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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簡(죽간)
秦시대 기록물 '竹簡' 2만점 발견(2002.07.17)
중국 진(秦)나라 시대(기원전 3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죽간(竹簡) 2만점이 후난(湖南)성 룽산(龍山)현 리예(里耶) 지역에서 발견됐다고 상하이(上海)의 문회보(文匯報) 등 중국 언론들이 15일 보도했다.
죽간이란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 얇게 쪼갠 대나무에 글자를 써서 여러 개를 엮은 것이다. 중국에서 진대의 죽간이 이처럼 대량으로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문회보는 이 죽간이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수많은 문자 자료들이 소실된 상황에서 진대의 정치·경제·사회 상황을 알려주는 원자료이며, ‘병마용(兵馬俑) 이래의 귀중한 발견’이라고 평가했다. 죽간이 발견된 곳은 후난성과 쓰촨(四川)성의 경계에 있는,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와 한(漢)대에 걸친 성곽 지역이며 이곳의 면적은 2만㎡에 달한다. 수력발전소 건설을 앞두고 발굴 작업이 이루어져 지난 6월 성곽 내 우물에서 생활용품과 함께 발견됐다.
죽간에는 고대의 한자체인 ‘고예서(古隸書)’로 수십만 자가 쓰여 있으며, 대부분은 지방관청 간에 오간 문서로, 군사·수학·관직·민족 등에 관한 내용이라고 문회보는 전했다.
죽간에는 또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던 때의 일들과 ‘4×8=32, 5×8=40’ 등 구구단도 기재돼 있다.
그동안 중국에 전해져온 진대의 죽간은 2000여점에 불과, 진대 역사 연구는 주로 사기(史記)나 한서(漢書)에 의존해 왔다. (池海範기자 hbjee@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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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간이란 대나무를 뜻하는 죽(竹)자와 편지, 서찰, 문서 따위로 옮길 수 있는 간(簡)을 합친 말로, 글자가 쓰인 대나무 조각을 말한다. 종이가 없거나 희귀하던 시절 중국을 필두로 한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대나무나 나뭇조각에다 글을 썼다. 글은 묵과 붓을 이용하거나 칼과 같은 예리한 도구로 새겼다. 비단을 이용한 경우도 있으나, 비단은 그 때나 지금이나 대단한 고가품이어서 사용 범위가 극히 한정됐다. 한국의 공주에서 무령왕릉이 발견되던 1971년, 그 해 12월27일 양쯔강 남쪽 중국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에서 발견된 전한시대 마왕퇴(馬王堆) 무덤에서는 노자의 <도덕경>을 비롯해 책자가 많이 발굴됐는데 그 대부분은 비단 책이었다.
글이 적힌 대나무와 나뭇조각을 중국에서는 흔히 간독(簡牘)이라 부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명칭은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익숙한 용어가 아니다. 왜냐하면 한국과 일본에서는 죽간은 사례가 극히 드물고 목간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그 명칭이 무엇이건 간독 연구는 한동안 일본이 주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에서는 1961년 고대 왕경 유적인 헤이조쿄(平城宮) 터에서 40점이 출토된 것을 시작으로 주로 7~9세기에 제작된 목간이 수십만 점 출토됐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 출토 목간은 20만 점을 웃돌고 있다.
중국에서도 간독이 더러 출토돼 이 분야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기는 했으나 그다지 활발한 편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삼국시대 오(吳) 나라 한 유적지에서만 목간 20만점이 쏟아짐으로써 이 분야 연구는 아연 활기를 띠었다. 고대 기록이 엉성하기 짝이 없는 한국 학계에서는 중국과 일본의 이러한 목간 발굴 성과에 그저 부러운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고학계에 불문율이 있다. 중국과 일본에서 같이 출토되는 유물은 언젠가는 한반도에서도 그러한 유물이 출현한다는 것이다. 불에 지져 그 갈라짐의 모양을 보고 점을 친 도구인 복골(卜骨)이라는 짐승 뼈가 그랬다.
중국이야 갑골문으로 대표되는 복골이 무수하게 쏟아졌고 일본에서도 복골은 꽤 많은 양이 출토됐다. 이러한 복골을 찾지 못한 한국고고학계에도 80년대 초반 마침내 경남 지방에서 복골을 발굴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복골은 주로 영남 지방을 중심으로 더러 출토되고 있다.
