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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문혜개(無門慧開) 시 - 靑天白日一聲雷: 쨍쨍한 해 마른하늘을 깨는 한줄기 우레 소리

<신동아 새연재>한형조의 고사성어 산책①


大 道 無 門


문은 없다. 언어와 논리를 통해서는 결코 대도(大道)에 이를 수 없다.

가르침에 의지해 진리에 이르려 하는 것은 흡사 「장대를 들고 달을 따려는 것」과 같고 「구두 위에서 무좀을 긁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강좌를 시작하며


고전과 한문에 관한 한 아무리 친절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기야 수준을 운위할 수 없을 정도로 고전과 한문은 아득히 멀리 있다. 그만큼 근대가 몰고 온 충격과 단절은 컸다. 이 글이 옛적의 희미한 기억을 되살리고 지워진 흔적과 부서진 파편을 복원하는 한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먼저 전공이 철학이니만큼 동양의 정신적 기저, 우리의 삶을 지배해왔던 의식·무의식적 가치와 관행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이 현대철학이 다룰 인간 정신과 행위의 모든 문제를 제기하고 검토했듯이, 춘추전국의 제자백가가 다루지 않은 동양학의 문제는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가운데 도가와 유가가 현실의 주류로 등장하고 후한대에 들어온 불교가 가세했다. 도교와 불교는 수·당의 시기를 풍미한 후 송대 유학의 부흥에 자리를 내줬다. 이 새로운 유학이 원(元)으로부터 전래돼 조선조의 삶과 정신을 규율했다. 이후 중국의 사상계는 양명학과 청대 실학으로, 조선조는 주자학의 독자적 발전을 거쳐 실학과 근세로 이어졌다.


이런 복합적 발전과 착종의 전과정을 다룰 수는 없다. 그래서 테마를 설정했다. 사진 한 컷이 역사적 사건의 전모를 몇 권의 책보다 더 생생하게 전달할 때가 있다. 네이팜탄에 놀라 뛰어가는 벌거벗은 소녀가 월남전의 비극과 참상을 어떤 웅변보다 생생하게 전해주듯, 때로는 작은 에피소드 하나가 한 사람의 일생을 집약시켜 보여주기도 한다.


이 연재는 그같은 상징과 소묘의 기법을 쓰기로 했다. 압축된 파일을 하나씩 풀어가며 동양의 고전과 전통의 세계로 안내하되 때로는 고사성어, 때로는 우화, 때로는 사건의 일화를 들어 설명할 것이다. 여의치 않으면 특정한 저작이나 논설, 밋밋한 이야기를 꺼내 이모 저모 횡설수설(橫說竪說)할 참이다. 엄밀한 논리와 체계적 정합성, 그리고 딱딱한 문체가 모처럼의 호기심을 흩어버리지 않도록 유의하겠다.



첫번째 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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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과 우리는 늘 불편하다. 문민 정부 취임 후에도 역사왜곡과 망언이 심심치 않아 국민적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1993년 11월 호소카와 총리가 해명을 겸해 한국을 방문했다. 이틀간의 방한을 끝내고 떠나던 날 아침 내외신 공동기자회견에서 金泳三(김영삼)대통령은 『이성적인 견지에서 올바른 역사인식의 정립을 통해 과거문제를 극복해 나가자』고 했고, 호소카와 총리는 『우리는 함께 시대적 요청에 따라 역사적인 개혁을 지향하고 있다』면서 한국의 노력을 치하했다.


외교란 그런 것이거니 하고 신문을 덮으려다가 멈칫했다. 기자회견이 있던 아침을 취재한 기사가 크게 눈에 들어왔다.



새 정부 출범 뒤 첫번째 한일 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마친 김영삼 대통령과 호소카와 일본 총리는 공동기자회견에 앞서 이날 아침 숙소인 경주 힐튼호텔 8층 에스페로 스위트룸에서 부인들과 조찬을 함께하며 환담을 나눴다.


