을 이룬 자체이다. 얼마 전에 발견된 중원비는 글자의 짜임 해는 능비(陵碑)와 공통된 것이 많으나 자체는 해서였고, 년두루묘(年頭婁墓)의 벽서(壁書)는 필력에 박력이 넘쳐흘러 생동함을 보여주었다. 평양석각은 성벽에 있는 것으로 행서인데 자체는 육조(六朝)의 특징을 잘 살린 힘찬 명품이다. 이는 상무적(尙武的)이고 진취적인 고구려인의 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다.
나) 백제(百濟)
백제는 서법을 살펴볼 자료가 거의 없는 형편으로 현재까지 발견된 것으로는 공주 무녕왕릉의 {매지권(買地券)}과 부여지방에 서 발견된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의 2종 뿐이다. 고구려가 중국의 북조의 문화를 받아 들이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백제는 남 조와의 접촉이 많았다. 무녕왕릉비는 순수한 남조풍을 띤 명풍이다. 그러나 사택지적비는 북조의 풍미가 있기도 하다.
이로 미루 어 백제는 남북조문화를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나 생각된다.
유려하면서 기품있는 왕릉지(王陵誌)의 필치는 당시의 수준높은 문화 를 나타내고 있으며 이 밖에도, 불상명(佛像銘), 와전명(瓦塼銘) 등이 유물로 남아있다.
다) 신라(新羅)
신라가 본격적으로 중국와 왕래를 시작한 것은 6세기 초엽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는 비교적 많은 유적이 금석문(金石文)에 남 아 있다. 율주에 있는 선사 시대의 유적으로 보이는 암각화가 있는 암벽 하부의 마애기(磨崖記)는 가장 연대가 오래된 것인데 법 흥왕 때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진흥왕 때 세운 창녕척경비(昌寧拓境碑)와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 3 군데의 순수비(巡狩碑) 가 있으며 진평왕 때의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최근에 발견된 단양 적성비가 있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은 순수비로서 이 비는 신라에서 한문화를 받아들인 이후 법에 맞는 글자 글씨로 작성된 최초의 작품이다. 문장이 병려체(騈儷體)의 형식을 사용하면서 도 전중건엄(典重健嚴)하여 왕가의 품위를 나타내기에 충분하였고 글씨도 육조풍을 띠고 있다.
신라의 서법은 자유분방하게 운필 한 가운데에도 장중하면서 유아한 품격을 지니고 있으면서 신라 특유의 유연하고 견인한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은 삼국시대의 특성을 정리해 보면 고구려는 웅건강용(雄健剛勇), 백제는 우아유려(優雅流麗), 신라는 전중질실(典重質實)함을 알 수 있다.
2. 통일 신라 시대
백제는 660년에, 고구려는 668년을 전후하여 신라와 당에 의해 망하고 신라가 통일된 왕조를 이루었다.
이 시기에는 당의 문화 를 받아들이면서 학술, 문화, 정치, 제도 등 모든 분야에서 당의 색채를 띠었다. 또한 당으로 유학을 가는 승려, 관료의 자제들 도 많았으며 그 곳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이 시기에는 서법(書法)도 발달하여 많은 유적을 남겼다. 남 북조시대는 자체가 예서에서 해서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기였기 때문에 그 서풍(書風)이 자유분방하며 고박(古朴)한 맛이 짙어 예술적인 풍격은 매우 높지만 자획(字劃)과 결구(結構)에 대한 기본적인 법칙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당초의 명가들에 해법( 楷法)의 규범이 정립되었고 서가들이 개성있는 독자적 서풍을 형성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서적으로는 최근에 발견된 사본화엄경(寫本華嚴經)과 일본 정창원(正倉院)에 전해오는 고문서가 있을 뿐이다. 금석문(金石文)은 상당수가 남아있다. 초기에는 대체로 남북조시대부터 내려오는 왕희지체가 주축을 이루었고 뒤에는 당의 구양 순체를 많이 썼다. 이 시기의 유명한 서가로서 제일로 꼽을 수 있는 김생(金生)은 당시 서적(書蹟)으로 남은 것이 없다. 고려 초 기에 와서 그의 글씨를 집각(集刻)한 낭공대사비(朗空大師碑)가 김생의 글씨로 유일한 금석인데, 그의 서법의 전형은 왕희지에서 나왔다 할 것이나, 왕의 글씨는 온화한데 비하여 김생은 그 전서가 유동미(流動美)와 여율감(旅律感)이 생동하는 변화를 여러모 로 살려서 한 획을 긋는 데에도 굴곡과 거세(巨細)를 달리하였다.
