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교실

生命 있는 예술 - 金兌庭(대구예술대학교 교수)

 1990년 7월 29일은, 반 고호가 세상을 떠난지 만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100주년이 되는 해에 일본 수장가에 의해 두 점의 작품이 우리 돈으로 일천백억원이란 엄청난 값에 낙찰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세계 최고의 그림값으로 유명한 반고호. 그의 사후 100주년에 온 유럽일 들끓었지만, 그가 살았을 때 세상은 오로지 단 한 장의 그림만을 팔아주었을 뿐, 그를 비참한 지경에 이르도록 매도하고 조금도 그의 예술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100년이 지난 오늘날, 왜 그토록 그의 예술에 높은 점수를 매기는 것일까?
  작년 7월 초, 1학기 강의가 끝나는 다음 날, 나는 떨리는 가슴을 안고 동구라파행 비행기에 올랐다. 첫째 목적은 반 고호의 조국 네델란드에서 열리는 그의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는 대대적인 유작전을 보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는 우리 민족과 같은 우랄알타이의 언어체계를 가진 헝가리의 미술을 살펴보기 위해서였고, 세 번째는 근래에 와서 한창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의 미술 현장을 확인하고싶은 심정에서였다. 내가 특히 마음이 바쁘게 출국을 서두른 것은, 공산사회주의 국가에서 자유화 물결을 타고 해방을 맞는 그들 여러 나라가 서방의 매끄러운 때가 조금이라도 더 묻기 전에 보고싶은 심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다소 폐쇄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닐 수 있는 그들의 순수성이 나의 관심사였다.
  내가 처음 기착한 곳은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였다. 고호의 기념전이 7월 29일이므로 20여일 동안의 기일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그 동안에 오스트리아를 경유하여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 등의 미술을 둘러 볼 수 있도록 스케줄을 짰다. 비엔나에 도착했을 때, 동행한 모 일간지 박특파원의 가족이 프리자카란 독일인과 함께 마중을 나와 주었다.
  사정을 들어보니 그들의 의견인즉 중립국인 오스트리아는 상관없지만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유화된 지 얼마 안 되는 헝가리나 체코슬로바키아는 아직 여행하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불편한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만한 것은 얼마든지 감수할 생각으로 온 것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쪽 나라들을 둘러보겠다고 우겼다. 이미 말했지만 내가 두려워한 것은 더 세월이 지나서 구라파의 세련된 손때가 그들 나라에 묻어 들어가는 것이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여행 일정을 짜 보았는데, 우선 이 곳 비엔나가 음악의 도시로 유명하긴 하지만, 옛날 제국시대에 큰집 행세를 했기 때문에 세계 각국에서 모아들인 미술품도 엄청나다는 것이었다. 우선 이 곳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다 보려고 해도 4,5일은 족히 걸린다고 해서 내가 지도를 보면서 혼자 다니겠다고 했더니, 박형이 굳이 안내를 자청해서 마지못해 같이 다녔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는 3일만에 이미 지칠대로 지치고 말았다. 내가 미술관에 들어서면 작품을 하나하나 찬찬히 보기 때문에 그와 내가 속도를 맞추기가 어려웠고, 그는 밖에 나가서 쉬다가 다시 들어와봐도 나는 아직 반도 채 보지 못한 상태여서 밖에 나가 맥주를 마시고 풀밭에서 잠들기가 일쑤였다. 그러한 일이 사흘동안 반복되자, 그는 견디지 못하고 병이 나버렸는데, 하루를 쉬고나면 괜찮을 것이니까 같이 다니자고 당부하였지만 내 고집도 만만치 않아서 나는 혼자 지도를 펼쳐보면서 중요한 미술사 박물관을 비롯하여 많은 미술관을 찾아다녔다. 또 책 욕심이 많아서 분량이 차츰 많아졌는데 나중에는 심지어 벼룩시장의 헌 책까지 뒤지고 다녀며 필요한 미술 서적과 자료를 사 모았다. 