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교실

韓國現代書藝의 方向摸索 爲한 批判 - 木人 全鍾柱

Ⅰ.
  아직도 우리는 서예의 이론과 작품을 논함에 있어 康有爲나 包世臣 또는 이전의 古典에 의존하고 그것을 盲信함으로서 전근대적인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오직 전통의 답습과 모방만을 예술로 착각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오류는 전통사회의 몰락과 함께 파산선고가 내려진 전통예술의 맥을 새로운 방향으로 재창출시키지도 못하면서 산업사회의 모든 예술현상을 무조건 서구적이고 사대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현대 미술사조의 흐름에 합류하지 못한 한계를 스스로 露呈시킨 자기 콤플렉스의 소산이다.
  이렇게 한국 서예가 전통의 낡은 틀 속에 안주하면서 메너리즘에 빠진 것은 선비정신의 발현과 고양이라고 하는 유교적 가치관에 의해 美적가치가 결정되는 偏執性이 예술의 다양성 보다는 획일성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儒敎的 徒弟敎育이 현대 산업사회에서 조차 선비와 예술가를 혼돈 시키고 있음은 물론 예술작품에 작가의 도덕성을 前提시킴으로서 예술성에 앞서 도덕성을 강조시키는 유교적 가치관에 의해 서예가 문인사대부와 같은 선비들의 전유물로 인식되어 왔다. 그들의 美意識과 論理意識을 바탕으로 형성 전개된 필법을 소위 정통서예로 단정하고 계승하면서 마침내 이것이 美의 절대가치를 부여하는 집단이 기득권을 이용하여 서단을 지배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지향하는 전통의 재현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의 보호에만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며 역사성과 민족성이라는 명제아래 技能의 優劣의 의한 계급화 현상마저 고착시키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교류전이라는 美名아래 여기저기 이웃나라에서 공장의 폐품 같은 것들을 수입하여 國際라는 간판을 붙이고 장사하는데 여념이 없는 실정이다.
  이러한 풍토에서 정통필법의 계승과 재생만을 서예의 正道로 규정하고 있는 書壇의 관심은 예술의 본질과는 상관없는 문제에 매달려 있다. 이를테면 기능적으로 잘 쓴 글씨와 보고 베끼는 기술이 얼마나 탁월한가 여부에 관심이 쏠려 있으며 誤脫字의 有無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급기야는 계급질서에 아부하는 도덕성을 앞세우는데 익숙해진 것이다.
  그러나 극동의 서예에서 영감을 얻고 있는 유럽의 앵포르멜이나 미국의 액션페인팅 그리고 중국이나 일본의 현대서예를 보게 되면 그러한 관심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를 알 수 있다. 특히 중국의 현대서예는 현대회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으면서도 서예의 성격과 특성을 확고히 견지하고 있음을 볼 때 그들의 조형의식이 얼마나 자유롭고 창조적인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전통의 재현에 절대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그것을 통하여 얻을 수 있다고 믿었던 美的體驗을 과연 어떻게 경험했는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입으로는 비록 열 두폭 비단을 단숨에 짜고도 남을 만큼 능란하게 고금명가의 書訣을 외우고 문자향 서권기를 노래하며 畵沙印泥屋漏痕을 되씹어도 그것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밖에 이해되지 못하는 書論과 해마다 몇 차례씩 국립현대미술관이나 예술의 전당을 도배하는 墨守的이고 관념적인 공장제품들 앞에서 우리의 공허한 가슴은 무엇으로 채웠는가? 美的감동은커녕 표현적 의미조차 없는 그저 기능적으로 잘 쓴 글씨가 정신적이라고 외치면서 향수자를 離反하는 행위는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오늘의 한국서예는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二分化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전통'과 '현대'라고 하는 보편적 개념이 엄존하고 있으며 이에 따른 가치관이 상반되기 때문이다. 筆者는 이것을 傳承書藝와 現代書藝로 구분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古典의 계승과 재생에 몰입하는 사람들은 現代書藝家로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며 당연히 傳承書藝家로 호칭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Ⅱ.
