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감

술에 관한 시 수편

정호승 <술 한잔>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꽃 소리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정호승 시집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에서

 

雲楚(운초) 김부용 / 戒酒戒詩(계주계시)

[술을 삼가고 시를 삼가다]

술이 지나치면 본성을 헤치고(酒過能伐性 주과능벌성)

시에 뛰어나면 사람이 궁해진다.(詩巧反窮人 시교반궁인)

시와 술이 비록 벗이 된다 하여도(詩酒雖爲反 시주수위반)

멀리도 가까이도 말았으면 하노라(不疎亦不親 불소역불친)

 

 

월하독작(月下獨酌/달빛 아래서 혼자 술을 마셨소)-이백(李白)

花間一壺酒(화간일호주), 꽃나무 사이에서, 한 동이 술을

獨酌無相親(독작무상친). 친구 없이, 혼자 술을 마신다.

擧杯邀明月(거배요명월), 잔 들어 밝은 달을 맞고

對影成三人(대영성삼인). 그림자를 마주하니 셋이 친구 되었네

月旣不解飮(월기부해음), 달은 술을 아예 마시지 못하니

影徒隨我身(영도수아신). 그림자만 부질없이 나를 따라 다니네

暫伴月將影(잠반월장영), 잠시 달을 친구하고 그림자 거느리고

行樂須及春(항낙수급춘). 즐거움을 누리는 이 일 봄에야 가능하리

我歌月徘徊(아가월배회), 내가 노래하면 달도 따라다니고

我舞影零亂(아무영령난). 내가 춤추면 그림자도 덩실덩실 춤을 춘다

醒時同交歡(성시동교환), 깨어서는 함께 서로 기뻐하고

醉后各分散(취후각분산). 취한 뒤에는 각자 나누어 흩어진다.

永結無情游(영결무정유), 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귐을 영원히 맺어

相期邈雲漢(상기막운한). 저 멀리 은하수에서 만나기를 서로 기약하자

 

하늘과 땅을 베고 덮고 (天地爲衾席)

강하를 술독을 삼아 (江河作酒池)

천일동안 계속 마시어 (願成天日飮)

취해서 태평성대 보내리 (醉過太平詩)

이규보(白雲李奎報); 고려 의종(毅宗) 22(서기1168) 12 16일 지금의 여주에서 태어나 몽고의 난을 피해 임금과 함께 강화로 피난가 있다가 74세에 죽자, 이곳에 묻힌 듯 하다는 자손들의 말마따나 선생의 무덤은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 백운곡, 선생의 무덤은 강화에서 최고의 명당자리란다.

강화에서 전등사로 가다 찬물 약수고개를 지나 목비(木碑)고갯길 오른쪽에 「백운 이규보선생묘」라고 쓰인 입간판이 있고, 여기서 3백여미터 숲속길로 들어서면 선생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움이 술이라면


한잔의 술처럼

마실 수 있다면

그대 그리움을 마시고 싶다

한잔의 술을 마셔

달래질 그리움이라면

밤새도록 취해도 좋겠다

취하지 않고는

이밤도 보낼 수 가 없을만큼

그대가 보고 싶다

힘든 내삶에 비틀거리고

그대 그리움에 비틀거릴 바엔

밤새도록 술이라도 마시고 싶다

기억 한자락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흐트러지지 않았는데

오늘은 술이라도 마시고 싶다

내 모든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그대였는데

남은건 그리움뿐이다

곁에 있어 좋았고

흔적만으로도 반가웠는데

지금은 너무 아프다

술잔속에

그리움이 그대이기에

그리운 그대를 마시는것이다

취하지도 않았는데

다 마시지도 않았는데

눈가에 이슬은 왜 맺히는지...

이게 아닌데

다시 울지 않으려 했는데

오늘밤은 내가 왜 이럴까.

다시 돌아 올거라고

비워둔 그대 자리에는

고독이 마셔버린 술병만 가득하다

-이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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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권상호
정다운 우리세상(cafe.daum.net/jt2241)에서 참조. 재편집

김부용(金芙容)의 고향은 평안도 성천, 운초는 시명(詩名)은 이다. 송도의 황진이(黃眞伊)와 부안의 이매창(李梅窓), 그리고 운초 김부용을 조선 시대를 통털어 시 잘 짓고 노래 잘하는 조선의 3대 명기라고 칭한다.

"뜻이 같고 마음이 통한다면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세상에는 삼십객 노인이 있는 반면 팔십객 청춘도 있는 법입니다."

