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화에 반영된 유교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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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문인화의 발생
한국 문인화의 의식은 고려 중엽부터 시작되었다. 고려 초기 불교의 국교사상이 가져온 많은 폐습으로 불교가 차차 국민들의 배척을 당하면서 고려 중엽부터 점차 유교학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중국에서는 유교와 함께 송학이라는 주자학이 성행하여 우리 나라의 지성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어 유교가 더욱 성행하게 된 것이다. 유학자의 근본 정신은 한가한 정서와 참선하는 교양, 그리고 청빈한 생활 속에서 생활하면서 글이나 쓰고 시나 지으면서 붓과 먹을 항상 가까이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유학자 또는 유묵이라고 한다. 그래서 문인화를 일명 유화(儒畵)라 부르기도 한다.
한국의 문인화는 고려의 유학자들에 의하여 점차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회화사상으로 고려를 살펴보면, 문종(文宗, 1019~1083)때부터 명종(明宗, 1170~1197) 시대에 회화가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는 고려의 학자들이 중국의 영향을 받아 그림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인종(仁宗, 1109~1146)과 명종은 직접 그림을 그리기도 하여 당시의 상류계급들이 그림을 향유하고 또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무렵 고려의 지성인으로 그림에 관심있는 사람은 김부식(1075~1151), 이규보(1168~1241) 등이 있고 화가로는 이영 등이 있다. 이중 김부식은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송나라 휘종황제가 「추성흔락도(秋成欣樂圖)」를 하사한 일이 있어 희화 교류가 있었으며 또 고려에서는 화가를 파견하여 중국의 그림을 묘사해 오거나 아니면 많은 국고를 들여 구입해 오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회화 활동은 고려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어 이규보 같은 유학자는 그림에 대한 문장이 무려 50여 편이나 된다. 이중 상당한 문장이 문인화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한국적 문인화가 정작 올바로 인식된 것은 고려중엽 이후부터이며 이 시기에 들어온 성리학은 훈고학적 유학에 반대하고 불교의 선종사상을 유교적 입장에서 수용하여 재구성 발전시켜 오다가 뒤에 커다란 문화적 변동을 가져오게 된다. 이와 같은 복잡한 과정을 겪으면서 고려말기를 맞이하고 문인화의 기초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 후 조선조 세종때인 15세기경에 인제(仁齊) 강희안(姜希顔)과 사숙제(私淑齊), 강희맹(姜希孟) 형제에 이르러 문인화의 길이 열렸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조선시대의 인문사상은 조선초부터 억불숭유정책에 힘입어 절대왕권확립을 위해 성리학의 이사상(理思想)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 명분정신을 정립하고 있었고, 권근(權近, 1352~1409), 정도전(鄭道傳, ?~1398) 등은 「'이(理)'란 자연이나 인간에 앞서 존재하는 초자연적인 것으로, 여기에서 물질적 '기(氣)'나 정신적 '심(心)'이 발생하며, 따라서 理는 인간의 정신적․육체적 활동을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15세기의 김시습(1435~1493)가 서경덕(1489~1546)은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전개하였으며 그후 퇴계 이황(1501~1570)은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했고 율곡 이이(1536~1584)는 이(理)와 기(氣)를 다같이 인정하면서 이기공발설(理氣共發說)을 주장하여 성리학적 분위기를 성숙시켰고, 이와 같은 이상들은 곧 문인화를 가장 잘 이해․소화할 수 있는 사상적 배경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2) 문인화의 개념와 사상적 배경
문인화란 작가의 심의(深意)를 자연의 사물에 의탁한 사의(寫意) 위주의 그림을 말하며, 글자그대로는 '문인들이 그린 그림'이나 실제로는 시(詩)․서(書)․화(畵) 세 개 장르를 하나의 화면상에 합일정착시킴으로써 문인화는 삼절(三絶)이라는 특수양식을 가지게 된다. 또한 사의적인 데에 관심을 주로 두면서 기술적인 면에서는 그들의 사상과 감동 및 이념을 간명직재(簡明直載)하게 표현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처음 문인화란 용어가 직업화가에 對한 말로 사용된 것은 동기창의 '화안(畵眼)」'에서 비롯되었지만 문인계급들이 등장하기는 당대의 과거제도가 시행되면서 부터이다.
또한 중국 회화이론의 대학자인 천헝크어는 그림의 화풍과는 상관없이 문인화란 인품(人品)․학문(學問)․재정(才情)․사상(思想)이 들어있는 그림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문인화는 외적인 형태보다는 영적인 형태를 더 중요시하며, 이것은 작가의 성령을 통하여 개성을 표현한 것이요, 그 표현된 개성이 우미하고 맑고 고상하며 청아하고 고고하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따라서 문인화란 작가가 높은 인격과 사상으로 시적인 분위기 속에 흥취된 상태에서 어떤 화풍이나 기교에 구애됨이 없이 맑은 정신상태로 대상을 표현한 그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인화의 정신을 바탕으로 매(梅)․란(蘭)․국(菊)․죽(竹)의 네가지 식물이 각기 함축하고 있는 고유의 장점을 사람의 인품에 비유하여 표현한 것이 사군자화이다. 사군자화는 인격과 깊은 학문을 갖춘 내면적 품격과 자연에 대한 깊은 철학을 반영하고 있으므로, 위에 언급한 내용으로 볼 때 문인화에 있어 사군자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사군자의 발생은 남종문인화가 가지고 있는 불교의 선미(禪味)와 노장의 무위자연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회화정신에, 유교 회화정신이 표현하는 인격수양과 청빈하고 깨끗한 마음가짐 그리고 은일적인 사상이 일치되어 유(儒)․불(佛)․선(仙) 합치의 예술로 승화되어 나타났다. 이러한 사군자의 표현을 사의적인 기법으로 발전시켰으며 사군자가 지니는 서(書)․화(畵)일치성과 상징성은 문인화가 갖는 의의와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3) 문인화속의 유교적 사상
문인화란 학문적 바탕을 둔 풍류인들의 대자연과의 합일 과정에서 흉중의 표현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일명 사대부화 또는 사대부적 문인화라 칭하기도 하는데, 사대부란 중국의 육조시대부터 존재했던 계층으로 송대에 그 활동이 가장 두드러졌으며 '사(士)'란 선비를 뜻하고 중국의 주대(周代)부터 있었던 유가적 의미에서의 사회계급 구분인 사민(四民)중 제일의 계층을 말한다.
