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품, 내용, 글씨
좋은 글씨는 자획의 아름다움보다는
글의 내용이 좋을 때 더 많은 감동을 주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글씨는 사람의 인품이 훌륭해야
진정한 좋은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훌륭한 작품을 쓰기 위해서
훌륭한 인품을 닦아야 하는 예술, 서도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자랑스런 정신적 유산이라 생각됩니다.
이상 간략한 序를 마칩니다.
임서에 대한 나의 생각(허재성)
좋은 것이 있으면 인간은 모방을 한다.
모방하다 보면 더 좋은 것을 만들기도 한다.
모방하다 그치는 경우도 많이 있지만
그래도 모방은 인간에게 창작을 부여해 주는 동기를 유발한다.
임서는 글자를 모방하는 것이다.
왜 모방을 할까 하고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좋은 글씨는 그 사람의 마음, 성격, 지식 전반에 대한
집합체라는 동양적 사고 의식이 그 안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느 글씨가 좋은 글씨인가에 대해서는
각인 각색이지만 객관성을 띤 대중적인 좋은 글씨가 있기 마련이다.
하나의 글씨를 마스터하는 길은 쉽지 않다.
처음에는 하나하나 획과 결구를 생각하며 모방한다.
형을 모방하고 글씨에 담긴 뜻과 내면의 의지(내적인 것)를
모방하는 단계에까지 이른다.
그리고 각각 다른 글씨에서 새로운 조형을 구축하고
자신의 글씨로 나아간다.
임서를 많이 하다 보면 생각하며 쓰는 가운데
자기의 글씨가 나오는 것이다.
고전을 기본으로 한 새로운 형태미라고 할까요.
서예인이든 서예가든 임서를 한다.
임서를 하며 새로운 상상의 나래를 거치며
작품을 내 놓는다.
임서는 중요하다. 기본이 되는 뿌리와 같은 것이다.
똑같이 임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의 운필을 더 두드러지게 하며 임서하는 사람도 있다.
작품도 보면 임서의 단계를 거치며 나온다. 임서의 한 부분일 수도 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과거에 남은 글씨의 형태가 반드시 다 바르게 전달 안되어
있어 후손들에게도 그렇게 전달된다는 것이다.
이 글씨는 잘못 써 있군 하고 판단할 지식이 대부분 부족하다.
악습의 악습을 거치고 있는 경우다.
전문적인 서예가도 때로는 그것을 구분 못하는 경우도 있다.
옛것을 안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 시대상을 이해 못하면 글씨를 왜 그렇게 썼는지 이해가 어렵다.
문자학, 역사, 시대적인 흐름을 이해해야 한다.
임서를 하며 왜 이획은 같은 글씨인데 이렇게 썼을까 하고
조금은 고민하는 학습 태도가 필요하다.
글씨를 쓴 시대와 글씨를 썼던 옛 서예인들의 모든 것을 알아야
임서했다고 할 수 있지 않는가?
하다 보면 자기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찾아가는 과정을
거치며 예술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서예인의 임서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자기를 찾아가는 것
고향을 찾아가듯이
본래의 순수하고 단순하고 거짓 없는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임서하는 궁극적인 모습일런지 모른다.
우리는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요? 추연웅 (artink@hanmail.net)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아프게 하는지요?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애달프게 하는지요?
왜 하나로 뭉치지는 못하고 서로 아웅다웅 하며 이제껏 지내온것일까요?
전 서예가 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예술인 줄만 알았습니다.
가장 하얀 종이 위에 만가지 색을 합한 검정색을 사용해서 만들어낸 작품!!
절대로 한 선에 두 번의 손을 가지 않고 그때의 그 느낌을 그대로 가장 사실적으로
들어내는......
서양의 미술처럼 덧칠을 하지 않고 한 획에 많은 생각과 갈등과 마음을 가장 확실하게
들어낼 수 있는 그런 예술이 서예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믿고 또 그렇게 생각하고 서예과를 지망해서 서예과를 오게되었습니다.
전 중학교 때부터 서예과를 생각하고 오직 그 길만이 내가 선택한 가장 현명한 길이라
믿고 공부해 왔습니다.
하지만 전 우물안 개구리에 불과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누구의 글을 흉내닌 적도 없고 그렇다고 선생님의 글을 보고 적지도 않았습니다.
