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교실

제5회 全國 書學硏究 發表大會

大丘書學會 創立 10주년 기념 제5회 全國 書學硏究 發表大會   
        -― 蔚山 商工會議所 대강당에서 성대히 열려 ― 
서예 학술 단체의 하나인 大丘書學會(회장 趙庸澈)가 금년으로 창립 10주년으로 맞았다. 이를 기념하여 지난 6월 15일(토요일)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영남의 유서깊은 문화도시 울산에서 ‘第5回 全國 書學硏究 發表大會’를 개최하여 성황리에 마쳤다. 현대식 건물인 울산 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이번 대회에서는 이 지역의 서예학술단체인 ‘울산서학회(이권일외 5명)’의 협조가 컸었다.
회장의 인사와 전 울산예총지부장이었던 서진길씨의 축사에 이어, 제1부는 主題發表, 제2부는 綜合討論의 순서가 이 학회 회원인 權相浩, 文鍾鳴씨의 사회로 각각 진행되었다.
    여기에 주제 발표 연사로 참가했던 네 분의 발표 내용을 요약하여 싣는다.
  
* 서예 작품과 落款과의 관계(한글 서예 작품을 중심으로)
       -  여태명(원광대학교 서예과 전임강사)
   한글 서예는 한문 서예에 비하여 서체의 변천과 서의 미학적 가치 부여를 위한 역사가 짧고 훈민정음 창제 당시부터 실용성만을 강조한 나머지 서예술로서의 철학적 표현과 서체의 다양한 표현에 서툴렀다. 또한 한자 문화권에 속하여 언문이라 천대받으며 오랫동안 한글을 예술적 표현 대상으로 인식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요즈음 한글 서예의 멋을 살리고 한글 서체의 다양한 표현에 대한 관심이 작가들의 실험적 표현을 통하여 한자 영향권에 찌든 의식으로부터 달리하려는 노력이 있음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단계에서 ‘한글 印章’의 중요성과 현실을 진단해 본다. 한글 인장도 金石氣와 文字香이 서려 있어야함에도 한글 인장의 현실은 한글 서예의 미학적 가치를 무시한 채 한문 전각에 형식적 구조를 맞추려 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많은 문제점을 가져오고 말았다.   한글 서체가 엄연히 있는데도 인장 서체의 다양한 표현과 인식이 부족하고, 한글 작품과 한글 인장에 대한 조화와 형식성 즉, 장법에 관하여 바른 이해를 돕고자 한글 인장과 작품과의 관계를 실제 작품을 통해 비교 분석해 본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오늘날까지 관인에 대한 규정 중 가장 큰 변화는 1962년 4월 각령 644호에 따라 印文을 한자로 쓰지 말고 한글 印으로 바꾸도록 하여 관인에 한글 전용이 되도록 한 점이다. 이러한 관인의 한글 전용은 곧 개인의 한글印 사용으로 확대되었으며 이것이 한글 印章의 출발이다.   그러나 이러한 印文의 한글 전용은 한글 印文 서체의 다양한 연구와 한글 印文字典 하나 없는 현실에서 印의 품격이나 예술성 따위는 찾아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이러한 한글 인장의 발전을 위하여 우선, 한글 印章의 이름이 지어져야 한다. 그리고, 한글의 생성 원리에 대한 바른 학습과 한글 서체 자체에서 고유한 서체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이 앞서야 한다. 아울러 한글 印文 서체의 다양성에 대한 탐구가 절실하다.   한글 서예 작품과 한글 인장과의 관계를 조명해 보면,   첫째, 한글 서예 작품에는 한글 인장이 필요하다. 한글 작품에 한자 전각으로 낙관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양복을 입고서 고무신을 신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둘째, 한글 서예 작품에서 글자 배열에 따라 한글 인장의 포자도 달라져야 한다. 작품 배자를 가로로 하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글자를 배자했을 경우에는 印文도 그와 같거나 비슷한 순서로 刻印하여 낙관하여야 할 것이다.   셋째, 한글 서예 작품에서 서체와 한글 인장 작품은 일치감이 있어야 한다. 곧 작품의 서체와 인장의 각인 서체가 조화를 이루는 치밀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넷째,  한글 서예 작품에서 한글 인장의 크기도 어울리게 해야 한다. 그리고 호가 둘 이상 있다고 하여 낙관 문장의 호와 낙관 인장의 호가 서로 달라서는 안된다.   다섯째, 성명인과 호인의 위치 변화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여섯째, 首印과 遊印의 크기와 위치에 신중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보다 나은 한글 서체의 발전과 그리고 한글 인장의 印文 서체의 변화와 다양화의 필요성이 강조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고유 문자에 대하여 보다 나은 예술성과 사상성을 부여하고 아울러 작가의 실험적 정신이 요구된다.
 
