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篆刻藝術의 生命이 意味하는 表現形式
白砥
一
藝術作品은 반드시 生命의 意味를 간직하여야 한다. 東西方의 歷代 많은 美學論著 中에 이 問題에 대하여 不同한 方式의 敍述들이 있다. 美國의 現代 美學家인 수산. 랑거는 藝術作品의 生命의 意味를 表現하는 形式을 生命形式이라고 칭하였으며 이런 生命形式은 주로 藝術作品의 有機性에서 表現된다고 하였다. 하나의 藝術品은 필히 自然界 生物의 生命形式과 비슷한 것을 具備하여야 한다. 한편 이러한 비슷함은 살아 있는 有機體의 生命形式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事實上 藝術作品들은 살아 있는 有機體처럼 진정한 이 世界에 生存하여 出生 → 發展 → 消亡 의 過程을 거치는 것은 아니며, 일종의 獨特한 方式으로 자신의 生命 意味를 表現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만약 某種의 創造된 符號(하나의 藝術品)가 사람들의 美感을 發展시키려면, 그는 반드시 感情 있는 形式으로 表現되어야 하며, 반드시 자기가 하나의 生命活動에서의 投影 혹은 符號로 表現되어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자기를 一種의 生命의 基本形式과 類似한 論理的인 形式으로 되도록 하여야 한다.(수산. 랑거)
하나의 藝術品 중에서 어떻게 일종의 有機的인 生命을 具體的으로 나타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은 藝術家들이 心血을 모두 기우려 思考하고 努力하여 表現하려고 하는 課題이다. 아울러 매개의 藝術表現의 이런 有機的인 生命의 形式은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本質的인 것은 藝術에서는 모두 共性을 뛴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것이 마치 사람과 다른 動物들이 자신의 生命의 意味를 表現하는 方式이 다른 것과 같다. 人類는 한 급 더 높은 水準의 사유능력을 갖고 있는 動物로서 生命의 表現過程에서 사람들은 주요하게 智力과 體力으로 자신의 生存을 얻고 아울러 智力이 體力을 항상 超越한다. 智力으로 生存을 찾는 것은 體力으로 生存을 찾는 것보다 가능성이 현저히 높으며, 특히 人類가 文明社會에 들어와서는 더욱 그렇다. 사실상, 사람이 이 世界를 主宰할 수 있는 것도 高度로 發達한 智能 때문이다. 다른 動物을 보면 그들이 生命을 維持하는 方式은 주요하게 그들 자신의 原始的인 生命能力, 즉 强者가 弱者를 대체하는 것에서 온다. 自然에 대하여 그들은 거의 抵抗本能이 없다. 그러나 이런 두 가지 集團들의 生存方式이 이렇게 다르다 하여도 그들 간에는 여전히 相通하는 면이 있으며, 그들은 모두 生長부터 消亡의 과정을 겪었다. 하나의 有機體는 처음에 보기에는 마치 世界上의 제일 獨特하고 個別的인 事物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事實上 그는 根本的으로 일종의 事物이 아니다. 그의 개별적인 獨特한 것과 보통 것과 유사한 生存의 形式은 사실상은 하나의 變化하여 가는 形式이며, 그의 통일적인 整體도 일종의 순수한 機能性의 整體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런 整體 속에 있는 그런 機能性의 結合은 形成할 수 없는 複雜性, 嚴密性과 深奧性이 있다.(수산.랑거). 藝術作品도 역시 이러하다. 만약 藝術作品을 일종의 단순한 存在라고만 한다면 한 폭의 油畵는 마치 한 폭의 畵布 하고도 같다. 書法도 文字와 다름없고 印章도 돌과 다름없을 것이다.
藝術作品의 生命形式은 有機的인 統一性, 運動性, 節奏性과 生長性을 포함한다.
二
篆刻藝術도 例外는 아니다. 篆刻藝術이 生命의 意味를 表現하려면 반드시 이런 生命形式을 具備하여야 한다.
