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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2월에 베트남에서 열린 한문교육학회 국제심포지엄에 참석하였다. 당시 발표한 논문은 「서예(書藝)와 한시(漢詩)」라는 제목으로, 최근 집필하고 있는 책의 일부 내용과 문제의식을 진술한 것이었다. 먹과 붓을 이용하여 점(點)·획(劃)·선(線)의 변화와 먹의 농담·명암을 통해 조형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전통 예술을 과거에는 서예(書藝)라고 불렀다. 중국에서는 서법(書法)이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서도(書道)라고 한다. 그런데 최근 서예라는 말은 근래의 조어(造語)이고 서도는 일본에서 만든 말이므로, 중국에서 그러하듯 서법이라는 말을 쓰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통념은 옳다고 할 수 없다.
서예라는 말은 이미 북송 때 황정견(黃庭堅)의 「이강년의 전서에 쓴 발문(跋李康年篆)」에 나온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중기의 이정구(李廷龜)가 말하길 “한호(韓濩)가 세자 시절의 광해군에게 ‘서예’로 총애를 입었다”고 하였다. 심육(沈錥)은 한 조카를 위한 제문에서 “군은 서예에서도 조성(早成)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상정(李象靖)은 퇴계 이황(李滉)이 손수 쓴 『동국명현사적(東國名賢事蹟)』에 발문을 적으면서 “선생께서는 강학하여 도를 밝히시는 여가에 때때로 서예에 완심(玩心)하셨다”라고 언급하였다. 정조대왕의 말씀을 서영보(徐榮輔)가 기록한 글에도 “정명공주는 부인으로서의 덕을 지닌 이외에도 곁으로 서예에 통하였다”라는 말이 나온다.
그런데 서예라는 말이 널리 쓰이면서 그 말이 주희(朱熹)의 언급에서 비롯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였던 듯하다. 즉, 유언호(兪彦鎬)는 「도암유묵병발(陶菴遺墨屛跋)」에서 “주자께서 일찍이 ‘서예는 사람의 덕성에 관계된다(書藝關人之德性)’라고 말씀하셨다. 아마도 붓을 끌어당겨 먹을 치는 것(引筆行墨)은 모두 마음에서부터 말미암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언급하였다.
‘서예는 사람의 덕성에 관계 된다’는 말은 주희가 「한기(韓琦)가 구양수(歐陽脩)에게 부친 서찰첩에 쓴 발문(跋韓魏公與歐陽文忠公帖)」에서 “서찰은 미세한 일이지만 사람의 덕성에 대해 그 상관되는 바가 이와 같은 것이 있다(書札細事, 而於人之德性, 其相關有如此者)”라고 하였던 구절에서 파생되어 나온 듯하다. 그 글을 다시 조금 더 길게 소개하면 이렇다.
한공(韓公)의 서적(書蹟)은 친척에게 준 것이든 천하거나 어린 사람에게 준 것이든 모두 단엄근중(端嚴謹重)하여 이 첩의 글씨와 같다. 결코 한 필(筆)도 행초(行草)의 기세를 지닌 것이 없다. 대개 그 흉중이 안정상밀(安靜詳密)하고 옹용화예(雍容和豫)한 까닭에 아주 잠깐 사이거나 아주 바쁠 때에도 역시 조그만큼도 바쁜 뜻[忙意]이 없었으니, 형공(荊公: 왕안석)의 조요급박(躁擾急迫)함과는 정반대이다. 서찰은 미세한 일이지만 사람의 덕성에 대해 그 상관되는 바가 이와 같은 것이 있다.
현전하는 문헌만을 근거로 본다면, 주희는 서(書)라는 말을 사용하였지 서예라는 말을 사용한 적은 없는 듯하다. 글씨가 사람의 덕성과 관련이 있다고 논한 위의 글에서도 서예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유언호는 주자가 ‘서예’란 말을 사용하였다고 착각한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곧 당시 서예라는 말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주자의 말을 환기하면서 서찰이란 말 대신 서예라는 말을 쓴 것이 아니겠는가?