이 멋진 말은 조선시대 순조임금때 1820년~1869년까지 한 세상을 살다간 여류시인으로 유명한 운초 김부용(雲楚 金芙容)이 남긴 말이다.
김부용(金芙蓉)은 평안도 성천에서 가난한 선비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네 살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 살 때 당시(唐詩)와 사서 삼경에 능통하였다고 하니 아마도 여간한 문재가 아니였던 모양이다. 열 살 때 부친을 여의고 그 다음해 어머니마저 잃으니, 부용은 어쩔 수 없이 퇴기의 수양딸로 들어가 기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시명(詩名)을 운초(雲楚)라고 하는 부용은 한번 배우면 둘을 깨우칠 만큼 영특하였고, 용모도 몹시 고와서 뭇 사내들의 가슴을 태웠다고 한다. 열두살에 기적에 오르고, 열다섯살엔 시문과 노래와 춤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얼굴마저 고와 천하의 명기로 이름을 드날리게 되었다.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자 많은 풍류객이 찾아와 재기를 칭찬하고, 수령의 수청을 독차지해 동료 기생의 시샘을 받았다. 열아홉 살이 되었을 때 운초에게 일생의 전환기가 왔으니 성천에 신임 사또가 부임해 온 것이다. 그는 정사에만 힘쓰는 명관(名官)으로 운초의 특출한 용모와 재색을 아껴 자기 스승인 평양감사 김이양(金履陽)에게 소개를 하였다고 한다.
김부용의 인생의 전부에는 김이양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가 젊었을 때 몹시도 가난하여 굶기를 밥먹듯하였다. 하루는 저녘도 못 먹고 굶고 자는데, 도둑이 들어 쌀이 없자 부뚜막을 헐고 솥을 떼어가는 소리가 났다. 부인이 남편을 깨워 살림살이의 전부인 솥을 가져간다고 하자  김이양은, `오죽 가난하면 남의 집 솥을 떼어가겠소. 우리보다 못한 사람인 것 같으니 내버려 둡시다` 하였다고 한다.
  이 소리를 들은 도둑은 크게 깨달아 솥을 그냥 두고 갔으며, 그 후로 열심히 일하여 부자가 되었다. 훗날 김이양이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옥당 학사(玉堂學士)로 있을 때 은혜를 갚고자 찾아와 둘은 그 후 백년지기처럼 친하게 지냈다하는 전설같은 이야기를 남긴 사람이다.
  그 김이양(金履陽, 1755∼1845)은 호가 연천(淵泉)으로, 풍채가 뛰어나고 시문에 능하였으며, 예조 판서를 거쳐 평안감사를 역임하고 있었다. 그 때 성천부사로 부임 해온 사또가 있었는데 신임사또는 정무가 대략 파악되자 운초를 데리고 평양으로 김이양을 찾아갔다. 특별히 아끼는 제자가 오자 김이양은 그를 위해 대동강가 `연광정`에서 환영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이 자리에서 신임 사또는 부용을 소개하였는데, 그때  김대감의 나이는 이미 77세였고, 부용의 나이는 겨우 19세였다. 시문을 통해 일찍이 김이양의 인품을 흠모해 온 부용은 평양에 머물면서 김이양의 신변을 돌보아 드리라는 사또의 명에 기쁜 마음으로 따랐다고 하는데 천거에 대해 김이양이 거절하자,
  `뜻이 같고 마음이 통한다면 연세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세상에는 삼십객 노인이 있는 반면 팔십객 청춘도 있는 법입니다.` 라고 말하여 부용을 거두게 되었다고 한다.
김이양은총명하고 아름다운 부용을 끔찍히 사랑하였고, 부용 역시 연만한 늙은 감사의 공양에 정성을 다하였다. 두사람은 비록 김대감이 나이가 들어 남자 구실은 못해도 서로 마음을 나누며 정답게 지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김이양이 호조 판서가 되어 한양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이별을 하게 되자 김이양은 직분을 이용하여 부용을 기적에서 빼내 양인의 신분으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 정식 부실(室)로 삼고는 훗날을 기약하며 혼자서 한양으로 떠나 갔다.
  생이별을 한 운초는 재회의 날만 기다리며 외로움과 그리움의 나날을 보냈다. 몇 달이 가도 소식이 없자 원망도 많이 하였다. 멀리 있는 님을 생각하니 때로는 보고도 싶고, 때론 잊지나 않았나 의심도 하고, 때론 걷잡을 수 없는 이별의 슬픔으로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도 하였다. 부용은 피를 토하는 듯한 애절한 시를 써서 인편으로 보냈다.