선생님도 마찬가지로 저에게는 체본이란 것을 써 주시지도 않으셨지만...
제가 왜 이런 글을 쓰는지 아시는가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군요!
난 지금 누구를 위해 글을 쓰고 있는지
여기에 서서 도대체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혹시 이 길이 내가 정말 원하는 길일까? 하고 말입니다.
서로를 아껴주고 감싸주는 그런 따뜻한 서예를 하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토론을 하면서 누가 누굴 욕하겠습니까!
알든지 모르든지 여지껏 세상에 맞춰 살아온 우리들의 잘못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전 제 자신에게 물음표를 던져 봅니다.
(어린 제가 이런 글을 올려서 욕을 먹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서예인의 책임감에 대하여 허재성
서예인이 가져야할 덕목이 몇 개 생각나 적는다.
서예인은 예술인이다.
평범한 길을 가는 범인의 축에서 벗어나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아름다운 사상, 아름다운 글씨를
타인에게 전달하며 살아가는
그런 책임을 느끼며 살아가야 한다.
아름다운 글을 전달하며 그렇게 살고자 노력하는
삶이 그에 따르는 몫이다.
전시를 통해 자기를 알리는 홍보가 따르지만
그것에 연연해서는 참된 서예인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직업적인 서예가가 아닌 참된 서예인으로 설 수 있는 것을
제시해 주는 이가 없더라도
그렇게 살고자 노력해야 한다.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은
아름다운 글을 매일 대하는 서예인이
호소력있는 글씨를 전달 못하는 것은
욕심이 들어가 있음이리라.
예술가로서의 정신세계를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세상에 지친 영혼에 시원한 말씀과 글을
전달해 조금이나마 영혼에 활기를 주는 역할을
서예인이 해야 하지 않을까?
책임감보다는 사명감보다는 자기홍보에 연연하는
서예인의 탈피를 벗어야 한다.
관객과 하나되는 서예를 추구하지 않고
시대와 하나되는 서예를 추구하지 않고
고전만 답습하는 서예인은
문제가 있지 않나?
한자만 쓰고 중국의 한시를 쓰는 것이
이 시대에 합당한지
책임을 느껴보아야 한다.
서예는 선의 예술이다.
선질을 가지고 다른 형태미를 추구하며 구태를 깨는
서예인이 나오기를 바라며
서예인은 왜 서예를 하며
책임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고하는 서예인을 보기를 갈망한다.
공모전에서 작품을 낼 때 출품료에 대한 나의 불만
공모전에서 작품을 모집한다.
작품을 낼때 출품료를 받는다.
보통 5만원정도의 금액이다.(하나의 작품당)
500명이 출품하면 2500만원에 해당하는 돈이다.
사실 출품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부담이 되는 금액이다.
가끔 내는 사람은 상관없지만.....
사실 낙선하는 사람에게 그 돈은 반납이 되어야 한다.
기분나쁘게 떨어지고 그 돈을 기부하는 형식이다.
물론 주최하는 단체의 성격에 따라 다르다.
입선이상이 되어도 표구비를 받는다.
아마 거기에 들어가는 돈이 15만원이상이 되지않을까....
주최하는 단체는 협찬을 받는다. 여러 공식적인 국가기관으로부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 및 행사비용을 출품하는 사람에게
떠 넘기는 꼴이다.
능력이 없는 단체는 주최를 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서예 단체가 이렇게 운영이 되고 있다.
작품을 뽑는 대서예가에게 돌아가는 몫뿐만 아니라
자질구레한 경비가 비효율적임을 인정해야 한다.
국가가 돈이 없을 때 세금을 과도하게 국민에게 부과하는 것과 같다.
고질적인 병폐라고 난 생각한다.
서예단체가 난립하여 서예대회를 운영하는 것은
이렇게 해도 몰려드는 서예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긍적적인 면을 부정하는것은 아니지만
보수적인 틀안에서 자라온 서예계의 모습을 보고 느끼는 바이다.
서예작품전시회는 서예인만의 잔치가 되어선 안된다.
거리의 미술처럼 소품으로서 나가서 서민들과 공감을 해야한다.
전시회에 들어가면 그래도 관심있는 서예인외에는 없다.
