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교실

한자의 기원부터 각체의 성립까지

 

한자의 기원(起源)부터 각체(各體)의 성립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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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인생의 취미 중에서 가장 고상한 것은 예술을 감상하고 창작하는데 있다고 본다. 서예(書藝)는 고대 중국에서 처음으로 창조된 동양의 문자 곧, 한자(漢字)를 수사 미화(手寫美化)한 정신적 조형예술이고, 다른 외부의 영향이 없이 중국 문화권 특유의 예술로서 회화와 밀접하게 관련하며 극히 미술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그 기원은 무릇 5천년, 즉 서양 회화사보다도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서예가 생겨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이 지혜가 있고 감정표현의 욕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문자(文字)나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중국에서 일찍 발달했다. 문자(文字)는 이런 의미에서 인간 최초의 변혁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서예의 예술성은 순순한 정신을 필묵에 의탁해서 표현하는데, 각 개인의 개성과 지역, 시대에 따라 상이하다. 이러한 상이한 추세와 변화를 알아보는 것이 서예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중국역사의 시대구분에 맞춰 서예의 역사를 서술해 보고자 한다. 그 대상이 되는 시기는 한자의 기원에서부터 한나라에 해당하는 각 서체의 성립기까지 다루어 보겠다.

한자(漢字)의 기원과 문자 자료의 등장 이전

한자(漢字)는 중국에서 뿐만 아니라, 동양에서 오랜 세월을 두고 갈고 닦아 내려온 문자이다. 이것을 아름답게 표현하고자 한 것이 서예이다. 서예가 중국에서 특수한 예술로서 발달한데는 한자 그 자체가 가지는 특성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한자는 서예의 발달과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한자의 기원에서 서예의 출발을 엿볼 수 있으며, 그 변천과정에서 서예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한자 이전

인간이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으나, 언어생활을 함으로써 의사의 전달이 비로소 제대로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말이란 직접 서로 상대해 있지 않으면 할 수가 없고, 서로 상대해서 말을 주고받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오래 기억하기가 어려운 단점이 있다. 이와 같이 말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고 있다. 여기에서 '문자'라는 것이 필요하게 마련인 것이다.

그런데, 문자는 이상적인 방법으로 구체화해서 어떤 의사라도 모두 표현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구체적인 방법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즉, 중국에서는 한자이전에 결승(結繩), 서계(書契), 팔괘(八卦)등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온다. 결승이란 자세히 알 수가 없지만 글자 그대로 풀어 쓴다면, 노끈의 맺음이라고 보아진다. 대소(大小), 장단(長短), 다과(多寡)의 매듭으로 의사표현을 했다. 서계란 것도 역시 어떠한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서(書)자는 '쓰다' 또 는 '긋다'의 뜻이 있고, 계(契)는 '새기다'의 뜻이 있으니 서계도 역시 문자이전에 긋고 새기고 해서 수를 헤아리든가 또는 믿음 의 표시로 삼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팔괘는 결승, 서계와는 달리 널리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주역에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음양의 변화를 그림으로 나타낸 것인데, [―],[--]의 부호를 기초로 하여 자연물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팔괘는 어디까지나 그림에 속할지언정 문자라고 하기에는 어려운 것이다.


창조적인 문자의 정리 (한자의 발명)

황제(黃帝) 시대에는 문물이 점차 번잡해져서 문자의 필요를 절실히 느끼고 사관 창힐로 하여금 상형문자(象形文字)를 만들게 하였다. 이 전설적인 말을 믿을 근거가 없으나, 대개 이 시대에 상형문자의 체계가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금수의 발자국과 거북등의 무늬에서 착상하여 초보적인 문자의 체계를 잡았다. 이로써 한자구성의 육법(六法)의 시조를 터  놓았고 여기서 오늘날 한자의 형태로까지 변천해 왔다.


