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감

獨坐 - 徐居正

獨坐 - 徐居正   


獨坐無來客 찾는 손님 없어 홀로 앉아 있자니        

空庭雨氣昏 빈 뜰엔 빗 기운이 어둑어둑 해지네 

魚搖荷葉動 물고기가 흔드니 연잎이 움직이고 

鵲踏樹梢飜 까치 내려앉으니 가지 끝이 너풀거리네 

琴潤絃猶響 거문고 눅눅해도 소리 아직 울리고 

爐寒火尙存 화로는 싸늘해도 불씨 아직 남아 있네 

泥途妨出入 진흙 길이 출입을 방해하니 

終日可關門 종일토록 문을 걸어 둘 수밖에.      

 

* 송은 전종복 선생께 행서 체본으로 써 드린 글이다. 검색해 보고, 잘못된 곳 몇 곳을 고쳐서 이곳에 올린다. 


  《四佳集 木版本 補遺》卷一에 수록되어 있는 시이다. 徐居正은 조선전기의 관인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여섯 살 때부터 文章을 지어 世人들로부터 神童이라는 칭찬을 들으며 자랐다. 世祖2년에 25세의 나이로 文科에 급제한 이후, 관료문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정치가로서, 외교가로서 다방면에 걸쳐 비범한 능력을 발휘하며 혁혁한 업적을 쌓았다. 이러한 그를 조선후기의 문인이었던 申緯는 《警修堂全藁》에서 當代 第一의 시인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初葉의 大家에 이를 것 같은 면, 당연히 徐居正을 第一의 위치에 올려놓을 만하고, 金宗直과 成俔을 그 다음에 둘 만하다. 이들을 唐에 비유하자면, 곧 徐居正과 이 인물들은 初唐의 四傑에 비유할 수 있다. 그리고 中宗・宣祖시에 유명했던 諸家들은 盛唐의 開元・天   寶 年間의 詩人들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徐巨正은 出生家門에서부터 시작하여 성장과정 그리고 관료생활에 있어서도, 별다른 迂餘曲折을 겪지 않은 채, 오직 자신의 능력 발휘만으로 생을 一貫했던 인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시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도 다소 부정적인 시각이 있다. 洪萬宗은 《小華詩評》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徐居正은 오랫동안 大提學의 자리에 있어서 당시에 名聲이 가장 높았으나 評論家들에게 重視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 才能이 華贍한 것에 그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李晬光 또한 《芝峯類說》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成俔이 이르길 “徐居正의 시는 오로지 韓・陸을 배운 것이다”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韓・陸이 누구인지 몰라, 혹시 韓은 昌黎이고, 陸은 龜夢이 아닌가 했다. 그러나 뒷날 徐居正이 손으로 직접 陸集을 베껴 쓰고 스스로 序文을 붙여서 지극히 方翁을 칭찬해 놓고, 또한 이르길 “放翁의 시는 韓子蒼으로부터 나온 것이다”라고 해놓은 것을 보게 되었다. 이에 비로소 韓이 곧 子蒼임을 알았다. 成俔은 徐居正과 동시대 사람이니, 그의 이 같은 말이 반드시 虛荒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徐居正이 崇尙한 바가 이러할 진데, 그 재주가 華贍함에 그쳐 있었다는 말은 마땅한 지적일 것이다.』   


  물론 이 같은 말이 전부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지라도, 작자의 生涯와 그 文學이 또한 不可分의 관계에 있는 것이고 보면,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朴成淳이 그의 論文에서 分類한 바, 徐居正 詩의 내용을 보면, 敎化性이 느껴지는 시, 田園的인 시, 觀照・省察의 시, 哀傷的인 시, 愛子의 시, 여성적 表現美가 느껴지는 시 등으로 요약이 된다. 이러한 分類에 맞추어 본다면 <獨坐>는 작자가 사물을 觀照하며 조용히 자신에 대한 省察에 잠겨있는 있는 시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의미의 폭을 좀더 확대하여 분석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首聯에서는 閑寂하고 平穩한 가운데, 홀로 쓸쓸히 앉아있는 작자의 모습이 표현되었다. ‘獨坐’, ‘無來客’, ‘公庭’등은 모두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상태에서, 외로움과 허전함을 느끼고 있는 작자의 마음을 나타내는 詩語들이다. ‘雨氣昏’은 이러한 작자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頷聯에서는 寂寞한 가운데 감지되는 微動의 움직임들이 표현되었다. ‘荷葉動’이나 ‘樹梢飜’은 각각 나뭇가지와 연잎의 末尾에서 포착된 순간적인 흔들림으로, 空寂한 분위기를 微眇한 視覺的 표현으로 나타낸 것이다. 또한 여기서 작자는 ‘작은 움직임’과 그것을 유발시키는 ‘연못 속의 물고기’와 ‘내려앉는 까치’의 動作에 일종의 因果關係를 부여함으로써, 사물의 원리를 窮理적 차원에서 조용히 觀照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頸聯에서는 어김없이 분위기가 전환된다. 앞부분의 내용으로 보아,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거문고도 퉁겨 보고, 화로도 만져보고 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눅눅해진 거문고 여전히 소리 울리고 있고, 싸늘해진 화로 아직도 불씨는 남아 있네.’를 단순히 심심해서 한 행동으로 보기에는 어딘가 좀 개운치 않은 느낌이 든다. 최소한 ‘세상일이란 겉으로 드러난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라는 뜻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듯하다. 여기서 筆者는 다소 무리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다음과 같은 내용을 통하여 이 부분을 이해하고자 한다. 조선 중기의 문신 金時讓은 《涪溪記聞》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徐居正은 大提學을 26년 동안이나 맡고 있었으면서 물러나지 않았다. 그가 하루는 조카에게 묻기를 “밖에서 나를 평가하는 輿論이 어떠하더냐?”라고 하였다. 그러자 조카가 대답하기를 “모두들 大提學에 너무 오래 있다고 싫어할 있을 따름입니다.”라고 하였다. 徐居正이 시무룩해져서 말하길 “내가 물러나면 곧 金宗直이 반드시 그 자리를 맡을 것이다.』

  徐居正이 당시에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으로부터 느꼈을 부담감을 짐작케 하는 내용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부분은 곧 아직 물러나고 싶지 않은 자신의 심정을 隱喩的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首聯, 頷聯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그가 처한 현실적 상황을 반영하여 분석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경우 의미적 구체성이 좀더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頸聯의 내용을 보기로 하자. 


  이 부분에서는 ‘진흙탕길’이 出入을 방해 하니, 드나들 일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온종일 문을 닫아둘 수 있다고 하였다. ‘泥途’는 ‘出入’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두 가지로 풀이 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尾聯 전체의 해석도 두 가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出入의 주체가 작자 자신이라고 보면 ‘泥途’는 곧, 자신이 꺼리는 金宗直이 될 수 있다. 즉, ‘내가 물러나고 싶어도 金宗直 때문에 그냥 눌러 있을 수밖에 없다.’라는 뜻이 된다. 반대로 주체를 자기를 찾아오는 손님이라고 보면 ‘泥途’는 ‘주변에서 자기를 곱지 않게 보는 것’으로 보아, ‘모두들 나를 싫어하니, 누가 찾아오겠는가?, 어차피 문을 닫아 두어도 상관이 없다.’로 볼 수 있다.


  물론 이 시가 정확히 언제 지어졌는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해석을 내리는 것이 큰 실수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金時讓이 말한 내용을 적용시켜 보지 않더라도, 이 시에 나타난 작자의 내면을 단순히 겉으로 나타난 것만을 가지고 이해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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