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교실

15 광개토왕릉비는 변조되었는가

 15. 광개토왕릉비는 변조되었는가

   1. 서론

 역사속에서 끊임없이 충돌하는 한,일 양국 사이에 좀 더 관심을 가져보자는 의도에서 이 글을 싣게 되었다.   많은 사실들이 왜곡되고 있지만 광개토왕릉비와 관련하여 우리 나라 고대사가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바로잡아 보려 한다.   이 글은 아직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관계로 우리쪽에 유리한 주장이 될 수 있음을 감안하고 비판적인 관점에서 보았으면 한다.

   암울한 시대를 예고하는 유신헌법의 반포로 시국이 뒤숭숭하던 1972년 10월, 일본 동경에서 <광개토왕릉비>의 연구라는 한 권의 책이 조용히 출판되었다.  그러나 이 책이 일으킨 파문은 대단하였다.   출판되자마자 한국학계와 언론은 발칵 뒤집혀졌고, 일본 학계도 큰 충격을 받았다.  신문지상에는 연일 이 책을 둘러싼 글이 발표되고, 곳곳에서 세미나가 열리고, 관계논문과 책이 쏟아져 나왔다.  재일교포 사학자 이진희가 쓴 이 책은 "일본 육군참모본부가 광개토왕릉비를 변조하였다."는 폭탄선언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2. 비문 변조설 내용

  그가 주장한 변조의 전말은 이렇다.   1880년 가을, 일본 육군 참모본부는 포병 중위 사쿠오에게 스파이 임무를 맡겨 중국에 파견하였다.  그는 북경에서 중국어를 배운 뒤 신분을 감추고 만주일대를 누비다가, 1883년 4~7월 경 광개토왕릉비가 있는 통구(通溝)로 들어갔다.  우연히 능비를 본 사쿠오는 이를 직접 해독한 뒤, 그 이용가치가 큰 것을 알고는 현지인을 조수로 고용하여 탁본을 만들었다.  이때 그는 일본에 유리하도록 이른바 신묘년조 기사의 '來渡海'등 25를 변조하였다.   1884년, 스파이 사쿠오는 131장이나 되는 능비 탁본을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수년간 비밀리에 해독작업이 진행된 뒤 탁본은 천왕에게 현상되었고, 해독작업의 결과는 국수주의 단체의 기관지인 회여록(제 5집)에 발표되었다(1880).   이 사이 참모본부는 여러 차례 스파이를 파견하여 능비를 조사하였으며, 1889년 이전 어느 해에 사쿠오의 비문 변조 사실을 은폐하려고 석회를 칠하였다는 것이다.   여러개의 비문 탁본을 자세히 살펴보면, 탁본이 만들어진 시기에 따라 글자가 다른 부분이 있다.  이는 언젠가 칠해놓았던 석회가 시간이 지나면서 떨어져 나가서 생긴 현상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 전에도 이미 지적된 바 있었다.   일본의 서예연구가 미즈타니는 1959년에 탁본들 사이에 글자가 다름을 지적하면서 비문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를 주장하였다.   현지에 가서 비문을 조사한 적이 있는 북한의 박시형도 1966년에 내놓은 <광개토왕릉비>라는 책에서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였다.   또 일찍이 1914년경에 이 지역을 찾아 비석을 직접 보았던 신채호도, "손상된 글자에 석회를 발라 만들어 넣은 것이 있으므로 진실을 잃은 것이 안타깝다." 는 언급을 한 적이 있었다.   어쨌든 찬반양론이 벌어지는 가운데 남한 학계는 비문 변조설에 동조하고 나섰고, 일본 학계에서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일부 양식있는 일본인들은 비문 변조 여부와는 별개로, 참모본부에 의해 주도된 초기 비문연구를 재검토할 것과 근대 일본 역사학의 제국주의적 체질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논의는 무성하였지만 비문에 대한 현지답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그 진위를 가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비의 재발견 경위와 참모본부의 역할에 관심이 모여졌다. 


