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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과 세우기
제 1 강. 기술 장벽을 뛰어 넘자!
만일 여러분이 글씨를 잘 쓰고자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나 안 서.', '나는 왜 안 서지지?' 하고 개탄할 것인가. '다다익선(多多益善)이야.'하면서 양으로 승부할 것인가. '내가 써서 내가 좋으면 그만이지.'하고 어설픈 만족에 주저앉을 것인가. 나의 짧은 생각으로는(I am homo sapiens.), 여기에도 대략 다음과 같은 수순을 밟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1. 기본적으로 자신의 느낌이나 표현을 나타내기 위한 최소한의 기술을 습득하여 완전히 체화(體化, embody)한다.
2. 많은 작품을 감상하면서, 그 속에 있는 미적 요소들을 탐구해 보고 그것을 구성하는 연습을 하여 본다.
3. '양질전화(量質轉化)'를 노린다.
이 세 가지만 잘 이루어진다면 어떤 글씨라도 정복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는 3번 과정에 성패가 달려 있다고 보는지 여기에 목숨을 건다. 굳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말릴 생각은 없다. 그것도 하나의 방법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자신이 호모 사피엔스라고 생각한다면?
본인(本人)이 다년간의 서예 경험-햇수만 그렇게 채웠음-으로 느끼는 바로는 서예 작품의 미적 요소를 읽어 내고 감상하는 능력을 어느 정도 갖춘 후에도 항상 발목을 붙들고 놓아 주지 않는 것이 바로 기술의 문제였다. 서우들이 흔히 하는 '손이 눈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표현이 이런 뜻인 것 같다. 나는 예서 기본 획을 거의 1년이나 썼는데,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은 '중봉(中鋒)' 개념의 교란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개념을 다시 잡는 데에 꼬박 1년을 허비한 것이다. 후배들 중에 잘못된 점을 지적해 주면, '저는 이러이러한 생각에서 이렇게 썼어요.'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그 말을 듣고 보면 '그런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후배의 결정적 한계를 발견하게 된다. 뜻은 그러할 지라도 그것을 표현해 줄 만한 수단, 즉, 기술이 그것 을 뒷받침하지 못한 것이다. 어느 CF에서 이런 광고 문구가 있었다.
"표현하지 않는 개성은 개성이 아니야!"
나는 몇 글자 바꾸어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표현되지 못하는 예술적 FEELING은 KILLING이야!"
사람들의 훌륭한 FEELING이 기술 장벽에 부딪혀 사장(死藏)된다면 그 얼마나 대성통곡한 노릇인가.
따라서 여러분은 이러한 기술적 논의를 경시해서도 안 되고 따분하게 여겨서도 안 된다. 여러분들이 이러한 기술 장벽을 뛰어 넘는다면, 여러분의 앞에서 무궁무진한 미(美)의 세계가 여러분을 반길 것이다. 그 언젠가 여러분들이 예술적 FEELING으로 충만 할 때 그것을 자유로이 표현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다른 이의 '체험 수기'를 접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1-1. 왜 '붓'이어야만 하는가
펜으로 글씨를 쓸 때 그것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표현을 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긋는다\안 긋는다'
만일 펜 끝이 두 가닥일 때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표현이 가능할 것이다.
'둘 다 긋는다\1번 가닥으로만 긋는다\2번 가닥으로만 긋는다\안 긋는다'
만일 펜 끝이 만 가닥일 때에는 몇 가지 표현이 가능하겠는가. 이론상으로는 2^10,000
가지 표현이 가능하다. 세어 본 적은 없지만 붓을 '만호(萬毫)'라고 한다면, 볼펜으로 글씨를 쓸 때보다 훨씬 더 풍부한 표련이 가능하다. 거기다가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부가 서비스까지 제공한다.
1. 그 재질로 인한 부드러움의 표현 가능
2. 사용하는 먹물에 따를 다양한 표현 가능
3. 바이오리듬을 체크해 주는 기능(나의 기분을 알아준다.)
4. 기타
그런데, 가격은 15,000원 정도이다. 볼펜 값보다는 비싸지만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호모 사피엔스라면 누구든지 서예의 용구로 붓을 선택할 것이다.
