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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窮而後工

歐陽修(1007-1072),字永叔,號”醉翁”﹑”六一居士”,傑出博學的散文家,宋代散文革新運動的卓越領導,唐宋八大家之一。由於憂國憂民,剛正直言,歐陽修宦海升沉,歷盡艱辛,但是創作卻”愈窮則愈工”。他取韓愈”文從字順”的精神,極力反對浮靡雕琢﹑怪僻晦澀的”時文”,提倡簡而有法﹑流暢自然的風格,作品內涵深廣,形式多樣,語言精緻,富情韻美和音樂性。許多名篇,如《醉翁亭記》﹑《秋聲賦》等,已千古傳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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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궁핍: '詩窮而後工'論

시인은 탄탈로스와도 같은 존재다. 맛있는 음식과 샘물을 두고도 영원한 갈증과 갈망 속에서 헤매인다는 탄탈로스. 시인은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이다.

不平則鳴, 不平이 있어야 운다

노래 삼긴 사람 시름도 하도할샤

닐러 못다 닐러 불러나 푸돗던가

진실로 풀릴 것이면 나도 불러 보리라

申欽의 시조이다. 시는 왜 쓰는가? 말로 해서는 아무리 해도 풀리지 않을 시름이 있기 때문이다. 말로 해서는 도무지 풀리지 않던 시름도 노래 앞에서는 눈 녹듯 사라진다.

"대저 무릇 물건은 그 平을 얻지 못하면 운다. 草木이 소리가 없으나 바람이 흔들면 운다. 물이 소리가 없으나 바람이 이를 움직이면 운다. 그 솟구치는 것은 혹 부딪치기 때문이요, 그 달리는 것은 혹 막기 때문이며, 그 끓는 것은 혹 불에 데우는 까닭이다. 금석이 소리가 없으나 혹 이를 치면 소리가 난다. 사람의 말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다. 그만둘 수 없음이 있은 뒤에야 말하는 것이니 그 노래함이 생각이 있고 그 울음은 품음이 있다. 대저 입에서 나와 소리가 되는 것이 그 모두 不平함이 있기 때문인가?"

韓愈가 〈送孟東野序〉에서 한 말이다. 대개 사물이 우는 것은 不得已 함에서 말미암은 不平이 있기 때문이다. 이 不平이라는 것은 마음이 평정을 잃은 상태, 달리 말하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상실한 상태를 말한다. 不平은 그냥 생기지 않는다. 어찌 해 볼 수 없는 不得已함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문학을 하려면 恨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 韓愈는 〈荊譚唱和詩序〉에서, "대저 화평한 소리는 담박하고, 근심스런 생각이 있는 소리는 아름답다. 떠들썩하게 즐기는 말은 工巧하기 어렵고, 窮苦의 말은 쉬이 좋다. 이런 까닭에 문장을 지음은 늘 羈旅나 草野에 있었고, 王公이나 貴人에 이르러서는 氣가 차고 뜻을 얻어, 성품이 능히 하여 이를 좋아하지 않으면 하기에 겨를하지 못한다."라 하여, '氣滿志得'하여 아쉬울 것이 없는 王公貴人들이 '窮苦愁思'하는 羈旅草野의 문학만 같을 수 없다고 하였다. 훌륭한 문학은 氣滿志得의 자족에서가 아니라 窮苦愁思의 不得已者에서 나온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李仁老는 ≪破閑集≫에서 "天地는 萬物에 있어 그 아름다움만을 오로지 할 수는 없게 하였다. 때문에 뿔있는 놈은 이빨이 없고, 날개가 있으면 다리가 두 개 뿐이며, 이름난 꽃은 열매가 없고, 채색 구름은 쉬 흩어진다. 사람에 이르러서도 또한 그러하다. 기특한 재주와 화려한 기예로 뛰어나게 되면 功名이 떠나가 함께 하지 않는 것은, 이치가 그러하다."고 하였다. 요컨대 문장도 뛰어나면서 功名도 함께 누리는 이치는 없다는 것이다. 뿔을 가지려면 이빨을 포기하든지, 꽃이 아름다우려면 열매의 내실을 기대하지 않든지 해야지, 날개도 달고 다리도 네 개이기를 바라거나, 채색 구름의 영롱한 자태가 길이 변치 않기를 바랄 수는 없다.

트릴링은 "현대의 문화인은 정치적으로는 부와 쾌락을 원하나 예술적 실존적으로는 내핍과 괴로움을 원하는 모순적 상태에 있다"고 말한다. 즉 "쾌락을 거부하고 프로이트를 따르자면 반쾌락에서 만족을 찾는 인간의 본능적 충동"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충동은 시대와는 관계 없이 존재해 왔다. 모든 것이 具足된 환경에서 문학은 설 자리를 잃는다. 욕망이 좌절되고 꿈이 상처 입을 때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이른 바 情緖란 것이 생겨나고, 그 정서가 喜笑怒罵가 되어 터져나온 것이 바로 시이다.

나비를 놓친 소년, 發憤抒情의 정신

그대가 太史公의 ≪史記≫를 읽었다 하나, 그 글만 읽었지 그 마음은 읽지 못했구료. 왜냐구요? 〈항우본기〉를 읽으면 제후들이 성벽 위에서 싸움 구경 하던 것이 생각나고, 〈자객열전〉을 읽으면 악사 高漸離가 筑이란 악기를 치던 일이 떠오른다 했으니 말입니다. 이것은 늙은 서생의 진부한 이야기일 뿐이니, 또한 부뚜막 아래에서 숟가락 주었다는 것과 무에 다르겠습니까. 아이가 나비 잡는 것을 보면 사마천의 마음을 얻을 수 있지요. 앞발은 반쯤 꿇고 뒷발은 비스듬히 들고 손가락을 집게 모양으로 해가지고 살금살금 다가가, 손은 잡았는가 싶었는데 나비는 호로록 날아가 버립니다. 사방을 둘러 보면 아무도 없고 게면쩍어 씩 웃다가 장차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이것이 사마천이 著書할 때입니다.