채색토기(彩色土器)의 발견

문자자료가 등장해서 역사를 조금이나마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은(殷)나라 22대 반경(盤庚)이라는 왕 이후의 일이다. 앞 에서 얘기된 것을 뒷받침해 줄 만한 어떤 사료도 발견된 것이 없다. 그런데, 1921년 이래 수년에 걸쳐서 중국의 하남(河南), 산서(山西), 협서(협西), 감숙(甘肅)의 각지에 산재하고 있는 신석기 유적에서 다수의 채색토기가 발견되었다. 그 중에는 그 당시에 사용하고 있던 일종의 기호인 것으로 생각되는 것을 각입(刻入)한 채색토기가 이따금 있다. 물론 어느 것이나 문자라고는 할 수 없지만, 표면에 새겨진 문양이나 인물, 조수 등을 볼 때 중국 원초의 그림 문자의 형태를 엿볼 수가 있다. 그림문자는 상형문자보다 더 그림에 가깝고 쓰는데 불편하며 간단한 구상물(具象物)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아마도 한자는 문자로서의 이러한 결함이 있는 그림문자를 추상화하고 단순화시키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이 과정 속에서 그림과 글씨도 분화돼 각자의 독자적인 예술로 발전했을 것이다.

문자자료의 등장과 대전(大篆)의 성립

우리가 오늘날 확실히 알 수 있는 중국 최고의 문자는 은왕조(殷王朝)의 것이다. 그 이전의 것은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다.


귀갑수골문(龜甲獸骨文)

갑골문은 현재 잔존하는 한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에 속한다.

1899년 북경 한약방에서 왕의영(王懿榮)과 그의 식객 유악(劉顎)이 발견한 이후 수집과 연구, 발굴 작업이 꾸준히 진행되어 현재는 상당한 수의 자료가 모아졌다. 연구 결과에서 출토지가 하남(河南)의 안양현(安陽縣) 서북 소둔(小屯)이라는 마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갑골문은 은인(殷人)이 점복(点卜)에 사용하고, 전쟁, 수렵, 벼농사 등에 관한 복사(卜辭)를 칼로 각한 것인데, 좌반(左半), 우반(右半)을 대(對)로 하여 같은 문자를 각입했다. 예리한 칼날로 귀갑(龜甲)이나 짐승 뼈에 새겨 넣었기 때문에 필획이 단순하고 직선적이다. 획은 생략이 많고 안제(按提)가 없다. 그리고 갑골문의 서체나 서법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 곳에는 몇 가지 다른 유형이 있다는 것을 확인 할 수가 있다. 또, 갑골주서(甲骨朱書), 수골묵서(獸骨墨書)등이 최근에 발견되었음에 비추어 당시에 이미 붓(筆)이 존재하여 필사(筆寫)가 행해졌음을 말해준다.

갑골문이 처음 발견되고 학자의 관심을 집중하게 한 것은 그다지 오래된 것은 아니다. 그 후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연구되어 왔지만, 학문으로서의 역사가 짧기 때문에 앞으로도 더 새로운 사실들이 알려지게 될 것이다.


金文

*은왕조의 금문

문자자료는 앞서 지적했듯이 은왕조 22대 반경왕 이후부터 등장했다. 이때는 청동기 시대의 정점에 도달해 있었다. 그래 서 안양(安陽)을 중심으로 그 당시의 많은 동기(銅器)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 시대의 동기는 위로는 조종(祖宗)을 기념하며 아래로는 유급자손(留級子孫)하기 위해서 주조(鑄造)된 것으로 거의 일상기물이다. 금문이란 이들 동기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말하는 것이다. 거의가 은말 이후의 각으로 갑골문보다는 뒤에 것으로 갑골문에 비해서 문자로서의 조형이 한층 뛰어나고 또한 필력( 筆力)도 능히 엿볼 수 있다. 또, 은기의 명문은 동시대의 갑골문 보다는 획이 많고 자형(字型)이 복잡하다. 은왕조의 동기에는 명문이 있는 것이 적다. 그리고 이때의 명문은 회화적인 성격이 뚜렷하고 상형(象形) 또는 그에 가까운 것이 많고, 일품(一品)의 자수가 적다.


