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교실

한국서예의 출구를 찾아 나선 한 해/김병기

1. 2003년 서예계의 고찰을 통한 발전적 전략

한국서예는 아직도 침체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지 못 하고 있다. 광복 이후,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하여도 서예는 서예 애호가들에 의해서 면면히 그 맥을 이어오면서 사회적으로도 상당히 품위를 인정받는 예술이었다. 따라서, 당시에는 서예가라고 하면 사회의 지식층 혹은 고상한 문화계 인사로 대우를 받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서예는 여러 장르의 예술 중에서도 가장 격이 높은 예술로 인식되어 타 장르의 예술인들도 서예의 그 높은 격조에 부러움의 눈길을 보내곤 하였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 이후 급격한 산업화와 함께 경제 제일주의와 실용 만능이라는 사회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서예는 세상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간단 명료하게 쓸 수 있는 이른바 인쇄체 글씨와 간판체 글씨가 운치 있는 예술적 서예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198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는 1970년대 후반부터 이루어진 중국의 문호 개방과 개혁 개방 정책에 힘입어 서예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은 중국 본토에서부터 서예가 부활되어 매우 큰 ‘서예 열(서예 boom)’이 일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쳐 우리나라도 1980년대 초에는 서예가 크게 성하였다. 게다가 박정희 정권 아래서는 더 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구호 아래 국가의 부를 쌓아 가는 데에만 주력을 하였지 쓰는 데에는 인색하였기 때문에 국민들이 문화 생활을 하는 데에 돈을 쓸 여유가 없었지만, 전두환으로부터 시작된 신군부 정권은 국민의 환심을 사기 위해 국가의 재정을 풀어 해외 유학과 해외 여행을 자율화하는 등 국민의 소비성 짙은 문화 생활을 권장하다시피 함으로써 이른바 졸부들의 예술에 대한 투자도 늘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타고 전반적으로 예술품 거래가 활발해졌는데 서예도 예외는 아니어서 한때 상당한 붐이 일었으니 그것은 1980년대에 일어난 중국의 서예 붐과 우리나라 내부의 경제와 문화환경이 적절하게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서예 붐은 급격히 하락하게 되었다. 그 가장 큰 원인은 졸부들의 돈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의 돈도 여행이나 스포츠 등 동적인 활동, 특히 향락성이 짙은 대중문화 쪽으로 흘러들어 가면서 서예는 점차 국민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프로야구가 생김으로써 관중을 운동장으로 끌어들이고 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이 유치되면서 국민의 관심은 온통 스포츠에 쏠리게 되었고 영화나 비디오 등에 대한 검열이 약화되면서 각종 향락성 영화들이 등장하고 전국 어느 곳이나 여관과 술집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면서 우리나라는 이른바 ‘3S(Sport, Screen, Sex)’ 문화의 전성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이러한 문화환경 아래에서 지극히 정적이고 자기 수양적이며 절제성이 강한 예술인 서예가 국민의 관심을 끌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이때부터 서예는 더욱 깊은 침체의 늪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긴 암흑의 터널에 갇혀 그 출구를 찾지 못한 채 쇠퇴의 길을 걸어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한글 전용이라는 어문 정책으로 말미암아 서예의 주된 창작 매체인 한자가 국민의 의식 속에서 멀어짐으로써 서예는 1차적으로 큰 타격을 입고 쇠퇴의 길을 가게 되었으며, 또 광복 이후 미국식 문화가 아무런 여과 없이 홍수처럼 밀려들어와 국민들의 미감이 모두 서구화됨으로써 우리의 전통예술을 서구의 그것에 비해 ‘낙후된 것, 미개한 것, 촌스러운 것’으로 봄으로 인하여 우리의 전통예술이 모두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는데 서예도 그러한 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것이 서예가 입은 2차적인 타격이다. 그리고 급속한 경제성장과 천민자본주의의 확산으로 인하여 향락성 대중예술이 문화시장을 거의 다 점유해 버림으로써 순수예술이 설 자리를 잃게 되었는데, 서예는 특히 수신성(修身性)이 강조되는 예술이기 때문에 향락성이 짙은 대중예술이 팽배해 있는 문화환경에서는 결코 성장할 수가 없다. 이러한 대중예술 지상주의로부터 받은 타격이 서예가 받은 3차적 타격이다. 이렇게 겹겹으로 타격을 받은 서예는 많은 부분에서 자생력을 잃게 되었다. 특히 범국민적인 무관심 아래 교육이 제대로 실시되지 않음으로 인하여 차세대 작가들의 창작 역량과 연구 역량이 크게 저하됨으로써 전통서예의 전수를 위한 교육마저도 크게 위협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 아래에서 한국의 뜻 있는 서예가들은 서예가 국민의 가슴과 생활 속에서 부활하여 국민의 예술로서 활성화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한국의 서예는 좀처럼 생활 속에서 되살아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과연 언제까지 이러한 침체가 계속될 것인가? 정말 터널의 끝은 보이지 않는가? 아니다. 이제 터널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출구에 여 명의 빛이 비치기 시작하였다.