연암 박지원의 〈答蒼厓〉란 글의 전문이다. 아마도 蒼厓란 이가 자신은 이즈음에 사마천의 《史記》에 푹 빠져 있노라며 편지를 보냈던 모양이다. 그러자 연암은 《史記》를 읽으면서 〈項羽本紀〉에 보이는 項羽의 出天의 용맹과 〈刺客列傳〉에서 荊軻를 전송하는 高漸離의 비장한 연주를 떠올리며 司馬遷의 생동감 넘치는 문장력에 감동하는 것은, 마치 부뚜막 아래에서 숟가락을 하나 줏어 놓고 무슨 대단한 발견이나 한듯이 "숟가락 줏었다!"라고 소리 치는 것과 다를게 없다고 잘라 말한다. 중요한 것은 사마천의 문장 솜씨가 아니라 그가 그 글을 지을 때의 마음을 얻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러면서 연암은 예의 그 참신한 붓을 들어 나비를 잡으려다 놓친 소년에 견주어 사마천의 마음을 설명한다. 소년은 정신을 온통 손가락 끝에다 집중시켜 살금살금 나비에게로 다가간다. 잡았다 싶은 순간에 나비는 저만치 날아가 버린다. 뻗었던 손이 부끄럽고, 전심전력의 몰두가 허망해지는 순간이다. 이거다 싶었는데 결국 손에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듯한 허망함, 조금만 주의를 더 기울였더라면 잡을 수도 있었다는 자책감, 혹시 누가 내 이 모습을 보지는 않았을까 하는 부끄러움, 바로 이런 모종의 안타까우면서도 착잡한 마음이 바로 사마천이 ≪史記≫를 지을 때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눈을 부릅뜨고 고함을 지르면 賊將이 간담이 서늘해져 그만 말에서 떨어져 버렸다는, 제후들이 감히 옆에 가지도 못하고 성벽 위에서 싸우는 모습을 구경할 수 밖에 없었다는 그 項羽가, 劉邦에게 四面楚歌의 곤경을 당하고 달아나다가 고향에 돌아가 父老를 대할 면목이 없다고 자결하는 장면은 얼마나 비통했던가. 秦王 政의 포학함을 징벌하고자 督亢의 지도 속에 독 묻은 비수를 품고 秦나라를 향했던 燕나라의 자객 荊軻가 易水 강가에서 "가을 바람 쓸쓸하고 易水는 찬데, 장사는 한 번 가면 돌아오지 않나니."하고 비장한 노래를 부를 때, 그의 벗 高漸離는 筑을 연주하였다. 듣는 자가 두 눈을 부릅뜨지 않는 이 없었고, 머리칼은 관을 뚫었다. 그러나 荊軻의 독 묻은 칼이 秦王을 찌르지 못하고 하릴 없이 기둥에 박히는 순간, 荊軻는 秦王의 칼에 난자 당해 죽는다. 그때 項羽가 천하를 쟁패했다면, 荊軻의 독 묻은 비수가 秦王의 가슴을 갈랐다면 역사는 어떻게 뒤바뀌었을까? 지나간 시대 영웅들의 비분강개한 삶의 역정을 돌아보는 사마천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역사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순간들, 손아귀에 쥐었다가 놓쳐 버린 역사의 파란곡절을 지켜보는 사마천의 그 마음을 읽지 못하고, 오로지 그 실감나는 문장의 묘사에만 감탄하여 "실감나네!"만을 연발하고 있다면, 이 어찌 부뚜막 아래서 숟가락 하나 줏어 들고 무슨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듯이 "숟가락 줏었다!"고 외치는 것과 다를 것이 있겠는가?

일찍이 사마천은 〈太史公自序〉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옛날 西伯은 涻里에 구금되어 《周易》을 부연하였고, 孔子는 陳蔡에서 곤액을 당하여 《春秋》를 지었다. 屈原은 쫓겨나 《離騷》를 지었고, 左丘는 실명한 뒤 《國語》를 남겼다. 孫子는 다리가 잘리고 나서 兵法을 논하였고, 呂不韋는 蜀 땅으로 옮긴 뒤 《呂覽》이 세상에 전한다. 韓非子는 秦나라에 갇혀서 〈說難〉과 〈孤憤〉을 지었다. 《詩經》 3백편은 대개 聖賢이 發憤하여 지은 바이다. 이 사람들은 모두 뜻이 맺힌 바가 있으나 이를 펼쳐 통함을 얻지 못한 까닭에 지나간 일을 서술하여 장차 올 것을 생각한 것이다.

5천의 보병으로 흉노의 본진을 유린하다 장렬한 전투 끝에 부득이 흉노에 항복했던 장군 李陵. 모두 외면하는 그를 외로이 변호하다가, 武帝의 격노를 불러 宮刑에 처해졌던 사마천은 오로지 《史記》를 완성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宮刑의 치욕과 모멸을 감수하였다. 완성된 《史記》의 서문을 쓰면서 그는, 좌절 속에서 불멸의 저술을 꽃 피웠던 지나간 聖賢의 發憤의 著作들을 떠올리고 있다.