한편 서(書)의 예술이란 의미에서의 서법(書法)이란 용어는 이미 『남제서(南齊書)』 「주옹전(周顒傳)」에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는 서법이라고 하면, 한 사람의 글씨체나 전범이 될 만한 글씨체를 가리키기도 하고, 글씨의 예술적 기법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정약용(丁若鏞)의 예를 보면, 서법이란 말을 그렇게 세 가지 뜻으로 각기 다른 문맥에서 사용하였다. 곧 「발십세유묵(跋十世遺墨)」에서 정약용은 ‘월헌공(月軒公)의 서법(書法)’이란 표현을 썼는데, 이때의 서법은 한 사람의 글씨체라는 뜻이다. 「기예론(技藝論)」(2)에서는 서법이란 말을 글씨의 모범, 그것도 속류의 모범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다시 정약용은 「발죽남간독(跋竹南簡牘)」에서 오준(吳竣)의 필체를 평가하면서 당대의 ‘서법’에 대해 논하였는데, 이때의 서법은 서(書)의 기법을 뜻하였다.
위의 『죽남간독』 1권은 고(故) 홍문관제학 오준(吳竣) 공의 친필이다. 오공은 특히 필한(筆翰, 편지) 글씨가 좋기로 이름이 났다. 그러나 그의 문장도 넉넉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동주(李東州)[민구(敏求)]가 귀양 갔을 적에 오공이 시(詩)를 보내어 화답(和答)을 요구하자, 이동주가 탄식하기를, “내 인생이 곤궁하구나. 오여완(吳汝完, 여완은 오준의 자)이 시의 화답을 요구하다니!” 하였으니, 이는 동주가 말을 잘못한 것이다. 지금 전하는 오공의 간독(簡牘) 글씨들은 모두가 정밀하고 법도가 있어서 후생(後生)에게 모범이 될 만하다. 근세에는 모두 윤순(尹淳)의 간독을 익히고 있지만, 윤순의 글씨는 각박하여 함축성이 적다. 근세 40년 동안에 걸쳐 서법(書法)이 효박(淆薄)해진 것은 윤순의 글씨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이를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는가 하면, 죽남(竹南, 오준의 호)만이 바로 그 병통을 잡을 수 있는 화타(華佗)ㆍ편작(扁鵲)인 것이다. 그러나 서예(書藝)로 말한다면 윤순이 더 낫다.
민족문화추진회의 번역문을 보면 정약용은 같은 글에서 ‘서법’이란 말과 함께 ‘서예’라는 말을 사용한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나 서예(書藝)로 말한다면 윤순이 더 낫다”라고 번역한 부문의 원문은 “然言之以藝則尹爲長”이므로, “그러나 기예(技藝)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윤순이 더 낫다”라고 고쳐야 할 듯하다.
서도(書道)라는 용어는 『한어대사전(漢語大詞典)』(1990)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고, 모로하시 데츠지(諸橋轍次)의 『대한화사전(大漢和辭典)』(1957년 초판, 1984년 수정판)에는 표제항으로 올라 있다. 일본의 근현대에 만들어진 말인 듯하다. 하지만 우리나라 옛 문헌에서는 서도라는 말이 간간이 나타난다. 조선초의 최항(崔恒)은 「비해당시축서(匪懈堂詩軸序)」에서 “(비해당은) 동방에서 서도(書道)를 흥기시켰다”라고 하였고. 조선후기의 이광려(李匡呂)는 이광사(李匡師)를 위한 묘지명에서 ‘서도의 중흥(書道之中興)’이란 표현을 썼다.
문헌의 인증을 많이 생략하였지만, 이상의 서술만으로도 서예(書藝)·서법(書法)·서도(書道)라는 말이 모두 우리나라에서 사용한 역사적 한자어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2.
논문을 작성하면서 서첩(書帖)을 사진으로 찍은 화보나 도록 가운데 미심쩍은 부분이 간혹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는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의 필적이라고 전하는 「오언절구축(五言絶句軸)」(103.5×57.2Cm 任昌淳 舊藏, 한국미술전집 11, 임창순 편, 동화출판공사, 1975. N78)이다. 이 시축은 현재 호암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시의 내용은 이러하다.