전위서예로서의 현대화에 추구하지만
대중화라는데에는 미흡하다.
권위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서예의 풍토상
표구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
며칠전 마라톤신청을 했다. 신청금 3만원에 비싼 느낌이 있었지만
나중에 운동티와 운동가방을 준다고 한다. 3만원이 넘는 돈이다.
서예대회에 비해 차이가 나는 것을 느꼈다.
개인의 돈을 모아 대회를 치루지만 개인에게 돌려주는 정신을
서예계도 본받았으면 좋겠다.
조그만 선물이라도 대회참가에 대한 기념이 될수 있는 선물을
주는 대회가 생기기를 바란다.
주최하는 사람으로서는 주최하는 입장으로서의 기쁨을 누리고
서예인은 참가함으로서의 기쁨을 누릴수 있는 대회가 되기를
바란다.
서예단체는 출품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수 있으면 좋겠다.
좀 더 발전적인 서예인들의 모임이 되기를 바라며...
Re: 공모전에서 작품을 낼 때 출품료에 대한 나의 불만
공감을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서예가들이 모여 얘기를 해도 공모전에 대한 얘기는
별로 없습니다. 뭔가 시원하게 운영하는 이가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상금을 바라고 글씨를 쓰는 이가 몇명이나 있을까요?
출품자의 돈을 걷어 한사람에게 주는 복권이나 별 차이가 없는것 같습니다.
입선이나 특선이나 별 차이가 없고
어떤 경우에는 입선이 안될 작품이 전시장에서 걸려있을때
황당한 경우도 있었지만......
불만이 있음에도 내놓고 얘기를 못함은
풍토란 환경에 들어가 있음입니다.
거부할수 없는 환경이자 거부하면 스승을 버리고 반역하는
역적이 되기 때문이지요.
현재의 정치계와 다를바 없다고 생각됩니다.
제 의견과 공감하는 분이 많이 있지만
의견제시를 못하는 분위기에 말을 못하고 살아온것이 현실입니다.
젊은 서예가들의 모임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글씨의 모양만 따질것이 아니라
전체 서예계를 발전시킬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글씨는 마음의 발전적인 형상을 표현하지만
보이지 않는 마음을 글로 어떻게 보이는 사람에게
비추이게 할것인가 고민하는 서예계가 되야 합니다.
서예계가 어떻게 대중에게 어필할것인가를 고민하는 서예인도 많습니다.
내부적인 문제를 치료하기전에는
대중앞에 나갈수 없으며
서예인들만의 잔치로 끝날뿐입니다.
자신의 글씨, 자신의 글,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는 꾸준한 자세
이것이 감동을 주지
남의 글씨를 모방하고 남의 글을 모방해서는
죽은 작품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자기 글씨, 자기 글을 발표하는 좋은 분도 있습니다.
기존의 작가에게 새로운 마음을 가지라고 하는것은 불가능합니다.
새로운 젊은 사람들에 의한 참다운 대회 운영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제자가 스승의 글씨를 탈피하는데 걸림돌을 만드는 스승은
스승이 아닙니다.
공모전의 작품은 임서,창작,크기도 변화있게 대중소로 바꾸어야 합니다.
글씨별로 모아놓고 비교해야 합니다.
스승을 모방한 글씨를 쓰는 제자는 뽑지 말아야 합니다.
제 눈에도 그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작품을 보면 누구에게 배웠구나 하고 느껴집니다.
스승의 글을 그대로 모방하여 내는 작가는 작가가 아닙니다.
그것이 무슨 예술가입니까?
그런식으로 가르쳐 놓으니 그게 무슨 전통인듯 후손에게도 그렇게 가르칩니다.
스승은 제자에게 넌 이것만 따라와라 그리고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노력해서 이루기를 바래야 합니다.
생각나는대로 얘기를 해서 정리가 안되지만 공모전의 장점을 단점이 다 먹어버렸습니다.
서예계의 희망이 그래도 보이는것은 젊은 전공자들이 있다는것인데
그들의 새로이 이 땅에 뿌려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서예인 필수의 법첩 "중국법서선"에 대하여
안녕하십니까? 양곡서림의 매니저입니다.
