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米芾에 대하여
米芾(1051~1107)의 처음 이름은 黻이었으나 41세때 芾이라 고쳐 불렀으며, 字는 元章이고 號는 海岳外吏 또는 襄陽漫士, 鹿門居士등이며 당호로는 英光堂또는 寶晉齋를 사용했다. 세상에는 흔히 米南宮이라 불렀다.
본적은 山西省 太原이나 뒤에 襄陽으로 옮겼는데 만년에는 강소성의 鎭江에서 살았기에 吳人이라고도 하였다.
선조 대대로 西城지방인 米國(지금의 사마르칸트의 동남쪽지방)에서 살았던 胡人으로 어릴 때부터 유교를 가까이 했으며 학문을 즐겼고 詩와 그림도 배웠다.
蘇軾, 黃庭堅, 蔡襄과 더불어 宋4大書家로 이름났으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미불은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서화박사로 추천이 되는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이후 宣和殿에 들어가서 소장되어 있는 古帖을 볼 기회를 얻어 큰 영향을 받았다. 禮部員外郞을 거쳐 뒤에는 准陽軍知로 일생을 마쳤다.
米芾은 그림과 글 모두 능했으며 훌륭한 괴석과 명서화첩을 많이 수집 및감정을 하기도 하였는데 글씨로는 해, 행, 초를 골고루 잘 썼으며 그 중에서 행서의 성취도가 가장 높았다고 한다.
그의 작품상의 용필을 소쇄하고 침착하면서도 정봉, 장봉, 노봉 등 필법이 자유로이 구사하였고 변화가 풍부하였다. 법도가 정연하여 자기만의 독특한 품격을 이루어 낸 대표적인 서예가이다.
미불의 작품은 전통적인 서법을 중시하면서도 문인화가로의 이상과 사상을 불어 넣은 창조적인 자세가 스며있어 뒷날의 작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蘇軾이 말하길 “미불 평생의 그의 서예작품은 沈着痛快하여 바야흐로 종요와 왕희지와도 竝行한다”고 하였고 많은 서예가들도 “한 자 한 자에 새로운 뜻과 법도를 지키면서 자기만의 정신을 품고 있다”고 하였다.
王鐸이 말하길 “미불의 글씨는 二王으로부터 나와서 종횡하고 표일하여 신선이 나는 것 같다. 내가 향을 피우고 그 아래 누웠다”라고 하였다.
서예사에 있어 왕희지의 맥을 잇고 자기만의 탁월한 예술적 품격을 뛰어나게 이뤄 낸 미불의 작품은 아직도 수많은 이들의 범본으로 쓰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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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