또한 자의 결구(結構)에 있어서도 상호조응(相互照應), 음양향 배(陰陽向背)의 묘를 마음껏 섭취하는 등 그의 천재적 예술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정말 신품의 세계를 독점하고 있다. 김생의 글씨는 낭공비 이외에 법첩으로 전하는 전유(田遊), 엄산가서(嚴山家序), 당시첩(唐詩帖) 등이 전한다.
말기의 최치원(崔致遠)은 시문(詩文)에서 뿐 아니라 글씨에 있어서도 한 시기를 대표하는 명가(名家)이다. 그의 자선자서(自選自書)인 진감선사비(眞鑑禪師碑)는 구양순(歐陽詢)의 아들인 구양통(歐陽通)의 도인법사비(道因法師碑)와 비슷한 신품이다.
통일 신라시대는 비록 고려시대에 비하여 양적으로 미치지 못할지라도 격에 있어서는 단연 우리 서예사상 결정에 달한 시기라 할 수 있겠다.
3.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과거제도가 당에서 도입되었다.
제술(製述)과 명경(明鏡)이라는 두 개의 과(科)를 두었는데 제술(製述)은 시(詩), 부(賦) 등 문학작품으로 응시하는 것이지만 글씨도 따라서 선을 보이게 되므로 서학(書學)의 수련을 게을리 할 수 없는 상황이 었고 이외에 잡과(雜科)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서업(書業)이라는 서사전문직(書寫專門職)이 있어 설문(說文), 오경(五經), 자양( 字樣)의 기본과목 외에 진서(眞書), 행서(行書), 전서(篆書)의 실기과목이 있어서 그야말로 서예의 발전과 보급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도 진적은 극히 드물어 금석(金石)은 비갈(碑喝)과 묘지(墓誌) 등이 많이 남아있다. 이 시대의 서법은 당 초기 대가의 필법을 주로 따랐으며 특히 구양순체(歐陽詢體)가 많았다.
구양순체는 자획이 방정건엄(方正健嚴)하여 한 자 한 자를 쓰는데 순간이라도 정신이 흐트러짐을 용인하지 않는 율법적(律法的)인 서법이므로, 특히 구체(歐體)가 많이 쓰인 듯하다. 고려시대의 명가로는 구족달(具足達), 한윤(韓允), 민상제(閔賞濟), 안민후(安民厚), 임현(林顯), 오언후(吳彦候) 등이 있고 우 세남(虞世南)에 능한 이로서 이원부(李元符), 장단설(張端說) 등이 있으며 이 외에 김원(金遠), 채충순(蔡忠順) 등이 있다.
고려시대 중엽에 이르러 탄연(坦然)(1070 1159)이라는 대서가(大書家)가 출현했다. 탄연은 고승인 동시에 명필가인데 그의 법명 은 대감(大鑑)이고 속명은 손씨이다. 일찌기 유학의 경전에 통하였고 불법에 들어가서 뒤에 왕사(王師)까지 되었다.그는 고승이 었지만 서예로서 그 이름이 더 높았다. 대표적인 그의 글씨로는 문수원비(文殊院碑)가 있는데 행서로서 왕희지의 성교서(聖敎書) 와 일맥상통하는데가 있으면서 일면 당대 이후로 전승되어 온 사경풍(寫經風)의 필법(筆法)이 합하여 새로운 일체(一體)를 형성 한다. 그의 서는 유려하면서도 강철같이 굳센 골(骨)이 있다고 하여 김생과 더불어 신품이라고 일컬어진다.