* 草訣歌에 대하여
      - 蔡龍福(문학 박사, 대구서학회 회원)
   草訣歌는 초서 학습의 요결을 읊은 글로서, 宋나라 米芾(1051~1107)에 의해 王右軍의 서적을 집자하여 編著된 것이다. 이 초결가는 漢字文化圈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造形意識과 書寫 방식에 깊숙히 침투해 왔다. 우리나라에서도 예외없이 조선시대에 전래된 이래 여러번 印刻을 거듭하면서 식자층의 好尙을 받아 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이 초결가는 일상 서사뿐만아니라 서예를 일삼는 이들에게도 서예학습이나 이론의 준거로서 큰 역할을 해 왔다. 그러나 昨今의 초서는 그 향수하는 층이 극히 일부분이거나 있다 하더라도 초서에 대한 올바른 이론적 근거를 갖추지 못하여 이미 地平을 잃어 버렸다.   초결가의 구성은 五言二句 一文으로 된 83개의 對句歌와 106개의 對句歌 두 本이 있다. 전자는 董其昌이 쓴 것이고 후자는 일반적으로 유포된 木版本이다. 우리나라에서 판각되어 전하는 본은 대개 임란 이후의 것으로 여러 차례 印存된 바 있다. 초결가의 명칭은 ‘草訣百韻歌’, ‘王右軍草訣百韻歌’, 그리고 ‘集草訣歌’ 등으로 불리어 졌다. 초결가의 저자는 王羲之, 米芾, 明代 일반인 등의 여러 설이 있으나, 書論에도 밝고 서의 보급이나 전수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가졌던 米芾이 王右軍의 체를 중심으로 晉人의 글씨를 集字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내용은 ①偏旁의 쓰는 방법 ②相似·類似字 ③異字合成字 ④楷·行書와 모양이 다른 경우 ⑤點劃의 加減으로 인한 別字 ⑥用筆의 문제 ⑦筆順의 문제 ⑧方程式化 등으로 구분하여 이해할 수 있다.
   草書를 쓰려는 사람은 우선 초서의 기본 結構와 用筆을 충실히 익힐 수 있는 ‘智永千字文’, ‘王羲之十七帖’ 등을 통하여 어느 정도 습득하게 된다. 그 다음 단계로 ‘草訣歌’를 통해 이미 획득된 자형에 대한 변별력을 바탕으로 자형의 질서나 초서의 構成 원리 우용 등을 배우게 된다. 이런 만큼 이 ‘草訣歌’는 중세에 있어서 초서 학습의 중급에 해당하는 교과서로서 식자층의 書寫的 조형 의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또 한편 초서가 매우 다양하고 유동적인 데 반해 이 ‘草訣歌’는 너무 규범화된 나머지 실제의 諸家書體를 수용할 수 없거나 예외적인 것이 많게 되어 드디어 明代에 이르러 范文明의 ‘草訣辨疑’를 낳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 ‘尙意’의 蘇軾 書藝觀
        -鐵肩 郭魯鳳(문학박사. 외대 강사)
   ‘尙意’란 宋나라 서예를 대표하는 말로 서예가 자신의 정감과 뜻을 나타내는 것을 주로 하며, 蘇軾이 실질적인 대표가 된다. 이 尙意 서풍의 형성 과정에서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요소로는 서예 이론의 발전과 송나라 서예가의 대부분이 文士였다는 점과 禪宗의 영향을 들 수 있다. 그리고 ‘尙意’에서의 ‘意’는 ‘抒情’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 이는 주로 문인의 意趣를 숭상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쓴 글씨에서 그 사람의 됨됨이를 논하려는 풍토가 성행하였다. 이것이 바로 ‘論書及人’으로 이를 가장 강하게 제창한 사람 역시 소식이며 그는 人品과 書卷氣를 강조하면서 또한 몸소 이러한 경지를 이루려고 노력함으로써 서예에 문인의 특성이 돋보이도록 하였다.
   이러한 배경과 풍토 아래 自由奔放하고 호방한 성격의 소유자인 소식은 구체적이고 지엽적인 법도보다는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필의와 자기의 성정을 펼 수 있는 서예관에 더 중심을 두었다. 이러한 서예관은 그의 ‘通其意’와 ‘文人畵’에 잘 나타나 있다. 즉 通其意에서는 먼저 서예의 본말을 파악한 다음에 옛사람으 것을 답습하지 않고 자기의 새로운 뜻을 나타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소식은 서예를 사대부의 취미요 자기의 심령을 만족시켜 주는 일종의 유희로 보았다. 따라서 그는 韻趣와 속되지 않는 서예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고상한 감상 취미와 높은 안목을 내세우고 있다. 따라서 그는 韻趣와 속되지 않는 서예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고상한 감상 취미와 높은 안목을 내세우고 있다. 그는 또한 뛰어난 鑑定家이면서 한편으로는 구속감이 없으며 진실되고 정성어린 情感과 趣味가 충만되어 있는 題跋體의 서론을 개척하였다. 이러한 것은 서예가의 人品과 修養이 글씨 쓰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것으로 서예 ‘文人化’의 근본적 사상이기도 하다. 이는 서예를 공부함에 있어 그 자체를 추구하는 것보다 서예 밖에서의 공부를 중시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결코 기교나 형질에 대한 중요성을 배제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技道兩進’론을 주장하면서 서예의 구성 요소인 ‘神, 氣, 骨, 肉, 血’ 등을 강조한 것을 보아도 이를 충분히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蘇軾의 書藝觀을 접하고 나서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글씨에 대해 항상 고민하고 우려하는 것은 앞으로 우리의 서단은 어떠한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한 시대를 뜨겁게 살다간 천재 문학가이면서 동시에 서예가인 소식의 서예관을 통하여 다소나마 그 해답의 길을 찾을 수 있으면 한다.
   끝으로 오직 형태나 형질만을 추구하는 글씨에 대하여 ‘일종의 분단장이나 하면서 요사스러운 노래와 천박한 춤으로 봉사나 귀머거리를 속이거나 아동을 현란하게 한다.’라는 소식의 말을 경종으로 삼기 바란다.
 