목간 또한 마찬가지였다. 1975년 경주 안압지에서 목간 51점이 대량으로 출현했다. 이를 시발로 경남 함안 성산산성과 부여 궁남지, 경기 하남 이성산성 등지를 중심으로 2002년 현재 국내 목간 출토품은 200여 점을 헤아리게 됐다. 이로서 한국 또한 당당히 ‘목간국(木簡國)’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목간과 죽간은 중국에서는 한 때 책 구실을 하기도 했다. 「논어」에 보면 위편삼절(韋編三絶)이란 유명한 말이 있는데 공자가 하도 책을 많이 읽어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고사를 일컫는다. 이 때 공자가 읽은 책이 바로 죽간으로 된 <주역>이다. 공자 시대에는 종이가 없었기 때문에 글을 쓴 대나무 조각들을 가죽 끈으로 엮어 책을 삼았다. 책을 뜻하는 한자어 ‘冊(책)’은 바로 죽간을 끈으로 연결한 모양을 본뜬 상형문자다.
죽간이나 목간은 이 외에 토지매매라든가 재산상속, 호구조사 문서, 판결문 및 물품 꼬리용으로 쓰인 경우도 대단히 많다. 서적을 제외한 이러한 용도는 종이가 발명된 이후에도 한동안 효용성을 유지했다. 왜냐하면 종이 또한 비단 못지않게 비쌌기 때문에, 간략한 내용을 기록하는 경우에는 죽간이나 간독은 여전히 애용됐다. 국내 출토 목간의 경우 물품 꼬리표로 쓰인 것이 압도적이다. 예컨대 지방에서 징발한 곡물 부대 같은 곳에는 그 곡물이 어느 지방 누구에게서 거둔 것인데 어디로 보내졌다는 표식을 하기 위해 목간을 이용했던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을 빌린다면 이런 목간은 원산지 표시나 바코드용이라고 보면 이해가 쉽다. 일본 목간 출토품 또한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중국에서는 그 용도가 실로 다양한 간독이 줄을 이어 출현하고 있다. 이러한 간독 자료는 왕실 지배층 중심이기 마련인 문헌기록에 비해 실제 사람들이 산 기록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는 이루 말할 나위가 없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2002-10-18 16: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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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소장 김선태)는 15일 경남 함안군 가야읍 광정리에 위치한 성산산성 유적 발굴 현장에서 국내 최대, 최고의 목간(木簡) 65점과 나무 수저, 붓, 도자(刀子:지우개용 칼)를 비롯한 목제유물 137점 등 총 202점의 유물을 발굴했다고 밝혔다.
이번 목제유물은 6세기 신라가 아라가야를 정복하고 지은 성곽 내에서 발굴된 것으로 목간에는 신라시대의 지명 관등명 인명 등 중요한 역사적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묵서명(墨書銘)이 집중적으로 나옴으로써 가야와 신라를 둘러싼 정치, 사회적 변화 등 고대사를 규명할 귀중한 학술자료로 평가된다. 목간은 군량미나 성 축조 비용 등을 곡물류로 낼 때 누가 냈는지를 기록하는 꼬리표로 당시 붓으로 인명 관직 주소 등을 기록하고 있다.
또 이번 발굴에는 지금까지 국내에서 출토된 바 없는 톱날형 목기를 비롯한 이형(異形) 목제 유물과 밤 호두 깨 살구 등 식물류, 말, 개, 새 등 동물뼈 등이 다량으로 나옴에 따라 고대 생활상의 복원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함안=전정희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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簡(간) : 1줄로 되어 있다. 길이는 23~24cm
牘(독) : 2줄 이상으로 되어 있는 것. 길이는 23~24cm. 일반적으로 尺牘(척독)이라 하는데, 당시의 한 척은 23~24cm정도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觚(고) : ‘의식에 쓰는 술잔, 모, 능각, 사각형’ 등의 의미로 나와 있으나, 원래 이것은 육모 기둥처럼 생긴 것에 두 줄로 새겨진 글씨를 가리킨다.
楬(갈) : ‘푯말’의 의미이다.
한나라 때 허신이 문자학을 가리켜 小學이라 했다. 楚簡으로 된 경전은 大學.
참고: <李兆海馬蹄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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