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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선삼매의 경지에 이른 추사 김정희

 

다선삼매의 경지에 이른 추사 김정희   

   

우리나라 차의 역사를 뒤돌아 볼 때...언제나 빠짐없이 나오시는 초의선사가 있다. 초의선사의 일대기를 보면 추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렇듯 두 분은 우리나라 차 문화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분들이다. 초의 선사와 정약용과의 만남 그리고 이어지는 추사 김정희와의 만남은 그렇게 그 시대의 대표되는 정신적 지주들의 만남이자 선지식들의 향기로운 인연이 아닐 수 없다.

* 청나라 옹방강이 ‘해동 제일의 문장’이라 칭송했던 대실학자 추사 김정희는 독특한 필체‘추사체’를 이루어내는 등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난 예인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호 ‘경향다로실’이 말해주듯 그의 차 생활은 유배지 제주에서도 그 사랑이 식지 않았을 만큼 진정한 다인이었다.

  한 채의 서옥과 송백의 그 외롭고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歲寒圖’는 유배지 제주도 대정현에서 지낼 때 자신을 잊지 않고 대해 주던 역관 우선 이상적에게 소박한 필치로 그려 주었던 문인화의 대표적 작품으로, 국보 185호로 지정되어 있다.

不作蘭과 같은 추사체의 필법에서 풍기는 書卷氣가 어린 대담한 필치의 그림이다. 뿐만 아니라 청나라에서 배워 온 서체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닌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이루어 내었으니, 추사체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시문에도 뛰어나 청의 대실학자 옹방강이 ‘해동 제일의 문장’이라고 칭찬할 정도였으며 <東茶頌>의 저자 초의선사와 다산과 맺은 인연 그리고 동방의 유마거사라 불리우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詩書畵禪茶는 물론 학문에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 추사는 모친이 그를 잉태한지 24개월이나 되어 태어났으나 염려했던 바와는 달리 정상으로 태어나 이름을 정희(正喜)라 불렀다 한다. 아버지 김노경은 그를 매우 사랑하여 그가 24세 되던 해 청의 동지사로 가면서 아들을 데리고 갔다. 그 곳에서 당대의 석학들인 옹방강, 완원 등과 교분을 맺었는데, 특히 옹방강의 아들 옹수곤과는 동갑나기라 형제의 의까지 맺고 네 번의 방문을 통해서 청의 금석학, 시문, 전각을 깊이 연구하고 돌아왔다.

  다산, 권돈인, 자하와 같은 사대부는 물론 천수경, 장혼 같은 중인들과의 시문을 통한 교유는 각별한 바가 있었다. 천수경의 초가인 송석원시사의 뒷바위 벽에 松石園이라 쓰고 각인까지 한 바 있는데, 근년까지 옥인동 어느 집 정원에 전해지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1786년 같은 해에 태어난 초의와는 절친한 관계였다. 청의 상류사회에서 배운 차로 해서 인연은 각별한 바가 있다. 언젠가 초의가 만든 차를 맛본 추사는 차를 빨리 보내어 달라고 채근하기도 하는 글을 짓기도 하고 차를 중간에 가로채기까지 할 정도였다. 차에 대한 애착이 유난하여 그가 차에 관한 글을 많이 짓고 수백에 달하는 호를 지었다 하니, 그의 차에 관한 애착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하게 해 준다.

  예를 들면 勝雪,,苦茶老人, 茶門, 一爐香室 등의 호가 있고, 초의로부터 차를 선물받고 써 주었다는 '茗禪'을 비롯해 ‘竹爐之室’‘茶爐經卷室’'茶山草堂’ 등이 있다.

  제주 유배 길에 대흥사에 들러 하룻밤을 함께 지내며 차를 마신 사실이며 그를 못잊어 제주도로 건너가서 반년을 같이 지낸 일이며 40년을 줄곧 우정으로 인연의 줄을 매고 살았던 두 사람의 교분은 도대체 어디에 연유한 것일까. 유명을 달리한 후에도 두 사람의 관계는 계속 이어졌다. 10년을 앞서 추사가 먼저 세상을 뜨자 제문을 지어 그의 넋을 위로하며 말하기를 ‘저세상에 가 서 다시 만나 새로이 인연을 맺자’

고 하였으니 독독한 우정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추사는 제주에서의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책을 읽고 글을 가르치며 서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그럴 때 연경에서 여러 질의 책을 구해 멀고 먼 대정까지 가져다 준 고마움으로 藕船是賞이라 자서하여 주기도 한다. 초의의 소개로 서울 장동까지 찾아간 소치는 추사에게 사사하는 행운을 얻게 되었는데 훗날 추사가 제주로 유배의 길에 오르자 적소까지 따라갔고 그를 소개한 초의까지 만나게 되어 함께 우의를 나누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던 것이다. 초의에게 차 보내주기를 빌던 유배지 제주에는 오늘날에는 넓은 차밭이 푸르고 명차를 생산하는 굴지의 차 산지가 되었으니, 우연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추사가 있어 제주의 드넓은 이 차밭을 본다면 무엇이라고 말했을까.

