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감

가람 이병기 - 난초

1
한손에 책을 들고 조오다 선뜻깨니
드는 볕 비껴 가고 서늘 바람 일어오고
난초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


2
새로 난 난초 닢을 바람이 휘젓는다
깊이 잠이나 들어 모르면 모르려니와
눈뜨고 꺽이는 양을 참아 어찌 보리아

산듯한 아츰 볕이 발틈에 비쳐 들고
난초 향긔는 물밀듯이 밀어 오다
잠신들 이 곁에 두고 참아 어찌 뜨리아


3
오날도 온종일 두고 비는 줄줄 나린다
꽃이 지든 난초 다시 한대 피어나며
고적한 나의 마음을 저기 위로하여라

나도 저를 못 잊거니 저도 나를 따르는지
외로 돌아 앉어 책을 앞에 놓아 두고
장장히 넘길 때마다 향을 또한 일어라


4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짓빛 굵은 대공 하얀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디 그 마음은 깨긋함을 즐겨하여
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


<문장>3호, 19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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