하루를 쉬고 난 후 그가 다시 헝가리행을 자청해서 동행을 하게 되었는데, 내가 미리 오스트리아에서 비자를 받아서 가자고 제의하였으나, 지난날의 경험으로는 기차 안에서 비자를 받을 수 있다고 해서 그대로 출발하였다. 웬걸, 오스트리아 국경을 지나자마자 헝가리 경찰들이 달려와서 비자가 없는 사람들은 기차에서 다 끌어 내렸는데, 많은 사람들이 역구내로 인도되어서 경찰의 지시대로 몇 사람씩 택시에 태워져서 온 길을 되돌아 다시 오스트리아 국경과 인접한 헝가리 이민국에서 비자를 수속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과거에는 기차안에서 비자 발급이 가능했으나 자유주의 국가로 바뀌면서 체제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우리가 비자 수속을 다 끝냈을 때 기차는 이미 떠나버렸기 때문에 100불을 지불하겠다는 조건으로 택시를 타고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로 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박형은 가는 도중 몇 번씩이나 귀한 손님을 자기 불찰로 고생을 시킨다고 미안해했지만, 나는 지난날 여행을 하는 중에 여러차례 어려움을 당한 일이 있고, 남의 나라에 오면 천덕꾸러기가 될 각오가 되어 있으니 귀한 사람은 오히려 그쪽이라고 되려 내가 그를 위로하느라고 진땀을 뺐다. 이해와 인내가 없으면 외국여행은 어렵다. 그는 나 때문에 병까지 나서 앓아눕지 아니했는가?외국여행이란 취미나 목적이 같은 사람이 동행해야지 그것이 다를 경우에는 서로가 마음을 쓰다가 여행을 망치기가 일쑤인 것 같다. 헝가리에서도 그러한 불편이 따랐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부다페스트에 매료되어 지칠줄 모르고 다녔다.
  부다와 페스트를 사이로 하여 다뉴브의 넓은 강이 흐르고 있고 강물이나 성채 등 그 우아하고 거대한 모습들이 마치 중세기의 유럽을 걷고 있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짚으로 고추나 마늘을 양쪽으로 엮어 꿰놓은 모습니 영락없는 한국의 모습이어서 깜짝 놀랐다. 게다가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없게 아름다운 헝가리의 처녀들, 사회주의 체제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했을텐데, 어떻게 그리도 피부색이 고우며 아름다운 몸매들을 지니고 있는지. 아이구, 안되겠다. 이러다가 원래의 목적지에 가지도 못하고 원고를 끝내야 할 것 같다. 이렇게 부다페스트의 아름다운곳과 국립미술관·박물관을 며칠동안 뒤지고 다니는 사이에, 박형이 또 병이 나서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오스트리아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홀가분한 차림으로 출발했다가 돌아올 때는 내가 산 미술책으로 어깨가 빠질 지경이었다. 비엔나에 돌아온 후 박형은 아예 끙끙 앓으면서 자리에 눕게 되었는데, 나는 그 이튿날, 다시 체코슬로바티아 대사관을 찾아가서 비자 수속을 마쳤다. 이제는 다시 기차에서 끌려내려오는 일이 있어선 안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50대 중반의 늙인이가 힘도 좋다고 부러움 반 투정 반 빈정대었지만, 나는 혼자 다시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프라하행 기차에서 나는 앞에 앉은 여인이 뒤적거리는 잡지 속에서 언뜻 반 고호 기사를 발견하고 그것을 빌어서 보게 되었다. 그의 서거 100주년 기념전에 관한 특집 기사였는데, 거기에 새로운 작품이 보여서 내가 비디오 카메라에 그것을 찍다가 언뜻 차창 밖으로 체코의 시골 풍경이 아름다워서 그것을 찍었더니 내 옆에 앉은 이태리 청년이 나더러 큰일났다고 겁을 주는 것이었다. 이곳에는 아직도 공산주의 체제가 가시지 않아 경찰이 달려와서 카메라를 빼앗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바짝 긴장을 해서 이미 찍은 필름을 빼서 없애야겠다고 서두르는데, 그 이태리 청년이 앞에 앉은 여인과 눈을 꿈적이더니 박장대소를 하는 것이었다. 동양의 촌뜨기를 놀려주느라고 이 젊은 서양놈이 장난을 친 모양이다. 아무튼 사회주의 국가는 어둠 침침한 사상 속에서 도시나 시골을 죽여가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생가라곤 없었다. 그저 시키는대로 할 뿐 내 것이 아닌 바에 다듬을 것이 없다는 심정들이어서 그 아름다운 고장들이 녹슬고 어둡게만 느껴졌다. 이태리 청년도 그것을 느꼈는지, 그를 이용하여 잠시 나를 놀려준 듯 싶었다.