2003년은 우리 서예계에 많은 가능성이 제기된 한 해였다. 침체의 긴 터널에 끝이 보이기 시작하였고 새로운 출구를 찾으려는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적극적으로 그리고 여러 방향에서 진행된 한 해였다. 물론 아직은 구태의연한 모습을 벗어나지 못 하고 있는 면이 벗어난 면보다 훨씬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새로운 출구와 돌파구를 찾고자 하는 여러 조짐들이 보이는 것 또한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이에, 본 고에서는 2003년도 한국의 서예계를 대표적인 몇 가지 사례들을 중심으로 ‘답습과 계승’이라는 측면과 ‘출구를 찾기 위한 새로운 노력들’ 이라는 측면으로 나누어 고찰해 봄으로써 한국서예의 발전에 하나의 지남침(指南針) 역할을 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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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답습과 계승의 현상들

‘답습’과 ‘계승’은 엄연히 다른 말이다. 답습은 타성에 젖어 이어받지 않아야 할 것까지도 그대로 이어받는 것을 말하고 계승은 앞선 시대의 유산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소중하게 이어받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답습은 개혁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개혁을 하지 못한 채 전에 했던 그대로 하는 것을 말하고 계승은 그냥 방치해 두면 자연 소멸될 위험이 있는 것을 잘 챙겨서 이어가는 것을 말한다. 2003년도 우리 서예계에는 답습이라고 평가되어야 할 부분도 많이 있었고, 계승이라고 평가해야 할 부분도 적지 않았다.

온갖 부작용이 다 노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혁해야 할 것을 개혁하지 못 하고 전에 했던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서예계의 대표적인 행사는 공모전이다. 2003년에도 전국적으로 130개가 넘는 공모전이 치러졌다. 이른바 서예 3단체의 공모전도 예년처럼 치러졌고 그 외의 중앙에 있는 각 서예 단체와 지방의 서예 단체 모두가 지금까지 해 오던 방식대로 출품료를 받아 작품을 공모하고 그 출품료를 이용하여 행사를 치르는 그런 공모전을 치렀다. 아파트도 ‘선 건축, 후 분양’으로 그 제도가 바뀌려는 판에 서예계의 공모전은 출품료를 받아서 대회도 운영하고 단체의 경비도 쓰는 그런 식의 공모전이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할지 모르겠다. 130여 개의 공모전에서 쏟아내는 입·특선 작가들이 연인원으로 치자면 수만 명에 이르고 각 공모전의 초대작가 또한 단체를 다 합해 놓으면 수천 명에 이를 것이다. 이렇게 상이 남발되고 초대작가 초대가 남발되다 보니 공모전이라는 게 전혀 권위를 갖지 못 하고 있다. 게다가 심사 부정까지 겹쳐 심사위원들이 경찰 조사를 받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으니 어느 세월에 서예계가 정화되어 상이 상답게 수여되는 권위를 회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러한 상태로 답습만 계속하다가는 공모전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 채 서예가 사회로부터 도태되는 현상을 부채질하지나 않을까 염려된다.