김대통령은 부인 손명순 여사와 함께 오전 7시14분경 먼저 들어와 있다가 호소카와 총리 내외를 맞은 뒤 미리 준비한 「대도무문」 액자를 가리키며 『한문은 여러 가지 뜻을 함축하고 있어 새길수록 그 뜻이 새롭다』고 말하고 『이 말은 정도를 걸으면 거칠 것이 없어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호소카와 총리는 『좋은 글을 직접 써 주셔서 정말로 감사하다』며 『늘 간직하며 뜻을 새기겠다』고 인사했다(한겨레신문 93년 1월8일자).



대통령이 「대도무문(大道無門)」이란 휘호를 즐겨 쓴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게 대체 무슨 뜻인지를 속시원히 일러주는 사람이 없었다. 직접 물어볼 수도 없고 답답하던 차에, 이 기사로 그동안의 궁금증이 풀렸다. 아하, 그랬구나. 대도무문은 그분의 오랜 야당생활의 울결(鬱結)과 각오가 결집된 말이었구나. 왈, 『정도(正道)를 걸으면 거칠 것이 없다』



조세형도 정태수도 대도무문


한문은 과연 『여러 가지 뜻을 함축하고 있어 읽을수록 새로운 것』임에 틀림없다. 표의문자의 다의성과 중첩성, 그로 인한 모호성이 한문의 특징이다. 그래서 의미의 변용과 확장이 비교적 자유롭다. 그렇기 때문에 한문은 시적 몽상에나 어울리지 과학적 탐구를 위해서는 적절치 않다는 지적도 있다. 한문이 외교적 수사나 완곡어법에 동원된 역사는 유구하다. 춘추전국시대의 외교관은 삼백(三百)의 시(詩)에 능통해야 했고, 지금도 한 정치가는 곤란한 지경이나 정치적 고비마다 모호한 한자어로 핵심을 비켜간다.


그렇다고 한자어에 뼈가 없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의미와 해석의 공간은 무한정 확장되지 않는다. 그 속에도 나름의 질서와 분절이 있고, 그것이 생산되는 엄밀한 콘텍스트(context;문맥)가 있다. 펀(fun;농담)이나 레토릭(rhetoric;수사)은 이 질서를 고의로 교란하고 무지로 간과하면서 생성된다. 그 또한 한문의 묘미이니 무조건 탓할 일만은 아니다. 대도무문 또한 다양한 연상과 의미의 변형으로 미끄러지기 쉬운 말이다.


몇년 전 조세형이라는 인물이 장안의 풍운아로 떠오른 적이 있었다. 여느 좀도둑과는 달리 고관대작의 금품만 털어 달아났는데 한동안 그림자도 찾지 못했다. 신문지상에는 대도무문(大盜無門)이라는, 솜씨에 대한 찬탄(?)과 경찰에 대한 비난이 뒤섞인 용어가 유행하기도 했다. 「큰 도둑에게는 못 들어갈 문이 없다」는 뜻이겠다. 야구장의 도루왕에게도 대도(大盜)라는 말을 쓰는 것을 보았다. 이 용어를 왜 무문(無門)과 연관시켜 쓰는지는 모르겠다.


무엇보다 백미는 얼마 전 전국을 충격과 절망으로 뒤흔든 한보사태일 것이다. 총수께서는 과묵한 분이시라 먹이고 건네받은 일을 죽어도 발설 않는다. 그 정도 의리는 있어야 큰일을 벌일 수 있다. 거래를 튼 사람이 엄청났을 텐데도, 그분은 자신이 입을 열면 대한민국이 내려앉을 것이라는 심모원려(深謀遠慮)에서 굳은 철통자물쇠를 열려 하지 않았다. 신문지상에는 대도무문(大盜無問)이란 말이 한숨과 좌절에 섞여 새어나왔다. 『위대한 도둑에게는 어떤 질문도 소용없다』



