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최고위과정

중국왕조사와 시대별 서체

1.하·은·주

1)은

(1)귀갑수골문(龜甲獸骨文)

갑골문은 현재 잔존하는 한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에 속한다.

1899년 북경 한약방에서 왕의영(王懿榮)과 그의 식객 유악(劉顎)이 발견한 이후 수집과 연구, 발굴 작업이 꾸준히 진행되어 현재는 상당한 수의 자료가 모아졌다. 연구 결과에서 출토지가 하남(河南)의 안양현(安陽縣) 서북 소둔(小屯)이라는 마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갑골문은 은인(殷人)이 점복(点卜)에 사용하고, 전쟁, 수렵, 벼농사 등에 관한 복사(卜辭)를 칼로 각한 것인 데, 좌반(左半), 우반(右半)을 대(對)로하여 같은 문자를 각입(刻入)했다. 예리한 칼날로 귀갑(龜甲)이나 짐승 뼈에 새겨 넣었기 때문에 필획이 단순하고 직선적이다. 획은 생략이 많고 안제(按提)가 없다. 그리고 갑골문의 서체나 서법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 그 곳에는 몇 가지 다른 유형이 있다는 것을 확인 할 수가 있다. 또, 갑골주서(甲骨朱書), 수골묵서(獸骨墨書)등이 최근에 발견되었음에 비추어 당시에 이미 붓(筆)이 존재하여 필사(筆寫)가 행해졌음을 말해준다. 갑골문이 처음 발견되고 학자의 관심을 집중하게 한 것은 그다지 오래된 것은 아니다. 그 후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연구되어 왔 지만, 학문으로서의 역사가 짧기 때문에 앞으로도 더 새로운 사실들이 알려지게 될 것이다.

(2)금문

문자자료는 앞서 지적했듯이 은 왕조 22대 반경왕 이후부터 등장했다. 이때는 청동기 시대의 정점에 도달해 있었다. 그래 서 안양(安陽)을 중심으로 그 당시의 많은 동기(銅器)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 시대의 동기는 위로는 조종(祖宗)을 기념하며 아래로는 유급자손(留級子孫)하기 위해서 주조(鑄造)된 것으로 거의 일상기물이다. 금문이란 이들 동기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말하는 것이다. 거의가 은 말 이후의 각으로 갑골문보다는 뒤에 것으로 갑골문에 비해서 문자로서의 조형이 한층 뛰어나고 또한 필력( 筆力)도 능히 엿볼 수 있다. 또, 은기의 명문은 동시대의 갑골문 보다는 획이 많고 자형(字型)이 복잡하다. 은 왕조의 동기에는 명문이 있는 것이 적다. 그리고 이때의 명문은 회화적인 성격이 뚜렷하고 상형(象形) 또는 그에 가까운 것이 많고, 일품(一品)의 글자 수가 적다.

2)주

(1)금문(金文)

은망주흥(殷亡周興)에 미쳐 갑골의 사용은 급격히 쇠하고, 반대로 동기 제작이 성행하여 명문이 갑골과 자리를 바꾸어 문 장기록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주(周)로 와서는 동기제작의 사유도 확대되어 여러 씨족들이 무공, 훈공을 세워서 왕실에서 은상 을 받음을 기념하는 내용 등 세속적인 내용이 동기에 새겨졌다. 그리고 은대와는 달리 명문이 장문화(長文化)되었다. 이 시대의 금문은 초기에는 주(周) 특유의 의례적인 엄숙함이 있는 가운데 은대의 서풍(書風)을 이어 비후(肥厚)함이 있어 생명의 약동이 보인다. 또, 자체가 차차로 정제되고, 자간, 행간이 정해지고 상하좌우의 자연스러운 구성이 좌우편방의 균형을 가져 오게 하여 자형은 고정화 되었다. 그러나, 후기에 접어들수록 점차로 생기를 잃어가고 형식화해 가는 경향이 있다. 이는 주(周) 왕실의 쇠퇴와 보조를 같이하고 있다.

(2)대전(大篆)

서주(西周) 선왕(宣王)때 사관 사주가 문자를 정연하고 획일적으로 하기 위해 고문(古文)을 정리(주문)하였다. 이에는 석고문이 있다. 서체를 결합, 정리하기 위하여 점, 획을 증익(增益)하여 혼돈하지 않게 하였다.