이제 후대는 사마천의 이 '發憤著書'의 정신을 높여 기린다. 앞서 연암이 강조했던 '사마천의 마음'이란 바로 이 '發憤'의 정신에 다름 아니다. '憤'이란 朱子의 풀이에 따르면 "마음으로 통함을 구하나 아직 이를 얻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일찍이 孔子가 '發憤忘食'을 말하였고, 屈原은 다시 여기에 사회적 성격을 담아 《楚辭》 〈九章〉 중 〈惜誦〉에서 "송덕함 즐기지 않다가 근심을 부르니, 憤을 내어 내 마음 펴 보이네. 惜誦以致愍兮, 發憤以抒情."이라 하여 '發憤抒情'을 말한 바 있다. 마음 속에 응어리 진 '憤'이 있으니, 이를 펴지 않고서는 견딜 길이 없다. 司馬遷은 《史記》 〈屈原列傳〉에서 "굴원은 왕의 듣는 것이 총명하지 않고, 참소와 아첨이 임금의 밝음을 가려 막아, 邪曲이 公을 해치고, 방정한 것이 용납되지 않는 것을 미워하였다. 그런 까닭에 근심하고 깊은 생각에 잠겨 〈離騷〉를 지었다."고 적고 있다.

조선 말기의 문인 姜瑋는 "시의 지극한 것은 재주부리지 않고 얻은 것이다. 재주 부림에 말미암아 얻은 것은 대개 지극한 것이 아니다. 鸞鳳의 맑은 소리와 珠玉의 빛나는 기운, 병든 이의 신음 소리, 슬피 우는 이가 흘리는 눈물이 어찌 모두 재주 부림에 말미암아 얻어진 것이겠는가? 그런 까닭에 말하기를, 詩 三百篇은 모두 聖賢이 發憤하여 지은 바라고 한다. 이로써 본다면 發憤하지 않고는 지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대저 시인은 눈 앞에서 나비를 놓쳐버린 소년의 안타까움을 지녀야 한다. 자신에게 닥쳐온 시련과, 견딜 수 없는 좌절감 앞에서 주저물러 앉지 않는 發憤의 정신을 지녀야 한다. 發憤하는 抒情 없이 어찌 남을 감동시킬 것이랴.

詩窮而後工과 詩能窮人

예전 詩話書를 들추다 보면 유난히 시인과 窮困의 관계에 대한 예화를 많이 접하게 된다. 그 이야기는 크게 간추려 보면, '詩窮而後工' 즉 시는 궁해진 뒤에 더 좋아진다는 논의와, '詩能窮人' 즉 시가 능히 사람을 궁하게 한다는 관념으로 대별된다. 엄밀히 말해 이 두 가지 생각은 서로 상반되는 명제이다. 詩窮而後工은 궁핍한 환경이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잘 쓰게 한다는 말이고, 詩能窮人은 시를 쓰는 행위가 시인을 궁핍한 환경으로 몰아 넣는다는 말이다.

대개 이러한 생각은 연원이 오랜 것이지만, 처음으로 이 말을 한 사람은 歐陽修이다. 그가 〈梅聖兪詩集序〉에서 이에 대해 언급한 이래 詩窮而後工은 古典詩學에서 중요한 명제가 되었다.

나는 세상에서 이르기를 시인은 영달함이 적고 궁함이 많다고 함을 들었다. 대저 어찌 그러한가? 대개 세상에 전하는 시는 옛날의 곤궁한 이의 말에서 나온 것이 많다. 무릇 선비가 그 있는 바를 쌓아 두고서도 세상에 베품을 얻지 못하면 스스로를 산꼭대기나 물 밖에 놓아 즐김이 많다. 벌레나 물고기, 초목과 바람 구름, 새와 짐승의 모습을 보고 이따금 그 기괴함을 찾고, 마음 속에 근심스런 생각이나 울분의 쌓임이 있으면 그 원망하고 풍자함을 일으켜, 타관살이 하는 신하나 과부의 한탄하는 바를 말하여 인정의 말하기 어려운 것을 그려내니, 대개 궁하면 궁할수록 더욱 공교해진다. 그렇다면 시가 능히 사람을 궁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거의 궁해진 뒤라야 공교해지는 것이다.

앞서 본 韓愈의 '不平則鳴'과 같은 논리이다. 선비가 마음 속에 지식과 경륜을 쌓아 두고도 그것을 사회적으로 실현할 수 없을 때, 마음 속에 근심스런 생각이나 울분의 쌓임이 있게 되는데, 대개 이를 글로 표현하니 그 생각이 보통 사람들은 말하기 어려운 것을 그려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歐陽修는 궁하면 궁할수록 시가 더욱 좋아진다고 단정하여, '窮'이 '工'을 위한 전제임을 밝혔다. 물론 이 글에서 歐陽修는 詩能窮人, 시가 사람의 운명을 困苦하게 만든다는 생각에는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하였다.

