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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는 마음이더라 [중앙일보] -소리꾼 장사익, 퍽퍽했던 삶을 쓰다

위: 수 장사익씨가 자신의 글씨를 프린트한디자이너 이상봉씨의 의상을 선뵈고 있다. 기사 제목도 장사익씨 글씨다.
아래: 사익씨 글씨를 새긴 LG 휴대전화. 윤동주 시 '별 헤는 밤'의 한 구절이다.


글씨는 마음이더라 [중앙일보]
소리꾼 장사익, 퍽퍽했던 삶을 쓰다

서울 세검정.
주택가 초입 경비초소에 웬 나무 푯말이 붙어 있다.
'홍지문마을 관리비는 매월 25일 냅니다.'
딱 보니 알겠다. 단아하면서 자유로운 글씨체.
이 동네 사는 소리꾼 장사익(58)의 솜씨다.
이렇게 이웃이며 몇몇 지인들만 누리던 그의 글씨가 요즘 유명세를 타고 있다.
디자이너 이상봉이 그의 글씨를 프린트한 천으로 옷을 지으면서부터다. 옷이 히트하면서 글씨도 함께 화제가 됐다. 이달 말께엔 그의 글씨를 새긴 휴대전화도 나온다. '육필'의 멋과 맛이 새삼 주목받는 요즘, 손과 글씨와 사람살이 얘기를 들으러 그에게 갔다.

글=이나리 기자 <windy@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아이구, 어서 오셔요. 이게 얼마만이래유. 근디, 지가 글씨 가지고 뭔 얘기를 해도 되나 모르겄어요. 저야 소리꾼이지 글씨는 재미로 허는 거라…. 경비초소 푯말 보셨다구유? 그냥 붙여 봤어요. 홍지마을, 홍지문마을…. 이름이 참 정겹잖어요. 다 재미지유.

지금 쓰는 건 결혼축의금 봉투에 넣을 편지예유. 실은 지가 청첩장 보낸 분을 잘 모르거던요. 하지만 그렇잖여요, 청첩장 한 번 보낼라믄 몇 번을 생각하고 또 고민허고. 이분도 그러셨을 텐데, 가 보는 것이 도리지유. 지가 편지 쓰는 걸 좋아해요. 이상봉씨헌테도 그렇게 편지 한 통을 썼지요. 헌데 그걸 천에다 떡 입히셨더라구. 아주 미안해 죽겄어요(웃음).

지가 충청남도 광천읍 삼봉마을에서 났어요. 어려운 살림인데도 장남이라고, 부모님께서 서울 유학을 시키셨지유. 선린상고 다닐 때 펜글씨를 배웠는디, 지금 생각하믄 그게 도움이 많이 된 것 같어요.

아시는 분은 아시겄지만 지가 마흔일곱에 가수로 나서기까지 살기가 좀 퍽퍽혔어요. 전자회사 영업사원부텀 노점, 카센터 더부살이까지 안 해본 것이 없으니께유. 성격이 자발머리없어 그런가, 일체 거짓말 안 하고 진짜 열심히 사는데도 뭐가 잘 안 되는 거예유. 지 이름이 생각 사(思)에 날개 익(翼)자잖여유. 늘 생각이 날개를 타고 돌아다니는겨.

그렇게 세상이 영 안 풀릴 때 처음 붓을 잡았어요. 포스터 글씨 따라 쓰고 그림도 베껴 그려 보고. 밑바닥 인생 위안하다 문득 새 결심을 하게 됐지요. 그려, 입때껏 40년을 살아왔는디 정말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냐. 밥만 먹고 똥만 싸고, 기차 타고 어디로 마냥 떠돌아 다니기만 한겨. 좋다, 내가 3년만 아주 죽을 힘을 다해 살아보리라. 그때 생각난 게 태평소였어유. 지가 1980년도부터 단소, 피리, 태평소 같은 걸 배웠거던요. 현실과 이상이 안 맞으니께 그렇게라도 숨통을 맨든 거지요.

93년부터 죽어라 매달리니 뭔가 답이 보이데유. 전주대사습놀이서 두 해 연달아 장원도 타고. 공연이 많다 보니 뒤풀이가 잦잖여유. 지가 술 한 모금 못 넘기지만 놀기는 마다 않거든요. 어느새 '뒤풀이 카수'로 도장이 콱 찍혔지요. '봄비' 그게 18번이구 '님은 먼 곳에' 그것도 자주 불렀구, '열아홉 순정' '동백아가씨'… 아주 끝내줬어요(웃음). 가끔 좋은 시에 지 맘대로 가락 붙인 노래도 불렀는데, 재야 피아니스트 임동창씨가 "판 내자"고 난리 치데요. 그러다 어찌어찌 가수가 됐어유.

글씨에 제대로 취미 붙인 건 김대환(타악 연주의 대가) 선생 영향이 컸어요. 그 선생님은 평생 반야심경만 쓰셨거든요. 2004년 돌아가시기 직전 절 불러 불쑥 그러시데유. "사익아, 너두 글씨 연습 해라. 너하구 나하구는 서예와 서도는 모른다. 스승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자유로움이 있지 않냐. 그게 예술 아니냐."

그때부텀 놀듯이 글씨 연습을 혔어요. 노래하다 안 되믄 글씨 쓰고, 또 그러다 지겨우면 노래하구. 그러다 보니 한글 흘려 쓰기가 자꾸 좋아지데요. 한자는 보믄 행서니 초서니, 살풀이 천 날아가듯 기맥힌 것들이 있잖여유? 한글도 하늘로 날려보내는 것이 글씨 쓰는 제 작은 꿈이지유.

지가 자유롭다 못해 헷갈리고, 되게 감성적으로다가 글씨를 쓰거든요. 아마 제 속에 그런 것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일 거예유.

육필이란 게, 그게 참 좋은 거지유. 편지 쓰고 답장 받고, 사는 재미가 그런 거란 말여. 지는 편지도 붓으로 써요. 글이 절로 나가거든요. 여백이 있고 낭만이 있고, 빈 공간이 더 많은 얘길 하잖여유. 그저 '너 잘 있니? 날씨가 참 좋다. 새싹이 올라온다. 안녕.' 이렇게만 써도 얼매나 좋아유. 카드 보낼 때 이름 석자만 직접 써도 그만큼은 마음을 보내준 게 되잖여유.

글씨를 못 쓴다구요? 그게 뭔 문제래요! 우리 어무니가 저헌테 보낸 편지가 딱 한 장 있어요. 그 편지가 너무, 세상에 젤로 아름다운 거여. 글씨는 삐뚤빼뚤, 맞춤법은 다 틀리구. 그래도 자식헌테 그런 보물이 또 있나요. 장모님은 어떻구요. 지가 한 달 간병을 한 적이 있는데, 이 양반이 고맙다고 어쩔 줄을 몰라 하셔요. 종이랑 연필 갖다 드리면서 "여기 몇 줄 써주셔요" 했지요. 받아 보니 '고맙다, 사랑한다…', 이게 기맥힌 거여. 한 달 고생 한 방에 다 갚아버리신 거여.

못 쓰는 글씨가 더 아름다워유. 없는 사람, 못 배운 사람이 정성껏 몇 줄 써 보내봐유. 그럼 (받는 사람은) 그냥 가는 거여. 잘 산다고 잘 사는 게 아니거던요. 글씨도 그런 거예유. 육필의 맛은 수고요 정성이지, 때깔이 아니잖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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