*서주(西周)의 금문

은망주흥(殷亡周興)에 미쳐 갑골의 사용은 급격히 쇠하고, 반대로 동기 제작이 성행하여 명문이 갑골과 자리를 바꾸어 문장기록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주(周)로 와서는 동기제작의 사유도 확대되어 여러 씨족들이 무공, 훈공을 세워서 왕실에서 은상을 받음을 기념하는 내용 등 세속적인 내용이 동기에 새겨졌다. 그리고 은대와는 달리 명문이 장문화(長文化)되었다.

이 시대의 금문은 초기에는 주(周) 특유의 의례적인 엄숙함이 있는 가운데 은대의 서풍(書風)을 이어 비후(肥厚)함이 있어 생명의 약동이 보인다. 또, 자체가 차차 정제되고, 자간, 행간이 정해지고 상하좌우의 자연스러운 구성이 좌우편방의 균형을 가져오게 하여 자형은 고정화 되었다. 그러나, 후기에 접어들수록 점차로 생기를 잃어가고 형식화해 가는 경향이 있다. 이는 주(周) 왕실의 쇠퇴와 보조를 같이하고 있다.

*고문의 정리

금문이 통용하던 시대 (서주(西周) 선왕(宣王)때로 추정)에 사관 주가 사주편(史籒篇)을 만들었는데 그 이유는 문자를 정연하고 획일적으로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서체를 결합, 정리하기 위하여 점획을 증익(增益)하여 혼돈하지 않게 하였다. 이를 주문이라 하는데, 획이 복잡하고 문체는 방정하다. 주문의 번중(繁重)함은 당시 문자의 필연적인 현상이지 사주가 인위적으로 글자를 복잡하게 만든 것은 아니다. '사주'에 의한 문자 정리를 기점으로 그 이전에 통용되었던 모든 서체는 고문(古文)으로 통칭되었고, 주문은 진(秦)제국의 서체인 소전(小篆)과 구별하기 위해서 대전(大篆)이란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서체의 혼란과 문자 통일

춘추 전국시대는 중국에서 이때까지 오래토록 계속되어 오던 고대 사회가 크게 변화를 일으킨 시대이다 . 산업의 발달과 상공업의 발흥, 그리고 자유로운 언론의 성행과 이에 따른 제자백가(諸者白家)의 등장 등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시대의 상황에 걸맞게 서예 역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이 시대의 서예의 자취는 금문(金文), 석각(石刻), 죽간(竹簡), 백서(帛書) 둥에서 엿볼 수 있다. 이때의 금문은 서주 시대 의 금문이 정제되고 고정화되어 가는데 배해서 그와는 역으로 지방적인 특색을 지닌 것으로 분화해가는 경향으로 변화해갔다. 그 자체는 주문(籒文)이다. 전국시대에 접어들어서는 청동기 문화가 급속히 쇠퇴하고 새로운 철기문화가 유입됨에 따라 동기의 수가 갑자기 적어져서 발견되는 금문 또한 아주 적다.


춘추 전국시대의 석각(石刻)

석고문(石鼓文) 이전에 존재했으리라고 여겨지는 석각류들은 신빙성이 낮기 때문에, 석고문을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래된 석각으로 인정한다. 석고문은 수말 당초(隋末 唐初) (AD 7C경)에 섬서(陝西)의 진창현(陳倉縣)의 들에서 발견되었는데, 큰 북의 모양을 한 돌이며 모두 열 개가 있다.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론(議論)이 구구하지만 춘추시대말기나 전국시대초기가 유력하다. 석고문은 사언구(四言句)로 내용은 인민애물(仁民愛物)의 뜻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글자 크기는 4cm 정도로 주문의 대자(大字)를 볼 수가 있다. 자체는 주문으로서 동기의 명문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필획은 금문과 소전의 중간에 속하고, 금문보다 잘 정돈되어 있고 소전보다 방편(方遍)하고 복잡한 곳이 있어 주문에서 소전으로 옮겨가는 동안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또, 이 시대의 석각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조초문(조楚文)이다. 전국시대 진(秦)의 혜문왕(惠文王) 12년 [B.C. 313]에 각입된 것으로 내용은 초왕이 여러 번 맹약을 어기어 진나라가 그를 저주한 것이다. 북송 때 발견되었으나 곧바로 없어졌으며 원석(原石)이 없다. 자체의 크고 작은 변화가 한결같지 않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있으며 서사체(書寫體)의 맛이 있다. 석고문과는 유사한 점이 많으나 더 간략하게 되어 있는 점이 특색이다.