 △ 김부용이 지었다는 시
이 시가 부용이 남긴 가장 아름다운 `부용상사곡`이라는 보탑시 (寶塔詩)이다.
                          別
                          思
                          路遠
                          信遲
                        念在彼
                        身留玆
                        紗巾有淚
                        雁書無期
                      香閣鍾鳴夜
                      鍊亭月上時
                      依孤枕驚殘夢
                      望歸雲 遠離
                    日待佳期愁屈指
                    晨開情札泣支
                  容貌憔悴把鏡下淚
                  歌聲鳴咽對人含悲
                  銀刀斷弱腸非難事
                  珠履送遠眸更多疑
                朝遠望暮遠望郎何無信
                昨不來今不來妾獨見欺
                浿江成平陸後鞭馬  過否
                長林變大海初乘船欲渡之
              見時少別時多世情無人可測
              好緣短惡緣長天意有誰能知
            一片香雲楚臺夜神女之夢在某
            數聲良甥柰樓月弄玉之情屬誰
            欲忘難忘强登浮碧樓可惜紅顔老
            不思自思乍倚牡丹峯每歎綠髮衰
          獨宿空房下淚如雨三生佳約寧有變
          孤處香閨頭雖欲雪百年貞心自不移
        罷春夢開竹窓迎花柳少年總是無情客
          推玉枕攬香衣送歌舞者 莫非可憎兒
        千里待人難待人難甚矣君子薄情豈如是
        三時出門望出門望悲哉賤妾苦懷果何其
      惟願寬仁大丈夫決意渡江舊緣燭下欣相對
      勿使軟弱兒女子含淚歸泉哀魂月中泣相隨

이별하옵니다  (別)
그립습니다    (思)
길은 멀고    (路遠)
글월은 더디옵니다 (信遲)
생각은 님께 있으나 (念在彼)
몸은 이 곳에 머뭅니다 (身留玆)
비단 수건은 눈물에 젖었건만 (紗巾有淚)
가까이 모실 날은 기약이 없습니다(雁書無期)
향각서 종소리 들려 오는 (香閣鍾鳴夜)
이 밤 연광정에서 달이 떠오르는 (鍊亭月上時)
이 때 쓸쓸한 베게에 의지했다가 (依孤枕驚殘夢)
잔몽에 놀라 깨어 돌아오는 구름을 바라보니
멀리 떨어져 있음이 슬픔니다 (望歸雲 遠離)
만날 날 수심으로 날마다  손꼽아 기다리며 (日待佳期愁屈指)
새벽이면 정다운 글월 펴 들고 턱을 괴고 우옵니다 (晨開情札泣支 ) 
용모는 초췌해져 거울을 대하니 눈물 뿐이고  (容貌憔悴把鏡下淚)
목소리도 흐느끼니 사람 기다리기가 이다지도 슬픔니다 (歌聲鳴咽對人悲)
은장도로 장을 끊어 죽는 일은 어렵지 않으나 (銀刀斷弱腸非難事)
비단신 끌며 먼 하늘 바라보니 의심도 많습니다 (珠履送遠眸更多疑)
어제도 안 오시고 오늘도 안 오시니 낭군님께서 어찌
그리 신의가 없습니까 (朝遠望暮遠望郎何無信)
아침에도 멀리 바라보고 저녘에도 멀리 바라 보니
첩만 홀로 속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昨不來今不來妾獨見欺)
대동강이 평지가 된 뒤에나 말을 몰고 오시려 합니까 (浿江成平陸後鞭馬過否)
장림이 바다로 변한 뒤 노를 저어 배를 타고 오렵니까 (長林變大海初乘船欲之)
이별은 많고 만남은 적으니 세상사를 누가 알 수 있으며 (見時少別時多世情無人可測)
악연은 길고 호연은 짧으니 하늘의 뜻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好緣短惡緣長天意有誰能知)
운우무산에 행적이 끊기었으니 선녀의 꿈을 어느
여자와 즐기시나요 (一片香雲楚臺夜神女之夢在某)
월하봉대에 피리 소리 끊기었으니 농옥의 정을
어떤 여자와 나누고 계십니까 (數聲良甥柰樓月弄玉之情屬誰)
잊고자해도 잊기가 어려워 억지로 부벽루에 오르니
홍안만 늙어가고 (欲忘難忘强登浮碧樓可惜紅顔老)
생각치 말자해도 절로 생각나 몸을 모란봉에 의지하니
슬프도다 검은 머리 자꾸 쇠해가고 (不思自思乍倚牡丹峯每歎綠髮衰)
홀로 빈 방에 누우니 눈물이 비오 듯하나 삼생의 가약이야
어찌 변할 수 있으며 (獨宿空房下淚如雨三生佳約寧有變)
혼자 잠자리에 누었으나 검은 머리 파뿌리 된들 백년 
정심이야 어찌 바꿀 수 있으랴 (孤處香閨頭雖欲雪百年貞心自不移)
낮잠을 깨어 창을 열고 화류소년을 맞아들여 즐기기도 했으나
모두 정 없는 나그네 뿐이고 (罷春夢開竹窓迎花柳少年總是無情客)
베게를 밀고 향내 나는 옷으로 춤을 춰 보았으나
모두가 가증한 사내 뿐 입니다. (推玉枕攬香衣送歌舞者 莫非可憎兒)
천리에 사람 기다리기 이토록 어려우니 군자의 박정은
어찌 이다지도 심하십니까 (千里待人難待人難甚矣君子薄情豈如是)
삼시에 문을 나가 멀리 바라보니 애처로운 천첩의
심정은 과연어떠하겠습니까 (三時出門望出門望悲哉賤妾苦懷果何其)
오직 바라건데 관인하신 대장부께서 강을 건너오셔서 구연의 촛불 아래 흔연히 대해 주시고  (惟願寬仁大丈夫決意渡江舊緣燭下欣相對)
연약한 아녀자가 슬픔을 머금고 황천객이 되어 외로운 혼이 달 가운데서 길이 울지 않게 해 주옵소서 (勿使軟弱兒女子含淚歸泉哀魂月中泣相隨)

