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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람의 내면 풍경 / 술과 詩의 風情(1)~(3)

옛 사람의 내면 풍경 / 술과 詩의 風情 (1)

 

선조 때 시인 권필은 과거 응시를 권유하는 벗의 편지를 받고

보낸 답장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내게는 고서 여러 권이 있어 홀로 즐기기에 족하고,

시는 비록 졸렬하지만 마음을 풀기에 족하며,

집이 비록 가난해도 또한 막걸리를 댈만은 하니,

매양 술잔 잡고 시를 읊조릴 때면

유연히 스스로 얻어 장차 늙음이 이르는 것도 알지 못하오.

저 이러쿵 저러쿵 하는 자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리요.

 

戱題(희제)란 시에서는,

 

詩能遣悶時拈筆 酒爲요胸屢擧광 

시능견민시념필 주위요흉루거광

 

시는 고민 걷어가 때로 붓을 잡았고 

술은 가슴 적셔줘 자주 잔을 들었지.

 

라고 하여 시와 술로 밖에는 풀길 없는

뜻같지 않은 세상에서의 갈등을 씁쓸히 노래하고 있다.

또 이수광은 〈술회〉란 작품에서,

  

詩似巧工雕萬物  酒爲長추掃千愁

시사교공조만물  주위장추소천수

 

시는 교묘한 솜씨로 만물 아로새기고 

술은 빗자루 되어 온갖 근심 쓸어가네.

 

라고 노래한 바 있다.

가슴 속에는 활활 타오르는 정염이 있고,

뭉게뭉게 피어나는 지울길 없는 근심이 있다.

시가 있어 이를 노래하고,

한잔 술이 빗자루 되어 그 근심을 깨끗이 쓸어내매,

마음 속에는 어느새 호연한 기상이 솟아난다.

술은 언제 나고 시름은 언제 난지

술나고 시름난지 시름 난 후 술이 난지

아마도 술이 난 후에 시름 난가 하노라

 

술과 시름은 동무 삼아 다닌다.

시름 때문에 술을 마시는가,

술 때문에 시름이 생기는가?

시름이 있으니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다 보면 시름은 간데 없다.

술만 있고 시름이 없다면,

시름만 있고 술이 없다면 세상은 아무 살 재미가 없지 않겠는가?

  

술을 취케 먹고 두렷이 앉았으니

억만 시름이 가노라 하직한다

아희야 잔 가득 부어라 시름 전송 하리라        정태화(鄭太和)

 

상쾌하지 않은가.

허리를 곧추 세우고 도연히 앉았노라니,

가슴 속에 숨었던 시름이란 놈들이 일제히

그 앞에 무릎을 꿇고서, `이제 물러 가렵니다` 하며

하직을 고해 온다.

내게 왔던 손님이니 그냥 보낼 수야 있나.

넘치는 한 잔 술로 가는 시름을 전송하련다.

또 이런 시는 어떨까.

  

자네 집에 술 익거든 부디 날을 부르시소

초당에 꽃 피거든 나도 자네를 청하옴세

백년간 시름 없을 일을 의논코저 하노라                김육(金堉)

 

 

술이 굼실 익으면 술 익었다 벗을 청하고,

꽃 피어 향기 흐르자 또 그 핑계로 동무를 부른다.

만나서 하는 얘기는 무슨 얘긴가?

더도 덜도 말고 딱 `백년간` 시름 없을 일을 의논코저 함이다.

 

 

시 있는 곳에 술이 있고 술 있는 곳에 노래가 있다.

더욱이 세상일은 언제나 공정치 아니하고,

시비는 늘 전도되며,

정의는 불의 앞에 항상 좌절을 경험하기 마련임에랴.

주선(酒仙) 이백은 일찍이

  

抽刀斷水水更流  擧杯消愁愁更愁

추도단수수경류  거배소수수경수

 

칼 빼어 물 베어도 물은 다시 흐르고 

잔 들어 시름 달래도 시름은 더 깊어지네. 

 

라 하여 늘 지니고 가는 가눌 길 없는 삶의 근심을 노래한 바 있다.