그런데 실제 이들 詩話에서 궁하면 시를 잘 쓴다는 詩窮而後工과 시를 쓰면 궁해진다의 詩能窮人을 흔히 혼동해서 쓰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러한 의미의 혼동은 단순히 옛 사람들의 의미 파악의 혼란에서 기인한 것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뛰어난 시인의 경우 거의 예외 없이 窮을 달고 살았다. 杜甫는 〈天末懷李白〉에서 "문장은 운명의 달함을 미워한다. 文章憎命達"고 하였고, 白樂天은 〈與元九書〉에서 "시인은 고생하는 괴로움이 많다. 詩人多蹙"고 하였다. 권필은 "글로써 궁해짐은 예로부터 그랬나니, 가난과 질병은 시인의 日常이라. 文窮自古然, 貧病乃其常"고 했고, 許筠은 〈蓀谷山人傳〉에서 李達의 시를 평하면서 "평생몸 붙일 곳도 없이 사방으로 유리걸식 하여 사람들이 대부분 천하게 여겼다. 궁색한 액운으로 늙음은 진실로 그 시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몸은 곤궁했어도 냣지 않을 시가 남아 있으니, 어찌 한 때의 부귀로 이 이름을 바꿀 수 있으리오."라고 했던 것이다.

사실 이들은 궁했기 때문에 좋은 시를 남길 수 있었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시를 씀으로 해서 그들의 궁을 더욱 가중시키거나 지속시켰다는 사실이다. 즉 그들은 시를 통해서 '忘窮'은 했을지언정 '送窮'은 하지 못했다. 하지 못하기는커녕 트릴링의 말과 같이 오히려 시로 인해 '送窮'의 기회가 와도 이를 박차기까지 했다. 이럴 때 시인이 시를 창작한다는 것은 삶에 대한 올곧음을 견지함과 같고, 시를 포기한다는 것은 시를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도록 만들었던 현실이나 대상에 대한 애정의 포기를 의미한다. 그 결과는 굴종과 타협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詩窮而後工과 詩能窮人의 사고가 역의 명제이면서도 순환론적으로 맞물려 있음을 보게 된다. 즉 窮의 상황은 시에 있어 工의 결과를 가져오지만 동시에 시는 窮의 상황을 지속시키거나 가중시키는데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窮의 처지에 있었던 시인들에게 시를 쓰는 행위는 세상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자신의 뜻을 지켜나가기 위한 자기 보호의 의미를 지니며, 이러한 정신이 독자의 입장에서는 愈窮則愈工, 즉 궁하면 궁할수록 시는 더욱 좋아진다거나, "문장이 좋아질수록 집은 더욱 가난해졌네. 文章益富家益貧"와 같은 평가를 낳게 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詩能窮人은 詩窮而後工과는 논리적으로 보아 역의 사고를 담고 있지만 실제로 이 두가지는 모순관계에 놓이지는 않는다. 트릴링이 말한, 불만족의 상태에서 만족을 구하려고 하는 모순적 충동지향은 바로 詩能窮人의 사고를 잘 설명해 주고 있는 셈이다. 詩窮而後工이라 할 때 窮은 工하기 위한 충분조건이고, 工은 窮하기 위한 필요조건이 된다. 또 詩能窮人이라 할 때 詩는 궁하기 위한 충분조건이고 窮은 作詩를 위한 필요조건이 된다. 이 때 '窮'이란 물질적 貧窮 보다는 실의와 좌절 같은 정신적 가치를 뜻한다. 물론 두 가지는 늘 붙어 다니는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단순한 경제적 결핍은 시인의 내면에 發憤의 욕구를 제고시키는데 오히려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정신적 갈등이 배제된 窮은 窮이 아니라 貧일 뿐이다.

궁한 사람의 시가 좋은 이유

군자의 배움은 혹은 일에 베풀어지고 혹은 문장으로 나타나니 항상 아우르기 어려움을 근심한다. 대개 때를 만난 선비는 功烈을 조정에 드러내어 명예가 竹帛에 빛나는 까닭에 그 항상 문장을 보기를 末事로 하며 또 하기에 겨를하지 못하거나 능하지 못함이 있는 것이다. 뜻을 잃은 사람에 이르러서는 궁벽한 곳에 숨어 마음을 괴롭게 하고 생각을 위태롭게 하여 정밀한 생각에 지극하니 감격하여 憤을 펴는 바가 있으므로 더불어 오직 세상에 펼 바가 없는 것을 모두 한결같이 文辭에 맡기는 까닭에 궁한 사람의 말이 공교하기 쉽다고 말한다.

다시 歐陽修는 〈薛簡肅公文集序〉에서 이렇게 부연한다. 韓愈처럼 구양수도 苦心危慮의 失志之人에 기우는 뜻을 밝힌 것이다. 일반적인 경우로 보더라도, 역시 시는 궁한 뒤에 더 좋아진다. 어디 시 뿐인가? 모든 예술, 학문이 다 그러하다. 시장에서 떡 파는 사람이 있었는데 노래를 구성지게 잘 불렀다. 그 노래 때문에 그 집 떡은 유명해져서 언제나 인기가 높았다. 그래서 형편이 넉넉해 지자 그는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그러자 그의 떡 가게도 점차 시들해졌다. ≪지봉유설≫에 나오는 이야기다.

사실, 詩窮而後工은 그 연원이 오랜 말이다. 《論語》에 보면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나중 시듦을 안다.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라는 말이 있다. 날씨가 따뜻할 때는 松柏의 貞操勁節이 눈에 띠지 않았는데, 歲寒으로 落木寒天이 되자 그 전에는 미처 느끼지 못하던 松柏之後凋를 새삼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제주에 유배 가 있던 秋史가 제자 李尙迪의 변치 않는 정성에 대한 답으로 〈歲寒圖〉를 그려 주었던 일은 유명하다. 이때 '歲寒'의 상황은 窮의 상황과 유사하다. 그 전에는 인식하지 못하던 사실에 대해 窮이라는 상황이 개입되어 인식에 변화를 가져다 준다는 것이 詩窮而後工의 논의의 핵심이다. 맹자도 "마음에 곤핍하고 생각에 부딪친 뒤에 짓는다. 困於心. 衡於慮而後作"고 한 바 있다.

