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교실

중국의 은나라

중국의 은나라

 

은나라는 역사적으로 실증된 중국 최초의 왕조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전에 하(夏)나라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증거가 없어서요,


은나라는 상(商)나라라고도 합니다. 기원전 1760~1520년쯤에 세워져서 기원전 1122~1030년쯤에 망했다고 합니다. 영토는 대략 현재의 산둥 성[山東省]에서부터 후난 성[湖南省]까지라고 하는데 그 위치는 중국지도를 찾아보시길. 중국의 문자로 은나라 때 만들어진 걸로 인정되고 있으며 태음력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은나라가 유명한 것은 무엇보다도 갑골문자입니다. 은나라 때는 거북이 등가죽 같은 걸 말려뒀다가 태워서 갈라지는 걸 보고 점을 쳤는데 그 결과를 바로바로 그 거북이 등가죽에 써놓은 겁니다. 그 갑골문이 발견됨으로써 전설로만 전해지던 은나라의 존재가 실제로 밝혀졌죠.


은나라가 우리 민족의 한 갈래가 세운 국가라는 이야기는 역사학에서 정설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는 걸로 압니다. 하지만 그 이론을 주장하는 쪽에서도 몇 가지 근거는 내세우고 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하나라에 포악하기 짝이 없는 걸왕이란 왕이 있었고 그를 무찌른 탕이 은나라를 세웠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걸왕의 폭정이며 은나라 건국과정에 대한 서술이 그 다음대인, 그러니까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건국한 무왕의 이야기와 너무도 흡사합니다. 아무리 역사가 되풀이되는 거라고 하지만 그렇게 인물의 설정이며 스토리가 꼭 맞아떨어지는 건 좀 이상하죠. 그러니 <사기> 혹은 <사기>가 참고했던 역사기록이 조작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생기는 겁니다.


우리나라 상고사를 다룬 기록(한단고기 등)에서는 중국인들이 숭배하는 신농, 복희, 여와 등이 모두 동이족으로서 중국에 문명을 전파했고, 중국의 전설적 성왕인 요, 순, 우 등도 모두 동이족 핏줄이라고 주장합니다. 은나라 역시 동이족이 세운 국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차츰 힘을 키워나간 중국인들이 과거를 부정하고 역사를 왜곡하여 그런 사실을 은폐해버렸다는 겁니다. 우리 민족 역시 점점 힘이 약해지면서 스스로 자신들의 찬란한 과거를 덮어버렸고요. 역사는 힘있는 자들의 기록이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과거에 강성했어도 현재 힘이 없다면 입을 열지 못합니다.