  프라하의 도시 풍경은 마치 연기로 뒤덮힌 중세도시와 같았다. 그 섬세하게 조각된 거대한 건물들이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좋았다. 그 순수한 알몸을 보고 싶어서 서둘러 온 것이다. 묻은 때가 벗겨지고 새로운 西方의 때가 묻는 것이 위험한 것이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이라 불리는 자유화 운동이 일어났으나, 이에 당황한 소련이 무력을 행사하여 이 운동을 무자비하게 짓밟아버린 일은 너무나 유명하다. 그 후 끈질긴 저항에도 불구하고, 많은 국민들이 지독한 사회주의 체제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굴복하여, 오늘의 결과 같이 젖은 장작처럼 화력이 없이 연기로만 그을은 모습으로 변하고 말았다. 나는 매우 착찹한 심정으로 시가를 헤매고 다녔으나 막상 박물관과 고전, 현대의 미술관을 둘러보면서 깊고 큰 문화의 저력을 느꼈다. 도저히 인간이 만들었다고 볼 수 없는 거대한 건물과 석주와 내부의 설계는 놀랄만한 것이었고, 진열된 유물과 미술품은 새로운 진로와 모색을 통하여 괄목할만한 결과를 낳게 되리라는 예감을 갖게 한다. 건물마다 정교한 입상과 장식 문양을 새겨 놓았고 하나도 같은 양식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부러운 유산들이었다. 헝가리를 여행하면서도 느낀 것이지만, 우랄어족에 속하는 아시아계의 민족으로 이뤄진 헝가리의 문화도 다뉴브강의 도도한 물결과 함께 대단한 수량과 저력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주의 체제로 다소 나태해진 사람들의 인성과 무관심이 안타깝게 여겨졌지만, 시내 전차를 타고 가면서, 어딘가 우수와 한이 어린 듯한 표정에서 우리 민족과 비슷한 면모를 느끼게 한다.
  이곳 저곳 다니다 보니 어느새 닷새가 지났다. 그 동안에 사모은 책 때문에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잠시 걷는 것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지쳐버리고 말았다. 곧장 프라하역으로 달려갔다. 비엔나로 돌아가서 한 이틀 쉰 다음 네델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으로 갈 작정이었다. 꼬박 세시간을 줄을 섰다가 내 바로 앞 사람부터 입석이라는 말을 듣고 차표 사기를 포기하고 택시를 불러 흥정을 했다. 비엔나까지는 여섯시간이 소요된다 왕복 12시간을 계산하여 후하게 미화 백불을 제의했더니 기사는 참으로 신바람이 난 모양이다.
  집에 들러 여권을 챙기고 고등학생인 아들을 데려나와서 함께 동행하게 되었다. 보통사람 두달치의 월급을 받게 되었으니 신도 날만한 일이었다. 우리나라 생각만 하고 저녁을 도중에 먹기로 작정하고 출발했는데 가도가도 불꺼진 길, 영락없이 굶을 수밖에 없었다. 비엔나 숙소에 도착한 것이 새벽 두시, 결국 이 허기가 큰 일을 저질르고 말았다. 배고픈 것도 잊고 사기지고 온 책을 다시 뒤적이다가 잠이 들었다. 눈이 떠지는대로 갈증을 느끼고 더듬거리며 가다가 쌓아놓은 책더미에 발이 걸려 넘어지면서 책상 모서리에 부딛쳐 허리를 쓸 수가 없었다. 결국 이 때문에 100주년 기념 고호 특별전을 포기하고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이 내내 마음에 걸리고 아쉬웠다. 참 이상한 일이다. 요즘 중국어 공부에 열중한 월간 서예사 최광열사장이 중국의 중앙미술학원 샤오따쩐(邵大箴)교수 "尊重藝術, 尊重個性"이란 글을 가지고와서 내 생각과 비슷한 내용이고 한국서단에 도움이 될 수 있을 듯하니 번역을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내용을 일별해 보니 마침 반 고호 백주년 기념에 대한 소감을 쓴 것이었다.