인터넷에 올라 있는 사진은 위쪽과 같다. 미술관측 해설은 이러하다. “본 작품은 그의 장기인 초서가 유감없이 드러난 것으로 활달 분방한 필세가 잘 나타나 있고, ‘봉래산인(蓬萊散人)’·‘양사언인(楊士彦印)’의 도장 2과(顆)가 찍혀 있다.” 단, 사진으로는 도장을 확인할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양사언은 조선 전기 문인이자 서예가로, 형 사준(士俊)이나 아우 사기(士奇)와 함께 문명을 널리 떨쳐 중국의 소순(蘇洵)·식(軾)·철(轍) 삼부자에 견주어진다. 글씨에 뛰어나 안평대군(安平大君)·김구(金絿)·한호(韓濩)와 더불어 조선전기 4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는다.
그런데 이 시축의 시가 과연 양사언의 자작일지 의심스럽게 만드는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필자의 조사 결과, 이 시는 정희득(鄭希得)이 지었다는 「왜놈이 부채를 가지고 와서 시를 써달라고 하기를 마치 얻지 못하면 어쩌나 안달하듯 한다. 모두 12수이다(倭徒以扇求題詩惟恐不得 十二首)」 가운데 제11수와 거의 동일하다. 정희득은 정유재란 때 피랍되었다가 쇄환되어 온 문인이다. 그의 피로(被虜) 사실은 정학규(鄭學奎), 『호산공만사록(湖山公萬死錄)』(1904년 간행 4권2책, 목판본, 서울대 규장각 想白951. 054-J463h)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희득의 『월봉해상록(月峯海上錄)』에는 그 시가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霜餘水反壑 風落木歸山 冉冉歲華晩 昆蟲皆閉關
제1구[기구]의 둘째 글자는 餘가 아니라 降, 넷째 글자는 反이 아니라 返으로 되어있다. 反과 返은 고금자의 관계이자 똑같이 상성(上聲) 완운(阮韻)이다. 이 시를 오언평기식으로 본다면 첫 구 제2자는 평성의 글자가 와야 하므로, 降(去聲 絳韻 ‘내린다’)을 놓을 수가 없고 餘를 써야 한다. 두 글자의 차이는 시상의 전개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 정도라면 시인 본인이나 후대의 정리자가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
하지만 이 시가 만일 정희득이 정유재란 이후 지은 시라고 한다면, 양사언은 이 시를 볼 수가 없었으므로, 이 시축은 양사언의 진적이 아닐 수도 있다. 정말로 난문(難問)이다. 곧, 다음 사실이 의문으로 대두된다.
(1) 호암미술관 소장(임창순 구장)의 전(傳) 양사언 필적이 실제로 양사언의 필적일 경우 : 후대인이 정희득의 『월봉해상록』을 편찬하면서 양사언의 시를 찬입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월봉해상록』에 수록된 정희득의 시는 12수 연작이라고 제목에 명시되어 있어서 후대인의 찬입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2) 호암미술관 소장(임창순 구장)의 전(傳) 양사언 필적이 사실은 양사언의 필적이 아닐 경우 : 곧 양사언이 아닌 다른 사람의 필적을 양사언의 필적이라고 잘못 감정한 셈이 된다. 정희득이 왜인에게 준 12수는 즉흥적으로 지었기 때문인 듯, 근체시의 평측과 맞지 않는 구가 상당수 있다. 정희득 시를 후대인이 베끼면서 서예가가 원래의 시를 오언평기식으로 정돈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정이다.
만일 후자라면 호암미술관 소장(임창순 구장)의 이 시축은 가치를 재심하여야 할 것이다. 인터넷 상의 정보에 의하면 국보급으로 분류해 두고 있다고 하는데(필자의 오인일 수 있다), 이것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 한편 만일 전자라면 『월봉해상록』의 편집 경위에 대해서 의구심을 두지 않을 수 없다. 독자 여러분은 어느 쪽에 좌단하겠는가?
이상과 같은 내용을 논문으로 정리하면서, 앞으로 한문학 연구자들이 서첩·도록의 제작 및 감수에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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