가뜩이나 쓴 인생에 한 잔 술이 없대서야 무슨 낙이 있겠는가.

 

滌蕩千古愁  留連百壺飮

척탕촌고수  류련백호음

皓月未能寢  良宵宜淸談

호월미능침  량소의청담

醉來臥空山  天地卽衾枕    

취래와공산  천지직금침  李白 〈友人會宿〉

 

천고의 이 시름 씻어내고자  

연거퍼 백병의 술을 마신다.                    

좋은 밤 소곤소곤 청담 나누며                 

두둥실 흰 달에 잠 못 이룬다.                  

거나해 공산에 드러누우면                     

천지가 그대로 이부자린걸.                     

 

백병의 술로도 씻어낼 수 없는 근심이 있다.

천고의 근심을 씻자고 마시는 술이니

목전의 상황에 얽매여 일희일비하는 소인배의 근심은 아니다.

우주를 품어안고 천고를 가늠하는 위대한 고독자의 근심이다.

어느덧 흰달은 동산 위로 두둥실 떠올라

어둡기만 하던 자리를 구석구석 비춰준다.

거나해 그대로 드러 누우면 드넓은 우주가 마치 포근한 솜이불 같구나.

 

 

 자료출처 : 한양대학교 鄭珉 교수의 <한문학>

 

 

 

 

옛 사람의 내면 풍경 - 술과 詩의 風情

 

江風索我吟 山月喚我飮(강풍삭아음 산월환아음)

醉倒落花前 天地爲衾枕(취도낙화전 천지위금침)

                         - 楊萬里

 

강바람 날더러 시 지으라 하고

산달은 날 불러 술 마시게 하는도다.

취하여 진 꽃 위로 거꾸러지니

천지가 바로 이부자리로구나.

 

 

-> 강바람 솔솔 불어와 시심을 북돋우고,

산달은 내게 거나한 주흥을 부추긴다.

강바람 산달에 주흥이 도도하니

시 읊다 취한 술에 진 꽃잎 위로 아예 드러눕는다.

편안하구나. 꽃잎 깔린 대지는 향기로운 요가 되고,

달빛 밝은 저 하늘은 비단의 이불이라. 건곤일척에 不知老之將至로다.

늙음이 장차 오는 것도 모르겠네.

 

 

이수광은 또 言志란 작품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天地大衾褥 江河一酒池(천지대금욕 강하일주지)

願成千日醉 眠過太平時(원성천일취 면과태평시)

 

천지는 커다란 이부자리요

강하는 하나의 술 연못일세.

천 날을 깨지 말고 취하여보자

꿈속에 태평시절 지나쳐보자.

 

 

->천지를 이부자리로 깔고 덮으니,

드넓은 강물이 그대로 술이로구나.

그 술을 천일 동안 마시어 보자. 취하거든 깨지 말고 잠을 자리라.

그 사이에 인간 세상에는 태평성대의 노랫가락이 울려 퍼졌으면 하는 것이다.

이렇듯 술은 가슴 속 깊은 시름을 녹여주는 묘약이 된다.

아니 깬들 어떠리.

 

 

李鼎輔

꽃 피면 달 생각하고 달 밝으면 술 생각하고

꽃 피자 달 밝자 술 얻으면 벗 생각하네.

언제면 꽃 아래 벗 데리고 玩月長醉(완월장치) 하려뇨.

 

->꽃구경은 달빛 아래서 해야 제격이고,

술은 꽃 아래서 달빛 보며 마셔야 제 맛이 난다.

멋진 술이 있어도 벗이 없대서야 무슨 맛이 나겠는가.

어여쁜 꽃과 흐는한 달빛, 매운 누룩으로 담근 술에 싫증나지 않는 벗.

꽃향기에 취하고 달빛에 취하고,

누룩에 취하고 우정에 취하니 이 취기는 영영 깨지 않아도 좋을 법하다.

그러나 세상 일이 어디 그런가.

술이 취하거든 깨지 말게,

삼기거나 님을 만나거든

이별 없게 삼기거나 술 깨고 님 이별하니 그를 슬허하노라.