* 추사는 언제나 그랬듯이 과천에 와서도 초의스님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며, 보고 싶으니 빨리 와주십사고 응석을 부리듯이 편지를 띄웠다. 그 중 가장 애틋한 사연이 들어있는 편지는 다음 편지(태평양박물관 소장)이다.

“북청으로부터 돌아오니 스님과 거리가 가까워진 듯한데 그래도 천리나 되는 먼 길입니다. … 스님은 산속에서 초목과 벗하며 살아온 분이니 세속에 찌든 이 몸보다는 건강이 좋을 것입니다. 상좌를 데리고 지팡이를 날리며 한 번 찾아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

  차를 마침 받게 되어 눈을 끓여 차맛을 품평해 보는데 스님과 함께 하지 못함이 더욱 한스러울 뿐입니다. … 요즘 송나라 때 만든 小龍團이라는 먹을 한 개 얻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특이한 보물입니다. 이렇게 볼 만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래도 오지 않으시겠습니까? 한번 도모해 보십시오. 너무 추워 길게 쓰지 못합니다. 소동파의 생일 날(12월 19일) 과천 사람이.”그러나 초의는 좀처럼 과지초당으로 추사를 보러 오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토록 갈구하는 차도 제때에 보내주지 않았다. 그럴 때면 그는 더욱 초의를 다그치듯 서신을 보내곤 했다.

  초의에게 차 보내어 주기를 청하였으나 제때에 보내주지를 않자 최후통첩을 보내 지체 없이 보내지 않을 것 같으면 욕질을 하고 방망이질을 하겠다고 을러메자 과연 편지와 함께 차를 보내 왔던 것이다. 고대하던 차가 도착하자 과천의 샘물로 차를 달여 시음하니 과연 천하에 제일가는 차라고 초의가 만든 차에 대한 칭찬을 그치지 않았다. 이에 곡우차를 보내 달라는 편지를 또 보내기도 하였으니 그가 얼마나 차를 좋아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 선다일여의 경지에 이른 다인

  그의 호 ‘경향다로실’은 그가 얼마나 차를 사랑했는가를 말해주기도 한다. 書卷氣와 文字香에 젖어 있던 그의 모습이 한가롭고 그 기품 또한 절로 높기만 하다.일찍이 초의가 산천도인 김명희에게 ‘예부터 성현들은 모두 차를 좋아했으니 차란 군자와 같아서 생각함에 사특함이 없다 (古來賢聖俱愛茶 茶如君子性無邪)’고 하였는데 이번에 추사는 ‘조용한 가운데 혼자 앉아 차를 마심에 그 향기는 처음과 같고 물은 저절로 흐르고 꽃은 저만치 홀로 피니 (靜坐處茶半香草 妙用時水流花開)’라 하였으니, 이 경지가 바로 茶禪三昧가 아니던가. 추사는 또 많은 다시를 남기기도 했는데 “남산의 신선은 무얼 먹고 사는지 / 밤마다 산중에서 백석차를 끓이네 / 세상 사람들은 백석이라고 부르니 / 한평생 살아도 돈이 필요 없다네”라고 읊어 백석의 소탈한 생활을 부러워하는 추사의 심정을 잘 드러낸 작품이라 하겠다.


* 정신을 강조한 추사체의 독특한 필체

  추사는 글씨와 그림에 뛰어난 예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경학에도 조예가 깊었고, 때로는 선에도 침잠하는 불자의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서학에도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박학다식한 실학의 대가이기도 하였으니, 이는 당대 실학의 대가들과의 교유의 영향이라 생각된다. 특히 그는 완원의 실사구시의 학풍에 매료되었었다.

다산 시작(詩作)의 중심 사상이 ‘우리 것’에 대한 강한 집념에 있었듯이 추사 또한 저들의 단순한 모방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서체를 개발하였으니, 서법에서도 운필에 앞서 정신을 강조하였고 그 다음에 기(技)를 둔 점이 이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의 이러한 예술혼의 표현은 서화론에 잘 반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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