* 書藝術의 본질적인 軌道 이탈 -글(文)과 글씨(書)의 관계를 중심으로-                 
              - 정충락(서예평론가)
   누구에게나 실수는 있게 마련이고, 잘못도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실수나 잘못은 발견되는 즉시 고쳐져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필자도 숱한 잘못과 실수를 거듭하면서, 더 이상의 문제는 없어야겠다는 다짐을 수없이 다짐해 왔다. 이번의 글도 또다시 있을 수 있는 실수를 사전에 源泉封鎖한다는 의미에서 點檢을 하게 된 것으로 이해하길 바란다. 
  그러한 의미에서 열심히, 愛情을 가지고 살펴보았다. 같은 漢字 문화권의 그 어디를 둘러보아도 현재 우리의 실정과는 상당 부분에 걸쳐서 다르다. 얼핏 보면 같아 보이지만 실제는 다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글이 衰退하고 있는 현상이야 어느 국가의 경우이든 서로가 비슷하지만, 그 밖의 상황은 비슷하게 느껴지기는 해도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 그 첫째가, 書壇 指導者들의 연구 활동 부족 현상에서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둘째, 文字를 主役으로 한 글씨 예술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접근 방법이 너무나 安易하다. 그것은 문자 예술에 있어서는 모양이 우선하는 것이 아니고, 의미가 우선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의 접근에서부터 偏差가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이유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일반적으로 글씨꼴의 형태에만 묶이어 있을 뿐, 字意와 形態의 連繫에 대한 연구가 미흡한 데에 있다.
   따라서 해결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어떠한 경우에 처하더라도 첫째도 공부요, 마지막도 공부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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