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교실

서예에 대한 올바른 안목과 가치확립

 

서예에 대한 올바른 안목과 가치확립

1. 머리말

  필자는 평소 서예의 본성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문점을 가져왔으며, 이의 이해를 위해 노력 하였다. 앞으로 전개하고자 하는 내용은 서예의 실기와 관련된 이론보다는 서예를 어떻게 이해하고 감상하며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전개하기로 한다. 이것은 서예에 대한 올바른 안목과 가치확립을 도모하여 일반 대중화하며, 나아가 공모전은 물론 작품전을 통한 작가 발굴 그리고 서단의 객관성 확립에도 도움되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선 저자가 서예를 새롭게 전공하게된 것은 다음 사항과 같은 의문들을 풀기 위한 것이 하 나의 원인으로 되었다. 즉


(1) "서예"라고 하면 일반인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조금이라도 고풍스런 사람들은 솜씨야 어떻게 되었던 여가가 있으면 서예를 하겠다는 생각 을 하는 사람이 많다. 이들은 서예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며, 또 일반인들은 학교, 호텔, 식당, 거실에 하나 정도는 걸려 있을 서예작품(액자)을 무슨 생각으로 보고 있을까?


(2) 서예는 온 국민이 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인구는 왜 줄어만 가는가?

  최근 조기 영어교육이 유행하고부터 붓을 잡는 어린이가 줄었으며, 여기에다 컴퓨터 통신과 같은 컴퓨터 이용 기술의 필요성이 부각되면서 더욱 줄게 되었다. 이 뿐만 아니라 규격화에 살고 있는 서구 사람들도 거리의 간판은 여러 가지 예술미가 있는 글씨체를 사용하는데, 자 연미를 문화 바탕으로 하는 우리의 거리 간판 글씨는 거의 전부 한 곳에서 제작한 듯 거의 같은 모양의 글씨체이다. 이렇게 어린 학생부터 사회 분위기에 이르기까지 서예는 점점 우 리 생활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3) 글씨의 품위는 과연 어떤 것인가?

  액자 글씨를 보고 우리는 쉽게 "잘 썼다, 못 썼다, 힘이 있다, 없다"등으로 막연히 말하지 만 실제 확실한 주관을 가지고 말하거나 객관성을 가지고 판단하고 있는 것일까? 오래보면 싫증이 나는 글씨와 매력이 있어 보이는 글씨가 있으며, 마음이 침착해지는 글씨, 힘이 솟아오르는 글씨가 있는가? 만약 객관성에 바탕을 둔 이러한 느낌이 있다면 글씨에 관한 어떤 미가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은 어떤 것일까?


(4) 서예 작품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안진경, 안중근, 백범 선생 등의 글씨가 이름 높으며, 이완용의 글씨는 소장조차 하지 않는 다는 것은 서예 작품의 예술성 보다는 교육적 역할을 중시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더 고명한 사람에게 교육을 받고 싶기 때문이고, 서예는 그림과 달라 무슨 내용이든 교육적이며, 따라서 우리가 유명인의 강의를 듣거나 설교당하려 하지, 아무리 교육적인 말이 라도 무명인의 교육은 외면하기 때문일까? 어떤 홍안의 소년이 "少年易老 學難成…"하며 글을 잘 쓴 후, 몇 歲作이라고 낙관까지 했을 때 과연 좋은 작품이 되겠는가? 왕희지가 왕족이 아니고, 안진경이 안록산의 난을 당하지 않았더라도 오늘날과 같이 유명하게 되었을까?



(5) 글씨는 지나, 지고의 예술이라는 것이 과연 맞는 말일까?

  많은 예술 중에 서예만이 이러한 것이라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6) 書如其人이란 서예에 얼마만큼 적합한 말인가?

  단지 글씨 그것으로 그 사람의 학문과 인격을 말하는 것이라면, 국내 최상급으로 글씨를 잘쓰는 그 인품도 국내 최상급일까? 한문만 학문이 아니라, 국문, 영문 등 인문과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 자연과학등도 학문임에 이들 학문에 깊은 사람에게 글을 쓰라면 과연 그 인품에 걸맞는 글씨를 쓸 수 있으며, 그 글씨로 그 사람을 평할 수 있을 것인가? 다양한 학문을 접하는 오늘날에도 인격의 고매함을 어떤 특정 분야의 학식이나 기능적 예술의 표현성에 두어야 할 것인가?