길을 발견한 기쁨


길(道)이란 말은 참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다. 길의 의미는 길을 잃어 보아야 안다. 작년 겨울 눈 덮인 산을 들어섰다가 길을 잃은 적이 있다. 사람이 다닌 발자국이 그토록 귀해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새벽에 출발한 걸음이 해질 무렵에서야 산판목을 찾았다. 어둠이 덮여도 이 길을 따라가면 마을이 있을 것이고, 따뜻한 구들목과 뜨거운 물, 그리고 보리밥덩이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목이 멨다. 길이 닿아 있는 곳은 축복과 행복의 공간이다. 멀리 개짖는 소리가 들릴 무렵, 나는 아득한 옛날부터 길이 이념, 진리, 열반 등의 궁극적 가치와 등치된 까닭을 깨달을 수 있었다.


길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이 있다. 대강만 보더라도 춘추전국의 제자백가가 있다. 그 이후 유가와 도가의 줄기가 주류를 이루고, 이에 불교가 가세하여 언필칭 유불선 삼교를 형성한다. 같은 학파 내에서도 길은 다시 여럿으로 갈라진다. 동양에서 탐색되고 실험된 길이 단조롭다는 것은 표면적 인상이다. 가위 향연이라고 부를 만한 수많은 갈래가 대치되고 융화 착종되어 있다. 오늘은 그 가운데 불교의 줄기에서 난 갈래길 하나를 더듬기로 한다.


불교도 궁극을 나타내기 위해 길(道)이라는 용어를 차용했다. 그것은 외래 불교가 대등한 자격으로 중국 고유의 길(道)들과 주도권을 다투게 되었음을 뜻한다. 독자성과 우월성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수식어와 분식이 늘어난다. 흡사 상품광고 같다. 저쪽이 선전하는 길은 틀렸거나 작고 보잘 것 없는 데 비해 이쪽이 내놓은 것이야말로 옳고 위대하다고 말한다. 진가(眞假) 대소(大小)의 구분이 그래서 생겼다. 대중부(大衆部)의 한 갈래가 스스로를 대승(大乘)으로 일컫고 기존 불교를 소승(小乘)으로 격하시킨 것을 대표적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대승도 한 갈래가 아니다. 팔만(八萬)의 장광설(長廣舌)로 불리듯 불교교리는 지속적인 확장과 발전으로 점철돼 있다. 중관(中觀)과 유식(唯識), 천태(天台)와 화엄(華嚴), 밀교(密敎)와 선(禪) 등 아득한 망망대해 속에는 서로 용납할 수 없는 교리, 창시자가 들으면 펄쩍 뛸 이단까지 포괄되어 있다(가령 성에 대한 태도만 해도 그렇다. 엄격한 금욕을 브라마차리야 즉 수행자다운 위의로 드높인 초기불교에서부터 성적 에너지의 비억압적 분출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밀교의 가르침까지 불교는 넓은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다).


정치한 논리와 고원한 형이상학, 그리고 심층적 정신분석이 중중무진(重重無盡) 얼기설기 얽힌 길에 질려보지 않은 사람이 드물 것이다. 어디 지금뿐이겠는가. 예전에도 그랬다. 인도불교는 시간적 순서를 따라 중국에 전해진 것이 아니었다. 중국인들은 두서없이 소개되고 번역된 불교경전과 논소를 새로이 구획하고 정리하느라 무진 애를 썼다. 이른바 교상판석(敎相判釋), 팔만 교학(敎學)의 지형짜기가 그래서 유행했다. 이 가운데 천태와 화엄의 것이 가장 유명하다. 그만큼 불교는 거대한 위용이었다.