中國의 歷代의 文論 중에서 生命意味와 生命形式의 槪念을 제출한 적은 없으나 相似한 표달 方式은 여전히 存在하고 있었다. 神이라는 槪念은 처음에는 사람들이 崇拜와 迷信의 偶像이었으며 이것이 生命의 매우 이상적인 대체물이 틀림없다. 人類의 사상 중에서 神은 永生한 것이며 제일 왕성한 生命을 가지고 있다. 藝術創作과 審美의 과정에서 사람들은 神을 하나의 藝術品味의 象征으로 비유한다. 이것이 바로 藝術作品이 반드시 具備되어야 할 生命의 意味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소위의 神은 藝術作品 中에서 表現되는 韻, 氣, 意의 槪括이다. <莊子. 天道> 중에서 말한 것처럼: 世之所貴道者書也, 書不過語. 語有貴也, 語之所貴子意也, 意有所隨, 意之所隨者不可以言傳也. 而世因貴言傳書. 莊子는 意를 語로 최고의 境界로 表現하였다. <呂氏春秋>에서는 精氣之集也, 必有入也. 集于羽鳥與爲飛物, 集于走獸與爲流行, 集于珠玉與爲精明, 集于樹林與爲茂長, 集于聖人與爲瓊明, 精氣之來也, 因智而明之. 流水不腐, 戶樞不, 動也. 形氣亦然. 形不動則精不流, 精不流則氣鬱 여기에서 말하는 소위의 精氣는 陰陽을 말하며 陰陽은 生命의 本이고 自然의 物質, 藝術作品들 또한 生命의 本이다. 書藝 篆刻藝術에서 藝術家들은 文字를 완전히 하나의 유기 生命體로 보고 있다. 예를 들면 韋誕이 前人들의 서예를 아래와 같이 評價하였다. 杜氏(杜度)傑有骨力, 而字筆劃微수. 崔氏( )法之, 書體甚濃, 結字工巧, 時有不及. 張芝喜而學焉. 專其精巧, 可謂尊聖, 超前絶后, 獨步無雙. 楊泉의 <學書賦>에는 뱟..其骨梗强壯, 如柱礎之丕期. 라고 쓰여 있으며, 王僧虔의 <又論書>에서는 催, 杜之后, 共推張芝, 仲將(韋誕)謂之聖, 伯玉(衛罐)得其筋, 巨山得其骨. 라고 쓰여 있고 <筆陳圖>에도 善筆力者多骨, 不善筆力者多肉. 多骨爲肉者謂之筋書, 多肉微骨者謂之墨猪. 多力豊筋者聖, 無力無筋者病. 一一從消息而用之. 라고 쓰여 있다. 明代人 楊士修가 쓴 <印母>의 32則에는 더욱 具體的으로 비유되어 있다. 아래에 대여섯 개를 예로 들어보기로 하자.
情 : 情은 겉모습과는 상대적으로 말한 것이다. 소위 말하는 정신을 이르는 것이다. 그렇다고 도장에 정신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정신은 사람에게 있다. 사람에게 정신이 없으면 곧 새겨 놓은 도장에도 정신이 없는 것이다. 사람에게 정신이 없다 함은 숨이 곧 넘어 갈듯 깔딱깔딱하니, 그 손놀림은 굳어서 아둔하여 힘이 가득 차고 충만한 뜻이 없다. 비유하건대 마치 조는 사람이 말하는 것과 같아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정신이 왕성하고 기운이 넘쳐 신명나는 사람은 자연히 열 손가락이 날개와 같으며 한 획을 새겨도 생기 박동하여 금태가 斷裂하는 듯 광망이 비동하게 한다.
活 : 縱으로 새기는 그 기세는 그 모양이 生動하여 畵龍点睛 즉, 완성된 용이 승천하듯 곧 날아가야 한다. 물을 그린다면 네 벽이 물에 젖어 우르르 붕괴하는 것 같아 참으로 붓끝에서 불꽃이 퉁기고 칼끝이 날개 짓을 해야 한다.
轉 : 縱으로 긋는 획의 流弊는 곧은 데 있다. 곧음은 너무 단정하여 감정이 결여됨이다. 轉이란 서로 떨어졌지만 멋이 있고 뜻이 있는 것이다. 인장 전체를 놓고 말하면 반듯이 한자 한자 글자끼리 서로 거리 간격을 돌아보고 맞추는 것이고, 한 글자를 놓고 논한다면 반듯이 한 필획 한 필획이 서로 거리 간격을 돌아보고 均衡을 맞추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 필획의 시작과 마무리가 서로 살피며 均衡을 고려하는 것이니 소위 말하는 步步回頭라 즉,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마다 뒤를 돌아보며 보조를 맞춤과 같고 千里도 똑 같은 보조로 걷는다 하여 千里一曲이라고도 한다.
嬌 : 교태롭다 함은 白髮이 성성한 蒼老와 대칭하여 일컫는 말이다. 刀筆이 蒼老하다 함은 마치 千年古木과 같이 형상이 여위고 앙상함이다. 교태롭고, 부드럽다 함은 落筆이 부드럽고 고우며 運刀가 맑고 깊지 않아 소박하기가 西施 ( 春秋時代 월나라의 美女 로 평소에 화장을 안함 )의 담박한 자태같고 요염하기가 양귀비의 醉舞와 같음이다.
