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교실

한일자 서예- 노상동

盧相東(ROH SANG-DONG) 

千手,千樹,自在堂 
1952년 경북울진에서 출생하여 매화초.중등학교.대구고등학교.경북대 사대 영문과,성균관대 유학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함,경북대 경묵회장,대구서학회 초대총무역임,물파창립발기인. 
78년부터 87년까지 서화지도,88년부터 98년까지 예술의전당에서 전시기획자로 근무 
현재 대구작업실에서 일획서예작업에만 몰두 
개인필묵전은 85년 대구태백화랑,91년 서울백악미술관,95년 서울 서초갤러리,98년 서울 서초갤러리, 
99년 서울 백악예원과 대구 봉성갤러리,2000년 대구 청산향림과 서울 예술의전당 미술관, 
2001년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관에서 개최. 
논문[추사서예의 조형성 연구]발표 
시서화집[필묵에 핀 꽃한송이],[한일자]출간 


주소 
작업실:대구광역시 수성구 범어2동 45-5 킹덤오피스텔 615호 
TEL:053-742-9124 
자택:대구광역시 수성구 신매동 263 태왕@ 101-1507 
TEL:053-792-9124 


한일자서예(HANILJAseoyea) 

 서예는 문자를 예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한자의 경우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전통 속에는 전통을 이어 주는 법이 존재하고 있다. 이것을 서법이라 한다. 붓으로 서법에 따라 문자를 쓴 것을 서예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서예에 있어 중요한 것은 서법과 문자이다. 서법에 치중할 경우 예술성이 풍부하고 문자에 치중할 경우 실용성이 두드러진다. 전통서예의 경우 예술성과 실용성이 불가분의 관계 속에 조화를 이루어 독특한 예술 작품으로 역사를 이어 온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그야말로 컴퓨터의 시대이다. 손으로 쓰는 필기 도구는 컴퓨터 자판으로 급속히 옮겨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서예는 아직도 대부분 문자의 실용성에 비중을 두고 있다. 일부는 서법을 연구하고 활용하여 예술성이 풍부한 서예로 발전하고 있지만 아직도 컴퓨터의 시대에 걸맞는 서예는 어떠한 서예라야 하는가? 라는 이 문제에 답하기란 쉽지 않다. 모필 문자의 실용성이 그 기능을 조금씩 잃어 감에 따라 서법의 예술성이 확대 변화하여 모필 문자의 실용성 자리를 메우어야만 서예가 이 시대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 그러나 모필 문자의 실용성 상실과 함께 서법의 예술성마저 기능을 조금씩 잃어 혼돈 상태에 접어 들었다. 다시 말하면 소멸되어 가는 실용성 자리에 서예 본래의 서법성이 확대 변화되어 그 자리가 메우어지는 것이 아니고 서예 밖의 미술이나 서양예술의 외부형식을 검증과 소화없이 받아 들이고 혼합시켜 급기야 서예 본래의 깊은 숨결은 소멸되어 가고 있다. 어떻게 하면 서예 본래의 정신이 살아 숨쉴 수 있을까 라는 대명제를 풀기 위해서 우리는 주야로 연구하고 매진해야만 할 중대한 시점에 직면해 있다. 

 앞에서 지적한대로 모필 문자의 실용성이 거의 상실되어 가고 있는 이 시대에 예술성에만 너무 치중할 경우 서예를 규정하는 문자성은 완전히 없어지고 단순한 회화로 전략될 위험성이 높아지고 있다. 서예는 회화와 다르다. 문자를 표현하는 독특한 서법성이 있다. 문자성이 없어지면 독특한 서법성은 존재할 땅을 잃어 버린다. 문자성이 단순화되면서 독특한 서법성이 더욱 활성화되어 예술성이 풍부해지는 것이 오늘의 서예가 풀어야 할 중대한 과제이다. 이 숙제를 풀기 위해서 나는 한일자를 연구하고 예술작품화 하는데 혼신의 힘을 쏟고 있다. 문자성이 가장 단순한 형상이 한일자이다. 한일자는 가장 단순하지만 완벽한 하나의 문자이다. 거장 단순한 한일자만으로 작품화 하려면 즉 가장 단순한 문자를 예술성 있게 표현하려면 가장 풍부한 서법의 예술성이 표현되어야만 한다. 서법은 어디에 있는가? 한일자를 두고 사람들은 가장 기초이며 가장 완성된 서법이라고 한다. 격언처럼 내려오는 말에 한일자만 3년 그으면 서법의 오묘한 것을 터득할 수 있다고 한다. 3년 동안 연구하고 실행해야 할 만큼 한일자에는 서법의 모든 법이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다. 3년 동안 긋고 연구해야만 터득될 한일자의 서법은 과연 무엇인가? 나의 경우 20여년전 서예에 깊은 뜻을 두고 한일자의 세계를 알기 위하여 3년 동안 긋고 연구하였다. 터득한 한일자의 서법을 예술작품화 하면서 20여년의 세월을 살아 왔다. 그러나 현실은 간단하지가 않았다. 터득한 한일자의 서법이 모든 현실을 감당할 만큼 극대화 되지 못했다. 오묘한 것은 가슴속 깊은 곳에 숨어 도사리고만 있었다. 그런데 2000년 6월 어느 날 20여년 숨어 있었던 그 한일자가 깊은 숨을 쉬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영혼의 그 한일자는 붓끝을 타고 화선지 위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깊은 영감들이 스쳐 갔다.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서예의 혁명이다. 내가 나를 찾는 순간이다. 한일자만으로 완벽한 건축이 되는 순간이다. 한일자만으로 완벽한 서예작품이 되는 순간이다. 문제는 건강이 아니라 생명의 존재다. 불상을 버리고 불경을 넘어서 부처의 진면목이 나타난 순간이다. 찰나가 영원이다. 한일자 하나가 서법의 대명사인 永字八法을 모두 갖추어 나타난 순간이다. 한일자 하나가 수 만가지 法을 타고 수 만가지 형상으로 표현되는 순간이다. 필은 짧되 뜻은 넓고 깊다. 수 천년을 두고 변치 않고 내려온 한일자의 서법이 신비를 드러낸 순간이다. 내 육신이 곧 한일자가 되어 움직이는 순간이다. 몸이 곧 한일자다. 내가 한일자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한일자가 한일자를 낳은 것이다. 그 한일자는 바닷물을 마시며 바위를 짜르고 바람에 걸려 썩은 피를 토했다. 法은 하나이지만 用은 헤아릴 수 없고 用은 하나이지만 형상은 헤아릴 수 없다. 달이 된 한일자 온 하늘 밝히고, 물고기 된 한일자 오대양을 누빈다. 새가 된 한일자 창공을 날아가고, 몸체 숨긴 한일자 꼬리로 숨을 쉰다. 눈감은 한일자..... 

 모든 글자의 조형이 한일자에 압축된다. 또 모든 서법이 한일자에 종합된다. 그 한일자는 모양이 단순하고 작지만 그 경지는 크고 넓고 깊다. 필묵예술은 여백의 예술이라 한다. 단순히 빈 공간의 여백이 아니고 자유의 다이나믹한 여백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적멸의 여백이다. 그 한일자는 모든 글자가 압축된 한일자이기에 나타난 한일자 이외의 여백엔 모든 글자가 살아 숨쉰다. 부분의 표현이 아니라 전체가 압축된 작은 것의 표현이다. 찰나 속에 압축된 이 작은 것이 무한 세계의 공간을 넘어 간다. 이 작은 것이 바로 생명의 실체이다. 

2000년 10월 노 상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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