1-2. 五指齊力(오지제력)-萬毫齊着(만호제착)
여러분이 자질이 뛰어난 만백성(population=10,000)을 홀로 다스리는 왕이라고 생각해 보라. 당장에 혼자서 만 명을 대하기조차 벅찰 뿐 아니라, 패싸움을 해서도 아무리 '황비홍'이나 '일지매'라 하더라도 이길 재간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는 나라꼴이 말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여러분은 아래에 여러 신하를 두어서 이들을 다스려야 한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이렇게 뛰어난 만호(萬毫)를 다스리고자 하는 여러분에게는 다섯 명의 훌륭한 신하가 있다. 자랑스런 그 들의 이름은 각각 '첫 번째 손가락', '두 번째 손가락', '세 번째 손가락', '네 번째 손가락', '다섯 번째 손가락'이다. 따라서 여러 분은 만 개나 되는 털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설득할 필요 없이 이들을 하나로 모은 붓대롱[筆管]만을 붙잡고 이들 다섯 신하만 잘 부린다면 그들을 훌륭하게 다스릴 수 있다. 지금까지 서예가들이 생각한 가장 효율적인 통제 방법은 다음과 같다.
[그림 1] 이야, 잘 섰다!
특히, 이 신하들이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싸우지 않게 해야 나라가 평안하다. ①번 손가락과 ②번 손가락이 힘의 균형을 이루고, ③번 손가락과 ④ ⑤번 손가락이 힘의 균형을 이루게 해야 한다. 만일 어떠한 국정을 수행하려고 한다면(이를테면 위의 그림에서 한 번 '세워' 주려고 한다면) ①번 손가락의 힘이 강해질 수밖에 없는데 이 때 ②번 손가락이 적당히 견제해 주지 않으면 ①번 손가락이 저만 잘났다고 우쭐대는 바람에 국정 운영에 혼선을 가져올 지도 모른다. 이러한 힘의 균형의 원리를 '오지제력( 五指濟力)'이라고 한다. 고려 왕국에 '3省 6府'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五指'가 있다. 이 오지들이 싸우지 않고 적절한 기능을 할 때 여러분의 성덕(盛德)이 만 터럭에 미칠 것이다. 이를 '만호제착(萬毫齊着)'중봉(中鋒)'의 포괄적 의미' 라고 한다.
공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修身齊家治國平天下.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五指濟力治筆萬毫齊着.
1-3. ‘세운다’라는 개념
이제, 이러한 농담따먹기가 여러분들에게 붓을 잡는 법을 완전히 이해시켰다고 보고, 국정운영술[用筆法]에서 여러분들이 제 일 애를 먹는 "세운다"는 개념에 대해 나의 느낌을 전달하려고 발버둥쳐 보고자 한다.
김영삼 대통령께서 항상 "갱재를 살리자."고 하시는데, 갱재는 살아날 줄을 모른다. 갱재를 모르기 때문이다. 여러 분들이 붓을 세우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면 가지가지이다. 붓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꽈배기를 만드는 사람, 붓 뒷부분에 약간 힘을 줬을 뿐인데 붓이 주저앉아 일어날 줄을 몰라서 당황하는 사람, 앞부분을 약간 들어 주었을 뿐인데 붓이 "솨악~ "하고 미끄러져서 쪽팔린 심정에 주위를 살피는 사람, .......... . 붓을 모르기 때문이다.
붓을 세운다는 것은 행필(行筆) 과정에서 흐트러진 힘의 균형을 회복하기 위한 모종의 조치를 말한다.
왼쪽 그림에서 밑으로 향하는 힘은 종이와의 마찰을 얻기 위한 것이고 앞으로 향하는 힘은 붓 뒷부분의 힘을 붓 끝으로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이 두 힘의 합력은 붓 끝으로 향하면서 앞으로 미끄러지지 않을 정도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만일 아래로 향하는 힘이 더 클 경 우 붓이 행필할 때보다 주저앉게 되고, 커지는 지면(紙面)과의 마찰 때문에 붓을 다루기가 몹시 힘들어진다. 앞으로 향하는 힘이 더 클 경 우 붓은 당연히 앞으로 미끄러진다. 이러한 힘의 균형은 우리들의 훌륭한 신하인 다섯 손가락의 힘의 적절한 분배에 의해 가능해진다.
[그림 2] 섰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절대로 손목을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붓이 종이에 전달하는 힘의 방향은 지면에 대해 수직이다. 손목을 움직인다는 것은 이러한 힘의 균형에 교란(攪亂)을 일으키는 것이 된다. 이는 마치 건물의 기둥을 붙잡고 흔드는 행위와 같다. 붓털이 부러질 리는 없기 때문에 붓의 경우에서는 이러한 교란이 '꼬인다'라는 형태로 현시(顯示)된다. 어느 정도 이상 '꼬이면',우리는 우리의 신하들로 하여금 여러분의 힘이 만터럭에 골고루 미치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붓을 세울 때의 힘의 배분은 여러 가지 상황에 맞추어 행해야 한다. 여러분은 실수로 선화지(새내기들의 기본획 연습 용지)의 매끄러운 면에 연습한 경우에는 세우기가 무척 힘들다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앞으로 향하는 힘과 균형을 이룰 만한 마찰력을 얻기가 굉장히 힘들기 때문이다. 벼루 위에서는 어떨까. 내 생각에는 불가능할 것 같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으면 나는 선뜻 10 0원을 줄 것이다.