이 무렵의 서가로 승혜소(僧慧素)가 있는데 그는 당대로 부터 전해져 온 사경(寫經)에 바탕을 두고 세해(細楷), 대자(大字)에 모두 뛰어났는데 대표적 작품으로서 영통사(靈通寺) 대각국사비음기(大覺國師碑陰記)가 있다.
고려시대 후반 무신난이 일어난 뒤에는 정권이 무인(武人)의 손에 넘어 갔고 문인들은 도피하거나 무인에 붙어사는 처지로 전락 되었다. 그리하여 전반적인 문화, 예술은 퇴보하게 되었고 글씨도 마찬가지의 운명이었다. 그러나 고려말기 원나라와의 밀접한 관계가 생기면서 활발한 교류가 전개되었다.
충선왕은 원의 북경에 만권당(萬券堂)을 지어놓고 있을 때 당시 서가중 최고인 조맹 부와의 교류가 많아서 당시 왕을 따라 원에 간 문인들은 조의 서체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이군해(李君孩), 이제현(李齊賢) 같 은 이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말기의 서가로는 예서에 능한 권중화(權仲和), 한수(韓脩) 등이 있었으나 초기에는 미치지 못했다.
고려 시대에는 비갈(碑喝)외에도 경판(經板), 사경(寫經)등이 적지 않은데 특히 묘지(墓誌)는 200여점을 헤아리고 있다. 연대로 는 초기에서부터 말기에 이르기 까지 400여년에 걸친 모든 것이 나타나 있어 더욱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이 묘지(墓誌)들은 일반 비석과는 달리 자유스럽게 행필하여 친말감을 갖게 하고 서체도 다양할 뿐 더러 공굴(工掘)의 차도 심하고 정확한 연대가 기록되어 있어 시대에 따른 변천과정을 알 수 있는 커다란 가치가 있다.
4. 조선시대
고려와 조선의 왕조교체는 문화적인 면에서 고려의 말기적 폐단을 척결하고 학자를 우우(優遇)하고 문치(文治)를 국시(國是)로 하여 서(書)의 왕성한 발전을 이루었다.
초기에 있어서의 조선의 서(書)는 고려시대의 서풍을 이어받아 조맹부의 서풍이 풍미하 였다. 조맹부는 원나라의 서예가로 호를 송설(松雪)이라 하여 그의 서체를 송설체라 하였다. 이는 충선왕때에 직접적으로 그에게 서 배워온 관계도 있고 그의 진적(眞蹟)이 대량으로 유입되어 그대로 교본이 되었고 법첩(法帖)으로 간각(刊刻)한 것도 적지 않 았기 때문이다.
초기의 유명한 서예가로는 정도전, 권근, 황희, 맹사성 등이 있으나 이중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은 안평대군(安平大君)이었다. 안평대군은 고려의 계승과 유습(遺習)을 새로운 기운(氣運)으로 쇄신하려는 기세와 고유한 민족기질을 농후케 하려 는데 집중하고 계속적으로 서(書)의 연원을 탐구하는 한편, 진수(眞粹)를 체득하여 구현하려 하였따. 또한 안평대군은 서(書)에 만 능한 것이 아니라 문학에도 통달하여 시에도 능하였으며 박식(博識)은 고금에 통철(通徹)하고 도덕과 도량과 풍채에 뛰어났으 며, 사리에 통하여 많은 이의 존경과 귀감이 되었다.