  오늘의 서단 현실을 진단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하여 일차적으로 생각 할 수 있는 것은 명칭의 혼재와 그에 따른 어휘상의 의미와 이미지가 서로 다르게 투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중국에서는 書法 일본에서는 書道, 한국에서는 書藝라는 명칭을 사용하는데 우리는 서법과 서도를 혼용하고 있다. 중국의 '書法'은 본래 藝와 道가 內包된 개념으로 파악하지만 어휘상 筆法에 傾倒되어 技能的이고 規範的인 것을 강요하는 느낌을 주고 있으며, 일본의 '書道'는 조형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知覺되어 명칭사용에 따른 이미지와 뉘앙스가 다르다. 우리가 '서예'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광복 후 素 이 六藝에서 藝를 取하여 書藝라고 칭하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그런데 이러한 여러 가지 명칭들이 아직도 우리사회에 공용되고 있으며 명칭이 포함하고 있는 의미와 이미지가 지역적 특성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개념상의 혼돈을 야기시키고 있다. 일부 사대주의적 근성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계승에서는 '書法'을 고집스럽게 愛稱하고 있으며 親日的인 부류에서는 '書道'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명칭을 영문으로는 똑같이 Calligraphy로 표기하는데 美를 의미하는 Calli와 筆寫를 뜻하는 graphy의 합성어로서 대단히 포괄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예컨대 한스아르퉁·피에르 술라즈·마크 토비·그레이브스·프란츠 클라인 등 세계적 추상과 필의적 추상에 나타나는 기호와 Tache 그리고 다이나믹한 필치와 운동표현을 서구인들은 가장 Calligraphy的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휘상의 의미가 얼마나 다른 이미지로 전달되는지를 알 수 있다.
  이처럼 명칭에 따른 어휘상의 개념과 의미의 다른 측면을 지적하는 것의 서예의 성격을 규정하는 표현영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들의 관념을 고정시키고 지배하는 가장 큰 장벽은 文字이다. 이른바 "문자를 떠나서는 서예를 생각할 수 없다"고 하는 논리가 영구불변의 진리로 통용되던 폐쇄사회가 붕괴된지 이미 오래인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우리는 서예의 표현대상을 문자로 고정시키는 묵수적 이론만을 금과옥조로 믿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문자의 暗示的이고 象徵的인 表現力를 부정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단지 표현대상을 문자만으로 한정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서예가 문학에 종속되는 것을 결과하며 線條의 조형질서 보다는 문학적 내용과 誤脫字의 유무에 의해 미적 가치가 판단되는 괴리를 자초하게 되었다. 이것이 곧 서예가 독립된 장르의 예술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해 버리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일 뿐이다. 또 문자의 변천과정을 따라 판독이 불가능한 원시문자 그리고 繪文字이전의 부호들은 문자로서의 의미와 기능을 상실한 非文字이거나 기호들인데 우리는 그것들의 재현이 서예가 아니라는 논리적인 모순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서예의 표현대상을 非文字까지로 확대하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형식상 재현적이고 主知的인 서예에서 비재현적이고 主情的인 서예로서의 영역확대를 의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서예가 지역예술에서 국제예술로 전환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오늘날 각종 공모전에 출품되는 엄청난 물량의 작품들을 문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작가 자신도 모르는 내용이 허다한데 하물며 일반 관람객들이 그것을 알아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일 것이다. 어차피 창출자도 향수자도 모르는 내용이라면 이러한 시대적 사회적 현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예술이 소수 지식인 계층의 전유물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Ⅲ.
  예술은 궁극적으로 자기 존재의 확인이며 인간의 자유와 개성을 존중하는 갈구의 몸짓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0C 현대미술이 물질주의적 문명현상을 초극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으려는 정신적 자각의 표출로서 다양한 외침을 계속하고 있는데 오직 서예만은 五指齋力이 어쩌고 中峰이 저쩌고 하면서 걸음마 시작하는 제비 다리를 꺽어 버리더니 급기야 혼백도 없는 「무중력 서법」을 만들어 輓章뒤에 숨어서 碑石이나 베끼고 있는 일련의 傳承書藝家들에 의해 現代書藝의 어린 싹이 밟히고 있는 형편이다. 그렇다고 현대서예가 매몰되고 고사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現代書藝가 전승서예가들의 공존을 거부하는 억압의 작용에 대한 즉 跳戰에 대한 應戰으로서의 反작용을 삼가는 것은 고뇌와 갈등의 질곡을 극복하고 조형사고의 영역을 확대하면서 美的 形式을 통한 자기사상의 표현을 준비하는 무거운 침묵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침묵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는 없는 것이며 지금도 혁명을 위한 응전의 징후는 계속 확산되고 있다. 억압과 해방이 공존하는 자연질서가 이것을 뒷받침하고 있으며 변화를 갈망하는 시대적 요청이 克明하기 때문이다.
