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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의 역사 - 도산서원에서 퍼 옴

유교의 역사(변천)

   공자가 죽은 뒤 유교가 천하에 행하여 져 여러 학파가 함께 일어났는데, 증자/ 자사를 거쳐 맹자에게 전한 학이 정통을 이루었다.

맹자는 인의 도를 세워 성선 과 야기의 설을 주장하고, 인정의 필요 를 역설하였다.

한편 순자는 맹자의 성선설에 반하여 성악설을 말하고, 예를 강조하며, 권학의 중요성을 주장하였다.

그 후 진시왕의 분서의 액을 만나 경서가 거의 소멸되었다가 한 대에 이르러 무제가 문교를 장려함에 유교는 다시 부흥하여 경전을 수집하는 한편 문자/언어의 번천으로 인하여 훈고학이 발생하였다.

훈고학은 문자의 뜻을 정확히하고 명물의 도수를 상세히 하여 언문의 참 뜻을 밝히는학문으로 정현/ 가의/반고/마융/하휴/복건/허신 등이 가장 유명하였다.

그러나 음양오행과 참위의 설이 유학에 섞여들어 양한의 학은 순수한 공자의 교리가 아니었다.

정현에 이어 왕숙/왕필/하안/두예 등도 모두 훈고의 대가이었다.

당나라 때는 남북조와 수말 대란의 뒤를 이어 크게 학문을 일으켜 육덕명/아사고/공영달 등의 대 선비가 나와 경학을 연구하고 학교와 문묘를 세우고 학관을 두고, 태종 정관년 중에는 '오경정 의'를 편찬하였다.

그러나 문학의 장려와 시문의 성행으로 경학은 황성하지 못하였다.
한/당 사이에 진정한 유가로는 한의 동중서, 수의 왕통, 당의 한유/이고 등으로 , 천인의 도를 밝히고 성명의 근원에 소급하여 크게 유교를 고취하고 널리 교화하여 사도의 명맥을 지켜 후세에 전하였다. 송에 와서는 절대 훈고학의 범위를 벗어나서 성리의 학이 일어났다.

이 학은 호원/손복으로부터 시작하여 주돈이/소옹/ 정호/정이/장재를 거쳐 주희에 이르러 대성 하였다.

이 학문의 요점은 우주의 본체를 태극이라 하고, 여기에서 이기 2원이 생기고 이 2원으로써 인성을 해석하여 본연의 성과 기질의 성을 논하고, 수양론에 있어서는 거경과 궁리로써 주요한 안목을 삼았다.

그런데 주자와 겉은 시대의 사람인 육구연은 주자와 의견을 달리하여 덕을 높임을 숭상하고 학은 오입에 있다 하여 사도 선의 돈오에 가까워, 주자의 궁리설에 맞지 않았다. 명에 이르러 왕수인이 육구연의 영향을 받아 지행합일설을 세워 한때 이채를 발했으나 원명을 통하여 주자학이 여전히 유학의 주류를 차지하였다.

명 말에 발생하한 고증학은 청에 들어와 새 학풍을 이루어 고염무/염약거/황종희/모기령/주이존/황선지/안원 등이 배출하여 신기운 을 이루었는데 그 뒤 대진/단옥재/완원 등이 나와 문자/성운을 비롯하여 사학/천문/지리/교감/집일에 이르기까지 널리 여러 고전에서 고증하여 전대의 공소한 억측의 설을 일소하였다.

그수 금문/고문의 문제가 일어나 공양학자 장존여/유봉손 등에 금문학이 성립하였다. 광서연간에 유평/강유위 등에 의하여 대성하였다.

한편 이와 반대의 논자에 유월/손태양/장병린 등이 있었다. 중화민국에 들어와 강유위 일파의 존공안에 대하여 진독수/오우 등 반공론이 일어나고 정치의 혼란과 회래사조의 범람으로 유교는 쇠퇴 일로의 운을 면하지 못하였다.

국민정부가 수립되자 민국 23년 8월 27일에 공자제를 부흥하고 중국 고유문화에 의거하여 국민사상의 통일을 기하려 하였다. 대륙침륜의 뒤에도 타이완에서 이 방침을 견지해 오늘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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