豊 : 纖利, 즉 실올같이 가늘고 예리한 線, 劃이 單薄한 것은 豊하지 못한 것이다. 豊한 것은 筆端이 진하고 중후하며 刀下가 둥글둥글 풍만하여 皮가 骨을 싸지 않고 있는 모양이 되어서는 안 된다.
楊士修의 <印母> 32厠은 篆刻藝術이 반드시 生命의 意味를 지녀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生命意味를 表現할 수 있는 生命形式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수산. 랑거의 生命形式 이론과 異曲同工하다. 中國의 印論史에서 印章의 生命意味에 대한 추구와 生命形式의 表現에 대하여 篆刻家들과 印學家들은 많은 멋진 논설들을 남겼다. 明代의 徐上達은 <印法參同>에서 喩言, 參互, 摹古, 提要, 章法, 筆法, 刀法 등 여러 면에서 상세한 分析을 하였다. 이런 것들의 대부분은 篆刻의 技法으로 되었지만 그 중에도 生命形式에 대한 槪括도 적지 않다. 사실상, 技法의 高妙는 生命意味가 表現하는 주요 條件이다. 本文은 이런 각도에서 印章의 生命의미의 기본형식의 表現에 대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2.1 章法의 有機的 構成
西洋의 藝術作品 중에서 藝術家들은 기본상 원만하게 章法의 구조를 表現하였다.
그러나 하나의 技法으로 이것은 상대적인 높이에서 인식되지 못하는가에 따라서 전체 藝術作品의 生命形象의 表現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徐上達은 印章의 章法에 대하여 樂竟이 章이고 文采가 章이며, 이것을 章法 이라고 한다면 전체 印을 빛낼 수 있는 것을 말한다. 印내에 있는 글자라면 모두 같은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과도 같으며 共派同流 하여야 하고 相親相助 하여야 하며 方圓의 不合이 없어야 하고 행열의 可觀이 있으며 신이 着하는 곳에는 당연히 원래의 정밀함을 얻어 擅揚하여야 하고 자기 마음대로 주장을 세워서는 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을 알고서야 章法을 論할 수 있다. 고 말하였다. 章法은 마치 하나의 有機體처럼 그 중의 매개의 文字, 매개의 筆劃, 이런 筆劃을 조직하는 매개의 운동 등 모두 有機的인 統一體이다. 만약, 그 중의 어느 하나의 構造要素가 문제가 있다 하여도 모든 章法이 協調를 이루지 못하며 生命이 유곡된다. 이런 有機體를 구성한 構造要素가 다르면 사람들에게 주는 生命感受도 다르다. 마치 우리들이 사람을 키가 크다 작다, 뚱뚱하다 여위다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生命體를 구성한 元素가 다르다는 것이다. 印章은 方寸間의 藝術이기는 하지만 하나의 작은 곤충과 같이 印章의 生命體는 形容하기 어려운 複雜性, 嚴密性과 深奧性을 간직하고 있다. 모든 章法에 대하여 투철한 이해가 있으려면 반드시 그를 해부하여 分析을 실시하여야 그의 구성 원리를 알 수 있다.
2.1.1 平衡對稱
만약 우리들이 自然界 중의 事物들을 자세히 관찰한다면 우리들은 아래의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生命을 갖고 있는 自然物(生物)이든 모두 平衡과 對稱의 特徵을 지니고 있다. 사람은 5관으로부터 손발에 이르기까지 모두 對稱으로 存在하고 있으며, 나무 잎도 맥락이 對稱으로 분열되어 있다. 對稱은 平衡이 될 수 있는 주요한 方式이다. 세계의 形成과 發展은 모두 하나의 平衡의 姿態로 始終一貫할 것이며, 만약 어느 時刻에 이런 平衡을 상실한다면 自然히 質的인 變化를 이르킬 것이며 더 나아가 사망에 이를 것이다. 平衡對稱은 自然初有의 形式이며 일종의 美의 表現이다.
印面의 章法上에서 平衡對稱은 印章의 美感의 제일 基本的인 形式이며 또한 인장 章法의 生命意味의 제일 基本的인 方法이다. 이러한 제일 基本的인 것은 아래의 形式으로 表現된다.
(1) 文字 자체의 對稱性
(2) 文字의 對稱排列
(3) 界格의 平衡作用
(1) 文字 자체의 對稱性
秦漢 以前의 璽印은 당시에 文字 사용에서 篆書만 사용하였기에 印面의 文字는 모두 篆字이다. 漢代 이후 다른 글자를 入印한 것은 있으나 수량은 얼마되지 않았으며 일종의 현상으로 볼 수는 없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실용적인 도장 외에는 우리들은 여전히 篆文으로 入印한다. 때문에 印章藝術은 또한 篆刻예술이라고도 할 수 있다.