춘추, 전국시대의 죽간(竹簡)과 백서(帛書)

죽간(竹簡)은 춘추 무렵부터 일반적으로 서적이나 문서의 기록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실물은 존재하지 않았는데, 근년에 여기저기서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1953년 호남(湖南)의 장사(長沙)에서 발견된 43편의 전국시대의 죽간과 1957년 하남(河南)의 신양(信陽)에서 발견된 전국시대의 죽간과 모필(毛筆), 칼, 죽관(竹管)등 죽간에 문자를 쓰는데 사용된 공구가 바로 그것이다.

위의 죽간은 전국시대에 초에서 만들어진 것인데, 이들이 죽간을 쓴 것은 은인(殷人)이 갑골에 각(刻)한 것에 비하여 편리하고 경제적이었기 때문이다. 자체는 고문(주문)에 가깝고, 간편하고 독창성이 풍부하며, 체세(體勢)는 편장(扁長)하고 횡획에는 비수(肥瘦)가 심한 것이 많다. 필의(筆意)가 이미 한예(漢隸)에 가까워졌고 주문에서 예서에로의 변천을 엿볼 수가 있다. 초의 죽간에서 진 이전에 이미 예서(隸書)가 싹트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또, 1954년 6월 장사(長沙)교외의 전국시대의 묘에서 좋은 토호(兎毫) 모필이 발견되었는데, 초인(楚人)의 필사용구(筆寫用俱)로 밝혀졌고 그 우수함은 놀랄만하다. 이 는 죽간에 사용되었으리라 믿어지는데, 모필(毛筆)에 묵(墨) 또는 옻으로 썼음을 알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의 백서(일명 繪書)는 죽간과 더불어 춘추전국시대부터 일반에서도 널리 사용된 것이며 지금까지 발견된 유품도 적지 않다. 1934년 장사 근교의 고묘에서 출토한 초의 백서(帛書)는 둘레에 세 가지 색깔로 신물(神物)을 그리고, 가운데는 좌우로 나누어 장편의 문자가 쓰여 있다. 이들 문자는 필획이 잘 정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힘차고 일치(逸致)가 있어 옛 맛을 더해주고 있다.


진(秦)의 소전(小篆) (문자통일)

진은 하(夏), 은(殷), 주(周)의 뒤를 이어 천하를 통일하고 따라서 서법 도 또한 획일하게 정리하였다. 이것이 바로 소전(小篆)이다. 서체의 변천은 자연스러운 변화에 따르기 마련이지만, 소전은 국가 통제상의 필요에서 의식적으로 연구하여 고치고 변화시킨 서체라고 할 수 있다. 이제까지 동방의 여러 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던 고문(古文)을 폐지하고 진나라의 전통서체인 주문을 약간 간략화하여 새로운 자체인 소전을 만든 것이다. 소전의 구조는 정사각 형에서 장방형으로 되었으며, 획도 처음과 끝의 굵기가 같고, 사이와 포백이 고르고 형태는 좌우가 대칭을 이루었으며 중심을 잡아서 평행을 이루도록 하였다. 당시의 서체를 전하는 자료로는 각석(刻石)과 와당(瓦當), 권(權, 저울추), 양(量, 되)의 명문이 있다. 또 최근에 발견된 다수의 죽간도 있다.