  그 내용 또한 나의 평소의 생각과 같아서 반가왔다. 또 내가 돌발사고로 네델란드에 들리지 못하게 되었지만, 다시 반 고호의 예술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이 표한 인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헝가리, 체코, 오스트리아 등 동유럽의 미술에 대하여 주마간산 격으로, 일별할 수 밖에 없게 되었지만, 거기에 대한 소상한 내용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우선 밸행인의 의도를 존중하는 뜻에서 샤오따쩐 교수의 논고를 정리해 보면, 역사상 뛰어난 천재는 간혹 사회의 냉대와 무관심을 받는 일이 적지 않았다. 반 고호만 하더라도 그의 생전에 그의 예술을 이해한 사람은 한 두사람에 불과했고, 그의 조국 네델란드나 프랑스화단에서 그를 알아주는 사람의 거의 없었다. 이러한 잘못된 판단의 예로서 렘브란트와 고호를 비교할 수 있다. 이 두 사람은 네델란드가 낳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화가로서 램브란트는 "先興後 "한 경우로서 영화와 부귀를 한 몸에 누렸으나, 반 고호는 생존시 배고픔을 면하기 어려웠고 그의 일생을 고통과 좌절속에서 살다가 37세로 생을 마쳤다. 그러나, 오늘날 그들 두 사람은 비교할 때 엄청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두 사람의 작품가격은 비교가 안될 정도이며 예술적 평가에 있어서도 현격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면, 어째서 그 무렵 고호의 이다지도 뛰어난 예술이 세상사람들의 이해와 주목을 끌지 못했을까? 그의 예술은 그 예견과 초월적 사고가 너무 지나쳤던 경우이다. 그의 작품중에 표현된 심리 상태를 표현한 것이어서 그 당시 보편적 시대 감성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예술이 언제나 현실을 뛰어 넘어 밀 올 것에 대한 예언적 요소를 강하게 띠는 것이긴 하나, 고호의 경우 너무나 뛰어난 領悟力과 사물을 꿰뚫어 보는 투시력이 너무 앞질러 간 것이다. 그의 지칠줄 모르는 정력과 극도로 예민한 감각은 예술의 표현능력에 있어 남다른 强度를 지닌 점이다.
  이것은 마치 악기의 현이 가장 높고 가장 강한 음을 내다가 오래 견디지 못하고 푹발한 경우라고나 할까? 그는 언제나 미친듯한 감정과 정상적인 감정 사이를 불안하게 오락가락 하였던 상태이고 그 당시 화단으로 본다면 한 사람의 대담한 반역자였던 셈이다.
  그는 아카데미즘을 반대한 것은 물론, 인상주의도 반대하였다. 비록 인상주의와 신인상주의가 그로 하여금 넓은 시야를 크게 틔어 준 것은 사실이지만, 말하자면 색의 調色과 극도로 밝고 찬란한 태양빛의 묘사 등이 그가 원래 지녔던 뛰어난 상징성과 표현력을 통하여 크게 깨우치게 된 결과였고 일본 浮世畵의 정묘한 묘사를 통해 그것을 고호 특유의 선의 예술로 적절히 이용한 셈이고, 평면구도와 장식성의 교묘한 장점을 유화 속으로 이식시켜 창조성이 강한 능력을 십분 발휘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인상주의와 신인상주의의 기법, 밀레와 들라크로와의 장점을 취해 객관적 사물을 표현할 때 그것이 지닌 항구적인 특징과 본질적 능력을 서로 결합시켜 사람들을 격동시킬 수 있는 새로운 회화언어를 창조해 낼 수 있었다.