  3. 비문의 재발견과 '신묘년' 기사

   광개토왕릉비가 집안(集安)에 세워진 것은 414년(장수왕2)이었다.  그로부터 250여년이 흐르고 나서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고구려는 멸망하였다(668).  이 지역은 곧 발해의 영토에 들어갔으나, 발해가 멸망하자 우리의 발길이 미칠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이리하여 거대한 비는 오랜 세월동안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비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성계의 영웅담을 노래한 <용비어천가>에는 비석이 있다는 사실을 적어 놓았고, 1478년(성종 18)에 평안도 관찰사로 국경지대를 시찰한 성현(成俔)도 비를 바라보고 시를 읊은 적이 있었다.   이후에도 비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모두가 금나라 황제의 비석이라고만 생각하였다.   만주에서 일어난 청왕조는 중원을 석권한 뒤, 그 시조의 발상지인 이 지역에서 사람들이 농사지으며 살 수 없도록 한 '봉금제도(封禁制度)'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들어서 이 지역의 인구가 늘어나고 있던 현실을 인정한 청나라 정부는 회인현(懷仁懸)을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하였다.   광개토왕릉비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중국 학자들은 서체(書體)에 관심을 갖고 탁본을 떠서 선물로 주고받기도 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연구에 먼저 착수한 것은 일본이었다.   그들은 비문을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하였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참모본부가 탁본을 입수하여 그 연구결과를 발표한 후,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 **신라를 정복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이른 바 '신묘년조'에 흥분을 감추지 못한 일본인들은 앞다투어 비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임나일본부설'이 정설로 자리잡고 식민사관의 기초가 놓여졌던 것이 이때부터였다.   4세기 후반의 역사가 1500년을 뛰어넘어 19세기 말에 재현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궤변까지 널리 퍼졌다.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일본 역사학자 시라토리란 자는 이렇게 떠들어대기도 했다.

 - 이 비문이 유명한 것은 조선 남부의 신라, 백제, 임나, 3국이 일본의 신민이었음을 명백히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의해서 일본이 조선 남부를 지배한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나는 이 비를 일본에 가져와서 박물관이나 공원에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국이나 독일 프랑스 같으면 몇만 원을 들여서라도 자기나라에 가지고 갔을 것이다. -

   이는 단순한 선동으로 끝나지 않았다.  1906~1907 일본군은 압록강 하구에 군함을 보내 비의 밀반출을 기도하였다.   이 계획은 비록 무산되었지만, 침략자의 음모가 얼마나 극단적이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비문의 신묘년조 기사가 식민사관의 도구로만 이용되던 일본 제국주의 지배 아래에서 1930 연대 말경 정인보는 신묘년 기사의 주체를 고구려로 보는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다.   즉 "왜가 신묘년에 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격파하였다.   그런데 백제가 <왜와 연결하여> 신라를 침략하여 그의 신민으로 삼았다."  라고 읽어, 비문 해석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그러나 정인보의 글은 오랫동안 발표되지 못하다가, 1955년에 세상에 알려진 후 비문 연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북한의 박시형은 앞서 본 <광개토왕릉비>라는 책에서 정인보의 해석방식을 받아들였다.  그 뒤에도 남북한학계는 대체로 정인보의 선구적인 업적에 입각하여 비문의 재해석을 시도하였다.   신묘년조 기사의 해석문제를 둘러싸고 진행되던 논쟁은 비문 변조설이 제기된 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변조설에 동조하는 한국 학계는 비자체에 대한 재조사를 주장하고 나섰고, 이를 부정하는 일본 학계도 비문에 대한 다양한 검토를 시도하고 있었다.   어쨌든 비문의 변조 여부는 일단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 제기였다.


  4. 비문 변조설의 진위

   비문 변조설이 나온지 10년이 흐른 1981년, 왕건군이라는 중국 학자가 길림성에서 <호태왕비연구>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그는 비석을 직접 살펴볼 수 있다는 이점을 살려 비를 세밀하게 조사하고 현지인의 진술을 듣는 한편, 관련 문헌을 면밀하게 검토하였다.   그리하여 얻은 결론은 대강 이러하였다.   1876년 청나라 정부가 회인현을 설치한 뒤 그곳 관리에 의해 비가 발견되었고,  몇몇 금석학자들이 사람을 보내 탁본을 뜨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비석 옆에 살던 초천부라는 사람이 탁본 뜨기를 독점하였는데,  이끼가 두꺼워 탁본 뜨기가 힘들자 말똥을 바른 뒤 불로 태웠다.  그렇지만 능비의 겉면은 여전히 울퉁불퉁하였다.   탁본의 수요가 더욱 늘어나자 초천부는 1903년경부터 비면의 흠에 헉회를 발라 고르게 하고, 획이 분명하지 않은 글자에도 석회를 칠하여 선명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선명한 탁본을 신속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의도치 않은 결과가 발생하였다.   그는 비문을 해독할 수 있는 학자도 아니었고, 석회를 메워넣을 때 쌍구가묵본은 참고하였으므로 자연히 몇몇 글자의 자획이 바뀌어 버렸던 것이다.    이러한 왕건군의 연구내용은 초천부의 후손과 현지인의 진술에 토대를 두고 있으므로 실상에 가깝다.  참모본부 특히 사쿠오의 의도적인 비문 변조는 불가능하였을지도 모른다.   금석학이나 서체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지 못한 젊은 장교가 비문을 직접 해독하고 일본에 유리하게 변조한다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학계에서는 대체로 왕건군의 조사결과를 인정하고 있다.   몇몇 글자의 변조 여부를 따지거나, 한두 문장만을 떼내어 왈가왈부하는 것만으로는 광개토왕릉비를 논할 수 없는 시점이 되었다.   중요한 것은 비문 전체를 통하여 당시의 역사상을 재구성하는 일이다.   먼저 비문의 내용을 살펴본 뒤, 비를 세운 5세기 고구려인의 세계로 발걸음을 내딛어 보도록 하자.


