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감

한국인의 애송시조(조선 전기4)

54. 이화우 흩뿌릴 제-계랑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천리(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주) 이화우; 비처럼 많이 떨어지는 배꽃. 2)추풍낙엽;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잎. 3)하노매; 하는구나.

*학자인 유희경과 사귀어 정이 깊었으나 그가 상경한 후 소식이 없으므로, 이 노래를 짓고 수절했다고 함.


*계랑(桂娘); 1513(중종 8)-1550(명종 5).조선의 여류 시인. 부안의 명기. 성은 이씨. 본명은 향금(香今), 호는 매창(梅窓). 계랑(桂娘), 계생(桂生). 가사, 한시를 비롯하여 가무 현금(玄琴)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多才多能)한 여류예술인이었음. 작품으로는 가사와 한시 70여수 외에 금석문(金石文)까지 전해지고 있음.


55. 미나리 한 포기를-유희춘


미나리 한 포기를 캐어서 씻으이다.

년 데 아니라 우리임께 받자오이다.

맛이야 긴치 아니커니와 다시 씹어 보소서.


(주) 1)씻으이다; 씻습니다. 2)년 데; 다른 데. 3)받자오이다; 바치옵니다.

4)긴치 아니커니와; 좋지 아니하거니와.


*미나리를 선조 임금께 바치며 연군의 정을 노래한 시조임.


*유희춘(柳希春); 1513(중종 8)-1577(선조 10). 조선의 문신 호는 미암(眉巖), 본관은 선산(善山). 부인은 여류 문인인 송덕봉(宋德峯). 김안국의 문인. 별시 문과에 급제, 벼슬은 이조참판에 이르러 사직했음. 경사(經史)에 밝고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음. 저서 '미암일기'는 귀중한 사료임.


56. 들은 말 즉시 잊고-송 인


들은 말 즉시(卽時) 잊고 본 일도 못 본 듯이

내 인사(人事) 이러하매 남의 시비(是非) 모를로다.

다만지 손이 성하니 잔(盞) 잡기만 하리라.


*송 인(宋 寅); 1516(중종 11)-1584(선조 17). 조선의 학자. 명필. 본관은 여산(礪山). 중종의 사위로 벼슬이 도총관(정2품)에 이르렀음. 시문에 능하였고, 이황, 조식, 이이, 성혼 등 석학들과 교유하였으며, 글씨에도 능하여 산릉(山陵)의 지(誌)와 궁전의 액(額)으로부터 사대부의 비갈(碑碣)에 이르기까지 많은 글을 짓고 썼음.


57. 태산이 높다하되-양사언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양사언(楊士彦);1517(중종 12)-1584(선조 17). 조선의 문신. 서예가, 호는 蓬萊, 본관은 청주. 식년 문과에 급제, 강릉부사, 함흥부윤 등을 역임했음. 글씨를 잘 써서 조선 전기의 4대 서야가로 불렸음.


58.달 밝은 오례성에-박계현


달 밝은 오례성(五禮城)에 혀 남은 벗이 앉아

고향(故鄕) 감루(感淚)를 뉘 아니 지리마는

아마도 위국단침(爲國丹 )은 나뿐인가 하노라.


(주) 1)혀 남은; 몇몇의. 2)고향 감루; 고향이 그리워 느꺼운 눈물. 3)지리마는; 흘릴까마는 4) 위국 단침; 나라를 위한 충성된 마음.


*박계현(朴啓賢); 1524(중종 19)-1580(선조 13). 조선의 문신. 본관은 밀양. 진사를 거쳐 식년 문과에 급제. 벼슬이 병조판서. 지중추부사(정2품)에 이르렀음.


59.호화코 부귀키야-기대승


호화(豪華)코 부귀(富貴)키야 신릉군(信陵君)만 할까마는

백년(百年)이 못하여서 무덤 위에 밭을 가니

하물며 여남은 장부(丈夫)야 일러 무삼하리요.


(주) 1)신릉군; 전국시대 위나라 소왕(昭王)의 아들로 식객 3천명을 거느렸다고 함.

2)여남은; 다른.


*기대승(奇大升); 1527(중종 22)-1572(선조 5). 조선의 성리학자. 호는 고봉, 본관은 행주. 식년 문과에 급제, 벼슬이 대사간(정3품)에 이르렀음.


60.보거든 슬뮈거나-고경명


보거든 슬뮈거나 못 보거든 잊히거나

제 나지 말거나내 저를 모르거나

차라리 내 먼저 츼여서 그리게 하리라.


(주) 1)슬뮈거나; 싫고 밉거나. 2)츼여서; 츠이어서. 없어져서.


*고경명(高敬命); 1533(중종 28)-1592(선조 25). 조선의 문인. 의병장. 호는 제봉(霽峰), 본관은 장흥. 식년문과에 장원, 벼슬은 동래부사에 이르렀음.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이끌고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했음.


61. 높으나 높은 남게-이양원


높으나 높은 남게 날 권하여 올려두고

이 보오 벗님네야, 흔드지나 마르되야.

내려져 죽기는 섧지 아녀도 임 못 볼까 하노라.