  성천기생 김부용의 시와 사랑 더딘 걸음 재촉하여 여러 날 만에 서울에 다다르니 말고삐를 잡은 하인은
대감의 본가가 있을 북촌을 그대로 지나쳐서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남산 기슭의 한 초당으로 안내한다.

  새롭게 단장한 아담한 별장에는 "녹천정(綠川亭)"이라는 현판까지 걸려 있어서, 부용을 맞으려는 김이양대감의 따뜻한 배려가 짙게 배어나고 있었다. 그제서야 자기를 데려오는데 여러 달이 걸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때부터 노대감과 단란한 신접살림을 다시 시작한 소녀 김부용은 어엿한 김판서대감의 소실이 되어 주위 사람들로부터 "초당마마"로 불리고 있었다.
  달콤한 세월이 덧없이 흘러 판서대감이 80을 넘었고,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려 하자 임금 순조는 그에게 봉조하(奉朝賀)를 제수했다. 봉조하란 2품이상의 관직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고령으로 퇴임하는 노대신에게 특별이 내리는 벼슬로서, 실무는 담당하지 않으나 종신토록 녹봉을 지급할 뿐 아니라,국가에 의식이 있을 때에는 조복을 입고 참여하는 영예로운 지위였다.
  뿐만 아니라 대감의 맏손자 김현근이 순조의 딸 명온공주를 맞아 부마가 됨으로서 국가원로가 된 봉조하대감은 시우들을 녹천정으로 불러 부용과 더불어 시를 읊고 거문고를 들으며 한운야학으로 유유자적하는 한일월을 즐겼다.
  그러나 노익장을 자랑하던 봉조하대감도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쇠잔해 가는 늙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어느덧 7~8년이 흘러 대감의 춘추 85세가 되었건만 부용은 아직도 27세의 방년, 풍요로운 물질과 한가로운 풍류만으로 만족하기에는 너무도 젊은 아까운 청춘이었다.
  그래서 부용은 어느 날 자기도 모르게 지필을 당기어 다음과 같은 낙서를 남겼다.

客子靑靑日遲遲  (객자청청일지지) 나그네의 청춘은 아직도 멀고 멀었는데
主人白髮亂如絲  (주인백발난여사) 주인의 백발은 파뿌리처럼 어지럽구나.
   
그래도 대감이 살아 있을 때는 그를 찾아 녹천정으로 모여드는 시인묵객들을 접대하면서 시름을 달랬지만, 세월은 그것마저 용납지 않는 듯, 91세를 일기로 노대감이 세상을 떠나자, 땅이 꺼지는 듯,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던 부용은 다음과 같은 시로서 떠난 임을 위로하고 자기의 삶을 돌아본다.