*석 고 문 (石 鼓 文)*

대전 자체(字體)의 가장 구체적인 작품이며, 중국역사상 가장 오래된 각석으로 북모양으로 다듬은 돌에 세겨져 있다하여 석고문이라 부른다. 돌의 수는 10개이고 표면에 700여자가 실려 있으나, 판독이 가능한 글자 수는 270여자, 현재 통용되고 있는 글자 수는 470여자 정도이다.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나, 동주의 위열왕 4년(기원전 481)에 진나라에서 만들어졌다 고 하는 설이 유력하다. 석고문은 4언구로 현재 내용이 완벽하게 이해되어 있지는 않지만, 대체로 전국시대의 진나라 군주가 사 냥을 하는 것과 영토의 개척으로 도읍을 세운 것, 제사에 관한 일들이 기술되어 있다. 석고문은 금문과 소전의 중간에 속하고 금문보다 잘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소전보다 방편(方遍)하고 복잡한 것이 있고 자체는 대체로 정방형을 이루고 있다.

3) 춘추 전국시대

죽간(竹簡)은 춘추 무렵부터 일반적으로 서적이나 문서의 기록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실물은 존재하지 않았는데, 근년 에 여기저기서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1953년 호남(湖南)의 장사(長沙)에서 발견된 43편의 전국시대의 죽간과 1957년 하남(河南) 의 신양(信陽)에서 발견된 전국시대의 죽간과 모필(毛筆), 칼, 죽관(竹管)등 죽간에 문자를 쓰는데 사용된 공구가 바로 그것이다. 위의 죽간은 전국시대에 초에서 만들어진 것인데, 이들이 죽간을 쓴 것은 은인(殷人)이 갑골에 각(刻)한 것에 비하여 편리하고 경제적이었기 때문이다. 자체는 고문(주문)에 가깝고, 간편하고 독창성이 풍부하며, 체세(體勢)는 편장(扁長)하고 횡획에는 비수 (肥瘦)가 심한 것이 많다. 필의(筆意)가 이미 한예(漢隸)에 가까워졌고 주문에서 예서에로의 변천을 엿볼 수가 있다. 초의 죽간 에서 진 이전에 이미 예서(隸書)가 싹트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또, 1954년 6월 장사(長沙)교외의 전국 시 대의 묘에서 좋은 토호(兎毫) 모필이 발견되었는데, 초인(楚人)의 필사용구(筆寫用俱)로 밝혀졌고 그 우수함은 놀랄 만하다. 이 는 죽간에 사용되었으리라 믿어지는데, 모필(毛筆)에 묵(墨) 또는 옻으로 썼음을 알 수가 있다.

춘추전국시대의 백서(일명 繪書)는 죽간과 더불어 춘추전국시대부터 일반에서도 널리 사용된 것이며 지금까지 발견된 유품도 적지 않다. 1934년 장사 근교의 고묘에서 출토한 초의 백서(帛書)는 둘레에 세 가지 색깔로 신물(神物)을 그리고, 가운데는 좌우로 나누어 장편의 문자가 쓰여 있다. 이들 문자는 필획이 잘 정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힘차고 일치(逸致)가 있어 옛 맛을 더 해주고 있다.

4) 진(秦)

진은 하(夏), 은(殷), 주(周)의 뒤를 이어 천하를 통일하고 따라서 서법도 또한 획일하게 정리하였다. 이것이 바로 소전(小篆)이다. 서체의 변천은 자연스러운 변화에 따르기 마련이지만, 소전은 국가 통제 상의 필요에서 의식적으로 연구하여 고치고 변화시킨 서체라고 할 수 있다. 이제까지 동방의 여러 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던 고문(古文)을 폐지하고 진나라의 전통서체인 주문 을 약간 간략화 하여 새로운 자체인 소전을 만든 것이다. 소전의 구조는 정사각형에서 장방형으로 되었으며, 획도 처음과 끝의 굵기가 같고, 사이와 포백이 고르고 형태는 좌우가 대칭을 이루었으며 중심을 잡 아서 평행을 이루도록 하였다. 당시의 서체를 전하는 자료로는 각석(刻石)과 와당(瓦當), 권(權, 저울추), 양(量, 되)의 명문이 있다. 또 최근에 발견된 다수의 죽간도 있다.