(7) 서예의 현대적 발전은 과연 없는 것일까?

  역사에 남아 있는 다른 예술분야의 작품은 오늘날 그들의 천재적 작품성은 인정해도 배우려는 사람은 없는데, 서예는 왜 안진경, 왕희지만 배우려 하는가? 왜 서예술에서는 다른 예술 분야와 같이 하나의 유명한 역사적 인물과 그 작품성의 평가로 끝나지 않는가? 음악이 현대적 감각에 어울려 발전하듯이 서예도 회화성이 강한 "현대서예"와는 다르면서 현대적 취향에 맞는 그 어떤 방법의 모색은 없는가? 어찌하여 고법만을 법으로 여기는 것이며, 서예가들의 사대주의 사상은 왜 그렇게도 강한가? 중국의 뛰어난 명품으로 오늘까지 이름있는 작품의 평은 오늘날의 미의식과 차이나는 것은 없을까? 많은 사고방식이 옛날과는 너무나 달라졌고, 또 문화도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 서평은 어찌하여 똑같아야만 하는 것일까? 옛날에는 출세의 필수과정이 서예였고, 또 서예에 능한 사람은 이렇게 천추에 빛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서예는 공공기관이나 교육기관, 지식인 등은 돌보지 않게 되었으며 일반대중에 의해 명맥을 유지해 오게 되었다. 이렇게 서예가 대중에 의해 유지되어 오고 있지만 각종 서예전에는 일반인들보다 대부분 출품자와 그 친구, 친지, 지인들이다. 이런 현상을 볼 때 서예가 하나의 소규모 친목모임으로 변해가는 분위기가 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의 서예교육은 어떡해야 할 것인가? 서예도 하나의 예술이라면 비록 그 특수미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서예작품에 대한 일반인들과 작가 사이에는 유사한 미감각 공감대가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서예계도 문학과 같이 대학에는 연구자, 민간에는 작가가 활동하는 2차원의 형태로 발전할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8) 서예의 대상은 어떤 것인가?

  서예는 말을 쓴 것에 지나지 않으며, 서양의 문자가 미술이 아니므로 동양의 문자도 미술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동양문자에만 서예가 성립한다는 것은 왜 그러한가? 동양의 문자는 대소, 배열 형태를 달리할 수 있으므로 미술로 취급할 수 있다면, 사실 서양의 문자도 마찬가지다. 단지 한자가 가지는 신비성은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우리 한글은 물론 일본의 가나문자도 서예로서의 위치를 확보하였다. 사실 이러한 점에서는 다양한 서체를 가지고 있는 영어도 서예로의 발전방향은 충분히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서예의 발전은 문자의 미적 연구가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잇으며, 이를 위해 선의 미, 구성의 미, 작가의 존엄성, 인간의 자연성 등이 가미된 종합적 서예미, 서예에만 있을 수 있는 서예 특수미가 성립하게 되는 것일까?


(9) 서예의 객관적 미와 주관적 미의 바탕은 어디에 있는가?

  초보자들이 가질 수 있는 이상과 같은 여러 문제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앞으로 수회에 걸쳐 서예의 예술성, 서예의 특징, 서예미의 존재, 서예미의 감상 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비록 서예에 대한 하나의 문제점이긴 하나 이러한 서예에 관한 일반적 이해와 해석, 그리고 미의식의 인식과 표현의 저변에는 서예교육을 바탕으로 한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이것 없이는 서예에 관한 올바른 재미를 맛볼 수 없을 것이며, 서예의 일반 대중화도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일반인들의 서예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감상력을 바탕으로 한 공모전을 통해서도 작가가 발굴될 것이며, 이것은 공모전에만 의지하는 현 서단을 보완하는 길도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서예는 현재로서는 동양 사람만이 향유하는 예술이다. 우리가 서양의 추상화를 보고 호기심은 갖되 이해하지 못하듯 서양 사람들 역시 서예에 호기심은 있되 우리가 느끼는 서예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서예를 알뜰히 발전시켜 일반대중의 것으로 만들어 나갈 때, 서양인들도 우리가 가지는 서예의 추상미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며 나아가 서양정신이 가미된 새로운 형태의 서예가 그들에 의해 생경나게 될지도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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