중기에 이르게 되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게 되고 서예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를 보이게 된다. 먼저 송설체의 쇠퇴를 들 수 있는데 이는 송설체가 균정미(均整美)에 치중한 결과, 힘이 유약하고 여러 가지 자형(字樣)이 판에 박은 듯이 변화가 없기 때문이 다. 그리고 왜란 동안에 많은 힘을 입었던 명나라의 서풍이 많이 받아들여지게 됨에 따라 문징명, 동기창, 축지산 등의 서풍이 유행하게 되었다. 또한 유학의 복고사상에 따라 왕희지의 서법으로 환원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론적 근거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에 왕희지의 법첩으로 전하는 것은 모두 위작이거나 몇 차례의 모필을 겪은 것이어서 진적과는 거리가 멀었다. 중기의 서법이 현저하게 쇠퇴한 원인이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이 시기의 유명한 서예가로는 석봉(石峰) 한호(韓濩)를 들 수 있다. 한석봉은 왕희지의 글씨를 이어받아 일생동안 공을 쌓아 능 숙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서품(書品)이 낮고 격조와 운치가 결여되어 외형의 미만 다듬는데 그쳤다. 이것이 그대로 궁궐의 서사정 식(書寫程式)을 이루어 중국에서 말하는 천록체(千祿體)로 전락되고 말았다. 이 영향은 오랫동안 후대에 미쳐서 석봉체를 본받은 사람의 수가 많았고 서법이 쇠퇴하게 되었다.
후기의 서(書)를 알아보면 영조 이후에 일어난 자아각성으로 문예부흥적 기운이 농후하여 문화 전반에 걸쳐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 시기의 서(書)는 한국 서예의 원천으로서 또 그 방향과 운명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유명한 서예가로는 백하(白下), 윤순(尹淳)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각체에 능하였고 특히 행서에서는 각 서예가의 장점을 잘 조화시켜서 스스로 일가 (一家)를 이루었다.
18세기 후반부터 한국의 신진 학자들은 청나라에 가는 사신을 수행하여 그 곳 학자들과 지식을 교환하는 가운데 많은 지식을 넓 혔다. 서법에 있어서도 청나라의 새로운 사조들을 많이 받아들여 올바른 서법이론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청대의 학술은 다양하 였으나 주축을 이룬 것은 고증학이었다. 이 때문에 금석학이 발달되었고 전서와 예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으며 특히 비(碑)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여 졌다. 당시의 유명한 서예가로는 완원(阮元), 김정희(金正喜), 신위(申緯) 등을 들 수 있는데 특히 김정희 는 그의 독특한 서체로 이름이 높았다.
다. 漢契書藝
한글 서예가 시작된 것은 세종대왕 28년(1446)에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글을 창제한 이후이다. 한문서예가 고대 문자의 생성과 그 역사를 같이 하는 것과는 달리 한글 서예는 불과 550여년 전에 만들어졌으며 조형상, 구조상에서 한문 서예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한문서예가 사물의 모양을 본따고 의미를 합성한데 반해 한글서예는 天, 地, 人 삼재에 근거를 두고 만든 상형 분자이며 동시에 표음 분자이다.
조선 시대 이래로 한글 서예는 한문 서예에 밀려 그 연구와 발전이 저조했었고 요즈음에도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조선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아녀자나 글을 모르는 서민들이 쓰는 글로 생각했었고 일제의 수난기를 거친 후에도 사대사상에 밀 려 겨우 명목만을 이어왔었다.
근대에 이르러 서양의 문물이 유입되면서 동양의 전통적 문자 표현의 재료와 도구 및 방법이 급격히 변화됨에 따라 자연히 글씨 를 쓰는데 대한 인식과 가치가 바뀌게 되었다. 여기에 한글의 예술성과 실용성이 이원화되면서 이른바 한글서예라는 전통적 근 대미술을 배태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우리나라 한글서예 근대화의 결정적 시기라고 할 수 있는 금세기의 전반은 일제의 침략과 6.25동란에 다른 미군정의 영향으로 인하여 전통 서예문화에 많은 왜곡과 굴절을 초래하게 되었다.
해방이후 경재적 재건과 더불어 부흥되기 시작한 서예문화는 주로 국전이라는 사회적 제도를 통하여 급속히 발전한 반면 학교 교육에 있어서는 사실상 형식에 그쳤을 뿐 체계적이고 학문적인 받침없이 오늘에 이르러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다.