시란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알지 못하는 사실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다. 즉 한편의 시가 뛰어난 시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삶을 뛰어넘는 인식의 갱신이 필요하다. 이 인식의 갱신은 현실과 밀착되어 있을 때에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 무엇' 밖에 놓여 있다는 느낌이 시인의 내부에 恨을 머금게 해, 그 결과 그것이 예술에 퍼부어진다는 것이 詩窮而後工의 기본 생각이다. 다시 말해 窮의 상황이 가져다 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극단의 괴리감에, 여기서 벗어나려는 자아의 노력이 덧붙여져 시에 있어서 工의 결과를 가져 온다는 것이다.

蘇東坡는 〈僧惠勤初罷僧職〉에서,

서리 맞은 수염은 病骨에 덥수룩

주린 배로 앉아서 낮 종소릴 듣네.

시가 사람을 궁하게 할 수 없고

궁한 이의 시가 좋은 것일세.

이 말은 진실로 망녕되지 않으니

나는 歐陽修에게서 이 말을 들었노라. 霜澙茁病骨

饑坐聽午鐘

非詩能窮人

窮者詩乃工

此語信不妄

吾聞諸醉翁

라 하여 詩窮而後工에 수긍한 바 있고, 〈讀唐人愁詩對作〉에서는

文人이 재능을 다 쏟지 않을까 하늘이 근심하여

항상 영락케 하여 덤불 속에 있게 했네. 天恐文人未盡才

常使零落在蒿萊

라고 하였다. 天公이 시인에게 덤불 속의 영락을 강요한 것은, 혹 안일의 환경이 그로 하여금 자신의 재능을 다 쓰지 아니하고 현실에 안주할까봐 염려한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또 袁宏道는 〈贈陳正夫〉에서,

예로부터 좋은 시는 주린 창자에서 나왔나니

한 글자에 비단 오십 필을 쳐줄만 하도다. 自來好語出飢腸

一字堪酬五十絹

라 하였다. 고려 말 李穡은 〈有感〉이란 작품에서 또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시가 사람을 궁하게 할 수 없고

궁한 이의 시가 좋은 법이라.

내 가는 길 지금 세상과 맞지 않으니

괴로이 광막한 벌판을 찾아 헤맨다.

얼음 눈이 살과 뼈를 에이듯 해도

기꺼워 마음만은 평화로웠지.

옛 사람의 말을 이제야 믿겠네

빼어난 시귀는 떠돌이 窮人에게 있다던 그 말. 非詩能窮人

窮者詩乃工

我道異今世

苦意搜鴻惃

氷雪磠肌骨

歡然心自融

始信古人語

秀句在羈窮

1.2구는 앞서 본 소동파의 시귀를 그대로 딴 것이다. 옛 사람이란 바로 歐陽修를 가리킨다. 세상과 맞지 않는데서 비롯된 '窮'을 추스리고자 괴롭게 광막한 벌판을 헤맨다. 살과 뼈를 에이는듯한 추위의 고통 속에서도 시를 쓰는 즐거움에 마음은 언제나 평화롭다.

이 詩窮而後工의 논리는 조선 후기 여항문인들에 의해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李家煥은 여항문인들의 선시집인 《風謠續選》의 서문에서 "천하에는 性情이 없는 사람이 없고, 詩를 지을 수 없는 사람도 없다. 그런 까닭에 사람은 누구나 시를 지을 수 있다. 다만 性情이 얽매이게 되면 詩는 망하고 만다. 性情을 질곡하는 것은 富貴보다 심한 것이 없다. 性情이 얽매이고 보면 비록 그 재주가 아무리 높고 언어가 뛰어나다 하더라도 말단일 뿐이다. 어찌 다시 시가 있으리오. 이것이 古今에 시로 일컬어진 자가 궁하면서 낮은 지위에서 나온 것이 많은 까닭이다."라고 했고, 洪世泰는 〈雪蕉集序〉에서 시라는 것은 小技에 불과하지만 名利를 벗어던져 마음에 누추함이 없어야만이 잘 할 수 있다고 보고, "예로부터 두루 살펴보니, 시에 능한 사람은 山林草澤의 아래에서 많이 나왔고, 富貴하고 권세있는 사람은 반드시 능하지 못하였다. 이로써 본다면 시는 진실로 작다 할 수 없고, 그 사람을 또한 알 수 있다."고 하여, 名利에 찌든 富貴의 인사보다는 山林에 거처하면서 마음이 맑은 자신들의 시가 훨씬 더 좋다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韓末의 金允植은 〈瓊雷聯璧集序〉에서, "아! 예로부터 배척받아 쫓겨난, 때와 만나지 못한 인사가 대개 이름은 허물을 입는 바 되어도 문장은 더욱 이름을 낳음이 되었다. 만약 蘇氏 형제로 하여금 일찍 허물을 버리고 이름남을 끊어 녹녹히 세상에 일컬음을 보지 못하게 했더라면 반드시 瓊雷에서 서로를 그리는 괴로움은 없었을 것이다. 비록 늙어 흰 머리가 되도록 책상을 마주해 비소리를 듣는 것도 또한 좋겠지만, 이렇게 되면 뒷 사람이 또한 좇아 蘇氏 형제가 있음을 알 수가 없을 터이니, 두 가지에서 장차 어느 것을 택하겠는가?"라 하였다. 대저 富家翁으로 편안히 늙어 세상에 그 자취가 드러나지 않음과, 불우를 곰씹으며 뛰어난 시를 남겨 그 이름이 후세에 길이 전해짐, 이 둘 중에서 어떤 것이 나으냐는 것이다.