印章의 紀元 문제에 대하여 印學界와 考古界에서는 어느 정도의 실물 증거가 있지만,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느 時代의 것인지에 대해서는 통일된 定論이 없는 상태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最古의 璽印은 安陽에서 출토한 3건의 銅璽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西周의 유물이라고 보고 있으나 믿을 만한 과학적인 근거는 없다. 이 3건의 銅璽 중에서 2개의 印文에 현저한 對稱性를 발견할 수 있다. 文字 자체의 對稱의 특징은 印面의 章法對稱性을 구성 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要素이다.
만약 우리들이 다시 한번 溯本求源(근본을 거슬러 올라가 근원을 찾음)을 하여 漢字의 최초의 形式인 象形文字를 分析한다면, 이런 對稱을 갖고 있는 많은 예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初期의 文字畵는 自然 物體의 형상 특징에 근거하여 묘사된 것이고,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自然界의 生物들은 모두 對稱의 특성을 띠고 있으며 自然의 물질들을 묘사한 文字畵들도 自然히 모종의 對稱이 存在할 수 있다. 象形文字 및 후에 있은 指事, 會意 등, 象形文字 중에는 대량의 對稱文字 들이 있다
秦이 中國을 통일한 후, 丞相 李斯는 6국의 文字에 대하여 整理를 실시하였으며, 구조상에서 整齊劃一하게 되어 文字의 對稱性은 더욱 돌출하였다. 그 외에 制印工藝는 秦代에 들어 와서는 상당히 발달하였으며 사람들이 印面文字에 대하여 특히 裝飾을 원하였다. 이런 裝飾은 구조상에서 整齊劃一과 平衡對稱으로 表現되었다. 우리들은 지금 美術字를 일종의 非藝術性의 구조문자로 칭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平衡對稱의 특성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상에서 사람들이 최초로 美에 대한 의식이 있기 시작하면서 부터 이런 整齊劃一과 平衡對稱을 추구하고 있었다. 文字의 演變史上에서도 역시 이러하다. 漢字가 藝術化가 되기 전에는 文字의 美化가 주요하게는 線의 平直化, 對稱化로 表現되었었다 즉 조건을 具備한 文字라면 일률로 對稱化 하였다. 小篆이 바로 일종의 전형적인 對稱文字 (모든 小篆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이다. 우리들은 秦代의 遺石에서 예를 들면 琅耶台刻石 등과 小篆字의 基體石鼓文에서 이런 특성을 感受 할 수 있다.
印面文字(특히 秦漢 및 그 이후의 印章 )들을 보면, 이런 對稱性이 더욱 강렬하다. 印章은 書藝作品처럼 長篇으로 쓸 수 없고 통상적으로 璽印은 몇 글자로만 되어 있기 때문에 對稱性이 특별히 강조되는 것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다. 한 폭의 多字의 書藝作品 중에서는 이런 對稱性이 현저히 감소된다.
(2) 文字의 對稱排列
헤겔은 이전에 形式은 그런 최고 外在의 抽象性 즉 定性의 一致性 (整齊一律이 마치 直線, 立方體 등과도 같음)에 영원히 정지되어 있어서는 되지 않는다. 一致性과 不一致性은 상호 결합하여 차별이 이런 단순한 同一에 뛰쳐 들어가 이를 파괴하여 平衡對稱을 生成한다. 고 말하였다. 戰國時代의 古璽는 璽印의 文字가 大篆이고 字形이 紛繁複雜 하였으며 또한 많은 異體字가 있었기에 印面의 章法은 雜亂하고 마치 靑銅器銘文과 같이 散落無法하다. 後世들은 이것을 自然錯落하고 活潑可愛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審美意識에서 볼 때, 이는 하나의 美의 形式이 아니며, 그저 任意로 排列했을 뿐이다. 예를 들면 白文官印 중에서 印面文字의 排列은 그저 地域과 職官을 分行排列한 것이다. 이런 원인 때문에 어떤 印面의 疏密關係는 너무도 심하여 整體의 印面이 상호간에 협조가 되지 않았다. 秦代以後, 小篆體가 入印함으로서 그 시기에 또한 字體上의 方折化 때문에 印面文字의 對稱性이 십분 분명하여졌다. 매 字가 차지하는 공간이 均等하여졌다. 明淸 篆刻이 復興한 이래, 印面空間의 布置上 대다수가 秦漢의 舊法과도 비슷하다. 사실상 이런 平均적인 布白으로 인하여 모든 印面의 疏密變化가 더욱 강렬하게 되었다. 漢字의 筆書가 繁簡不一(번잡하고 간략함이 하나 같지 않음)하기에 설령 차지하고 있는 空間이 같다고 하여도 모든 章法上에서 이런 단일적인 平均對稱을 타파하고 疎可走馬, 密不通風 의 藝術效果에 달하였다.