취하거든 깨지를 말고, 만났거든 이별을 모르고 지낼 일이다.

취한 술은 쉬이 깨고 좋은 님은 쉬 떠나니,

인생에 무슨 이런 장난이 있단 말인가?

술 깬 뒤 님 떠난 빈자리를 더듬는 슬픔에 인생의 시름만 깊어 간다.

 

 

灑酒待君來 橫琴惜餘景(쇄주대군래 횡금석여경)

溪流流向君 一路春松影(계류류향군 일로춘송영)

               - 白光勳

술 걸러 그대 오길 기다리면서

거문고 빗겨 들고 봄볕 아까와.

시냇물도 그댈 향해 흘러가누나.

길 따라 솔 그림자 늘어섰구나.

 

-> 상쾌하지 않은가. 병들어 누운 친구를 그리며 지은 시다.

동지섣달에 담근 술 항아리에서 굼실 풍겨나는 누룩의 향내.

진작에 탁주를 잘 걸러 놓고

그대가 자리 털고 일어나 나를 찾아 주길 기다리고 있다.

거문고를 빗겨 들고 한 곡조 타는 뜻은 남은 볕이 아쉽고 아까운 때문이다.

그대에게 향하는 나의 이 마음,

시냇물도 내 안 같아서 흘러흘러 흘러가고,

그 길 따라 솔 그림자가 줄줄이 늘이웠다.

이 솔의 푸르름 닮아 그대 빨리 쾌차하소.

따뜻이 손을 잡고 술 한 잔 나눕시다.

 

逢人覓酒酒難致 對酒懷人人不來(봉인멱주주난치 대주회인인불래

百年身事每如此 大笑獨傾三四杯(백년신사모여차 대소독경삼사배)

                          - 권필

 

님 만나 술 찾으면 술이 없더니

술 두고 님 그리면 님이 오잖네.

백년간 이 내 일이 매일 이렇다

혼자 웃고 서너 잔을 주욱 들이키노라.

 

 

->함께 술 마시기로 약속한 친구가 오지 않자,

무료히 앉았다가 속이 상해 혼자 술 마시며 지은 시다.

벗이 있고 술이 있대서 그 자리가 늘 유쾌할 수도 없다.

벗은 마음에 맞는 벗이라야 벗이랄 것이요,

술은 즐거워 마시는 술이라야 술이랄 것이다.

 

 

一定 백년 산들 긔 아니 초초한가

초초한 浮生(부생)이 무슨 일을 하려 하여

내 잡아 권하는 잔을 덜 먹으려 하는가.  

                   - 정철

 

-> 아마도 좌중에 한 친구가 권하는 술잔을 자꾸 내밀며 흥을 깼던 모양이다.

에이 못생긴 친구. 백년을 산다 해도 흰 말이 벽 틈 사이로 지나가듯

짧은 세월인데, 덧없는 뜬 인생이

무엇이 바빠 이 정다운 술잔마저 마다한단 말인가.

안 돼. 내 잔 한잔 기어이 받게.

 

자료출처 : 한양대학교 鄭珉 교수의 <한문학>

 

옛 사람의 내면 풍경 / 술과 詩의 風情 (3)

술과 詩의 風情

 

陽坡(양파)의 풀이 기니 봄빗치 느저 잇다

小園 桃花(소원 도화)는 밤비예 다 피거다

아희야 쇼 됴히 머겨 논밭 갈게 하여라          辛啓榮

 

 

농가의 봄날은 이렇게 온다.

양지녘 언덕에 햇볕이 따뜻하고,

그 볕에 봄풀은 웃자랐구나.

간밤 비 맞아 복사꽃이 활짝 피니,

집집마다 논밭에선 쟁기질이 한창이다.

아침에 소를 든든히 먹여 아이를 재촉하여 들로 나간다.

 

오늘은 비 개거냐 삿갓에 호미 메고

베잠방이 걷오추고 큰 논을 다 맨 후에

쉬다가 점심에 탁주 먹고 새 논으로 가리라        金兌錫

 

 

그리하여 또 여름이 오고, 장마비 그치자 햇살이 짱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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