이와 같이 詩窮而後工의 주장은 歐陽修가 처음 제기한 이래로 수 많은 사람들의 동조와 지지를 불러, 마침내 古典詩學에서 중요한 명제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궁하지도 않으면서 궁한 체 하는 '거짓 窮'의 기이한 현상까지 벌어지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명나라 때 謝榛은 《四溟詩話》에서 "요즘 두보의 시를 배우는 자는 부유하게 살면서도 궁한 근심을 말하고, 태평한 시절을 만나고도 전쟁을 말하며, 늙지 않았으면서도 늙었다 하고, 병이 없으면서도 병들었다고 한다. 이것은 흉내냄의 매우 심함이니 性情의 참됨이 아니다."라고 하여 시인들의 유난스런 무드잡기를 꼬집고 있다.

詩는 窮達과는 무관하다는 주장

시인은 窮의 상태에서 사물에 대한 감각이 예민해지기 마련이다. 가슴 속의 불평이나 울분이 날카로운 촉수가 되어 이전보다 그의 시를 더욱 우수하게 만들어준다. 그런데 여기서 궁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훌륭한 시를 쓸 수 없는 것인가 하는 논의가 있을 수 있다. 실제 궁한 이의 시가 모두 좋은 것은 아니고, 달하였으면서도 시가 좋은 경우 또한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달한 처지에 있으면서 문필에 종사하는 이들의 경우, 가만히 앉아서 詩窮而後工의 논의에 승복할 때 그들은 자신들의 노력이나 才分과는 관계 없이 결코 공해질 수는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는 셈이 되므로, 여기서 필연적으로 詩窮而後工의 논의에 대한 이들의 반격이 예견된다. 실제로도 詩窮而後工에 반대하는 '窮不如達'이나 '達而後工'의 주장도 만만치 않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 館閣文人인 徐居正은 《東人詩話》에서 "예로부터 궁한 사람의 말은 모두 枯寒瘦淡하다"고 하고, 그 시를 보면 초췌하고 곤궁한 기상을 볼 수 있다 하여, 이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張維는 〈月沙集序〉에서, "歐陽氏가 文章을 논하면서 궁한 뒤에 시가 좋아진다는 말이 있고서부터, 글쓰는 사람들이 많이들 이 말을 일컬어 구실로 삼는다. 대저 雕蟲寒苦의 무리가 비바람에 신음하고 끙끙대며 잠꼬대하고 조잘대며 날고 내달리면서, 한 마디 반 마디에 있어서도 곱고 추함을 다투는 자는 이것으로 이끌어도 오히려 괜찮겠지만, 만약 鴻公哲匠의 벼슬아치로 詞壇에서 그 빛깔을 드러내어 울긋불긋한 빛깔로 꾸미고 그 소리에 맞추어 笙簧金石으로 크게 한 세상을 울리는 사람 같은 경우는 그 사람과 재주가 어찌 窮達의 영역에 얽매여 그 巧拙을 따지겠는가?"라고 하여, 나라의 중임을 맡아 지닌 바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는 鴻公哲匠은 窮達의 잣대로 따져 헤일 수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趙熙龍은 《石友忘年錄》에서, "세상 사람들은 늘 말하기를, 文人은 貧賤함이 많고, 그림을 배우는 자는 더욱 궁박한 상이 많다고들 한다. 무릇 四海의 사람은 恒河의 모래알 수만큼이나 많은데, 글을 읽고 그림을 배우면 반드시 貧賤에 이르게 되고, 배우지 않아 그림에 어두우면 반드시 부귀를 누리게 된다면 천하의 책이니 그림같은 일은 진시황의 焚書를 기다리지 않아도 없어졌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사람들이 이를 이루고자 해도 재주와 능력이 미치지 못하므로 이런 말을 가지고 자신을 변호하는 것일 뿐이라고 하였다. 또 金嵑는 〈鄭農塢詩集序〉에서, "歐陽修가 梅聖兪의 시를 논하면서 궁하면 시가 더욱 뛰어나다고 여겼고, 黃山谷은 杜甫의 시를 논하면서 늙어갈수록 시가 더욱 좋아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나는 홀로 궁하다고 해서 좋아지거나 늙어갈수록 좋아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만 뛰어난 자만이 더욱 뛰어나게 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내가 三唐 아래로 宋元明淸 및 우리나라 문인의 시집에 이르기까지 거의 수십 백 종을 살펴 보니, 궁한 사람은 더욱 구슬펐고, 늙은 사람은 더욱 거칠고 졸열해서 좋은 것이 거의 드물었다. 이로써 볼진대 오직 뛰어난 자만이 뛰어나게 될 수 있고, 궁함이 반드시 사람을 뛰어나게 하지도 못하고, 늙음이 반드시 사람을 뛰어나게 하지도 못함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요컨대 시의 工拙은 窮達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타고난 능력과 관계되는 것일 뿐이라고 본 것이다.