文字布白의 對稱性은 또한 線의 粗細均等에서 表現되며, 일반적으로는 하나의 印 중에 線의 粗細는 비교적 均等하다. 文字를 쓰는 과정에서 남아 있는 습관(예를 들어 戰國秦漢古璽 중의 塊面筆畵 및 天發神讖碑의 尖頭)외에 최초의 印工들은 始終 粗細一致를 특별히 추구하고, 오늘 우리들이 볼 수 있는 筆劃에서 粗細懸殊한 印章은 대다수가 - (박륵)의 원인 때문이다. 특히 朱文으로 된 小璽는 線의 均衡이 極致에 달한다. 이 후의 篆刻은 이런 均衡을 타파하여 篆刻家들은 粗細變化가 강렬한 線을 동일한 印에 도입하여 印章의 多樣性과 活潑性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線은 具備에서 粗細不一하지만 그러나 그의 均衡의 變化는 실제는 여전히 平衡의 특징을 具備하고 있다.
(3) 格界의 平衡作用
<說文>에는 界라는 것은 곧 竟이다. 라고 쓰여 있으며 段注에는 竟은 俗本에서는 境이다. .... 引申하여 광범위한 邊竟을 칭한다. 界를 介라고 함은 畵이며, 畵는 介이다. 마치 밭 田字의 四界하고도 같다. 聿은 그리는 도구를 말한다. 介界는 각기 古今字이다. <爾雅>에서는 疆, 界, 垂이다. 곧 - (계광)이며 印章 중에서는 소속을 말한다. 古璽印은 거의 모두가 官私印이다. 때문에 印 외에 하나의 계광을 그려 이것으로 소속을 표시한다. 秦 以前의 古璽는 대다수의 계광이 있다. 이 계광은 소속을 意味할 뿐만 아니라 印章章法上에서 하나의 平衡作用도 한다. 마치 하나의 城牆처럼 牆內의 사람들은 安居樂業하고 事田從桑하며 平和共存하고 혼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秦代 까지는 入印文字들의 方折化 때문에 筆直한 線 자체가 하나의 계광작용을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사람들은 점차적으로 - (변광)을 없앴다. 그러나 이런 것은 단지 白文印 중에서만 볼 수 있으며 朱文印章은 후에 와서도 여전히 계광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주요하게 視覺感受의 차이 때문에 白文印은 紅底白字로 종이에 찍어도 여전히 계선을 보유하고 있다. 朱文은 白底紅字로 인세는 邊界가 意味 없어졌다.
변광 이외에 또 하나의 界格이 있다. 예를 들면 日田 등, 印面章法상에서는 마찬가지로 平衡作用을 하고 있다.
2.1.2 和諧
和諧는 平衡對稱보다 한층 더 높은 抽象形式이며 藝術作品이 人類知識感受中의 적응도를 말하다. 통상적으로 이는 일종의 自然規律에 부합되는 사람의 審美經驗의 습관적인 感覺을 말한다. 원시 自然界의 일체 事物은 모두 和諧하다. 이는 自然物들이 始終 規律的으로 存在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公轉하는 것, 公轉하면서 동시에 自轉하는 것, 달은 지구를 둘러 싸고 도는 것 등, 自然界의 생태가 일단 인위적으로 파괴된다면 自然은 和諧하지 못할 것이고 水土流實, 動物絶種, 人口暴增 등의 現象이 있을 것이다. 和諧는 또한 하나의 習慣感受에서도 表現된다. 우리들은 처음 생소한 지역에 가면 자기가 當地의 風土人情에 적응되지 않는 것을 感覺할 수 있으며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이런 不和諧한 感覺이 점차 줄어 들거나 없어진다. 각종 不同한 要素들은 하나의 統一體 중에 상존할 수 있으며 일종의 協調一致가 表現 되며 이것이 바로 和諧이다.