공모전 외에 또 하나의 답습 현상은 해마다 틀에 박은 듯이 진행되는 실속 없는 국제교류전이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하나의 주제를 잡아 국제 간에 공동으로 연구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그저 양측의 인사들이 만나는 데에 의의를 두는 식의 국제전은 이제 청산되어야 한다. 그런 식의 만남은 온라인 상에서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고 또 개별적인 만남만으로도 충분하다. 굳이 단체의 이름을 빌려 막대한 돈을 들여 가며 거창하게 만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서예계에서는 아직도 국제 간의 단순한 만남을 위한 만남, 행사를 위한 행사로서의 국제교류전이 다수 이루어지고 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국제교류전이라는 이름 아래 작가들을 초대하고선 초대작가들로부터는 출품료를 받음으로써 돈만 내면 실력이 없는 무명작가를 하루아침에 국제전 초대작가로 만들어 주는 일종의 영업성(?) 국제서예전도 횡행하였다. 더 이상 답습하지 말고 과감하게 개혁을 해야 할 부분이다.

또 하나의 답습 현상은 행사의 남발이다. 내용은 없고 겉모양만 화려한 행사들이 많이 있었다. 각 서숙의 회원전에는 어김없이 도록이 제작되었으니 아직 도록에 작품을 실어 남에게 보일 만한 서예 그룹이나 개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도록을 찍어 전국에 배포하고 화려한 전시를 개최하는 낭비를 지속적으로 답습한 것도 2003년의 서예계의 현실이다. 발표를 공인해 줄 수 있는 권위 있는 평론이 활성화되어야 이러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2003년 한국서예계에는 앞선 시대의 서예 문화유산을 이어받고자 하는 계승을 위한 노력도 많이 있었다.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에서는 “옛 글에 밴 선현들의 정(情)”이라는 제목으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서간문을 전시하여 조상들이 남겨놓은 훌륭한 서예 문화유산을 계승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특히 이 전시는 서간문을 내용별로 가족, 친구, 사제, 군신, 자연의 5가지 소주제로 나누어 서간문 안에 밴 선현들의 정을 드러내 줌으로써 서간문이라는 서예 유산이 우리에게 온기를 지닌 생명체로 다가오게 하였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는 개원 25주년 기념으로 6월 25일부터 7월 12일까지 장서각 전시실에서 <고문서 특별전>을 개최함으로써 역시 계승해야 할 서예 문화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었다. 2003년에 있었던 이러한 서예 문화유산에 대한 전시로서 가장 의미가 깊은 전시로는 역시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이 주최한 <표암 강세황전>일 것이다. 이 전시는 2003년 12월 27일에 개막되어 익년 2월 29일까지 지속될 대형 전시로서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이 시리즈로 기획하여 전시해 오고 있는 한국서예사 특별전의 23번째 전시이다. 서예박물관 측은 이 전시를 위해 많은 시간과 인력을 투입하여 170여 종의 작품을 수집하고 수집한 작품에 대해 일일이 석문과 해설을 붙여 400여 쪽에 이르는 대형 도록을 제작하였고, 전시장에도 역시 석문과 함께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 관람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최대한으로 노력하였다. 전시장과 전시 도록을 이 정도의 수준으로 꾸밀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서예계의 연구 역량이 그만큼 향상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서예의 원형을 이 시대에 전수하려고 노력한 의미 있는 전시였다. 그런가 하면 국립중앙박물관이 조선시대 유명 학자들의 서예 유산을 모아 전시한 <조선 성리학의 세계-사유의 실천>전에서는 율곡 이이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작품 중에 위작이 발견되어 큰 소동을 빚기도 하였다. 우리에게 우리 서예의 맥을 잇는 작업이 쉽지 않은 작업임을 일깨워 준 전시였다.