진의 각석은 여섯 군데에 칠석(七石)이 있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은 태산(泰山)과 낭야대(낭야臺)의 두 각석뿐이다. 이들도 훼 손이 심해서, 엄정하고 중후하여 소전의 정통이라 할 수 있는 태산각석은 원석에 9자만 있을 뿐이고, 낭야대각석도 글자가 대부 분 뭉그러지고 희미하여 읽기가 어렵게 되었으며 소전의 둥글고 힘차며 중후한 맛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진의 권량명(權量銘)은 소전의 자료로서 청동제 또는 철제의 권(權)이나 양(量)에 각입한 명문(銘文)을 뜻하는 것이다. 진시황 은 도량형의 통일을 위해서 관제(官製)의 원기(原器)를 만들어서 민간에 배포하였고 그릇 옆에 그 취지를 알리는 소서(소書)를 새겨 넣었다. 훌륭한 소전으로 쓰여진 것이기는 하나, 문자도 작고 각석의 문자에는 미치지 못한다. 또, 점점 간소화되어 필획을 생략, 점진적으로 후대의 예서와 같이 되어버린 것도 있다.

1975년 호북(湖北)의 운몽(雲夢)의 고묘에서 천 점이나 되는 많은 양의 진대 죽간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전서가 차차로 예서로 변화되어가고 있는 과정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태 산 각 석 (泰 山 刻 石)*

태산각석은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후, 동방의 군현을 순회하면서 세운 송덕비의 하나로 낭아대각석과 더불어 소전의 표준 이라 불릴 만큼 유명하다. 이 각석을 탁본해 본 결과 2백 23자의 전문을 얻을 수 있었는데, 명시대의 탁본에는 29자만 남아 있었 고, 청조때는 화재로 파손되어 그 패석에 겨우 10여자가 보일 뿐이었다.

*낭 아 대 각 석 (瑯 牙 臺 刻 石)*

진시황제는 태산각석을 세운 해에 산동의 낭아에 올라가 제대를 쌓고 돌에 각하여 진의 덕을 기리었다. 이 각석의 글자는 뭉개지고 떨어져나가 겨우 탁본으로 10행정도 전해지고 있다. 이 비석의 패석은 북경 박물관에 일부 소장되어 있다. 이사의 서(書)로 전해지며, 태산각석이 정제된데 비해 용필이 좀 부드럽고 좌우 상칭의 균제가 잘

잡힌 힘찬 표현의 장중감을 준다.

5) 한(漢)

소전을 간략화한 것이나, 소전과 같이 국가가 제정한 자체가 아니라 민간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예서(隸書)라는 새로운 서체가 생겨났다.

(1)전한 ; 예서의 진전(秦篆)과 초서(草書)의 등장했다.

한간(漢簡) - 대부분 필세가 자연스럽고, 붓으로 쓴 먹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 전서에서 예서로, 예서에서 초서로 변화되는 전환기의 서체로 볼 수 있다.

마왕퇴(馬王堆)1호묘의 한간 - 전서의 풍치를 남기면서 진보된 예서의 필법을 나타내고

있다.

돈황(敦煌), 누란(樓蘭) 거연(居延) 한간 - 기존의 학설을 뒤엎을 만큼 귀중한 자료로 파책의 서법이 이미 전한 때 존재하였으며, 예서를 간략화하여 빠르게 쓰는 초예(草隸), 일종의 초서(草書, 장초(章草))가 쓰이고 있었다는 것이 알려졌다. 주로 변방의 기록들이므로 초서체가 일반 민간에 널리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정식 서체로는 대부분 예서(파책이 있는)가 사용되었고, 일상의 서사체로는 예서의 속서(速書)로 장초(章草)와 초예(草隸)가 쓰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후한 : 각석( 刻石) - 비의 형식을 구비하지 않은 것이 많았다.

석궐(石闕) - 사천(四川) 과 산동(山東)에 많았다.

마애(摩崖) - 천연의 암벽에 직접 문자를 각입하는 것 등의 석각문자

석비의 유행 ; 비석의 문자로는 한대에 들어와 완성되어 통용서체가 되었던 예서 가새겨 졌고, 예서는 예술적으로 점점 그 아름다움을 발휘 하였다.

종이의 발명 ; 환관인 채륜(蔡倫)에 의해 종이를 발명되면서 초서가 발달하였다

서가(書家)의 등장 ; 조희(曹喜) - 전예(篆隸)에 능하고 .전예파. 채옹(蔡邕),

두도(杜度) -초서에 능했다.