헤겔은 自然美의 抽象性을 論說 할 때 和諧를 抽象統一의 최고 形式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그가 인식하고 있는 和諧는 協調一致 뿐이며 어느 하나의 차이가 있는 면이 있어서는 되지 않고 자신의 자격으로 片面的으로 보여 주고, 그것이 아니면 곧 協調一致를 파괴할 수 있다. 즉 和諧의 파괴라고 하였다. 우리들이 오늘날 認識할 수 있는 和諧는 이미 이런 헤겔의 이런 관념을 초월하였다. 藝術作品 중에 藝術家들의 감정의 表現과 作品의 形式은 高度의 통일에 달하였으며, 이것이 바로 藝術作品의 協調一致이다. 形式이 어떻게 대립되며 그 주체의 사상과 영혼을 表現한다면, 그것이 바로 최고의 和諧이다. 이런 高度의 和諧가 바로 藝術作品章法의 生命意味를 表現하는 最高形式이다.
和諧는 通俗的으로 말하면 바로 편안함이고 딱 맞춤과 알맞음을 말한다. <呂氏春秋. 仲夏紀>에서 適音을 말하면서 무엇을 適이라 하는가? 衷音의 適을 말한다. 무엇을 衷이라 하는가? 크게는 鈞을 추월하지 않고, 무거움에는 石을 초과하지 않으며 小, 大, 輕, 重의 衷이다. 黃鐘의 宮은 音의 本이며 淸濁의 衷이다. 衷한 것은 適하기도 하다. 적당히 듣고 적당히 하는 것이 和이다. 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適衷은 단지 和諧의 일반적인 表現形式이다. <禮記, 致中和>篇에서는 喜怒哀樂을 表現하는 것은 말하는 중에 있고 表現을 한다면 모두 中節하여야 하며 이것을 和라고 한다. 中이라는 것은 천하의 大本이며, 和라는 것은 天下의 道에 달하는 것이다. 中和를 이루는 것은 天地의 위치이며 萬物을 육성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中和에는 실제로는 和諧의 두 개의 意味를 포함하고 있다. 즉 中은 萬物이 모두 合하여 協調一致를 이루는 것을 말하고, 和는 대립면의 相互統一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노자가 말하는 大音希聲, 大象無形 이 바로 和의 形象된 表現이다.
篆刻藝術의 章法美의 최고 단계가 바로 和諧이며 中和이다.
袁三俊은 <篆刻十三略>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章法은 반드시 次第相尋하고 脈絡相貫 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廬에 자리를 잡으려면 堂戶庭을 제거하고, 자기의 위치가 있을 것이며, 대략 俯仰相背 간에서 一氣貫注하는 것을 바라보고 顧盼生姿하고 宛轉流通하다는 감을 얻을 수 있다. 徐郡도 말하기를 章法은 마치 名將이 布陣하는 것과도 같이 首尾相應하고 奇正相生하며 起伏相背하고 字勢에 따라 錯綜離合하고 回互偃仰하며 불가조작하고 天然成妙하다. 여기에서 말하는 首尾相應, 奇正相生 , 起伏相背 가 바로 篆刻藝術 章法의 生命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아래에 몇 개로 歸納하여 敍述하기로 하자
(1) 疏密有理, 戰國時代의 古璽는 疏密變化가 매우 크며 대다수가 信手이지만 準則이 없고 自然生動하다. 특히 朱文小璽는 疏密變化가 더욱 天成이다. 明淸이래 疏密은 理性的으로 처리된다. 淸代晩期의 趙之謙, 吳昌碩, 黃牧甫 및 현대의 齊白石, 來楚生, 鄧散木 등 여러 대가들의 印章은 아주 좋은 典範들이다.
(2)
(3) 計白當黑 計白當黑은 中國藝術의 특유의 수법이다. 莊子는 虛室生白 , 唯道集虛 라고 말하였다. 달중광은 虛實相生, 畵가 없는 곳이 모두 妙境이다. 라고 말하였다. 이런 空白은 자신의 意義를 意味 초월하였다. 印學의 格言인 疎可走馬, 密不透風 의 意味가 바로 반드시 虛實相生하여 篆刻藝術의 生命의 情調와 意境을 구성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4) 方圓兼備, 方者勁節, 圓者宛通.
하나의 印이 方圓을 모두 얻는다면 氣色이 靈活하고 可愛할 것이다. 혹은 方字圓筆하
고, 혹은 圓字方折하며, 혹은 內方外圓하고 혹은 內圓外方하며, 혹은 界格方正하고 文字는 圓轉하며 혹은 圓邊에 方文하기 때문에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다.
(5) 參差縱橫
參差는 字와 字間에 上下左右에서 顧盼揖讓하고 自然呼應하며 血肉相連하여 印面의
整體가 一氣呵成하여 背離하는 감이 없다.
(6) 變形合度
篆文이 入印하는 것에는 增減하는 정도가 印面에 합치되는 것이다.