진의 각석은 여섯 군데에 칠석(七石)이 있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은 태산(泰山)과 낭야대(낭야臺)의 두 각석뿐이다. 이들도 훼손이 심해서, 엄정하고 중후하여 소전의 정통이라 할 수 있는 태산각석은 원석에 9자만 있을 뿐이고, 낭야대각석도 글자가 대부 분 뭉그러지고 희미하여 읽기가 어렵게 되었으며 소전의 둥글고 힘차며 중후한 맛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진의 권량명(權量銘)은 소전의 자료로서 청동제 또는 철제의 권(權)이나 양(量)에 각입한 명문(銘文)을 뜻하는 것이다. 진시황은 도량형의 통일을 위해서 관제(官製)의 원기(原器)를 만들어서 민간에 배포하였고 그릇 옆에 그 취지를 알리는 소서(소書)를 새겨 넣었다. 훌륭한 소전으로 쓰여진 것이기는 하나, 문자도 작고 각석의 문자에는 미치지 못한다. 또, 점점 간소화되어 필획을 생략, 점진적으로 후대의 예서와 같이 되어버린 것도 있다.

1975년 호북(湖北)의 운몽(雲夢)의 고묘에서 천 점이나 되는 많은 양의 진대 죽간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전서가 차차로 예서로 변화되어가고 있는 과정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예서의 출현

급속한 인지의 발달은 여러 가지 사무의 복잡을 가져오게 되었고, 이에 따라 서사(書寫) 기록도 변모해 가야만 했다. 이전 의 대전(大篆)이나 새로 만들어진 소전(진전)에는 아직 상형문자의 특징인 곡선적인 필획이 많기 때문에 서사에 불편하고 비능률적이었다. 이에 따라 곡선을 직선으로 바꿔 필사를 쉽게 하고 그 능률을 높이기 위해서 예서(隸書)라는 새로운 서체가 생겨났다. 예서는 소전을 간략화한 것이나, 소전과 같이 국가가 제정한 자체가 아니라 민간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생긴 것이다. 그 예서라는 명칭은, 소전이 국가가 제정한 바른 서체인데 대해서 예서는 일반 민간에서 사용되던 간략체이기 때문에 이것을 천하게 취급해서 '도예(徒隸)의 서(書)'라고 말한 데에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된다. 예서는 전서가 변화된 서체로서 전서에 내포되어 있던 모든 서법이 밖으로 나타나고 있어 이로부터 해서와 초서가 발생한 근본이라 할 만큼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서의 필법은 중요하며 모든 서법의 기초가 된다.

전서의 간략체로서 자연발생한 예서는 진대 이전부터 발생의 징조가 엿보였으며 그런대로 불충분했던 진을 거치면서 차차로 사 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널리 일반 민간에서 사용되고 한대에는 소전과 위치를 바꾸어 통용서체가 되어 더욱 발전하였다


예서의 진전(秦篆)과 초서(草書)의 등장

한 제국을 세워 올린 전한 때에는 광대한 국토와 비견되는 문화적인 발전이 있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서예에 있어서는 시대에 걸맞은 진전이 없었다. 이 시대의 서예자료는 대단히 부족하다. 앞선 시대에서와 같은 훌륭한 금문 은 전연 그 자취가 없어졌으나, 남아 있는 몇 개의 금문에는 진대의 전서의 풍취가 있고, 또 다른 것들은 모두 옆으로 길어서 전서와 예서의 중간 형태를 띠었다.

이 시대의 각석은 몇 개가 지금도 전하지만, 아직 전서의 영향을 완전히 탈피 못한 것이 대부분이다. 예서로 쓴 것들은 예서의 완성된 형태인 파책이 있는 글씨가 아니다. 이 이외에도 당시의 서예자료로는 거울의 명문이나 동인(銅印)의 문자나 와당의 문자를 들 수 있다. 이것들은 둥근 맛을 가진 전서를 도식화한 것이며, 모두 전서의 풍취가 있다.


전한의 한간(漢簡)

금세기 초두에 들어서 발견되기 시작하여 50년대와 70년대에 많은 양이 발굴된 목간(木簡)류와 백서(帛書)들은 한대의 서예자료로서 의 서체의 변천 연구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을 받는 것들은 마왕퇴(馬王堆) 1호묘의 한간(漢簡)과 돈황(敦煌), 누란(樓蘭) 한간, 그리고 거연(居延) 한간이다.