(주) 1)남게; 나무에 2)마르되야; 말았으면 좋겠다.


*이양원(李陽元); 1533(중종 28)-1592(선조 25).조선의 문신. 호는 남파(南坡), 본관은 전주. 알성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임진왜란 때 유도대장으로 타군과 합세하여 크게 승리한 후 영의정에 올랐음.


62. 추산이 석양을 띄고-유자신


추산(秋山)이 석양을 띄고 강심(江心)에 잠겼는데

일간죽(一竿竹) 둘러메고 소정(小艇)에 앉았으니

천공(天公)이 한가(閑暇)히 여겨 달을 조차 보내도다.


(주) 1)일간죽; 하나의 낚싯대. 2)소정; 조그만 배. 3)천공; 하느님. 4)달을 조차; 달까지


*.유자신(柳自信);1533(중종 28)-1612(광해군 4). 광해군의 장인. 진사로 벼슬이 한성부 판윤에 이르렀으나, 뒤에 인조반정으로 삭직되었음.


63. 말 없는 청산이요-성 혼


말없는 청산(靑山)이요 태(態) 없는 유수(流水)로다.

값없는 청풍(淸風)이요 임자 없는 명월(明月)이라.

이 중에 병(病) 없는 몸이 분별(分別) 없이 늙으리라.


(주) 1)태 없는; 모양이 없는 2)분별 없이; 걱정 없이


*성 혼(成 渾);1535(중종 30)-1598(선조 31). 조선의 학자. 호는 우계(牛溪), 본관은 창년(昌寧). 17세 때 감시 초시에 합격했으나 신병으로 과거를 단념, 경학연구에 정진했음. 임진왜란 때 우참찬에 올라 좌참찬(정2품)에 이르러 관직에서 물러났음. 일찍부터 율곡 이이와 교분이 두터웠으나 학설에 있어서는 퇴계 이황의 학설을 지지, 이이와 6년에 걸친 사단칠정

(四端七情)에 대한 논쟁을 벌여 유학 계의 큰 화재가 되었음.


64. 고산 구곡담을-이 이


고산(高山) 구곡담(九曲潭)을 사람이 모르더니

주모 복거(誅茅卜居)하니 벗님네 다 오신다.

어즈버, 무이(武夷)를 상상(想像)하고 학주자(學朱子)를 하리라.


(주) 1)고산구곡담; 고산은 황해도 해주에 있는 산. 구곡담은 이이가 42세에 때 고산에 들어가, 주자의 무이구곡계(武夷九曲溪)를 본받아 붙인 이름. '곡'은 굽이. 2)주모복거; 띠를 베어 내고 집을 지어 살 곳을 정함. 3)무이; 중국 복건성에 있는 산. 산중에 구곡계가 있음. 4) 학주자; 주자를 배움.


*이 시조는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의 서곡임.


65. 일곡은 어드매오-이 이


일곡(一曲)은 어드매오, 관암(冠巖)에 해 비친다.

평무(平蕪)에 내 걷으니 원근(遠近)이 그림이로다.

송간(松間)에 녹준(綠樽)을 놓고 벗 오는 양 보노라.


(주) 일곡; 첫째 굽이. 2)어드메오; 어느 곳인가? 3)관암; 갓처럼 솟은 바위. 4)평무; 잡초 무성한 들판. 5)내 걷으니; 안개 걷히니. 6)송간; 소나무 숲 사이. 7)녹준; 푸른 술통. 맛좋은 술을 뜻함. 8)벗 오는 양; 벗이 오는 모습.

*이 시조는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의 제 1곡임.


66. 이곡은 어드매오-이이


이곡(二曲)은 어드매오, 화암(花岩)에 춘만(春滿)커다.

벽파(碧波)에 꽃을 피워 야외로 보내노라.

사람이 승지(勝地)를 모르니 알게 한들 어떠리.


(주)화암; 꽃과 바위. 꽃이 피어있는 바위. 2)춘만커다; 봄이 저물도다. 3)승지; 명승지. 경치 좋은 곳.


*이 시조는 '고산구곡가'의 제2곡임.


67. 구곡은 어디매오-이 이


구곡(九曲)은 어디매오, 문산(文山)에 세모(歲暮)커다.

기암괴석이 눈 속에 묻혔세라.

유인(遊人)은 오지 아니하고 볼 것 없다 하더라.


(주) 1)문산; 기암괴석이 뒤섞여 아름다운 산. 2)세모커다; 세모로다. 한 해가 저무는 때, 즉 겨울이로다. 3)유인; 유람하는 사람.

*이 시조는 '고산구곡가'의 제9곡임.


*이 이(李 珥); 1536(중종 31)-1584(선조 17). 조선의 학자. 문신. 호는 율곡(栗谷), 본관은 덕수(德水). 13세로 진사 초시에 합격, 그 후 생원시, 식년 문과에 장원, 이조 판서, 판돈녕부사(종1품)등을 지냈음. 조선 유학 계에 이황과 쌍벽을 이룬 학자로, 당쟁의 조정, 대동법의 실시에 노력하는 등 많은 활약을 했음.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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