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최고위과정

추사 김정희 화론 연구 - 박원숙

 

Ⅵ. 結論

조선 후기 최고의 학자이자 예술가였던 추사 김정희는 문자향과 서권기에 바탕한 화론을 주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그런 이념에 바탕한 많은 글씨와 그림을 통해 이론과 실천 양 방면에 있어서 지고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이미 어릴 때부터 천부적인 총기와 재능으로 당시 노재상(老宰相)이었던 번암(樊巖) 체재공(蔡濟恭;1720-1799)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다고 전해질만큼 재능이 특출났던 추사 김정희는 조선사회가 변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가고 있을 때 새롭고 혁신적인 학문의 습득을 열망하여 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가 청조의 고증학을 습득하고 수많은 문인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학문적 깊이를 더할 수 있었다. 그 이후에도 옹방강은 물론 그 문하의 문인학자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경학·금석학·문자학·사학·지리학·음운학 등의 각 방면에 통달하였던 김정희는 드디어 추사체란 독자적이고 창의적인 서체를 창안하였고 '해동제일통유(海東第一通儒)'란 칭호까지 듣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그에게 닥친 현실적인 고난이 김정희로 하여금 더욱 학문과 예술의 세계에 정진하도록 만들었으니 그를 조선의 동파(東坡) 소식에 비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당시 새로운 사조인 학예일치사상에 바탕하여 문인화풍의 화론을 정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림을 통해 실천하기도 했던 김정희는 조선 후기가 낳은 천재요, 그에게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른바 '완당바람'을 불러일으킨 거대한 예술가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지나친 사의지상주의로 말미암아 조선 말기 서화계에 남종문인화풍을 고착시킴으로써 서화의 다원화를 저지시키는 한계도 드러내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특히 조선 말기의 급변하는 국제정세에서 조선에 실사구시의 실천적 학문과 예술이 절실하게 요청되었으나 그는 다른 모든 그림의 가치는 무시해버리고 묵란을 그리는 것이 제일 어렵다고 거듭 강조하거나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에게마저 편애를 보임으로써 오히려 창의성을 가로막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김정희의 업적과 한계에 대한 냉철한 재평가가 더없이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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