먼저 마왕퇴 1호묘 한간은 문자 자료가 적은 전한대의 글씨로서 서체의 변천기의 중요한 출토품이며, 그 서체의 특징은 결구와 획의 곳곳에 전서의 풍치를 남기면서 상당히 진보된 예서의 필법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즉, 전서가 예서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서체를 아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다음으로 돈환, 누란한간과 거연한간은 기존의 학설을 뒤엎을 만큼 귀중한 자료이다. 이것들에 의해서 파책의 서법이 이미 전한 때 존재하였으며, 예서를 간략화하여 빠르게 쓰는 초예(草隸), 일종의 초서(草書. 장초(章草))가 쓰이고 있었다는 것이 알려졌다. 이 한간들의 내용은 주로 변방의 기록들이므로 초서체가 일반 민간에 널리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당시의 정식서 체로는 대부분 예서(파책이 있는)가 사용되었고, 일상의 서사체로는 예서의 속서(速書)로 장초(章草)와 초예(草隸)가 쓰이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제까지 한대의 서체에 대한 연구는 돌에 새겨 영구히 후세에 전하려는 의도에서 엄격하게 쓰여진 한비(漢碑)가 주종을 이루어 왔지만, 한간(漢簡)의 발굴로 그 연구영역은 한층 더 확대된 셈이다. 한간은 대부분 필세가 자연스럽고 억지로 붓을 돌리지 않았으며 붓으로 쓴 먹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어서 한비와는 대조적인 차이를 찾아볼 수 있다. 또 전서에서 예서로, 예서에서 초서로 변화되는 전환기의 서체까지도 엿볼 수 있다는 데에서 그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다.


새로운 움직임

아무리 전한시기가 서예에 있어서 미약한 시대이기는 하였지만, 그 말기가 되자 차차로 서예가 일종의 예술로서 인정받기 시작했으며, 이때까지 의 원시적인 서예 예술시대에서 자각적인 서예술로 옮겨가는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한의 원제(元帝), 성제(成帝)때 [B.C. 49 B.C.7] 일반 사회에서도 글을 중요시하게 되었고, 글씨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며 그 아름다움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는 과거에 제왕이나 권력자들이 자신의 의도에 의해서 서예술을 이끌어가고, 그 문자를 쓴 당사자도 전문인인 것에 비추어 볼 때 새로운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일반 민간의 관심 고조가 찬란한 후한의 시작을 재촉하고 있다.


일대 전환기

후한 시대는 중국서예사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원시 서예술이 참다운 서예술로 옮겨가는 일대 전환기이다. 또, 이때에 와서야 비로소 다른 형태의 예술과 동등한 지위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후한의 전반기 약 120년간은 아직 그 다지 대단할 것은 없었고 그 때의 서예자료로는 각석(刻石), 석궐(石闕), 마애(摩崖)등의 석각문자가 전한다.

이때의 각석은 비의 형식을 구비하지 않은 것이 많았으며, 비(碑)라고 지칭하기에는 타당하지 않다. 당시의 서귈은 사천(四川) 과 산동(山東)에 많았으나 마멸이 심한 것이 대부분이고 또 새겨진 문자는 적다. 마애는 천연의 암벽에 직접 문자를 각입하는 것인데, 이 당시부터 시작되었고 여기에는 자연의 맛이 더욱 돋보인다. 중국의 서예술은 후한의 말기 즉, 환제(桓帝), 영제(靈帝) 때[147~189]에 눈부신 진전이 있었고, 이에 따라 본격적인 서예술의 세계로 들어갔다. 그 이유는 석비의 유행과 종이의 발명으로 대표되는 필기구의 급격한 개량에 의해서다.


석비의 유행

돌에 문자를 새겨 기념하는 것은 주대(周代)에 시작되었지만, 소위 비(碑)의 형식을 갖추게 된 것은 후한대(後漢代)이고, 말기에 이르러 갑자기 유행하여 많은 유품들이 남아 있다. 비석의 성행으로 한예의 각석입비(刻石立碑)가 수없이 많아졌다. 특히 환제, 영제의 연간 [147~189]의 40년간은 그 전성기로 근 2 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원석이 백점이상 남아있을 정도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서예의 발전을 촉구하게 되었다.