  5. 비석의 상태와 비문의 내용

  광개토왕릉비는 집안 분지의 동쪽, 압록강에서 5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고구려의 옛 도읍지였던 만큼, 주변 곳곳에 1면여기에 달하는 고분들이 흩어져 있다.   자갈이 중간중간 박혀 있는 응회암으로 만든 비석은 높이 6.39미터, 무게 37톤에 달하는데, 많이 가공하지 않아 표면이 울퉁불퉁하다.   화강암으로 된 거대한 받침돌이 비석 밑을 받치고 있다.  바둑판 같은 선을 반 듯하게 그어, 그 속에 보통 14×15센티미터 정도의 손바닥만한 크기로 글자를 새겨서 넣었다.  예서체로서 고풍스런 멋이 나면서도 힘이 넘치는 뛰어난 필체이다.   동남쪽의 1면에 11행, 서남쪽의 2면에 10행, 서북쪽의 3면에 14행, 동북쪽의 4면에 9행, 모두 44행에 총 글자수는 1775자이다.  그중 150자 정도는 마멸되어 알아볼 수 없는 상태이다.   언뜻 보기에는 투박한 모습이지만, 고구려인들은 이 비를 세우는 데 엄청난 정성을 들였다.   광개토왕이 죽은 지 2년 뒤인 414년, 장수왕은 부왕(父王)의 업적을 자손만대에 전하려고 거대한 자연석을 다듬어 하늘을 향한 석조기념물을 세웠던 것이다.   광개토왕의 능에 대해서는 견해가 일치되지 않지만, 비석 서남쪽 200미터 정도 떨어진 태왕릉(太王陵)으로 보는 것이 유력하다.   태왕릉이라는 명칭은, 이 부근에서 "태왕릉이 산악처럼 굳고 편안하기를 바란다."는 글자가 새겨진 벽돌이 발견된 적이 있어 붙여졌다.   거대한 돌을 다듬어 피라미드 모양의 7층 계단을 쌓고 그 안은 자갈돌로 메운 이 무덤은 한 변의 너비가 70미터가 넘는다.   무덤 정상부에 시신을 놓았던 돌방이 있는데,  그 입구에 서면 집안 분지와 주변을 둘러싼 산과 압록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좁은 통로를 지나 들어가면 맞배지붕의 궁정을 축소한 듯한 방이 나오는데, 입구벽면 위쪽에는 대들보와 서까래가 가는 선으로 새겨져 있으며, 바닥에는 왕과 왕비의 관대가 놓여 있다.   비문은 고구려 왕가(王家)의 내력과 비석을 세운 이유,  광개토왕 생전의 업적, 광개토왕릉을 지키는 수묘인(守墓人)에 관한 규정을 적은 세 부분으로 크게 나뉘어 있다.   첫째 부분에서는 광개토왕이 사방에 무위(武威)를 떨치고 나라와 백성들을 부강하게 한 뒤 412년  9월 29일에 죽었기 때문에 그의 공훈을 대대로 전하고자 능비를 세운다고 적고 있다.  둘째 부분에서는 광개토왕의 생전에 정벌 이유와 과정, 결과를 일목요연하게 밝히고 있다.   395년에는 비려(裨麗:대흥안령 산록의 거란)을 정벌하고, 398년에는 숙신을 정복하였다.   399년에 백제가 왜와 화통하자 왕이 몸소 평양성까지 순행하였는데,  이때 신라왕이 왜의 침입 사실을 전하자 다음해에 5만의 보병과 기병을 보내어 왜병을 궤멸시켰다.  404년에는 대방고지(帶方故地:황해도)를 침입한 왜군을 무찌르고, 407년에는 백제의 6성을 격파하였으며, 410년에는 동부여를 정벌하였다.   왕이 정복한 지역은 총 64성 1400촌이었다.   셋째 부분은 광개토왕릉을 관리하는 수묘인에 관한 규정을 적은 것으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6. 능비를 세운 사람들의 세계