2003년 한국서예계에서는 이러한 유형의 서예 유산에 대한 계승만 이루어진 게 아니라, 무형의 유산들도 지속적으로 계승되었다. 대학은 대학대로, 사숙은 사숙대로, 학회는 학회대로 후속 세대들에게 서예를 계승하기 위해 서예 교육과 연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학회가 큰 성과를 거둔 데 반해 학교나 사숙의 교육 성과는 매우 저조하였다. 학회는 한국서예학회를 중심으로 춘계와 추계로 나누어 알찬 학술대회를 갖는 등 활발한 학회 활동이 이루어져 한국의 서예계를 선도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해 냈다. 그러나 교육에 있어서는 각 대학 서예과의 신입생 지원율도 지난해에 비해 하락하였고 각 사숙의 서예 학습 지망생들도 많이 줄어서 문을 닫는 학원들이 속출하였다. 특히 초, 중, 고등학교 공교육에서는 서예가 거의 다루어지지 않음으로써 서예의 전수와 계승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에 이르렀다. 우리 서예 문화의 소중함을 인정한다면 무엇보다도 서예의 예술정신과 바른 기법이 제대로 계승될 수 있도록 국가와 민간이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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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출구를 찾기 위한 새로운 노력들

2003년은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은 답답한 답습 현상이 여전한 한 해이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한국서예가 기나긴 침체의 터널을 벗어나 새로운 출구를 찾기 위해 무던히 노력한 한 해이기도 하였다. 물론 커다란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해오던 방향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시도들이 유난히 많았던 한 해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우선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한국서예 사상 처음으로 ‘서예치료’라는 개념이 현실로 구체화되어 실지 치료가 이루어졌고, 또 그 치료 결과가 대중에게 공개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서예의 세계화를 지향하며 1997년 이후 꾸준한 발전을 지속해 온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가 2003년에 이룬 큰 업적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의 연구 기획팀은 2002년도부터 서예치료를 구체화할 계획을 세우고 2003년도 연초부터 실험학교를 운영하고 치료 사례를 발굴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하면서 9월 20일의 서예비엔날레 개막식에 맞춰 서예치료를 주제로 한 국제서예학술대회를 갖기로 하였다. 그 결과, 9월 21일에 개최된 국제서예학술대회에서는 한국 최초로 서예치료에 대한 공식적인 논문 발표가 이루어졌는데 전북대학교 김병기 교수는 『서예는 곧 사람이다』라는 기조 논문을 통하여 서예치료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동시에 진단하면서 서예치료를 통해 21세기 한국의 서예가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함을 주장하였고, 원광대의 김수천 교수는 심리학적인 증거와 여러 임상 사례들을 들어서 『서예치료의 이론적 근거』를 밝혔으며 서예비엔날레조직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실험 학교를 운영한 문계성 교사는 『주의력 결핍 및 과잉 행동 장애 성향이 있는 아동에 대한 서예치료 결과 보고』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조영랑 선생은 약 20년 가까이 재소자들을 상대로 실시해 온 서예치료의 경험과 실험 결과를 객관화하여 『재소자를 대상으로 한 서예치료 임상 사례 연구』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연구 발표는 한국서예의 출구를 찾기 위한 새로운 노력이자 조짐임이 분명하였고 나름대로 큰 성과를 얻었다.

2003년에 있었던 새로운 조짐 중에 의미 깊은 또 한 가지는 서예를 타 장르와 연계하여 서예가 공연예술로 재탄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점이다. 3월 7일과 8일 이틀 동안에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는 대만이 낳은 세계적인 무용가인 린화이민(林懷民)이 이끄는 크라우드 게이트 댄스 시어터(雲門舞集)의 <행초(行草:Cursive)>라는 공연이 있었는데 이는 서예 작품으로서의 행초서를 춤으로 형상화한 공연이었다. 이 공연을 또 하나의 계기로 삼아 국내의 많은 서예가들이 서예의 무대 공연 가능성을 재론하게 되었는데 마침내 ‘생활 속의 서예’를 주제로 한 2003년도 동아시아문화포럼에서 『서예의 무대 공연 가능 근거와 방법에 대한 연구』라는 논문이 발표되어 서예의 무대 공연 가능 근거를 확실하게 제시하였다.