분분한 논의와 난만한 주장에 질린 나머지 불교의 핵심을 간명하게 종합하려는 경향이 대두했다. 그 중심에 신라승 원효(元曉)가 있었다. 한 바가지의 해골물로 내장을 게워 올린 뒤 「일체가 마음이 짓는 것(一切唯心造)」임을 통찰한 원효는 부처의 팔만사천 법문을 특정한 소의경전이 아니라 「마음」 하나에 귀일시키는 새로운 교판(敎判)을 구상했다. 당대 최고의 학승으로 그는 당시에 한역된 거의 모든 경전을 비평하고 정돈하며 체계화해 나가는 기염을 토했다. 남아 있는 주석과 논설만 해도 그 규모를 짐작하기에 유감이 없다.


모든 경전은 하나인 마음의 다양한 측면을 기술한 것이므로 번다하거나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 모든 경전은 그 언어의 제한성과 규격성으로 하여 무한한 마음의 실상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다. 요컨대 마음은 팔만의 법문을 포용하면서 동시에 배제한다. 이 역설의 논리가 원효로 하여금 모든 입설을 세우고 동시에 부수며, 주면서 동시에 빼앗는 입파여탈(立破與奪)을 가능하게 했다.



「문은 없다」고 선언한 선(禪)


산사(山寺)에 들어서면 산문(山門)의 경계를 나타내는 일주문(一柱門)과 만난다. 조금 더 들어서면 사천왕(四天王)이 눈을 부라리고 있는 해탈문(解脫門)이 있다. 무심코 드나드는 그 문이 실은 천국과 지옥, 속세와 열반을 가르는 경계선이다. 해탈문을 지나 시내 위에 극락교가 걸쳐 있는 것도 그런 상징적 설정이다.


이쪽 언덕은 고통과 비참 속에 신음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리고 고개를 들면 저 너머(彼岸)에는 축복과 평화의 정토(淨土)가 빛나고 있다. 그 사이를 육중한 문이 버티고 있고 한가운데 빗장이 질려 있다. 문은 들어갈 수 있다는 허용과 들어갈 수 없다는 금지의 이중성을 갖고 있다. 문이 있다는 것은 이 사바의 고통을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면서 또한 그 세계를 함부로 넘볼 수 없다는 절망이기도 하다.


어느 쪽을 강조하는가는 길의 성격마다 다르다. 초기 불교는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절망 쪽을 상대적으로 강조했다. 석가가 성불하기 위해서는 수천 수만 겁의 생을 돌며 길을 닦아야 했다. 사방 백 리의 바위를 잠자리 옷을 입은 천사가 백 년에 한 번씩 내려온다. 그 옷깃에 스쳐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지는 기간이 한 겁이다. 그러니 부처가 된다는 것, 문을 넘는다는 것은 범부로서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일천제(一闡提, icchantica)라 하여 그 가능성마저 원천 봉쇄된 종자도 있었다. 대승으로 오면서 희망 쪽의 비중이 커진다. 모든 사람의 성불을 말하고, 또 자력으로 안되면 타력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다. 현실이 곧 법계이므로 사실상 문은 활짝 열려 있다는 극단적 주장까지 펼쳐졌다.


그런데 선은 이 모든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다.


『헛수고야, 문은 없어!』


선은 문이 다른 곳에 있다고 말하지 않고 문은 없다고 말한다. 불교 역사에서 이 선언은 거의 혁명적이다. 불타가 사성체(四聖諦)로 법(法)의 바퀴를 처음 굴린 이래 전개된 진리의 문(法門), 즉 삼장(三藏)의 권위를 일거에 부정해버린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가르침에 연연하지 않았다. 경전을 통해 진리를 찾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짓고」 「기왓장을 갈아 거울을 만드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라고 단언했다.