또 다른 한 종류는 增損이 없으나 結字上에서 常態를 뛰어 넘어 혹은 位置를 옮기고
혹은 疏密이 거꾸로 되며, 筆劃이 적은 곳에 더욱 疎하고 繁한 곳에 密하다.
2.2 線條의 生命感
篆刻藝術의 線條는 書法藝術의 線條와 같이 동일한 族에 속한다. 이들은 篆刻藝術과 書法藝術의 基本 言語를 構築할 뿐만 아니라 作家의 感情을 전달하는 역할도 한다. 한 건의 篆刻作品 혹은 書法作品을 감상하면 우리들이 우선 感受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線條이다. 이런 線條는 西洋 繪畵중의 素描의 線條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線條의 기능에 대하여 매우 注重하는 中國寫意畵도 線條의 含意는 書法篆刻藝術의 線條와도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篆刻을 創作하는 과정에서 客體(入印文字)의 局限性 때문에 作家가 가지고 있는 線條의 感情이 항상 書法作品처럼 그렇게 淺顯히(書法藝術 중에서 최고의 경계에 달하는 線條도 역시 深奧莫測하다). 表現되는 것은 아니다. 書法作品 중, 線條는 書寫하는 字體의 變化에 따라 變化한다. 篆刻은 圓通하고, 隸書는 凝重하며, 楷書는 肅穆하고, 草書는 飛動하다. 그러나 篆刻創作表現의 객체는 단지 篆字 하나 뿐이다. 篆字중의 구성요소는 여전히 적지 않지만 線條의 表象에서 보면 書法作品과 같은 豊富한 다채로움에는 전혀 미치지 못한다.
한편 線條는 단지 일종의 외부 形態의 變化만 있는 것은 아니다. 書法篆刻藝術의 線條에는 일종의 內質의 生命活動도 存在하고 있다. 이러한 內質운동이 線條의 全美境界를 창조하였다.
2.2.1 線條 외부운동의 表現形式
前人들은 적지 않은 서예를 배우는 과정에서의 論點들이 있다. 예를 들면 <書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分布를 처음 배우면 平整을 추구하고 平整을 얻은 다음에는 險絶을 추구하고, 險絶을 얻은 다음에는 다시 또 平整으로 돌아온다. 劉熙載도 高論이 있다. 서예를 배우는 사람은 처음에는 不工에서 工을 추구하고, 다음에는 工에서 不工을 추구하며, 不工하는 것이 工의 극에 달한 것이다. 線條의 生命의 意味를 表現하려고 하자면 반드시 먼저 外動을 추구하여야 하며, 外動을 얻어야 內動의 도리를 알 수 있다.
(1) 文字 構造가 표시하는 운동
線條의 제일 직관적이고 제일 간단한 형상은 바로 直線이다. 이것은 하나의 生命의 基線이다. 어떤 곡선이던 모두 直線 變化의 結果이다. 선이 아직 生成되기 전에 그것은 점에 불과하며 이런 점은 그때까지 生命運動을 具備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어떤 点이건 모두 線으로 될 수 있는 可能性을 지니고 있다. 点 자체가 지니고 있는 靜態가 파괴 된 후 運動이 곧 生成된다. 点의 內力이 팽창하면 面이 되고, 外力 혹은 內力의 趨動하에 일정한 방향으로 延伸하면 線이 되는 것이다. 書法篆刻藝術의 線條는 실질상에서는 点이 생성한 面과 線이 운동과정에서의 混合體이다.
漢字의 書寫에서 点은 筆이 종이에 닿는 그 순간에 형성된 하나의 符號이며 따라서 文字의 構成順序에 따라 운동하여 面 이 된다. 漢字 槪念 중의 点 은 일종의 線의 形式이다. 이런 順序대로 조직된 構造는 文字 자체가 일종의 운동기능을 具備하였다. 우리들은 친히 書法篆刻藝術의 創作을 보지 않았지만, 그의 구조특성으로부터 우리는 思索이 필요 없이 線條의 운동과정을 알 수 있다. 漢字構造의 複雜性 때문에 線條가 매개 文字를 構築함에 있어서 不同한 절조의 운동을 보이고 있다. 각종 不同한 절조의 운동이 같이 조직되어 漢文字의 자체의 美를 형성한다. 이런 美의 특성은 書法篆刻藝術美를 구성하는 요인이다.