2003년에 한국의 서예계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새로운 조짐으로는 서예와 디자인을 적극적으로 접합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도 역시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조직위원회는 <2003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의 한 행사로서 <디자인 서예전>을 기획하고 서예가들에게 특별히 의뢰하여 유명 기업체의 로고나 캐릭터 혹은 대표 상품의 상표를 서예를 이용하여 디자인하게 하고 그것을 전시하여 많은 호평을 받았다. 한국서예의 새로운 출구를 찾기 위한 노력이 분명하였다. 이러한 디자인 서예의 가능성에 확신을 준 또 하나의 전시는 고산 최은철이 10월 2일부터 10일까지 일산의 호수 갤러리에서 가진 <무위자연의 의상(衣裳)과 의상(意象)>전일 것이다. 최은철은 이 전시에서 의상(衣裳)과 서예를 접합하여 의상에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각디자인으로서 서예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확인해 주었다.

한국서예의 출구를 확보하고자 하는 노력은 한국서예가들의 잇단 해외전시를 통해서도 나타났다. 이미 세계화의 한 축으로서 그 위상을 다짐으로써 국제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동양화(Easternization)’의 바람을 타고 동양에 대한 서구인들의 관심이 증대되고 있는 현실에 착안하여 한국의 서예가 세계의 문화시장에 하나의 문화권력으로 탄생되기를 기대하면서 2003년도에는 한국서예가들의 해외전시가 어느 해보다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 분야에서 선구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는 소헌 정도준으로서 그는 2003년에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웨덴 등에서 순회 전시를 가짐으로써 한국서예의 진면목을 서구 사회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하석 박원규도 ‘수(壽)’ 자와 ‘복(福)’ 자를 쓴 작품으로 스웨덴에서 초대전을 가짐으로써 한국의 서예를 알리는 데 한몫 하였으며 권오실, 김명자 등은 한글 서예로 미국에서 초대전을 개최함으로써 한글 서예의 세계 진출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그런가 하면 원로 서예가 정주상이 이끄는 국제난정필회가 올해에는 파리에서 전시를 가짐으로써 역시 한국서예의 세계 진출 가능성을 한층 높였으며 심응섭은 모스크바 마르크스 거리의 한국문화홍보원에서 한글 서예 전시를 개최하여 우리의 한글 서예를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갈산 조문희는 6월 4일부터 6월 13일까지 작품성이 탁월한 현대 문인화 작품을 내걸고 가졌던 국내전시에 이어 11월 9일부터 20일까지 이탈리아 밀라노의 보르고냐 화랑에서 현대적이면서도 동양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현대 문인화전을 가짐으로써 한국서예의 넓은 폭과 서예가 가지고 있는 문인 정신과 서화동원의 정신을 서양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런가 하면,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는 역으로 세계의 유명 미술가들에게 우리의 먹과 붓과 한지와 서예 자료집과 서예의 예술적 특징과 서예 작품 제작 방법에 대한 매우 자세한 영문(英文) 안내서를 발송해 주고 그들로 하여금 직접 서예 작품을 제작하여 서예비엔날레에 출품하게 함으로써 한국의 서예를 외국의 미술가들에게 알리고 체험하게 하는 데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처럼 2003년은 여러 방면에서 한국서예의 해외 진출이 활성화된 한 해였다.

2003년에 있었던 또 하나의 새로운 조짐은 한글 서예가 어느 때보다도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는 점이다. 오랜 세월 동안 한글 전용의 어문 정책을 실시해 온 결과 오늘날의 한국인 중에 능히 한문 서예 작품을 읽고 감상할 수 있는 인구는 정말 많지 않다. 이러한 현실에 비추어 수년 전부터 “이제는 한글 세대에 어울리는 한글 서예가 활성화되어야 서예가 살 수 있다.”라는 의견이 대두되어 왔는데 2003년에는 그러한 의견을 본격적으로 실천이라도 하려는 듯이 한글 서예전과 한글 서예에 대한 학술 세미나가 어느 해보다도 많이 열렸다. 여러 한글 서예 단체들이 예년에 비해 보다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였고, 특히 세종한글 서예큰뜻모임에서는 창립 5주년을 기념하여 <조선시대 한글 서간의 서예적 조명>이라는 주제 아래 학술대회를 가짐으로써 한글 서예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 분위기 조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2003년에 있었던 새로운 조짐으로서 <민족서예교류전>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8월 6일부터 8월 15일까지 서울의 물파아트센터와 전주의 전주역사박물관에서 열린 <민족서예교류전>은 본래의 기획과는 달리 북한의 서예가들이 직접 참여하지 못 하고 조총련계 재일 동포 서예가들만 참여하였으며, 그들의 출품작 중에는 수준이 미흡한 작품이 있었다는 점에서 다소 아쉬움을 남기기는 하였지만 남북한 작가들과 조총련계 동포들의 작품이 한 전시장안에서 만나게 되었다는 점과 민족 정서에 바탕을 둔 실질적인 교류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큰 의미가 있었으며 침체된 한국서예의 돌파구를 여는 데에도 적지 않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전시였다고 할 수 있다.