  현대서예는 현대라고 하는 시대적 사회적 상황과 現象學的 의미를 반영한 개념으로서 기존의 질서 위에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형식이다. 따라서 非文字를 모티브로 할 수 있어야 하며 문자를 파괴하고 해체할 수도 있음을 물론 재로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재료는 작가가 자신의 의지에 의하여 선택하고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서예의 특성을 살릴 수도 없는 재료를 사용하여 문자를 표현한다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 현대서예일 수는 없는 일이다. 근년에 들어서서 서예의 성격과 특성을 무시한 채 오일칼라(과슈)나 석고 그리고 합성수지와 같은 재료를 사용하여 갑골문자 모양을 긋고 그린다고 해서 그것이 현대서예로 오인되는 경향이 있지만 그런 것들은 유럽의 기호예술을 흉내낸 慕西主義的인 遊 일 뿐이다. 왜냐하면 운동성과 우연성은 말할 것도 없고 直觀에 의한 線條의 一回性마저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한 몸부림의 소산인 실험정신을 높히 사지만 현대서예라는 이름아래 서예본래의 표현적 특성과 성격까지 무시해 버린다면 본질적으로 그것은 서예가 아닐 뿐만 아니라 서예술을 빙자한 조형질서의 혼돈의 가중일 따름이다. 현대미술이 지역미술에서 국제미술로 전환되고 미술의 영역별 한계가 무너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양식적으로 그것이 평면이나 입체로 통합 구분되어지지 않은 이상 서예는 여전히 독립된 장르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현대서예의 방향모색을 위한 방법론적 실험이라 할지라도 자기 비평과 자기 규정도 없이 자기 환원으로 귀착해 버리는 자기과시를 상품광고처럼 서단의 표면 위에 부상시키는 시행착오는 불식되어야 한다.
  전통에 대한 과격한 비판이 도약을 위한 하나의 활력임에 틀림없지만 고착화된 형식으로부터 해방이 배태한 혼란과 무절제한 상상력은 방향을 잃게 하여 창작능력을 상실시킬 뿐이다. 그리고 서로 대립되는 개념으로서의 '전통' 對 '현대'가 '형식' 對 '내용'으로 등식되고 이것을 '계승' 對 '단절'로 파악하여 현대서예를 전통의 단절로 규정하는 오류를 범해서도 안될 것이다. 현대서예는 전통의 단절이 아닌 필연적 재창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의 극복을 통하여 회화적인 유희로 생명의 종말을 전개하는 無精卵의 量産을 막아야 할 것이다.

Ⅳ.
  한국의 현대서예는 광복이후 등과와 수양의 한 방편으로 인식되었던 이전의 관념을 무너뜨리고 본질적인 예술성을 강조한 소전과 劒如에 의해 주도적으로 모색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소전은 형식논리에 치중하는 儒家的인 古典을 재해석하면서 문자의 조형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문자의 조형적 특성과 이미지를 형상화하면서 美的 형식원리에 큰 관심을 보인 그는 문자의 상징성에 깊히 매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劒如는 字形보다는 筆意를 書藝術의 본질로 파악하면서 문자표현을 앵포르멜적인 방법으로 접근하고 筆意의 우연성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고전에 대한 자기해석을 분명히 하고 전통을 재창조한 소전과 검여는 한국 현대서예의 개척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뒤를 이어 조형의식이 강한 일련의 작가들에 의해 현대서예의 방향이 다양하게 모색되면서 傳承書藝家들의 냉소적인 비판과는 달리 무한한 가능성을 향해 꾸준히 전개되고 있음을 본다.
  이는 변환된 사회구조의 현실을 인정하고 묵수적 환상에서 깨어난 현대서예가들에 의해서 새로운 전통과 질서가 구축되고 있음을 의미하며 서예와 문자의 상호 깊었던 의존관계가 붕괴될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과거의 방법론적이고 형식적인 法으로 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하나의 혁명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현대서예는 反권위주의와 反전통주의적 성격의 포스트 모더니즘과 軌를 같이하지만 당분간 전개양상은 신표현주의적 성격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된다.
  현대서예가는 지금이 바로 反혁명의 횃불을 위한 홰를 모을 때다.

韓國書藝(제3호 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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