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교실

文房之香 (문방지향) - 문방의 향기

文房之香 - 문방의 향기

이번 전시는 <서화문방전>이란 명제가 시사하듯 단순한 작품전이 아니라 작가들의 문방의 도구들을 작품과 더불어 진열했다는 데서 이채로움을 띤다. 서, 화가들만이 아니라 문방도구들을 수장한 애호가들도 함께 했다는 점 역시 이채롭게 보인다.

면면들을 보면, 서예에 구자무, 권창륜, 회화에 송영방, 임송희, 정탁영, 김종학, 문방 애호가로 김연수, 박금란 등이다.

서양의 그림과 동양의 그림은 그것이 제작되는 시스템 자체가 다른데서 독특한 구조와 형식을 갖추게 됨은 주지하는 바다. 서양의 그림은 그것이 어떤 도구나 재료에 의하던 상관없이 완료된 작품 자체가 중요시 되는 반면, 동양의 회화는 그것이 어떤 매재에 의해 어떤 분위기에서 이루어지는가의 과정자체를 대단히 중요시하게 된다. 그러기에 문방이란 독특한 창작 공방이 작품을 에워싼 아우라를 대신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편이다.

문방이란 단순히 창작의 공방이라기보다 문인사대부들의 정신과 학문을 연마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정신세계의 깊이와 창작의 격조가 어우러질 수 있는 요인은 실로 이에 말미암는다고 할 수 있다. 서양화에서 붓이나 파레트가 단순한 도구 이상일 수 없으나 동양의 문방의 도구인 벼루나 모필, 연적이 단순한 창작을 위한 도구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은 문방의 주인과 더불어 생활하고 주인과 더불어 사유하기 때문에서다. 이런 배경에서 문방사우란 이름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문방에서 창작되는 종목이 주로 문인화와 서예이다. 문방의 도구로서 모필은 회화와 서예에 공통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기에 회화와 서예라는 장르상의 명칭에 의해 구분되지만 과거에는 서화로 통용된 것도 문방의 풍습에서 유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글씨를 잘쓰는 사람이 곧잘 그림도 잘 그리는 것이나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글씨도 곧 잘 쓰는 것은 서, 화가 원래는 같은 뿌리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서예는 예술이라기보다 학문의 영역을 지니었기 때문에 과거로부터 서는 학자들의 몫이었고 회화와 더불어 서예를 하는 문인사대부들이 자연 뛰어난 학식의 소유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단순한 쟁이가 아니라 폭넓은 영역의 학식을 체득해가는 지식인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동양의 서화가들의 위상이었다.

서예가로 참여한 구자무는 월전선생에게 직접 사사한 문하생으로 월전의 문인화의 경지를 계승하고 있는 분이라 할 수 있다. 시와 그림과 서가 어우러진 그야말로 격식을 갖춘 문인화를 시도하고 있는 점에서 돋보인다.

권창륜은 서예계의 대표적인 작가로 알려져 있는 분이다. 글씨 외에 문인화 영역에도 뛰어난 작품을 창작하고 있다.

송영방, 임송희, 정탁영은 월전의 서울대 시절 제자들로 현대문인화 영역의 대표적인 작가들이라 할 수 있다. 자신들의 본격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추상화에 못지않게 적지 않은 문인화를 창작해내고 있다. 어쩌면 문인화의 마지막 세대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듯 이미 이들의 뒤를 잇는 문인화를 좀처럼 엿 볼 수 없다.

김종학은 문인화와는 다소 동떨어진 서양화가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의 옛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착은 능히 문방전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

그가 즉흥적으로 그리고 있는 근작들을 보면 그것이 비록 재료는 서양의 것이지만 그리는 태도와 양식면에선 문인사대부들의 희작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서양의 재료로 그리는 문인화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다면 그렇게 불러도 좋을 듯하다.

문방 도구인 벼루와 연적 등을 출품한 문방 수집가들의 참여는 이 전시를 단순한 서, 화가들의 그것으로 머물게 하지 않고 애호가 내지는 창작을 향수하는 사람들의 상대적인 가치가 어떤 것인가를 알리는 계기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띠게 된다.

과거의 문인 사대부들에 의해 애호된 문방의 도구들을 수장하고 아낀다는 것은 그것을 사용했던 선인들의 정신세계를 공유한다는 것이 된다. 그들의 정신세계와 더불어 같이 한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림 속에 문방이 있고 문방 속에 그림이 있는 이 전시회는 잃어져가는 우리의 옛 문화를 되살리려는 의도에서 기획되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잃어져가는 것이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그것들과 더불어 살았던 옛 사람들의 격조 높은 삶의 경지와 창작의 정신을 어떻게 다시금 일깨워 계승할 것인가를 숙고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라는 것도 이에 말미암는다. 먹의 향가기 없어지고 붓의 자재로운 필운도 사라진 시대, 이 각박한 현대 속에 그윽한 문방의 격조와 아름다움이 혹여 청량한 한 줄기 샘물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 오광수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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