비석의 문자로는 한대에 들어와 완성되어 통용서체가 되었던 예서가 새겨졌고, 예서는 예술적으로 점점 그 아름다움을 발휘하였다. 일반적으로 비석은 인물의 공덕을 표창하여 널리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당시 유교사상의 도덕주의에 기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그 문장이나 서법에도 충분한 주의가 기울어져 훌륭한 문장과 아름다운 글씨가 추구된 것은 당연하다. 한비는 어느 것이나 독자적인 서풍을 가진 뛰어난 것뿐이고, 전형적인 한예(漢隸)로 쓴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 비석의 유행도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처음의 입지취지와는 동떨어져서 거짓 행적을 기록하는가 하면, 가문을 과시 하는 호화로운 국면으로 치닫게 되자 현제때[205]에 석실(石室), 석수(石獸), 비명(碑銘)등의 제작을 모두 금지시켰다.


종이의 발명

서기 105년에 환관인 채륜(蔡倫)이 종이를 발명하였는데, 그 동안 실용적으로 문자기록에 사용하던 목간이나 비단의 단점으로 인하여 종이는 이것들에 대체하여 서서히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종이를 사용하게 되면 무엇보다도 편리하기 때문에 일반 민간에 빠른 속도로 번져갔을 것이다. 종이가 발명되면서 척독(尺讀:짧은 편지)에 이를 사용하는 일이 생겼으며, 대체로 여기에 초서로 서사를 한 것 같다. 이로써 초서가 종이의 보급과 함께 발달하였는데, 이는 예서가 한비의 유행으로 발달한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서가(書家)의 등장

진 이전에는 글씨의 공졸(工拙)을 비교하지 않았으므로 서학(書學)이나 서법의 설이 없었으나, 한대에 이르러 비석이 성행 하면서부터 글씨의 심미적(審美的) 요구가 이어져 서법의 전승(傳承)에 계통을 찾을 수가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자연히 전문적인 서가가 등장하게 되었다.

여기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조희(曹喜)와 두도(杜度)이다. 두 사람은 장제(章帝) [75~88] 때 활동하던 인물이며, 조희는 전예(篆隸)에 능하고 두도는 초서에 능했다고 한다. 이들 이후에 나타난 서가를 보면 두 사람 중의 어느 한편에 속해있다. 그래서 전자를 전예파, 후자를 초서파(혹은 행초파)라 했는데, 전예파는 채옹(蔡邕)이, 초서파는 장지(張芝)가 대표하고 있다. 두 세력으로 구분되어있던 것이 점차로 시대가 지날수록 초서파가 세력을 증대해갔다. 종이의 보급과 함께 초서가 새로운 혁신적인 글씨로서 일반 민간에서 환영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후한대에 서가가 전예파와 초서파의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는 사실은 남북 조사대의 북파의 비(碑)(예서, 해서), 남파의 첩(帖)(행, 초서)이 두 파의 원류가 될 수 있었다는 데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설문해자(說文解字)

후한때에는 중국 언어학사상 불후의 명저일 뿐만 아니라 고문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기초 자료가 되어 서예사에서도 귀중한 책이 되는 '설문해자'가 편찬되었다. 설문해자는 허신(許愼)이 서기 98년에 초안을 잡아 100년에 완성하였는데, 모두 14편으로 9,353자가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을 만든 목적은 학자들의 그릇된 견해를 풀어주고 성인들이 문자를 만든 신성한 목적을 알리기 위해서다. 설문해자에는 완전하게, 그리고 계통적으로 소전을 보전하고 있고 당시 통용하던 고문, 주문 속체(俗體)가 포함되어 있다. 설문해자는 설문내의 소전과 일부 주문의 형체로 더 오래된 문자를 해독할 수 있으며, 오늘날 현존하는 고서를 정리, 주석하는데 있어서도 반드시 갖추어야할 책이다. 또, 서예 자료에 있어서는 갑골복사(甲骨卜辭)와 종정관지(鐘鼎款識)를 연구할 때, 설문해자의 도움을 받아야 할뿐 아니라 진한래 간책백서(簡冊帛書)의 정리, 해독에도 설문해자는 사용된다. 실례로 앞서 언급한 바 있는 마왕퇴 출토의 백서죽간은 설문해자를 적용하여 해독할 수 있었다.