(2) 曲線의 美
曲線이 아름답다는 것은 완전히 曲線이 表現하는 動感이 直線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영국 畵家 허카즈는 線條를 直線, 圓弧線, 波狀線, 蛇形線 등 몇 개 종류로 분류하였으며, 마지막 세 개 종류(曲線)가 直線보다 裝飾性이 더욱 뚜렷하다고 하고, 제일 아름다운 形體에는 直線이 제일 적다. 모든 直線은 길이에서 좀 다를 뿐 裝飾性은 최소이다. 고 말하였다. 시러는 <論美書簡>에서 直折線과 波狀線에 대하여 비교를 하였다. 이 두 선의 차이점은, 첫 번째 것은 徒然히 방향을 바꾸는 것이고, 두 번째 것은 不知不感 중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단지 審美의 感覺으로 말하면 이 두 종류의 線이 不同한 屬性을 가지고 있기에 그들의 효과도 역시 같지 않다. 사람들의 위 혹은 아래로의 뛰는 운동은 반드시 自然的이고 人爲的인 강제적 힘에 의거하여야만 완성 할 수 있으며 위로건 아래로건 운동의 방향은 모두 의미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외에 또 하나의 운동이 있는데 그의 방향은 처음 시작부터 무슨 규정을 받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운동은 우리에게는 自願的인 운동일 것이다. 우리는 波狀線에서 이러한 운동을 체득할 수 있다. 때문에 아래의 이 線은 자체의 자유로 위의 線과 구별할 수 있다, 당연히 자유의 線條는 방향이 규정된 線條보다 더욱 同感이 있다.
春秋戰國時代, 文字의 구조는 완전히 平直한 자태에서 벗어 나지 못했지만 사람들은 이미 운동에 대한 추구를 습득하였다. 적지 않은 이 시기의 靑銅器 銘文에서는 線條上에서 이미 인위적인 曲化를 表現하였다. 漢私印 중의 蟲鳥篆이 바로 이것을 意彷한 것이다. 이런 印章은 거의 모든 筆劃를 曲線化 하였으며 魚鳥의 頭形을 裝飾으로 文字에 쓰여 넣었다. 그리하여 印面은 마치 龍이 날고 鳳凰이 춤을 추는 듯 하다. 唐宋의 官印에 와서는 線條의 曲疊이 특별히 강조 되었고 하나의 간단한 直線筆劃이 盤繞하여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여서 九疊篆의 美稱이 있다. 만약 우리들이 印章의 다른 要素들을 고려하지 않고 단지 이러한 屈曲多疊의 篆文만 감상한다면 이를 일종의 美의 향수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의 印章 중에서 단일적으로 曲化만 강조한다면 外觀形態의 최대의 動感을 얻을 수 없다. 단지 平直한 線條와 서로 조합을 이룰 때에야 그가 더욱 아름다우며 운동감도 더욱 강렬하다. 한 폭의 白色이 만약 회색으로 된 밑 바탕에 있다면 그가 얼마나 흰지를 나타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일단 黑色의 밑 바탕에 놓인다면 그가 사람들에게 주는 白色 感覺은 극에 달 할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視覺效果이다. 線條의 動感을 얻으려면 對比를 강조하는 것이 제일 效益이 있을 것이다.
(3) 粗細變化
秦漢 더욱이 宋元까지의 印章은 제작수단의 원인 때문에 入印文字의 線條는 대다수가 粗細均等하다. 우연히 몇 개의 匠心을 들인 것들이 있지만 그러나 전체적인 面貌를 改變하지는 못한다. 오늘날 본 粗細의 효과는 대다수가 風化 때문이다. 理性的으로 線條의 粗細變化를 美의 요소로 印章에 용입한 것은 明代中葉 이후의 일이다. 文人들이 印章에 대한 흥취가 날로 增加하여 印章은 이미 실용의 기능을 벗어나 藝術의 門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石料의 松脆한 특성은 文人들로 하여금 스스로 칼를 들어 돌을 팔 수 있었고 刀法이 점차 성숙한 기초위에서 線條의 粗細變化를 추구하는 것이 篆刻가들의 열중하는 과제도 되었다.
線條의 粗細變化는 隣近筆劃의 粗細對比와 동일한 筆劃의 粗細不一을 말한다. 많은 印章들은 동시에 이 두 가지의 變化를 表現한다. 篆刻家들은 古代 泥封效果와 박륵하여 생긴 自然變化를 理性的으로 처리하여 線條의 美感을 대대적으로 豊富히 하였다. 浙派의 印章은 대체로 동일한 水準에서 粗細를 추구하고 있으며 그들이 칼을 쓰는 것이 마치 行筆과도 같으며 筆法 중의 提, 按, 頓, 挫를 刀法에 融入하여 線條가 일종의 澁動이 생성하고 刀味도 있으면서 또한 筆意도 있다. 吳昌碩 및 現代의 齊白石, 來楚生, 登散木 등 書藝家들은 殘損效果를 직접 刀法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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