2003년에는 한국서예의 출구를 찾기 위해서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새로운 노력과 조짐들이 있었다. 이러한 조짐들이 앞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실천됨으로써 한국서예가 새로운 발전의 문을 활짝 열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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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 밖의 특기할 만한 일들

이상으로 2003년의 한국서예계를 답습적인 면과 계승적인 면, 그리고 출구를 찾기 위해 새롭게 노력한 면 등으로 살펴보았다. 그러나 2003년의 서예계에는 이러한 일들 외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기록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몇 가지 일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003년 1월 5일 정주상이 이끄는 난정필회 주최로 신년 시호전(試毫展)이 있었다. 멋진 서예 문화를 이 시대에 재현·부활시키고자 노력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깊은 행사였다. 3월 4일 예술의전당에서는 중국의 유명 서예가이자 서예 학자인 유정성(劉正成) 초청 강연이 있었고, 11월 5일부터 18일까지 세종문화회관에서는 중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창봉 박동규가 그의 지도 교수인 남경의 황돈 교수와 함께 <중한 양인 황돈·박동규 서법전>을 열었다. 근당 양택동이 소장품 1,090점을 수원시에 기증하는 아름다운 일이 있었고, 작고 서예가 강암 송성용 서예비 제막이 6월 14일 전북 김제시 체육공원에서, 남정 최정균 추모비 제막식이 10월 2일 전북 임실에서 있었다. 원로 서예가 소당 이수덕과 동강 조수호가 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금봉 박행보가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포헌 황석봉의 전시를 두고 호된 비평을 가한 월간 『까마』 편집 주간인 김두경과 황석봉을 변호하는 일부 독자 사이에 반론이 오가면서 온라인 상에서도 한때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는 일이 있었으며,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이 주최한 <운여 김광업 전>을 두고 혹평과 호평이 크게 엇갈리는 일도 있었다. 오명남은 「서론정수」라는 책을 출간하여 서예 연구에 좋은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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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새로운 출구찾기의 가능성 보여줘

2003년도 한국의 서예계는 여전히 전례를 답습하는 부정적이 면도 많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어느 해보다도 새로운 출구 찾기에 대한 가능성을 많이 보여 주기도 하였다. 2003년에 제시된 서예치료, 서예의 무대 공연, 서예와 디자인의 접합, 서예의 해외 진출, 한글 서예의 긍정적 활성화 등은 앞으로 한국의 서예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모티브들을 잘 살려서 한국서예 발전의 길을 닦아 나간다면 한국의 서예는 머잖아 세계의 문화시장에 우수한 문화상품으로 등장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는 그러한 서예 문화를 토대로 국제 사회에서 강력한 문화권력국가로 부상할 수 있을 것이다. 서예는 한국의 문화산업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한 컨텐츠임이 분명하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갈고 닦아서 근대화 이후 지금까지 100여 년 동안 우리가 지속적으로 견지해 온 서양문화 ‘따라잡기’라는 어두운 터널에서 벗어나 찬란한 우리 문화 ‘내세우기’ 문화 의식을 확립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21세기에 우리 민족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다. 앞으로 서예에 대한 보다 진지하고 적극적인 연구가 민간 차원에서도 이루어져야 하고, 또 정부 차원에서도 보다 더 계획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 筆者 : 김병기 서예가 |전북대 중어중문과 교수

 

- 한국문화예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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