6세기경 갈대잎을 타고 북위의 수도 낙양에 나타난 달마로부터 선의 역사는 시작됐다. 이 서역의 이방인을 맞아 황제는 수많은 절집을 짓고 경전을 베끼며, 승려들을 외호(外護)한 자신의 공덕을 자랑했다. 달마는 황제의 면전에서 『그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無功德)』이라고 면박을 주었다. 머쓱해진 황제를 뒤로 하고 달마는 숭산의 소림사로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9년의 면벽으로 엉덩이가 물크러지던 어느 겨울, 한 젊은이가 찾아왔다. 눈 쌓인 뜨락에서 밤을 지샌 그를 향해 달마가 물었다.


『왜 왔는가』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디 이리 내놔 보게』


『찾아보면 없습니다』


『그렇지. 내가 네 마음을 고쳐 주었다』


이것이 등불을 전한 최초의 사건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 이심전심(以心傳心), 문 없는 문을 통해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 선은 육조(六祖) 혜능(惠能)에 이르러 확고한 기반을 다졌다. 그 이후 선의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떴다가 사라졌다. 이 창조와 혁신의 수세기를 「선의 황금시대(the golden age of zen)」라 부른다.


선은 당말에서 오대, 그리고 북송을 거치면서 틀에 박히고 진부해졌다. 전란과 피폐의 와중에 지식인들은 불교와 도교의 개인주의를 넘어 사회적 질서와 도덕적 책무를 중시하는 유학을 재발견하기 시작했다. 이 시대적 흐름 앞에서 선은 그동안 난만히 개화했던 자체의 전통을 정리하고 보존하는 수성(守成)의 자세를 취했다. 경전을 부정하며 등장한 선이 종당 경전으로 낙착되고 말았다. 이는 자기모순과 당착으로만 볼 것이 아니다. 그 아이러니의 배반이 없었다면 선은 역사의 모래더미 속에서 잊혀졌을 것이다.


11세기 초에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을 필두로 다양한 선의 문헌이 지어진다. 광등록(廣燈錄)과 속등록(續燈錄), 오등회원(五燈會元) 등은 사적과 역사로서는 훌륭했지만 실제 공부를 위해서는 너무 방만했다. 수행자들은 간명한 수행의 매뉴얼을 요청했고, 이에 부응해 만들어진 작품이 원오(圓悟)의 벽암록(碧巖錄)이었다. 이 또한 본래 의도를 벗어나 이지적 분석과 해석의 대상으로 타락하자 대혜(大慧, 1089~1163)는 스승의 이 회심작을 불태워 버렸다. 선의 스콜라적 경향을 비판하는 움직임의 한가운데에서 새로운 선서(禪書) 하나가 편찬됐다. 무문관(無門關)이 그것이었다.



진리로 통하는 입구에는 문이 없다


편자는 무문혜개(無門慧開), 1182년 항주 전당에서 태어났다. 이름이 특이하다. 대개 선사들의 이름은 조선조의 선비들처럼 터잡고 주석한 영지(領地)에서 따온다. 가령 1백20년을 살아 무르익은 고불(古佛)로 불리는 조주(趙州)는 그가 오랜 편력을 마치고 80줄에 들어 자리잡은 관음원(觀音院)이 있던 곳이다.


그런데 예외적인 사람이 몇 있다. 마조도일(馬祖道一)이 그렇다. 그는 속성인 마씨(馬氏)를 그대로 썼다. 호보용행(虎步龍行), 장대한 기골과 형형한 눈빛으로 수천의 기라성같은 수행자를 길러낸 거장이었다. 얼굴이 말의 두상을 닮아 마조라 했다는 설도 있다.


무문혜개도 통례를 벗어난 이름을 갖고 있다. 그는 지상에 점유한 영토가 아닌, 평생의 고투를 통해 체득한 선의 진실을 자신의 이름으로 내세웠다. 「문은 없다」가 대체 얼마나 절실한 소식이기에 이름으로 삼았을까.