우리 상고사가 학계의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도 그런 것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국력이 약하더라도 더 많은 근거를 찾아 증명해야 할 일이지요. 중국측의 역사 기록이 왜곡되었다는 심증이나, 우리가 가진 얼마 안 되는 상고사 기록만 증거라고 들이대기에는 좀 부족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참, 은나라를 상나라하고도 하는데요 그 당시는 수도의 이름을 따 나라의 이름을 짓습니다. 은의 수도가 상이거든요. 그리고 그 유명한 갑골문자가 출토된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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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권상호
殷 중국 고대왕조. 스스로는 상(商)이라 하였으나 이 나라를 멸망시킨 주(周)나라가 전(前) 왕조를 은(殷)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상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대략 BC 17∼BC 16세기 무렵부터 BC 11세기 중반 무렵까지로 알려져 있다. 〔전승과 갑골문의 발견〕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와 그 밖의 고문헌(古文獻)에 따르면 시조 설(契)의 어머니 간적(簡狄)은 유융씨의 딸로서 제곡의 차비(次妃)였는데, 현조(玄鳥;제비)의 알을 먹고 설을 낳았다. 설은 우(禹)의 치수(治水)를 도왔으며 순(舜)에 의해 상(商)에 봉해졌다. 다음 대인 소명(昭明)부터 제12대 주계(主癸, 갑골문에는 示癸)까지 부자상속(父子相續)이 행해졌으며, 그 뒤에는 천을(天乙;湯王, 갑골문에는 大乙)이 계승했다. 이 이전에 도읍을 여덟 차례나 옮겼으며, 탕왕 때 박(지금의 河南省 曹縣 부근)으로 옮긴 뒤 하(夏)나라의 걸왕(桀王)을 멸망시키고 스스로 무왕(武王)이라고 하면서 천자의 자리에 올랐는데 이것이 은왕조(殷王朝)의 시작이었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천도해 탕왕에서 제18대 반경(盤庚) 때까지 다섯 차례나 도읍을 옮겼다고 한다. 제30대 주왕(紂王;帝辛) 때 나라가 매우 혼란했는데, 이때 서쪽에서 일어난 주나라에 의해 멸망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사서(史書) 속의 전승이 과연 사실이었는지의 여부는 오랫동안 밝혀지지 않았으나 1899년 허난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 부근의 샤오툰[小屯]이라는 마을 옆을 흐르는 위안허강[洹河]이 범람해서 제방이 무너졌을 때 그곳에서 문자가 새겨진 귀갑(龜甲)과 수골(獸骨)의 조각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우연한 계기에 이것을 입수한 유철운(劉鐵雲)이 이 문자를 해독한 결과, 이 가운데서 문헌에 나온 은나라 왕명을 많이 읽어낼 수 있었다. 이로써 유물들이 은대의 유물이라는 사실과, 또는 역으로 사서에 있는 기록이 근거없는 기록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은왕조가 실재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 뒤 갑골편은 같은 지역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1928∼37년 사이에 중앙연구원역사어언연구소(中央硏究院歷史語言硏究所)에 의해 대규모의 발굴작업이 행해져 대량의 갑골편과 함께 거대한 왕릉과 궁전터 그 밖의 많은 유물·유적이 발견되어 이곳이 《사기》에서 말하는 은허(殷墟)인 동시에 반경에서 마지막 왕 주왕까지의 도읍지일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해졌다. 20세기 중국 고고학 고대사연구에서의 최대발견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사서에서는 이보다 앞선 하왕조(夏王朝)가 존재했다고 전해지지만, 그 실재를 증명하는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기 매문에 현재 은왕조가 중국 역사상 확인된 가장 오래된 왕조이다. 〔정치·사회·문화〕 은나라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해명하기 위한 자료는 갑골문 해독 결과와 고고학적 연구로 한정된다. 갑골문은 은왕실의 복관(卜官)에 의해서 은왕조의 제사·농사·기후, 외적의 침입과 정벌, 왕의 여행, 사냥·질병 등 모든 사항에 걸쳐 있는데, 은나라 사람이 인간세계에 대해 지배력을 가졌다고 생각한 천제(天帝) 즉 하느님에게, 그 신의를 묻기 위해 점친 결과를 적은 것이다. 특히 제사에 관한 점이 많은데, 이는 은왕실의 선왕선비의 이른바 조상신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와, 강이나 산 등 자연신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로 나뉜다. 이들에게 제사지내는 일이 정치에서의 질서 형성의 핵심이 되었다는 뜻에서 제정일치의 정치형태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왕도는 갑골문에서 <대읍(大邑)>이라고 불렸는데 지배귀족들의 주거지인 씨족읍이 대읍을 둘러싸며 많이 산재하였다. 이 씨족읍에는 많은 소읍이 예속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읍들 상호간의 누층적(累層的) 지배예속관계가 국가구조의 기본이었던 것으로 보아, 왕도에는 이미 어느 정도의 지배관료층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제적으로는 농업이 중심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수수·조·보리 등을 재배하고 가축(소·말·염소·돼지·개·닭 등)을 사육했으며 또한 누에도 쳤다. 이것을 위해서 생산노예를 사용했느냐의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지만 갑골문 속에 강(羌)이라는 이민족(異民族)이 제사용 제물로 많이 희생되었고 또 발굴된 왕묘의 주변에서 실제로 엄청난 순장인골(殉葬人骨)이 출토되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면 이민족 노예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 문화적으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이 시기가 중국 청동기문화의 전성기였다는 점이다. 고고학적으로는 은대전성기(殷代全盛期)를 전기 이리두기(二里頭期), 중기 정주기(鄭州期), 후기 안양기(安陽期)로 구분하는 것이 통례이다. 중국 역사상 청동기의 시작은 이리두기에서 볼 수 있는데 중기에는 벌써 대형의 정교한 청동제기류(靑銅祭器類)가 많이 제작되었고, 후기에 이르자 질과 양 모두 뛰어난 청동제기와 무기가 만들어졌다. 이것들은 외범분할법(外范分割法)에 의해 주조된 청동기로, 기술적으로 최고의 완성도를 보이고 있다. 또 복잡한 무늬까지 새겨져 있어서 세계적으로 고대 청동기문화의 진수로 일컬어진다. 이러한 은나라문명의 근원에 대해서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이른바 세계 6대문명 가운데서 메소포타미아·이집트·인더스문명, 그리고 중앙아메리카·안데스 두 문명이 각각 상호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은 인정된다. 그러나 은문명만은 이들과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 아직까지의 연구로는 밝혀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