먼저 전번 왕탁의 서법과 중국서론대계에 관한 홍보로 1차 수입분 모두 판매된 것에
대해 서예인 여러분들께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왕탁의 서법과 중국서론대계는
2차로 또 주문되었읍니다. 필요하신분들은 또 연락을 주시면 다시 주문토록
하겠읍니다.
다음은 다른 일본 서예서적에 대하여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옛부터 서의 체본으로서 할만한 선현들의 서적을 "법서"라고 하는 말로
불리워져왔읍니다. 이러한 법서를 전 60권으로 만든 것이 일본 이현사에서 내놓은
이른바 "중국법서선"입니다. 체본으로서의 필수의 법첩, 감상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명품을 중국서예사상의 셀수없는 많은 명적중에서 체계적으로 정선하여
60권으로 집약 편집한 것입니다.
이전 208권으로 발행되었었던 서적명품총간 중 가장 중요하고 인기있는 법첩만으로
60권을 간추렸으므로 서예인들 누구에게나 1셋트씩 구비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본 양곡서림에서는 60권 셋트로 90만원에 보급하여 드리는 특별세일 기간을
마련했읍니다. 카드에 의한 분할판매도 가능합니다.
서예인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tel;02-742-9640
H.P;016-369-3089
(yangkok@sbsmail.net)
서론의 바이블 "중국 서론대계"에 관하여
서예를 공부하시는 분들이 반드시 알아두어야할 중국서론을 한나라시대부터
민국시대까지의 서론을 정리한, 그야말로 "서론의 바이블"이라 할수 있읍니다.
어떤 때에는 이 책이 한국에서 나왔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읍니다.그럴정도로
귀중한 책입니다. 이 책의 내용을 보면 이 챆은 단순히 서의 의의를 논한 것 뿐만이
아니라 넓게는 문자라든가 서체 또는 서법, 서품...에 이르기까지 더우기 서가의
전기나 감식, 수장에 관한 것까지도 포함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그 핵심적인 것은
서의 본질을 논하는 것입니다. 특히 서를 공부할 때에 누구나 실기만을 전념하기에
그치는 경우가 있읍니다. 서를 깊게 공부하기 위하여서는 서의 역사나 이론을
공부하는 것이 필수 조건이라고 봅니다. 서의 연구자는 물론 실제 작가에 있어서도
필수의 책입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모두가 한자원문 및 일본어 해설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한자 원문을 찾아보는 즐거움은 이루 말할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서론을 공부한다고 공모전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것도 아니며 별로 필요성을 느끼지도 않는 것같은 경향이 있으며 심지어는
유명작가들이 서론을 공부하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제자들에게 말하고 있다니 참
유감스럽습니다. 그러나 제가 알기로는 서론에 관심이 많은 분이 서예계를
이끌어가는 것이 순리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서론을 아는 분은 손재주가 아닌
문기있는 서예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양곡서림의 매니저로서 서예하시는 분들이 일본어나 중국어를 깊게 공부하여
방대하고도 전통있는 서론이 쓰여있는 원서들을 무리없이 볼 수 있게 되길 바라며
그것은 한국 서예발전에 중요한 원동력이 되리라 사려됩니다.
특히 저희 서점에서는 이번에 중국 서론대계 12권(90만원)을 적극 보급하고져 합니다.
연락주시기 바랍니다.앞으로도 서예인에게 필요한 책들을 자주 소개하겠읍니다.
물론 제가 소개하는 것은 일본책이 주를 이룰 것입니다.
전화;02-742-9640 팩스;02-745-8649
016-369-3089
유봉숙 (deer108@netian.com)
Re: 서예의 침체에 대한 생각 허재성 wrote:
>현대는 글을 쓸 필요성조차 점점 없어진다.
>자기개성의 글씨가 없어도 살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컴의 등장이 그 비중을 더욱 크게 한다.
>서예를 하는 사람이 실종되어간다.
>대책을 세우기도 전에 벌써 그 흐름은 거대하게 덮쳐온다.
>
>서예를 하게하기 위한 매력, 당연성, 절대 필요성을 역설하는데 설득력이 약해간다.
>일반의 서예가 아니라 특수계층에 의한 서예가 되어간다.
>그 특수 계층마져도 분열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서예가도 제 각각이다.
>젊은이에게는 고리타분한 일로 여겨진다. 이것이 현실이다.