조선 중기 한문 4대가의 한 사람인 李廷龜는 〈習齋集序〉에서 權擘의 시를 논하면서, 권벽은 50년 동안 조정에 서서 벼슬 하였으니 결코 窮하다 할 수 없는데, 그의 시는 어찌하여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다고 전제하고, "문장은 하나의 재주이다. 반드시 오로지 한 뒤에야 공교해지나니, 대개 번화하고 부귀로워 명성과 이욕을 쫓는 자들이 능히 오로지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런 까닭에 예로부터 시에 공한 자는 대개 궁하고 근심하고 떠돌며 괴로워 함을 거느려 때에 있어 만나지 못하니, 공교함이 능히 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궁함이 스스로 능히 오로지 하여, 오로지 함을 이루면 저절로 능히 공교해지는 것이다"라고 하여, 詩窮而後工 대신 詩專而後工을 내세웠다.

한편 秋史 金正喜는 〈題彛齋東南二詩後〉에서, "歐陽修가 시를 논하면서 시는 궁한 뒤에 좋아진다고 하였다. 이는 다만 貧賤의 窮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富貴하면서 窮한 것 같음에 이른 뒤에야 그 窮은 窮이라고 말할 수가 있으니, 부귀한 자가 궁한 뒤에 좋아지는 것은 또한 貧賤한 자가 궁한 뒤에 좋아지는 것과는 다르다."고 하여, 貧賤之窮 아닌 富貴之窮에 기우는 뜻을 밝힌 바 있다.

궁하다고 해서 시가 다 좋은 것이 아닌 것처럼 달하였다 하여 시가 나쁘란 법은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시인의 정신에 달려 있을 뿐이다. 시가 궁해진 뒤에 더 좋은 것은 얼마간 사실이지만은, 이를 수긍하는 것이 달한 이의 시를 아예 인정치 않는 편협으로 치닫는다면 이것은 곤란하다.

詩는 사람을 궁하게 만든다

당나라 때 玄宗이 孟浩然을 불러 접견하고, 예전에 지은 시를 읊게 하였다. 이에 孟浩然이,

재주 없어 밝은 임금 이 몸 버리고

병 많아 옛 벗도 멀어지누나. 不才明主棄

多病故人疎

라 한 시를 외웠다. 이에 불쾌해진 왕은 "그대가 스스로 朕을 구하지 않은 것이지, 짐은 그대를 버린 적이 없노라." 하고는 고향에 돌아가게 하였다. 사려 깊지 못한 경박한 붓놀림 때문에 궁하게 된 경우이다.

張尙禮가 〈宮怨〉시를 지었는데,

정원은 깊고 깊어 낮 물시계 소리 맑은데

닫아건 문엔 봄풀이 시름처럼 자라누나.

꿈 속에서 한창 임금의 총애 얻고 있는데

꾀꼬리 한 소리에 잠을 깨었네. 庭院沈沈晝漏淸

閉門春草共愁生

夢中正得君王寵

却被黃彴叫一聲

라 하였다. 정원이 어찌나 고요한지 한낮인데도 물시계에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맑게 들릴 지경이다. 일년 내내 닫아건 문 안 뜨락에는 어느덧 봄풀이 내 마음 속의 시름처럼 자라고 있다. 그녀는 이미 임금의 총애를 기대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꿈 속에서나마 그토록 그리던 임금의 은총을 받아 행복에 겨워 있는데, 그마저도 꾀꼬리가 심술궂게 깨우는 통에 놀라 깨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시를 본 高皇帝는 궁궐 깊은 곳 宮人의 심사를 어찌 그리 잘 아느냐고 하여 蠶室에 가두어 죽여 버렸다. 이쯤 되면 詩能窮人이 아니라 詩能殺人이다.

예전에는 杜甫를 배우면 가난해지니 읽기는 읽어도 닮지는 마라는 말이 있기까지 했다. 명나라 때 王世貞은 《藝苑眊言》에서 "古人이 이르기를 '詩가 능히 사람을 궁하게 한다'고 하였는데 그 실정을 헤아려 보면 진실로 합당한 것이 있다. 대저 가난하고 늙고 근심하고 병들고, 떠돌거나 귀양살이 하며 타관에 머뭄은 사람이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詩로 들어오면 아름답게 된다. 옛날의 詩匠을 두루 살펴보니 진실로 온전히 마친 자가 적어, 이를 위해 구슬피 탄식하고, 숙연히 두려워 하였다. 지난 번 同人들과 함께 장난 삼아 문장의 아홉가지 운명을 만들었는데, 첫번째는 貧困이고, 두번째는 시기함이며, 세번째는 과실, 네번째는 좌절 당해 고생함이고, 다섯번째는 쫓겨나 귀양감이고, 여섯번째는 형벌을 당함이며, 일곱번째는 요절함이고, 여덟번째는 끝이 안좋음이며, 아홉번째는 후사가 없음이다."라고 하여, 詩能窮人의 합당함을 지적하고, 아울러 文章九命 즉 시인의 아홉가지 困苦한 운명을 나열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洪萬宗은 《小華詩評》에서, "지금 사람들이 잘못 시가 사람을 궁하게 만든다는 말에 혹하여 시를 읊조리는 것이 능히 사람으로 하여금 궁하게 한다고 생각하니 숭상할만한 바가 아닐뿐더러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저 시를 읊조림은 목청을 잘 쓰는 이가 슬퍼 목 메이는 곡조로 남을 능히 슬프게도 하고, 호방하고 번화한 노래로 남을 능히 기쁘게도 하는 것과 같다. 다만 시도 또한 그러하다. 그 궁함에 있어서는 그 말이 궁하고, 그 달함에 있어서는 그 말이 달하게 되니, 이는 바로 시에 능한 사람이 형용하여 말로 표현함에 능한 것이다. 어찌 시인이 이를 따라 궁하게 되고 이를 따라 달하게 되는 이치가 있겠는가?"라고 하여 詩能窮人의 생각을 배척하는 견해를 개진하였다.