각체의 성립

후한대에 들어서자 많은 서가들은 서예의 여러 가지 변형체를 발전시켰다. 이런 과정 속에서 오늘날 통용되는 모든 서체가 성립된 것 같다.

앞서 이야기됐지만, 초서는 진의 예서가 간략화 되어서 이룩된 것으로, 원래 한자의 발전으로 인한 자연적인 산물이다. 진대에는 소전을 쓴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 통용되던 글씨는 오히려 초서였다. 이러한 사실은 돈황의 한간(漢簡)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따라서 당시의 초서를 정확히 부른다면 초예(草隸)라고 할 수 있으며, 그 후의 초서를 금초(今草)라고 할 수 있다. 후한의 장제(章帝)때 이르러 초예에 능한 '두도'가 나왔으나 그의 유품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 후 '장지'가 초서를 더욱 발전시켜 금초를 이룩하였다.

또, 한대의 말기가 되어서는 우로 삐치는 파책의 필법이 대단히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전서와 예서의 둥근 맛이 있는 형을 받아들여서 해서를 만들었다. 해서는 예서의 사각형과 정확성이라는 기본 성격과 장초의 간결성과 속필(速筆)을 결합한 서체이다.

그리고, 해서의 출현과는 전후구분이 어려운 행서가 등장하였는데, 행서(行書)는 후한의 유덕승(劉德昇)이 간편하고 쉽게 쓰고자하여 만들었고, 예서의 형식을 완전히 벗어난 진보된 형태이다. 예서의 모난 각(角)이 죽었고 운동감과 경쾌한 맛이 가미되었다. 행서의 획과 자형은 해서와 동일하나 속필로 썼다는 사실이 다르다. 아마도 해서와 행서는 거의 동시에 일어나 유행했을 것이고, 해서가 발전하고 분화됨에 따라서 그 변형체는 해서와 행서의 혼합체로 발전하였다.

이로써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는 서체들은 한대에 이미 모두 만들어졌다. 그만큼 한대 특히, 후한시기는 중국서예사상 매우 중요한 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맺는말

한자는 중국에서 끊임없이 진보해왔고 발전해 오기를 몇 천 년, 그러는 동안에 한자는 여러 번의 변화를 가져왔다. 갑골문으로부터 금문, 대전, 소전, 예서, 초서, 해서, 행서에 이르기까지 비록 발전의 속도는 느렸으나 추세로 보아서는 점점 간단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시대마다의 이러한 추세와 새로운 서체의 출현은 한사람의 힘에 의해서 이룩된 것은 아니고, 일반민간의 심리 즉, 번잡하고 귀찮은 것은 누구든지 싫어하고 간단하고 알기 쉬운 것은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인정(人情)에 의해서다. 새로운 서체의 발명의 근거가 되는 것은 인간의 지혜가 있어 끊임없이 생각하고 개선해 나가려고 한다는 점과 일반 민간들의 잠재력이다. 서예의 긴 흐름 속에서도 그것을 이끄는 주체는 일개 특정인이 아니라, 일반 민간인인 것을 알 수 있다.

본 글은 문자의 시작부터 다루어 현재 통용하는 서체가 성립되기까지의 긴 서예사의 흐름을 짚어보았다. 물론 이것이 그 모든 것을 포괄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앞으로 새로운 자료와 연구가 축적된 이론들이 공급된다면 역시 많은 부분들이 수정이 가해질 것이다.


<참고문헌>

육종달(陸宗達), 김근 譯, [설문해자통론(說文解字通論), 계명대 출판부

김기승 著, [한국 서예사], 정음사, 1975

권영원 著, [전초입문(篆草入門)], 오성사,1985

김종태 著, [중국회화사], 일지사, 1976

용우순 著, 양동숙 譯, [중국문자학], 학연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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