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최고위과정

데리다 철학의 영향

형이상학적 이분법에 반기

플라톤 이래 철학사 흔들어
'포스트 모더니즘' 촉발시켜

[조선일보] 2004. 10. 10.

데리다는 30대 중반의 나이에 당대를 주름잡던 거인들, 가령 소쉬르·하이데거·사르트르·레비스트로스·라캉·푸코·레비나스 등과 같은 스타급 이론가들을 차례로 거꾸러뜨리면서 세상에 등장했다. 철학역사상 가장 정교한 문헌 해석의 기술을 펼치는 그의 글들은 내용을 떠나 그 자체가 아름다운 음악인데, 절창을 토하고 일찍 죽는 천재들에 비하면 70을 훨씬 넘긴 그의 수명은 그래도 축복인 셈일 것이다.

나는 지난 여름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를 지나다가 눈이 휘둥그렇게 된 적이 있었다. 데리다가 이 도시를 방문해 사인회와 학술 모임에 참석할 예정이라는 포스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이미 1년 전부터 그를 죽은 사람처럼 취급했다. 데리다 부고 특집 기사의 일부를 미리 준비하기 위해 나에게까지 전화를 했던 ‘르몽드’지의 도쿄특파원도, 그의 임박한 죽음에 대해, 그가 남길 유산과 빈자리에 대해 속삭였었다. 그런데 데리다는 살아 있었고 건재해 보였다!

많은 이론가들에게 데리다의 글들은 어떤 ‘복음’이었다. 플라톤 이래 2000년 철학사에 종지부를 찍고 전혀 다른 사유의 가능성을 전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거대 사조는 이 괴력의 사나이가 펼치는 해체론에 의해 촉발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떤 철학 이론이라기보다는 20세기 후반 문학·예술·사회과학 등 다양한 영역에서 튀어나온 비평 사조들을 통칭하는 용어이고, 그 내용은 “차이가 동일성에 앞선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데리다의 해체론은 기존의 차이 개념과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차이 개념을 제시했다. 또 이 새로운 개념을 통해서 서양사상사의 내적 발전 논리를 재구성하는 동시에 그 바깥으로 향하는 통로를 그려냈다. 이런 ‘차이의 사유’는 한국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쳐 문학이론을 중심으로 인문학 전반에 걸쳐 ‘다르게 생각하기’ 열풍을 불러왔다. 하지만 사실은 데리다 전문가도 없고 중요한 기본 저작들의 번역이 매우 부실한 등 아직 내면화의 단계도 거치지 못한 실정이다.

해체론 앞에서 과거의 모든 이론은 진부해져 버렸고 가사(假死) 상태에 빠져버렸다. 그것은 그동안 주변에 있던 것들에 대해서는 해방의 사건이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 이래의 다양한 이론들은 과거의 사상사 안에서 죽어 있던 목소리들의 부활이다.

데리다의 해체론은 논쟁적이고 파괴적인 성격 때문에 무수한 적들을 만들어냈다. 프랑스 지성계 안에서만 해도 데리다의 적대자가 아닌 이론가는 손꼽기 어렵다. 데리다의 죽음은 수많은 적대자들에게 희소식인지 모른다. 하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사상가의 죽음은 언제나 여러 차례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데리다가 과거나 당대의 이론들을 죽였듯이 그의 사상 또한 죽음의 순번을 기다리고 있고, 그런 한에서 아직 살아 있다. 데리다가 진부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바로 그날 우리는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또 하나의 새로운 사상이 태어났음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제2의 죽음을 알리는 선언이 서양이 아니라 동양, 그것도 동아시아에서 일어날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은 괜한 공상에 불과한 것일까?

(김상환 서울대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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