車天輅와 張維는 각각 〈詩能窮人辯〉이란 논문을 남긴 바 있다. 詩能窮人의 문제가 月課의 주제로 오를만큼 이 문제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탄탈로스의 갈증

古典詩學史를 통해 볼 때, 詩窮而後工의 논의는 뚜렷한 하나의 시론이라기 보다는 시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각기 자기의 입장에 따른 찬반이 덧붙어 그 논의의 양상은 자못 흥미롭다. 詩窮而後工의 논의는 서정이라는 문학 본래의 기능에 대한 다른 측면에서의 접근이다. 시는 궁한 뒤에 좋다는 명제는 예외를 인정치 않는 사실 명제도 아니고, 의당 그래야만 할 당위명제도 아니다. 이것의 진리값을 놓고 역대로 많은 논란이 있어 온 것은 당연하다.

不平則鳴て發憤抒情て詩窮而後工 등의 논의는 궁극적으로 동일성(Identity)의 문제를 환기시킨다. 동일성은 '자기 자신을 자기자신이라고 느끼는 감정'이다. 즉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이상적 관념적 자아와 실제의 자아 사이에 아무런 편차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窮의 상황이 가져다 준 실의나 좌절감은 시인의 내부에 그렇지 않았던 상태와의 괴리감을 인식시킨다. 이는 결국 시인 내부의 마땅히 그리 되어야 할 규범으로서의 자아와, 그렇지 못한 현실의 자아 사이의 괴리감에 대한 인식이다. 문학을 비롯한 모든 예술활동을 크게는 이러한 인간 내부의 두 개의 자아를 일치시켜 나가려는 몸짓으로 볼 수 있다면, 窮의 상황은 보다 나은 예술 작품의 창조를 위한 충분조건이 된다.

懷才不遇, 즉 재주를 품고도 세상에 쓰이지 못하니 여기에서 갈등이 생기고, 이 갈등을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으니 대상에 투사하여 해결하려고 했다. 결과로 얻은 것이 독자의 입장에서는 工이라는 평가요, 자신의 입장에서는 항구적일 수는 없으나 동일성의 상태에 조금 더 접근할 수 있다는 위안이다. 상실감이 강하면 강할 수록 회복에의 갈망도 커지는 것이니, 동일성의 추구란 현실과 자아, 혹은 이상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 사이에 형성된 파국적 관계를 청산하려는 노력인 것이다.

胡適은 그의 《白話文學史》에서 "陶潛과 杜甫는 해학적 풍취가 있는 사람들로, 궁하고 쓰라린 이야기를 하더라도 결코 風趣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이 이렇게 우스운 소리도 하고 통속적인 자유시를 쓰는 풍취를 지녔기 때문에 비록 궁핍하고 배고픈 가운데서도 발광하지 않았으며 타락하지도 않았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窮하되 그 窮 속에 침몰해 버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도 결코 風趣를 포기하지 않는 獨立不懼의 정신, 詩의 工은 이러한 정신 안에서만이 보장된다. 시인은 탄탈로스와도 같은 존재다. 맛있는 음식과 샘물을 두고도 영원한 갈증과 갈망 속에서 헤매인다는 탄탈로스. 시인은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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梅聖俞詩集序

予聞世謂詩人,少達而多窮,夫豈然哉﹗蓋世所傳詩者,多出於古窮人之詞也。凡士之蘊其所有,而不得施於世者,多喜自放於山巔水涯之外,見蟲魚草木風雲 鳥獸之狀類,往往探其奇怪;內有憂思感憤之鬱積,其興於怨剌,以道羈臣寡婦之所歎,而寫人情之難言,蓋愈窮則愈工;然則非詩之能窮人,殆窮者而後工也。 

予友梅聖俞,少以蔭補為吏,累舉進士,輒抑於有司,困於州縣,凡十餘年。年今五十,猶從辟書為人之佐,鬱其所蓄,不得奮見於事業。其家宛陵,幼習於詩,自為童子,出語已驚其長老。既長,學乎六經仁義之說,其為文章,簡古純粹,不求苟說於世;世之人,徒知其詩而已。然時無賢愚,語詩者必求之聖俞;聖俞亦自以其不得志者,樂於詩而發之,故其生平所作,於詩尤多。詩既知之矣,而未有薦於上者。昔王文康公,嘗見而嘆曰︰「二百年無此作矣。」雖知之深,亦不果薦也。若使其幸得見於朝廷,作為雅頌,以歌詠大宋之初德;薦之清廟,而追商周魯頌之作者,豈不偉歟﹗奈何使其老不得志,而為窮者之詩,乃徒發於蟲魚物類,羈愁感嘆之言﹗世徒喜其工,不知其窮之久而將老也,可不惜哉﹗聖俞詩既多不自收拾,其妻之兄子謝景初,懼其多而易失也,取其自洛陽至於吳興以來所作,次為十卷。予嘗嗜聖俞詩,而患不能盡得之,遽喜謝氏之能類此也,輒序而藏之。其後十五年,聖俞以疾卒於京師。余既哭而銘之,因索於其家,得其遺稿千餘篇,并舊所藏,掇其尤者,六百七十七篇,為一十五卷。嗚呼﹗吾於聖俞詩論之詳矣,故不復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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