따라서 사대부란 글자 그대로 학식을 갖춘 관이(官吏)라는 뜻이며, 유교적 중앙집권의 정치체제와 더불어 이루어진 엄격한 계급사회인 조선왕조에서는 현직 또는 퇴임관료나 지식을 갖춘 사회적 지배층은 그 지위에 합당한 여기(餘技)로서, 또는 스스로 즐긴다는 의미에서 그림을 그렸음은 중국과 별로 다르지 않다. 다만, '스스로 즐긴다'는 의미를 독점할 수 있었던 계층은 반상의식(班常意識)이 뚜렷했던 조선조에서는 생활의 여유가 있었고 높은 학문을 간직할 수 있었으며 자연을 관조하고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사대부 계층만의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사대부화(士大夫畵)' 또는 '사대부적 문인화(士大夫的 文人畵)'라는 어구(語句)가 등장했으리라 본다.
이처럼 문인화란 유교적 사상에 의해 특징지어진 계층에 의해 구분되어져 일부 특권계층에 의해 향유되었던 회화양식을 일컬으며, 또한 그러한 계층에 의해 발전된 양식이란 점에서 그 철학적 내용을 따지지 않더라도 가장 유교적 성격을 많이 내포하고 있는 회화양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문인화․사군자화의 절정기라 할 수 있는 조선시대는 사상적 배경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유가사상에 기본하여 문인화가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그 후 조선시대 말기에는 - 그것이 오늘날에 와서 미술사적으로 어떻게 평가되고 있는가와는 별도로 - 우리 나라 회화사의 큰 정점을 이룬 추사 김정희의 영향으로 서권기(書卷氣)․문자향(文字香)의 화론이 조선 말기 문인화와 사군자의 사상적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조선시대의 문인화는 선배문화로 일축된다고 볼 수 있는 유교문화의 대표적 산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4. 결론
조선시대는 그 이전의 어느 시대보다 더욱 유교의 틀을 확실히 다진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유교를 건국 통치이념으로 하여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확실히 하려 하였으며 그로 인한 중앙집권의 안정을 꾀하려 했던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교는 이러한 그들의 의도를 타당성있게 하기에 충분한 정치이념이었으며 따라서 조선은 그 어느때보다도 신분제도가 뚜렷하게 구분되는 가운데, 신분에 의한 활동 역시 분명하게 구분되고 제한되었던 것이다. 사실, 미술이란 역사이래로 일반 민중에 의해 주도된 적이 거의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조선의 미술이 반드시 유교의 영향에 의해 선비들이 향유할 수 있는 양식으로 발전했다고 하는 것은 일면 무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이는 완전히 다른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그 이전의 미술이 일부 지배계층이나 종교에 의해 향유되고 제작되었던데 반해, 조선시대의 미술은 일부 지배계층이 아니라 선비들의 여기(餘技)로써 대부분의 지식인들에 의해 향유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것이 미술의 대중화라든지 다양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충분히 그렇게 될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 데 한 몫을 하고 있음은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조선의 유교는 대부분 성리학 중심으로 발전하긴 했지만, 두 차례에 걸친 큰 전쟁을 통해 시련을 겪게 되면서 실사구시의 학문인 실학이 생겨나고 그로 인해 미술 역시 다양하고 화려하게 꽃피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는 것이다.
조선의 회화는 이처럼 유교의 사상아래 그 어느 때보다 보수적으로 발전하고 있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로 인해 진취적인 양상을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현재 우리 나라의 미술은 서구미술의 유입으로 인해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는 불과 1세기도 되지 않는 짧은 시기동안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감안해 볼 때, 모든 것이 혼란한 시기임을 짐작케 한다. 따라서 현대에 이어지는 바로 前 시대의 미술을 되짚어 봄으로써, 한국의 미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해 보는 것이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한국 회화는 한국인이 가지는 특성에 의해 나름대로의 독창성과 위대함을 가지고 있다. 조선의 회화는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에게 앞으로 나아갈 바를 일시적이나마 제시하고 있다. 물론 그것이 지속적으로 계승되지 못한 아쉬움이 남지만, 그것을 기반으로 충분히 우리의 독창적 양식을 만들어 갈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유교적 관점에서의 조선회화가 가지는 한계점이 물론 있지만, 그것을 한계로만 단정지을 것이 아니라, 한국 문화가 갖는 특성으로 인식하고 이러한 유교적 정신세계를 오늘날과 같이 가치관이 붕괴되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다시 한번 되짚어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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