  생명적 색채와 선은 고호의 그림 중에서 감정의 불꽃과 같아서 사람들의 심령을 온화한 가운데 활활 불태우고자 했던 뜨거운 열정이 그들 주위의 세속적인 사람들을 쉽게 이해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표면상으로 따뜻하고 우아한 것에 도취된 자산계급들은 19세기에 있어서도 역시 예술적 맹인들어었다고 할 수 있다. 작은 가정 단위로 교육과 예술적 훈도를 받아온 그 당시의 귀족, 벼슬아치나 승려들로부터 천재적 대예술가의 새롭고 뛰어난 양식이 그들에게 이해되기란 무척 어려웠다. 그래서, 어느때나 걸출한 예술가와 혁신주의적 사상가는 머물러 있는 머리로 안일을 추구하는 상류계급으로부터 백안시 당하고 냉대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초기 인상파들이 받았던 조롱과 냉대의 눈먼 역사를 익히 알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두려워하는 한 우리는 새로운 예술양식을 통한 신선감을 남길 수가 없다.
  바지막으로 샤오따쩐 교수가 제시한 여섯가지의 평가기준을 소개한다.
  첫째, 비평가는 모름지기 역사적인 각도에서 일체의 예술현상을 보아야 한다. 비평의 착안점은 현실 위주가 아닌 예술 발전의 관점을 토대로 설정한다. 진정한 예술비평가는 모름지기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향방에서 탐지되어야 하고 비평의 사고는 총체적인 역사 파악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올바른 비평 풍토와 예술작품의 본질에 접근하기 어렵게 된다.
  두 번째, 비평가는 모름지기 작자의 의도, 창조의 원인을 굴착한 후 자기의 판단을 피력할 필요가 있다. 스스로 잘 모르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입장에서 인상적으로 비평할 경우, 중요한 예술현상이나 예술작품을 잘못 판단하게 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으므로 특히 이러한 주의와 탐구가 요청된다고 본다.
  셋째, 이 세계의 사물은 끊임없이 변혁을 거듭하고 있으며, 새로운 사물도 속출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탐구를 게을리 하는 경우, 새로운 사물을 접할 수 없게 되어 결국 비평적 낙오를 면하지 못한다. 중국의 경우, 1950년대의 화가 林風眠의 경우만 보더라도, 지금은 모든 사람이 그의 그림을 높이 평가하지만, 그 무렵만 하더라도 그것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괴물인가 하고 다들 의아해 한 것이 사실이다. 자칫하면 오늘날 홍수처럼 쏟아지는 현대미술은 지식의 부족과 연구의 나태함으로 해서 소홀히 취급되는 것도 다 그런 원인이다.
 넷째, 어떤 경우 고전예술과 전통예술의 표준을 잣대로 하여 새로 나타난 예술작품을 잰다고 할 때, 그 양식은 물론, 내면에 숨어있는 새롭고 독자적인 정신내지 예술관을 놓치고 말 것이다. 양자간에 가치관의 일치를 보지 못할 때 대부분의 경우 공통의 언어를 기대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다섯째, 비평계는 자유로운 토론이 허용되고 또 전개되어야 한다. 새로 나타난 예술작품이나 예술사고에 대하여 많은 다른 의견의 개진을 통하여 그 중요성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다른 소수의 의견을 강압적인 태도로 묵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되도록 많은 변론을 거치면 거칠수록 더욱 명백한 귀결을 기대할 수가 있을 것이다.
  여섯째, 비평가는 시간을 두고 고증을 거치는 인내를 가져야 한다. 미묘한 예술작품이나 사상을 이해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급하게 결론을 내려선 안되면 역사가 만드는 진지한 판단을 기다릴 필요가 있다. 반 고호가 세상을 떠난 지 오랜 후에 유럽인들은 비로소 그의 예술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만약 생전에 성급한 쟁론을 통해 판단이 내려졌다면 오늘날과 같은 많은 사람의 공을 얻어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사람들은 각기 스스로 정신력과 개성을 통하여 대자연을 관찰하게 된다. 개성은 천차만별이어서 이것이 결국 개인의 예술관을 결정하게 된다. 표현과 감상도 천차만별이어서 바로 이러한 기준이 예술의 개성적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거나 폄해하기도 한다. 예술가의 상상력과 창조성은 정당한 비평을 통해서 유감없이 발휘될 수 있다. 개인적 취향이나 표준을 통하여 예술가와 예술품을 재는 경우 간혹 심각한 오해와 비극을 초래하여 고귀한 예술가가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인지하여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기 가치있는 삶을 찾아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月刊書藝(1991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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