그도 일찍이 존재의 비밀을 찾아 여러 스승을 찾았다. 마침내 월림사관(月林師觀)을 만나 그의 지도로 조주무자(趙州 無字)를 끌어안고 끙끙대기 6년, 어느날 점심공양을 알리는 북소리에 칠흑 같은 통속을 뚫었다. 무문혜개(無門慧開)는 그 감격을 이렇게 읊고 있다.



쨍쨍한 해 마른하늘을 깨는 한줄기 우레 소리

대지의 온갖 생령들이 화들짝 눈을 뜨네.

삼라만상이 일제히 고개를 조아리고

수미산이 벌떡 일어나 어깨춤을 추는구나.


靑天白日一聲雷, 大地群生眼豁開

萬象森羅齊稽首, 須彌躁跳舞三臺

躁(성급할 조; ⾜-총20획; zào)



자유란 이런 것임을 과시한 절창이다.


일대사(一大事)를 마친 무문은 학인들의 부탁으로 선가의 일화 48칙(則)을 골라 자신의 논평과 송(頌)을 붙여, 이종(理宗) 황제의 4번째 즉위일에 바쳤다. 무문관(無門關)은 선의 정신을 선 고유의 방식으로 제창한 명저다. 전체를 살필 여유는 없고 서문만 소개한다. 이것만으로도 그의 방황과 개오, 그리고 자신감을 엿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부처가 설한 가르침 가운데 핵심은 「마음」이다. 그 진리로 통하는 입구에는 그러나 문이 없다. 문이 없는데 어떻게 뚫고 나갈 것인가. 옛 현자가 하는 이런 소릴 듣지 못했는가. 『문을 통해 들고 나는 것은 잡스러운 것들이요, 인연을 통해 얻은 것은 마침내 부서지고 말 것이다』 기실 이런 이야기도 평지에 괜히 일으킨 풍파요, 멀쩡한 살갗에 종기 짜는 칼을 들이댄 것. 하물며 언어문자에 매달려 지혜를 구하는 짓이야 말해 무엇하리. 이는 「몽둥이를 휘둘러 달을 쳐내는 것」과 같고, 「근지러운 발을 구두 위에서 긁어대는 것」과 같으니 진리와 무슨 절실한 교섭이 있겠는가.


*소정 무자년(1228년) 여름, 동가의 용상사에서 대중들의 수좌로 있을 때, 나는 가르침을 청하는 납자들의 부탁을 어쩌지 못해, 옛 사람들의 공안(公案)을 「문을 두드리는 기와 조각」으로 삼아, 각각의 근기에 따라 학인들을 인도하였다. 이모저모 초(抄)하다 보니 어느새 책 한 권 분량이 되었다. 처음부터 계통과 순서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다. 모아보니 모두 48칙(則)이었다. 뭉뚱그려 무문관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용기 있는 자, 위험을 돌아보지 않고 칼 한 자루 꼬나잡고 곧바로 뛰어들면 여덟 팔 가진 나타(神將)도 막지 못할 것이며, 서역의 28조사(祖師)나 중국의 6조사도 그 늠름한 기상에 목숨을 구걸할 것이다. 그러지 않고 혹여 주저하고 머뭇거리면, 창 틈으로 달리는 말을 보듯 눈깜박할 사이에 벌써 진리를 놓치고 말 것이다.


*송하여 가로되, 『큰 길에는 문이 없다(大道無門). 그렇지만 길은 또한 어디에나 있다. 이 관문을 뚫고 나가면, 온 천하를 당당히 걸으리라』


(禪宗無門關: 佛語心爲宗, 無門爲法門. 旣是無門, 且作麻生透. 豈不見道, 從門入者不是家珍, 從緣得者始終成壞. 任麻說話, 大似無風起浪, 好肉 瘡. 何況滯言句覓解會, 掉棒打月, 隔靴爬痒, 有甚交涉. 慧開紹定戊子夏, 首衆于東嘉龍翔, 因衲子請益, 遂將古人公案, 作敲門瓦子, 隨機引導學者. 竟爾抄錄, 不覺成集, 初不以前後敍列, 共成四十八則, 通曰無門關. 若是箇漢不顧危亡單刀直入, 八臂那咤損他不住. 縱使西天四七, 東土二三, 只得望風乞命. 設或躊躇, 也似隔窓看馬騎, 貶得眼來, 早已蹉過. 頌曰, 大道無門, 千差有路, 透得此關, 乾坤獨步.)