>현대에 맞는 서예의 창작의지는 열심히 똑같이 임서하는 분위기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현대에서 쓰기 어려운 붓이란 것을 가지고 써 보라고 추천하기에도 힘들다.
>
>인간의 마음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도하는데 서예인이 스스로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글씨공부를 하는 명분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그것을 해 주지 않고는 힘들다.
>이익이 없는 공부는 하지 않는 법이다. 서예계가 단합하지 않고는 안 된다.
>자기 밥그릇에만 골몰하는 버릇은 버려야 한다.
>서예계가 하나되는 방법을 들라하면 예를 들어 어느 곳에 가서도 글씨를 쓸 수 있게
>체인화하는 방법도 모색해야 한다. 먹물을 갈기에는 현대인은 너무 시간이 부족하다.
>그 시간을 세이브(save)시켜주는 것도 모색해야 한다.
>스승이 제자가 찾아와 엄숙하게 가르치는 방법에서 고객을 대하듯이 하는
>영업적인 방법을 연구하지 않으면 서예계는 더욱 침체할 것이다.
>현대인은 미래를 찾아가지 과거로 회귀하지 않는다.
미술교육 (artink@hanmail.net)
우리는 고도 산업 사회의 물결 속에서 대중화되고 익명화(匿名化)되어 기계처럼
허둥대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는 현대인의 끝없는 욕망과 갈등, 끊임없이 찾아드는 불안을 안고
허무를 해소시켜 줄 탈출구를 그리워하고 있다.
삶의 열락(悅樂)에 도취된 사람이건 삶의 고뇌에 시달리는 사람이건 또는 삶의 권태에
찌든 사람이건, 자기 생활에 기쁨을 주고 자기 인격에 향기를 주며, 자기 존재에 빛을
던져 줄 수 있는 예술적 감수성과 개성적 창의성을 외면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자연과학의 발달보다는 인간 본연의 자세를 회복하는 실존의 문제가
더욱더 심각하게 부상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기는 자기 삶 속에서 인간 본연의 모습을 발견하고 인간성에 눈을 뜨며,
풍요로운 정서를 되찾기 위한 욕망이 꿈틀거리고, 창의적 희열을 찾으며 아름답고
윤택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갈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현대인의 정서적 요구는 입시 위주의 교육에서는 좀처럼 풀리지
않는 매듭이며 수수께끼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정서 교육을 외면하는 지식
교육은 그 차체가 허구일 뿐 아니라 삼라의 원천적인 행복과는 동떨어진 비인간적
교육이기 대문이다. 이제, 산업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조형미를
발견하는 개성적인 눈과 가치 있는 생활 용구를 선택하는 지혜가 필요하며, 아름다운
정서와 교감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주는 교육이 시급히 요구된다. 따라서 직관적
감성과 이성적 조형 능력을 도구로 하는 미술교육을 통하여 인간을 아름답게 만드는
바람직한 길을 열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미술교육은 일제시대의 도공, 공작 교육에서부터 시작되어 어언 반세기가 지났다.
미술 가족은 늘어나고 미술 문화는 활짝 피었는데도 이에 앞서야 할 미술 교욱은 아직도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현대문화의 녹음방초(綠陰芳草)가 우거져도
오늘날의 미술교육은 좁은 교실에 예속되어 교과서 속에서만 맴돌고 있는 실정이다.
왜 우리의 미술교육은 분파적 논리에 사로잡혀 전체를 총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인간의 정서를 순화시키는 미술교육은 어떻게 해야 하며, 사라져 가는 전통 미술을
되살리는 길은 없을까? 미술교육이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가?
왜 미술교육은 기능주의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가? 산만하고 잡다한 미술 이론을
간추려 그 에센스만 뽑아 낼 순 없을까?
아무쪼록 미술교육의 현실을 직시하고 구 문제점을 타개해 나가며
시시포스(Sisyphos)적 노력을 해야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땅의 청년 작가들의 다가올 미래 사회의 여러가지 충격을 극복하고
사회변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며, 순수하고 풍부한 사고와 감정, 꿈과 정열, 그리고
무한한 가능성을 펼칠 수 있도록 학생들의 개성을 발견하고 정서를 순화하는
미술교육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건 미술교육의 내용을 뽑아 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