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최고위과정

<제7강> 甲骨文(갑골문)

 

서체 변천

  한자의 기원에 대한 논의는 일반적으로 중국 고대 제왕시대 황제(黃帝)의 사관(史官)이었던 창힐(倉頡)이 새나 짐승의 발자국을 보고 한자를 만들었다는 전설이 중심이지만, 이는 중국의 여러 성인창조전설(聖人創造傳說)의 하나에 불과하다. 이 외에 고대 삼황(三皇)의 하나인 복희씨(伏羲氏)가 팔괘(八卦)와 서계(書契)를 만들어 정치에 사용했다는 전설에서, 이 팔괘와 서계를 한자의 기원으로 보기도 하지만, 이 역시 복희씨가 용의 몸에 사람 얼굴을 하고 있는 신화 속의 인물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전설에 불과한 것입니다.

  결국 한자의 역사를 기원전 3000년 이전으로 올라가는 것으로 보는 객관적 학설은 고고학(考古學)에서 발굴 확인된 갑골문(甲骨文)을 통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한자 서체의 변천은 회화적 요소가 중심이었던 갑골문에서부터 역사적인 시대 변천에 따라 많은 변화를 이루게 되는데, 큰 변화를 살펴보면 초기의 갑골문과 금문(金文)에서 전서(篆書)로 변화된 시점과 전서에서 예서(隸書)로의 변화, 또 예서에서 초서(草書), 해서(楷書), 행서(行書)와 같은 현재 사용되는 서체로 변화된 시점을 큰 줄기로 볼 수 있다. 또한 고대 한자 서체가 회화적 요소라는 기본 특징을 지니던 것이 점차 회화적 요소가 줄어들면서 문자로서의 기능이 강조된 기호적 요소로 발전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갑골문(甲骨文)

   甲骨文이란 귀갑수골문(龜甲獸骨文)의 약칭으로 기원전 1,500년경부터 1,000년 무렵까지 있었던 중국 고대 은(殷)나라[商(상)이라고도 함] 때 龜甲과 獸骨에 문자를 새겨 기록한 글을 말한다. ‘龜甲’은 거북의 배 껍질의 의미이고, ‘獸骨’은 소 같은 짐승의 어깨뼈[肩胛骨]나 넓적다리뼈[大腿骨]과 같은 것이다. 갑골문은 1899년 중국 허난성[河南省] 안양시[安陽市] 샤오툰춘[小屯村]에서 최초로 발견되었다. 1920~30년대에 이곳을 중심으로 발굴하기 시작하여 전후에도 계속적인 발굴이 이루어져 대량의 수확을 이뤘다. 개인적인 발굴을 합하여 오늘날 십수만편이 존재한다. 연구 성과도 빛나는 업적을 이루어 이 대량의 자료들을 5기로 구분하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하여 은(殷)나라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고, 아주 오래 된 문자이기 때문에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으며, 이후 샤오툰 일대에서 농민들에 의한 도굴이 빈번하게 행해져 갑골문이 입수됨과 함께 학자들에 의한 수집과 연구가 실시되었다.

  갑골문은 은대 후기 왕실에서 점친 결과를 기록한 最古의 한자자료이다. 은(殷)나라는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정치형태를 지니고 있었는데, 전쟁 등의 국가 중대사부터 모든 행위와 현상을 제사장이 천신(天神)이나 자연신(自然神), 혹은 조상신(祖上神)에게 이 갑골을 이용해 점을 쳤다.

  점을 치는 방법은 주로 갑골에 구멍 같은 흠집을 내고 그것을 불에 올려놓고, 열로 인해 그 흠집으로부터 갈라진 방향에 따라 길흉(吉凶)을 판단했다. 주로 점을 친 후에 그 결과를 갑골에 기록을 해 놓았기 때문에 갑골문은 "복사(卜辭)"라고도 불리고, 칼로 새겨놓았기 때문에 '계문(契文)'이라고도 한다.

  또한 1899년 홍수 때 처음 발견된 갑골문은 그 지역[현재 하남성(河南城) 안양현(安陽縣) 소둔(小屯)]이 은(殷)나라의 도읍지였기 때문에 '은나라의 옛터'라는 의미로 '은허(殷墟)'라고 불리고 그 문자를 '은허문자(殷墟文字)'라고도 한다.