번역은 최신의 것이지만 내용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글은 모두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문은 없다. 그러니 언어에 매달려 진리를 구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 (2)그런데도 왜 나는 공안의 문자를 고르고 거기다 평창(評唱)이라는 사족을 달았는가. (3)이 책은 그렇게 엮은 방편의 집록이니 조심해서 다루어야 한다. 손가락을 통해 달을 보고, 뗏목을 의지해 강을 건너듯 이 공안은 다만 문을 두드리는 기와 조각일 뿐이다. 문자에 미혹돼 「머뭇거리면」 다시 생사의 윤회 속으로 떨어진다. (4)이 모든 소식을 노래로 요약해 들려준다.



선문답과 화두의 의미


불교에 발을 들여놓은 수행자는 자연스럽게 묻는다. 『무엇이 불법(佛法)의 대의(大意)입니까』 혹은 『달마가 서역에서 건너온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불교의 핵심을 궁금해 하는 구도자들의 진지한 물음에 어떤 선사도 합당하고 친절한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 『뜰 앞에 잣나무니라』 『똥 치는 막대기지』 『그런 건 없네』 『앞산이 물 위로 지나간다』 등등 엉뚱하고 뜬금없는 대꾸들뿐이다.


여기에 장난기나 악의는 없다. 얼핏 종잡을 수 없어 보이는 이들을 관류하고 있는 근본정신이 있다. 이것과 만날 때 선문답은 더 이상 선문답이기를 그친다. 진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은 없다는 것, 아니 그 물음 자체가 이미 진리에서 비켜 서 있다는 역설이 그것이다. 그것을 일깨워주기 위해 선사들은 황당한 대답에 그치지 않고 때로 실력행사도 불사했다. 벼락 같은 소리를 질러 귀를 멍멍하게 하든가 혹은 몽둥이나 죽비로 질문자를 두들겨 팬 것이다.


처음 질문자는 자신이 무얼 잘못했는지를 모른다. 몇 번의 갈피 모를 수작을 겪거나, 몽둥이찜질을 당하거나, 코를 비틀리거나, 문틈에 발을 찍히고서야 이게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기 시작한다.


문은 없다. 언어와 논리를 통해서는 결코 목표에 이를 수 없다. 가르침을 의지해 진실에 이르려는 것은 흡사 「장대를 들고 달을 따려는 것」과 같고, 「구두 위에서 무좀을 긁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언어를 통한 이론적 변증의 한계와 위험을 깊이 자각한 선은 그 대안으로 독창적 수련의 방식을 마련했다. 공안(公案)의 체계가 그것이다. 공안이란 공문서를 가리킨다. 표준과 권위를 강조한 이 용어는 지나치게 근엄하다. 거기에는 선이 불교의 주변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인하고 정당성을 변호해나간 정치적 의도가 묻어 있다. 그래서 나는 화두(話頭)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그냥 「이야기」, 그 덤덤하고 밋밋한 단어는 선의 이념인 일상의 자연스러움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


화두는 이야기이다. 좀더 한정하자면 깨달음의 계기가 된 특별한 이야기이다. 이것이 선의 수련을 위한 방편으로 학인에게 제시되었다. 선사들은 이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선의 비밀에 접근할 수 없다고 말한다. 『선을 공부하려면 조사가 세워놓은 관문을 뚫어야 한다(參禪須透祖師關)』



어느 학인(學人)이 조주에게 물었다.

『개한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말했다.


『없다!』


(趙州和尙因僧問,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無).



