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교실

통일신라시대 서예

 

통일신라시대 서예


  원삼국 말기 신라와 당나라와의 교섭은 정치적인 것이 주가 되고, 문화의 수입은 오히려 부차적인 것이었으나, 통일 사업이 달성된 뒤 신라는 학술, 문화, 정치제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중국의 것을 모방하였다. 사신의 왕래가 빈번하여지면서 관료의 자제와 승려들로서 중국에 유학하는 사람이 많아졌고, 과거제도1)를 받아들여 관리등용에 학문하는 사람을 채용하게  됨에 따라 문필에 능한 사람이 다량 배출되었다. 또한 이때에 당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문화가 찬란한 시기였으며, 글씨에 있어서는 전형적인 해서의 규범이 정립되던 시기로 구양순, 저수량, 우세남, 유공권 등의 대가들이 나타나 중국 서예 사상 가장 활발한 시대를 이루었다.

  신라의 서적으로는 근년에 발견된 寫經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과 일본 쇼소원(正倉院)에 전하는 신라장적이 있으며, 상당한 수의 금석이 남아 있다. 통일 초기에는 왕희지2)체가 크게 유행하였고, 당(唐)나라 중엽 이후 해서의 전형적인 규범이 정립됨으로써 그 영향이 통일신라에도 크게 미쳐 말기부터 해서가 유행하였다. 그리하여 행서는 주로 왕희지법, 해서는 구양순법이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 때까지 양조(兩朝)의 서예계를 풍미하였다.

  초기에는 왕희지의 서체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영업(靈業)의 신행선사비(神行禪師碑)3)·감산사석조불상조상기(甘山寺石造佛像造像記)·성덕대왕신종명(聖德大王神鍾銘)·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와 김생(金生)4)의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捿雲塔碑)의 서체가 모두 왕희지의 서풍을 따르고 있다. 영업의 글씨는 왕희지의 <集字聖敎序>와 구별해 낼 수 없을 정도의 명품이며, 김생은 왕희지의 법을 따르면서도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남북조시대의 서풍과 당(初)나라 초기 시대 猪遂良의 필의를 참작하여 개성이 뚜렷한 서풍을 창안하였다. 김생의 글씨는 한 획을 긋는데도 굵기가 단조롭지 않고 변화가 무쌍하며, 글자의 짜임새에 있어서도 좌우와 상하의 안배에 있어 율동적 효과를 살려 陰陽向背의 조화를 나타내고 있다.

  고려의 이규보(李奎報)로부터 <東國諸賢書訣評論>에서 김생을 ‘신품제일(神品第一)’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이 시대의 서예에서 특기할 만한 것으로는 화엄사에 보존되어 있는 <화엄석경(華嚴石經)>의 깨어진 조각들이다. 이것은 정강왕이 부왕인 헌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화엄사를 짓고, 각황전(覺皇殿) 벽에도 화엄경 전문을 돌에 새겨 끼워 두었던 것인데, 전란으로 건물이 타고 석경도 산산조각이 나버려 현재 몇 백 개의 파편만이 보존되어 있다. 서풍으로 보아 한 사람이 쓴 것은 아니나 대체로 구양순의 서풍이 많다.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은 한국에서 사경으로 가장 오래된 것이며, <화엄석경(華嚴石經)>은 대체로 구양순의 서풍이 짙은 당나라 때의 사경체이다. 당나라의 개성석경(開城石經)과 연대가 거의 비슷한데, 글씨의 수준은 오히려 개성석경보다 높다.

  통일 신라 말기의 대가로는 최치원(崔致遠)5)을 들 수 있다. 최치원의 작품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쌍계사진감선사비(雙磎寺眞鑑禪師碑)>이다.6) 이것은 구양순의 아들 구양통(歐陽通)의 도인법사비(道因法師碑)와 매우 비슷한 풍골(風骨)을 지니고 있다. 

   통일신라의 서예에 대하여서는 많은 자료가 있으나 결론적으로 말하면 초기에는 왕희지의 서풍이 유행하였는데, 이는 당나라의 태종이 특히 왕희지의 글씨를 좋아한 까닭에 그 영향이 컸으리라 짐작되고, 말기에는 구양순의 서풍이 도입되어 고려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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