초서파(=행초파). 장지(張芝), 초서는 진의 예서가 간략화되어서 이룩된 것으로, 초예(草隸)라고 할 수 있으며, 그 후의 초서를 금초(今草)라고 할 수 있다.

설문해자(說文解字)편찬 ; 허신. 완전하게, 그리고 계통적으로 소전을 보전하고 있고 당시 통용하던 고문, 주문 속체(俗體)가 포함되어있다. 모두 14편으로 9,353자가 수록되어 있다.

(3)말기 : 파책의 필법이 대단히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전서와 예서의 둥근 맛이 있는 형을 받아들여서 해서를 만들었다. 해서는 예서의 사각형과 정확성이라는 기본 성격과 장초의 간결성과 속필(速筆)을 결합한 서체이다.

행서가 등장 - 후한의 유덕승(劉德昇)이 간편하고 쉽게 쓰고자하여 만들었고, 예서의 형식을 완전히 벗어난 진보된 형태이다. 예서의 모난 각(角)이 죽었고 운동감과 경쾌한 맛이 가미되었다. 행서의 획과 자형은 해서와 동일하나 속필로 썼다는 사실이 다르다.

아마도 해서와 행서는 거의 동시에 일어나 유행했을 것이다

*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는 서체들은 한대에 이미 모두 만들어졌다. 그만큼 한대 특히,

후한시기는 중국서예사상 매우 중요한 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을 영 비 ( 乙 瑛 碑 )*

후한의 환제(桓帝)때에 노나라의 재상 을영의 신청에 의하여 공자묘에 묘를 관리하는 사람을 두게 한 것을 기술하고, 을영 이 하 그 일에 관계된 사람들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비문은 18행,각 행에 14자로 되어 있다. 결구가 잘 맞춰져 있고 용필이 날카로우며 그 파책은 특히 역동적이다. 조전비에서처럼 중심으로 밀집시키고 좌우 양면으로 세를 확장시켜 내는 결구 도 아니며, 장천비처럼 방형 안에 필획을 제한시키는 결구형식도 아니다. 평범한 모양이지만 힘이 들어 있고, 소박하면서도 경부 한 느낌을 주지 않는 충실한 서체로서 팔분서체의 정통으로 꼽힌다. 중량감과 균형미가 아낌없이 발휘한 한대의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예 기 비(禮 器 碑)*

예기비가 새겨진 것은 약 1800여년전 후한의 환제 영수(永壽) 2년의 일이며, 한래비 라고도 부른다. 이 비문의 내용은 노나 라의 제상이던 한래의 공적을 칭송한 글인데, 그는 공자를 존중해 그 자손 일족에게는 일반인과 다른 특별한 대우를 해야 한다고 주장, 징병이나 노역을 면해 주는 등, 진심어린 예우를 다했다. 또 그는 진시황제의 폭거 이후 산둥성 취무에 있던 허물어진 공자묘(이곳은 한 이후 역대의 비가 많아 곡장비림(曲章碑林) 이라 불린다.)를 수리하고 제사에 쓰이는 가장 중요한 기구류, 즉 예기를 정비하고 또 공자의 생가를 수복하고,묘 주변의 배수 사업 등도 했다. 이와 같은 한래의 작업에 감동한 사람들이 그의 높은 덕을 기리고자 돌에 새긴 것이 바로 이 예기비 이다. 한비는 중후한 것과 연미(硏美)한 것이 있느데 이 비는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 중용을 지키고 있다. 문자의 구성이 알맞고 운필이 정교하여 높은 품격을 지니고 있는 비로서 새김도 훌륭하고 글자 수도 많아 예서를 익히는데 적당하다. 그리고 예기비의 선조(線條)에 관하여서는 유(여윔),경(단단함),청(맑음),정(곧음)이 언급되어진다. 즉, 예기비는 선조가 여위어 신정(神情)이 넘치며 단단해서 골격이 튼튼하고 맑아서 모습이 명랑하며 곧아서 태도가 준수하다고 말해진다. 따라서 예기비에 대한 감상은 필획의 선조를 통해 그 신정과 골격, 모양, 자태를 터득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사 신 비 (史 晨 碑)*