불교교리에 익숙한 사람은 학인(學人)이 던진 질문의 의미를 알 것이다. 불성론(佛性論)에 의하면 인간을 포함한 온 우주의 삼라만상이 부처의 징표와 진리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조주는 응당 『아무렴, 불성이 있지』라고 대답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조주는 학인의 예상과 안도를 가로막고 나선다. 상식이 짜놓은 올가미에 걸려 있는 한 구원은 없다!


화두는 상식을 두드리는 충격 장치다. 이 목적을 위해 선은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조주의 불퉁스러운 대꾸는 비교적 점잖은 편에 속한다. 때로는 모순되는 언설을 동시에 긍정하거나 부정하며, 때로는 전혀 불가능한 사태를 현실로 설정하고 해답을 요구하기도 한다. 학인은 이런 황당무계와 속수무책을 해결하고 함정 밖으로 나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생사의 언덕에서 헤매다가 다음 생의 윤회를 기다려야 한다.


조주는 단호하게 『없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불교적 교리의 틀 안에서는 해결될 전망이 없다. 틀을 벗어나고 문맥을 이동하면 그럭저럭 이론적 해결은 보겠지만 존재의 근본적 변혁은 꿈꿀 수 없다. 긍정하든 부정하든 우리는 어제의 그 누더기 그대로인 것이다. 진실의 옷자락을 만지려면 일상의 습관적 정신활동을 봉쇄해야 한다. 무문혜개는 말했다.


『깨달음을 얻으려면 모든 생각의 길목을 차단해야 한다(妙悟要窮心路絶)』


아직 생각을 굴리거나 이로를 더듬고 있다면, 즉 주저하고 머뭇거리면 화살은 이미 서역 저편으로 가버린다.



「문 아닌 문」이 열리는 순간


학인은 그야말로 「막다른 골목」으로 밀렸다. 이 캄캄한 절벽, 어두운 칠통을 어떻게 타파해나갈 것인가. 의식적 모색의 길이 막힌 에너지는 압축되면서 심층으로 내려간다. 마음이 산란하고 분산되어 있으면 집중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삼매(三昧)가 깊어지면서 의식과 욕망에 의해 분절되고 소외된 에너지가 무의식에서 통합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문 아닌 문」이 열린다. 초에 불이 켜지듯 「안과 밖이 하나로 합쳐지는(自然內外打成一片)」 순간이 온다. 무문혜개는 그 경험을 「마른 하늘에 벼락이 때리고 대지의 초목군생이 화들짝 놀랄」 만큼 급격한 존재의 카타스트로피(catastrophe)라고 증언했다. 그 경험의 본질이 어떤 것이고 그런 다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것은 흡사 「벙어리가 꾼 꿈」과 같다. 설명할 수도 없고 전달할 수도 없는 혼자만의 냉가슴인 것이다.


여기까지가 선의 대강, 대도무문의 소식이다. 문이 없다 했는데 문이라고 그려보였으니 눈썹을 보존하기 힘들게 생겼다. 이 모든 법석을 잠재울, 내가 좋아하는 화두 하나를 소개한다.


불교학자로서 유식(唯識)에 정통한 도광(道光)이 어느 선사에게 물었다.


『선사께서는 어떻게 마음을 써서 길(道)을 닦고 계십니까』

『내게는 쓸 수 있는 마음도 없고, 닦아야 할 길도 없네』

『그렇다면 어째서 이리 사람들을 모아 선(禪)을 배우고 길(道)을 닦으라 가르치고 계십니까』

『내게는 송곳 하나 꽂을 땅이 없는데 어디다 사람을 불러모은단 말인가. 또 내게는 혀가 없는데 어떻게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겠나』

『어떻게 그런 뻔뻔스러운 거짓말을 하고 계십니까』

『다른 사람을 가르칠 혀가 없다고 했는데 거짓말인들 어떻게 할 수 있겠나』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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