단적으로 공적인 교육기관이나 연구기관이 없었다는 것이다.
80년대 후반에 들어 공적 교육기관으로서의 서예관의 건립, 대학에서의 서예과의 신설, 그리고 사회적인 서예학술단체의 활동 은 21세기 한국서예의 확고한 위상정립은 물론 한글 서예계 발전의 획기적 요인이 될 것으로 기대 되나, 현재에는 아직 필체 및 서체의 명칭통일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에 이르러 내세우는 몇몇 서체명칭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 1973 김응현: 정음체, 판본체, 정자, 반흘림, 진흘림
◦ 1973 김일근: 반포체, 효빈체(모방체), 궁체(남필, 여필), 잡체, 조화체
◦ 1983 박병천:
◦ *한글서체-전서체, 예서체, 해서체(정자), 행서체(반흘림), 초서체(흘림)
◦ *인쇄체-판본고체, 판본필서체, 인서체
◦ *필사체-정음체, 방한체, 궁체, 혼서체, 일반체
◦ 1979 중학 서예 : 판본체, 국한문혼서체, 궁체(정자, 흘림)
◦ 1985 윤양희 : 핀본체, 혼서체, 궁체(정자, 흘림(반흘림))
◦ 1986 김양동: 정음 고체, 언문시체(선비언필체, 궁체(정자, 흘림 진흘림))
위와 같은 분류들은 아직 분류개념 및 분류 위계도 불분명하다.
이상의 분류를 정리하여 한글 고전 자료를 분석해 보면 판본서체에도 전서, 예서, 정자, 반흘림, 흘림체가 있을 수 있고 궁중에 서도 전서체, 정자체, 반흘림, 흘림체가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전서체형만의 판본체와 정자 흘림체만의 궁체라는 개념이 고쳐져야 한다. 그런데 한글 고전자료에서 순수한 예서체형의 글씨는 아직까지 발견되고 있지 않다.
한글 서예는 크게 나누어 훈민정음의 창제와 더불어 생성된 판본체와 궁중에서 체계화되고 여성사회에서 발전시킨 궁체 그리고 가장 긴 생명력을 가지고 독특한 개성을 충분히 살려 우리 민족의 얼과 더불어 오랜 세월동안 숨쉬어온 민체등으로 구분해 생각 할 수 있다.
한글서체와 한문서체를 비교해 보면 판본체에 있어서 원필과 방필은 한문서예의 전서와 예서에 해당하고, 궁체의 정자와 흘림 은 한문서예의 해서와 행서 그리고 봉서 혹은 서찰은 초서에 해당된다.
판본체는 문자의 효용면에서 그 기능을 다했을 뿐 서예술로서 계승 발전되지 못했다. 판본은 판각된 형태이므로 각공에 의해서 판각되는 과정에서 글씨의 생명력이 상당히 저하되고 판각되기 이전의 원글씨가 지녔던 생동감이 거의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성격이 다소 상실되어 그 형태와 획이 도식적이고 단순한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한글서예는 판본체의 획의 묘를 살려서 쓴 고체와 궁궐안에서 쓴 궁체 그리고 (서)민체가 있다. 이중에서도 궁체는 한국적 고유미를 가장 잘 표현하고 완벽에 가까우리만큼 그 조형미가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궁체의 발달은 약 350년간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그것은 필사된 서찰과 서책의 유품에 의해 증명된다. 서찰은 주로 왕후와 상궁 그리고 궁녀들의 필적 인데, 능숙한 필치로 단아하고 자유분방하게 씌어진 것이 그 특징이다. 서책은 궁중의 내서인데 미려하고 우아하며 한결같이 고르다. 궁체가 발달된 이유는 왕실과 외척사이에 편지 왕래가 잦았기 때문에 봉서를 쓸 기회가 많았으며 또 왕후와 공주의 교양서 로 책을 많이 필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궁중의 문화가 외부로 나와서 귀족계급에 파급되었다. 그리고 한문을 모르던 여성들에게 파급되어 보존되고 닦여졌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궁체가 정제되어졌다.