風流氣槪湖山主  (풍류기개호산주) 풍류와 기개는 호산의 주인이요.
經術文章宰相材  (경술문장재상재) 경술과 문장은 재상의 재목이었네.
十五年來今日淚  (십오년래금일루) 15년 정든 임 오늘의 눈물
峨洋一斷復誰裁  (아양일단복수재) 끊어진 우리 인연 누가 다시 이어 줄고.
都是非緣是夙緣  (도시비연시숙연) 인연 아닌 인연을 맺어온 인연
旣緣何不?衰前  (기연하불진쇠전) 피치 못할 인연이면 젊어서나 만나지,
夢猶說夢眞安在  (몽유설몽진안재) 꿈속에서 꿈을 꾸니 진실은 어디 있나
生亦無生死固然  (생역무생사고연) 살아도 산 게 아니요 진실로 죽은 것을,
水樹月明舟泛泛  (수수월명주범범) 달 밝은 수정에 배는 둥둥 떠 있고
山房酒宿鳥綿綿  (산방주숙조면면) 술 익은 산방에 새는 지저귀는데,
誰知燕子樓中淚  (수지연자루중누) 누각에서 홀로 우는 남모르는 이 슬픔
?遍庭花作杜鵑  (선편정화작두견) 방울방울 뿌리는 눈물 두견화로 피어나리.
                                            - 칠언배율(七言排律)

  그들이 깊은 인연을 맺은지 15년이 되는 1845년 이른 봄 김대감은 92세의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임종시 김대감은 부용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눈을 감았는데, 이때 부용의 나이는 겨우 33세였다.
  부용은 고인과의 인연을 회상하면서 일체 외부와의 교류를 끊고, 오로지 고인의 명복만을 빌며 16년을 더 살았고, 그녀 역시 님을 보낸 녹천당에서 눈을 감았다. 그녀는 임종이 다가오자 유언으로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대감마님이 있는 천안 태화산 기슭에 묻어주오.` 라며 다시 못 올 불귀의 객이 되었다.
  김부용의 묘소는 천안 광덕사 경내를 지나서 광덕산(태화산)으로 오르다보면 우측 계곡 건너의 양지바른 곳에 있다. 시인 김부용의묘. 그 신분이 후실이었기로 사랑하는님과 합장의 예우는 받지 못하였지만 지아비로 모시던 그 사람의 바로 아래에 오두마니 거하고 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것, 그 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당대의 시인 강참판은 일찍부터 부용의 시를 감탄하여 오던지라 부용을 직접 만나자 기쁨에 취해 밤 늦도록 시로 화답하였다. 그러나 헤어질 때가 되자 그는 연모의 정이 솟구쳐 떠나가는 부용을 배웅하며,
나의 혼은 그대를 좇아가고 (魂逐行人去)
빈 몸만 문에 기대어 섰오  (身空獨依門)
라고 읊었다. 어쩔 수 없이 보내야 하는 자신의 안타까운 심정을 솔직히 노래한 것이다.
  그러자 부용도 화답하기를,
나귀 걸음 느리기에 내 몸 무거운가 했더니 (驢遲疑我重)
남의 혼 하나를 함께 싣고 있었오 (添載一人魂)
  이만하면 사내들의 애간장을 녹이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희제(戱題)
연꽃이 곱게 피어 늪 가득 피었고야
사람들은 이르기를 나보다 곱다 건만
내 오늘 우연히 둑 위를 거니는데
어찌타 꽃 안보고 모두들 나만 보나.

연당에 꽃이 활짝 피어 연못 전체가 한 송이 꽃 인양 아름답다. 부용은 아름다운 부용당을 거닐다가 문득 저쪽 연당 가에서 연꽃을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이 ‘기생 부용보다 꽃 부용이 더욱 아름답구나.’ 하는 장난 섞인 소리를 듣고 즉흥적으로 읊조린 시가 바로 위의 ‘희제(戱題)’라는 시(詩)이다. 참으로 기발한 착상으로 당당하고도 여성다운 섬세함을 읊은 시이다.
  부용을 일러 황진이, 매창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시기(詩妓)로 꼽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청화
카~~ 매일 폭염속에서 견딜수 없어 맥주한잔씩 꼭 마셔가면서도 저런 발상한번 못 해 봤고만, 역시 인물은 다른가 봅니다. 마시면 마실수록 취하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머리는 더욱 탁해 지니 이를 이를 어쩐다고라...... 존 시 감상 했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