  고구려인들은 자신들의 수도 국내성을 천하 사방의 중심지로 생각하였다.  즉, 고구려를 둘러싼 세계는 모두 고구려에 신속(臣屬)되거나 신속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였다.   고구려왕은 천제(天帝)의 아들이자 하백(河伯)의 의손자인 추모왕(鄒牟王:주몽)의 후예로서, 천하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존재였다는 자부심에 차 있었다.   당시 고구려인의 이러한 천하관(天下觀)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비가 세워진 5세기 초,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패자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 대륙은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 있었다.   특히 북중국에서는 주변 민족이 세운 나라들이 연이어 들어섰다가 멸망을 거듭했고,  요동, 요서지역에서 세력을 떨치던 선비족도 쇠퇴하였다.  남쪽의 신라는 아직 힘이 미약하였고, 가야는 작은 나라로 나뉘어 있었다.   바다 멀리 일본 열도에서도 통일왕조가 성립하기 전이었으므로 '왜'라는 세력이 때때로 한반도 남부에 출몰할 뿐이었다.   고구려의 유일한 적수는 백제였다.  백제는 371년에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이후, 고구려의 남쪽 국경을 계속 위협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광개토왕은 백제를 공격하여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내는데 승리를 거두고 60여 성을 차지하였다.   나아가 신라에 침입한 왜를 쫓아내고 신라를 휘하에 거느렸으며, 북으로 거란, 숙신, 동부여를 복속시켰다.   이렇게 고구려는 주변의 나라들을 복속시키고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발돋움 하였다.   이에 고구려인은 동북아시아의 패자가 된 자신의 나라를 천하의 중심으로 인식하고, 주변 나라를 고구려에 신속한 존재로 여기게 되었다.   비문 속에서 고구려인은 광개토왕의 정복을 만천하의 백성을 풍요롭게 살도록 하는 조치로 예찬하고 있다.


  7. 신묘년조의 해석

   신묘년조의 수수께끼는 비를 세운 고구려인의 천하관을 통하여 풀 수 있다.  비문에서 왜는 광개토왕의 거사를 방해하는 '악의 무리'로 나타난다.   399년에 백제와 왜가 화통하자 왕이 몸소 평양까지 순행하였고, 400년에는 신라왕의 요청으로 신라를 침입한 왜를 응징하였다.   그리고 404년에는 대방고지에 침범한 왜를 왕이 몸소 토벌하였다.   이러한 '왜'가 처음 나타난 곳이 바로 신묘년조이다.   여기에는 396년에 광개토왕이 백제를 정벌한 이유가 담겨져 있다.   광개토왕은 고국원왕의 전사를 설욕하고, 유일한 적수를 굴복시키기 위해 백제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그 이유를 왜라는 '악의 무리'에서 찾은 것이다.   왜냐하면 고구려인의 관념속에서 백제는 이미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질서 속에 편입된 속국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가 한반도 남부에 침입하여 그 질서를 범하였기 때문에 이를 응징하려고 백제를 정복하였다고 비약시켜 말했던 것이다.   신묘년조는 액면 그대로의 사실은 아니며, 단순한 허구도 아니다.   당시 왜라는 존재가 있었고,  이들이 때때로 한반도 남부에 출몰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의 왜는 백제나 신라를 정복할 만한 힘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비를 세운 고구려인들은, 광개토왕이 백제를 정복하고 신라, 가야지역에 군대를 보낸 조치를 정당화하려고 왜의 존재를 과장함으로써 마치 이들이 백제나 신라를 '정복'한 것처럼 비문에 새겨놓았던 것이다.  어쩌면 왜를 고구려가 중심이 된 질서밖에 있는 존재로 간주하여 신속시켜야 할 대상에서 아예 제외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던 표현인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능비의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손 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듯이, 글자 몇 자가 바뀌었다고 비문이 전하는 역사상 전체가 뒤바뀌는 것은 아니다.  제국주의자들의 음모가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지만, 진실은 결코 묻혀질 수 없다.   광개토왕릉비에는 아직도 많은 진실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것을 제대로 찾는 것은 우리의 몫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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