  1903년 최초의 갑골문 자료집인 유악(劉顎)의 《철운장귀(鐵雲藏龜)》가 출판, 1058편의 자료가 소개되었는데, 편자 유악은 서문(序文)에서 갑골문에 기록되어 있는 선조명(先祖名)은 은나라 사람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듬해인 1904년에는 고전 금문(金文) 연구의 대가(大家)였던 손이양이 《철운장귀》의 자료를 기초로 해서 《계문거례(契文擧例)》를 출판하여 해독 방법을 개척하였다. 게다가 안양의 땅이 예로부터 은나라의 수도였다는 설이 있었기 때문에 갑골문이 출토되는 샤오툰 부근이 고고학자들에 의한 학술적 발굴이 실시되게 되어, 2만 8000여 편의 갑골문이 발굴된 것 외에도 은나라 왕실의 궁전터와 왕묘를 포함한 다수의 묘와 유물이 발견되어 은나라에 대한 역사연구는 비약적으로 진전하게 되었다. 특히 종래 단편적이었던 갑골문 자료에 비해 완전한 형태를 지닌 거북등껍질이 발견되어, 그 위에 기록된 많은 갑골문을 비교하여 개개의 갑골문 시대를 결정하는 대강(大綱)이 둥쭤빈[董dǒng作zuó賓bīn]에 의해 발견된 것은 큰 수확이었다. 이 갑골문은 은왕조의 후기 제30대 무정(武丁)에서 최후의 제신(帝辛)까지의 것으로, 그 사이를 5기(期)로 나누는 것이 확실해졌다. 여기에 갑골문은 역사연구 자료로서의 가치가 확립되어, 은나라 때의 종교·정치·사회구성·지리·역법(曆法) 등을 역사적으로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제사제도와 그 변천사를 연구하는 데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 갑골문의 해독은 금문(金文)이나 후한(後漢)의 허신(許愼)이 지은 《설문(說文)》에 실린 고문자(古文字)와 글자 모양을 비교하여 연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방법은 기본적으로는 옳지만 《설문》에 설명된 의미와 고전에 사용된 의미를 그대로 갑골문에 적용할 수 없는 것이 많기 때문에 갑골문 속의 동일문자의 용례를 모아 비교하거나 같은 문형 속에 사용되는 다른 문자와 비교해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더욱이 갑골문에는 생략형 문장이 많기 때문에 기본적인 문형을 파악한 뒤에 문자의 용법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최근의 언어학연구의 성과를 이용하여, 문법상의 연구도 개시되어 특히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갑골문의 특징

  갑골은 그 자체가 아주 딱딱하기 때문에 그 표면에 글자를 새기기 위해서 청동(靑銅) 같은 금속이나 경옥(硬玉) 같은 단단한 칼날을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래서 갑골문은 서체가 가늘고 긴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수의 갑골문은 먹이나 붉은 먹을 이용해 붓으로 쓰여진 것들도 발견되고 있다.

  또한 갑골문은 원시 문자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 회화적 요소가 강한 특징이 있습니다. 사물의 모양을 그대로 묘사해 문자화했기 때문에 상형문자(象形文字)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주로 단독적인 독체자(獨體字)[文]가 주를 이루고 있다.

  현재 대략 4,000여 자 정도를 확인했는데, 아직 상당수의 글자는 해독을 못하고 있고, 특이한 점은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동일한 글자도 그 모양의 차이가 상당하게 나타나고 있다.


갑골문의 가치

  갑골문은 현재에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문자학(文字學)뿐만 아니라 고대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소중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한자 이해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갑골문의 서체를 처음 접하면 현재의 한자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 진 것인가를 쉽게 알 수 있다. 결국 한자 이해의 측면에서 갑골문으로부터 서체의 변화를 접하면서 보다 분명한 한자의 자원(字源)을 확인하는 것이 한자를 바르게 이해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또한 다음에 이어질 금문과 전서로의 변화를 확인하면 한자의 변천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끝
* 산동성 대문구(大汶口)에서 출토된 신석기 시대의 도기에 새겨진 최초(?)의 한자(?)
* 귀갑과, 우견갑골 혹은 사슴 등 짐승의 뼈에 새겨진 한자를 통칭하여 '갑골문'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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