궁체는 그 글자 구성이 한문 문자에 비해 단순한 만큼 서선내의 함축미와 글씨 짜임에 있어서 고차원의 균형미를 요구한다. 필 법에서 중봉행필을 엄수하고 붓털의 오묘한 탄력을 활용할 수 있을 때 까다로운 궁체의 균형에 틈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궁체는 너무 곡선미가 짙고 여성적이며 지나친 기교로서 미서에 이어지는 흠이 있다. 또한 서법이라는 준비된 질서 속 에 구속되어 일률적이고 개성이 없으며 그 조형성과 예술성의 격조가 낮은 느낌이 있다.
민체는 궁체와 더불어 필사본으로 되어있는 한글류의 책들에서 나타난 서체이다. 이는 서예작품으로 쓴 것이 아니고 소설, 가사 , 서간 등 읽고 기록하기 위한 목적으로 쓴 것이다. 글씨로 쓴 민체는 필사자, 필사연대를 간혹 밝힌 것도 있으나 대부분 명시되 어 있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다만 궁중 이외의 백성들에 의해서 필사되었다는 것과 조선 중기에서 말기에 간행된 것이라는 정도 밖에 추측할 수 없다.
민체의 특징은 각기 개성이 뚜렷하며 자유분방하게 서사(書寫)함으로써 우리민족의 넋과 얼이 살아 있다는 것이며, 고구려의 광 개토왕비와 울진 봉평비 등에서 느낄 수 있는 우리민족의 예술성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민체의 형식은 자유롭고 구속됨이 없이 작자의 시간별로 달라지는 슬픔과 기쁨 넉넉함과 배고픔의 뜻을 표현하고 있으며 그때 그 자리에서 그 자신의 표현인 즉 통일성, 강조, 균형, 비례, 선, 형태, 재질감, 공간의 환영리 등의 조형성이 잘 나타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민체는 민간에서 정립되지 않은 채 기록된 것이다. 다시 말하여 '체(體)'라 일컬을 만한 기준이 서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우리 나라 고유의 민화가 우리서민의 감정과 생활상을 깊숙히 반영하고 있다고는 하나, 이를 하나의 통일된 기준으로 정립된 화풍으로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편, 조선 중.말기에는 서사상궁의 글씨 쓰기 교육용으로 연습교본이 있었으나 한글 글씨쓰기를 정식으로 교본화 한 것은 1910년에 한서 남궁억이 쓴 신언문체법이 최초인 것으로 알려진다.
1958봄에 갈물 이철경은 갈물 한글 서예 단체를 발족하고 가을에 제1회 갈물한글서예회 회원전을 열었는데 이는 행사 이전에 많 은 후학들에게 한글 궁체쓰기를 지도한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1959년에 동방연서회(이사장 김충현)가 창립되어 후진양성에 치중하는 한편 서예 특강, 학생휘호대회 등을 통하여 한글 서예 보 급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한글 서예에 대한 연구는 70년대에 이르러 비교적 깊게 이루어 졌으나 일부인만이 참여하는 실정적인 것인데 반해 80년대에는 많은 서가들이 다양한 형태로 한글서예 교본을 출간하는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상과 같이 알아본 한글서예에는 많은 과제가 남겨져 있다.
현대문 표기가 가로 행을 하고 있으므로 장법에 있어 가로 쓰기를 연구해 보아야 겠으며, 한글 서예를 보다 발전시키기 위해서 는 그 내용이 되는 문학성(국문학)에 대한 연구와 형식이라고 할 수 있는 조형성(미술)에 대한 이해가 같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 등이다.
한글서예는 자칫 조형화하기 쉬운 한문서예에 비하여 많은 과제와 함께 가능성과 장점을 갖고 있는 우리글이다.
신희철
지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