1-4. 왜 세우나.
서우들이 흔히 말하는 '세우는 세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획을 탄탄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
2. 중봉을 잡기 위해
3. 절(切)이나 전(轉) 등 방향 전환(方向轉換)을 위해
먼저, 세운 상태에서 왜 획이 탄탄해지는지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이 문제에 대해서는 89학번 토목공학과 강태식 서우가 밝힌 바가 있다.
세운 상태에서는 붓털 사이의 공간이 넓어짐과 동시에 행필이 일시 정지하게 되어 부호(副毫)에 저장된 먹물이 전호(前毫)로 이동하여 지면에 닿게 된다. 이에 화선지의 성질 때문에 세운 부분에서 살짝 번지게 되고 획이 도톰해지게 된다. 이 부분이 전체 획의 구조에서 탄탄해 보이게 하는 美的 效果를 발휘하게 된다.
둘째, 세운 상태에서 중봉을 잡는 것이 가능한 이유를 살펴보자. 행필 과정에서 여러분의 손가락의 힘에 따르지 않는 털이 발생하는 것은 국정을 수행하는 데에 꼭 반역자가 나오는 이치와 같다. 이 때 세운 상태에서 중봉을 잡는 원리를 살펴 보자.
〔그림 3〕위에서 본 세운 상태
행필 과정에서 어떠한 요인에 의해 반드시 일시적으로 손의 힘이 붓1끝까지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된다. 이를 편봉( 偏鋒)이라고 한다. 붓의 힘이 균형을 이룬 상태에서도 이에 수렴하지 못하는 몇 가닥의 털 내지는 부분이 존재하게 된다. 먼저 이들에게 손의 힘을 미치도록 하는 일이 필요하다. 세운 상태에서는 그 힘이 붓끝을 향하기 때문에 이러한 작용이 가능하다. 그 상태가 위의 그림에서 '가' 로 표시된다. 이 상태는 붓의 중심의 힘에 의해서 붓 끝을 통제할 수 있는 상태임을 나타내고, 따라 서 자연히 행필하는 방향에 대한 획의 중심으로 붓끝을 이동(移動, shift)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이동된 상태는 그림에서 '나' 로 표시된다.
중봉을 잡는다는 것은 붓의 힘의 방향이 행필에 수렴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전서(篆書)에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의 중심을 획의 가운뎃부분으로 말하는 데에 별다른 이견이 없을 것이다. 획의 변화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밖의 서체를 임 서하거나 창작을 하는 경우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뜻에 따라 그 중심은 부단히 변화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경우를 설명하기 위해서 중봉의 개념을 다시 풀이하고자 한다. 중봉이란 긋고자 하는 획에 따라 모든 붓털들이 따라오게 되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중봉의 넓은 의미를 '만호제착(萬毫齊着)'으로 보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여러분이 자신의 예술적 FEELING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그것을 표현하고자 할 때 항상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이 바로 붓이 여러분의 의도대로 따라주지 않는 것이다. 이럴 때에 여러분은 잠시 붓을 놓고 하늘을 보면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이건 다 과인이 부덕한 탓이로다."
여러분은 자신만의 '중봉관(中鋒觀)'을 가질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부록] 방향 전환과 '세우기'
세우는 세 번째 이유로 흔히 '방향 전환'을 든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 약간 비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 필요를 느낀다 .
우리가 쓰는 글씨가 '모르스 부호'가 아니라면 붓이 가는 방향은 부단히 변화하게 마련이다. 이 말은 중봉 상태의 교란 가능성이 항상 존재한다는 말이다. 본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흔히 우리가 드는 예인 '절(切)'이나 '전(轉)'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이다. 본인의 견해로는 이러한 것들은 방향 전환의 과정에만 나타날 수 있는 미적 요소로 보아야 할 것이다. ' 전(轉)'이 전서의 특징적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은 그것의 부드러움이랄지 역동감이랄지 하는 것 때문이다. 이를 방향 전환의 대표적 예로 드는 것과 그 미적 특징을 논하는 것은 분리되었으면 좋겠다. 단지 90도로 꺾는 부분에서의 붓털의 교란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로 끝내자.
이렇게 생각해 보면 붓을 세우는 이유는 다음 두 가지를 들 수 있겠다.
1. 행필 과정에서 운필의 불안정이나 방향의 전환 등의 이유로 발생할 수 있는 중봉의 교란을 수습해 주기 위해 붓 을 세운다.
2. 부차적으로, 이 상태에서 획을 탄탄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붓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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