이 비는 후한의 영제 시대에 노나라의 승상이 된 사신이 공자묘에 성대히 제사를 치르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로 현 재 산동성 곡부{공자묘의 비림(碑林)}에 있다. 이 비는 전후 양면으로 문장이 가득 새겨져 있는데, 앞면을 사신전비, 후면을 사신 후비라 칭한다. 사신전비의 내용은 대개 사신이 공자의 고향에서 노나라 승상의 직에 있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알고 아울러 상 서(尙書)에게 성상(聖上)으로 하여금 공자의 제사를 올리도록 청하여 주기를 간청한 것이다. 사신후비의 내용은 사신 이공자에게 제사 올릴 때의 성대한 정황에 대하여 기술한 것이다. 고박하고 후실(厚實)하며, 팔분예의 전형적인 것의 하나이다. 글자체는 3: 2내지 4:3정도의 세로 구성이다. 서법을 확실히 지켜 늘씬한 맛이 있고 화려하고 기교있는 필법에 신중하고 긴장미가 있으며 단아하게 자형이 잡혀 있어 예서를 배우는 입문으로 적당하다.

*서 협 송 ( 西 狹 頌 )*

서협송은 마애각으로 무도(武都)의 태수가 서협의 각도(閣道)를 수리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원형, 사각형의 결구로 시작하거나 끝나고, 파책이 다른 비석처럼 강조되지도 않은 소박하고 야성미 넘치는 글씨, 굵고 가늠이 없이 똑같은 굵기로 글씨를 쓰고 있지만 무미건조하지 않고 마음에 다가오는 박력이 있다. 장천비에서처럼 단순하고 소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감서성 성현 이궁협의 절벽에 새겨져 있는데, 처음에 오단크기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다시 오단크기의 유래가 적혀 있다. 이 왼쪽에 서협송의 본문이 있다. 글의 끝에 구정(仇靖)이란 글쓴이의 서명이 있다. 한비는 대체로 글쓴이를 밝히지 않지만, 이 작품은 서명이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서풍은 중앙 도시의 전형을 약간 벗어났지만 의지적인 늠름한 붓놀림은 모든 한비 가 운데 단연 돋보인다.

*조 전 비( 曺 全 碑 )*

조전비는 흙속에 매몰되어 오다가 명나라 때 섬서성 부양현의 옛 성터에서 발굴되었다. 그전에 이 비는 한비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였으나, 20C 영국 고고학자인 스타인이 한인들의 진적(眞蹟)을 발견함으로써, 조전의 우려한 서풍이 한말의 퇴폐한 풍조와 일치하지 않다는 것과 이 비의 자형이나 필화의 모양새는 예법이 완성된 극치 점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 비의 서법은 300년간의 정칙을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진적이 아니라는 아쉬움은 면할 길이 없다. 또 하나 조전 비의 단정한 모습에서 결체나 용필의 비밀을 엿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단장하면서도 아리땁고 중후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풍모와 중심 밀집과 좌우서전(左右舒展)의 결구를 특징으로 하고 있는 이 비는 몇 단점에도 불구하고 한비의 치보(致寶)라 일컬어지고 있다. 조전비의 내용은 정확히 알 길이 없으나, 상황증거를 추리하건대 부양현 장관이던 조전의 희망에 따라 그의 창덕비가 세워지기로 되어 며칠 후면 입비식까지 갖게 될 무렵 돌연 조전이 실각한 것으로 보인다. 비의 뒷면에는 관계한 사람들의 이름과 기부한 금액까지 명기되어 있는데, 바로 그들이 연루되는

것이 두려워 증거품이 될 비를 땅속에 묻어 버렸을 가능성이 짙다. 이 비를 세운 날짜는 중평 2년 10월이고 사서에 의하면 그해 9월 삼공, 즉 최고 권력자중의 한 사람인 사공 양사가 죽었다. 동시에 그 참모 격이던 간의 대부 류도는 갑자기 실각하고 다음날 처형되었다. 조전도 그 일당에 속해 있었던 것 같다. 조전의 동생 영창 태수 조란도 당쟁 때문에 죽고 조전도 그 때문에 벼슬을 버리고 7년간이나 숨어 지내던 일이 기록되어 있다.

*장 천 비 ( 張 遷 碑 )*

낙음현의 현령이었던 장천의 공덕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본문에는 가차자(假借字)나 오자가 더러 있어서 후세의 모각이 아니냐는 논란도 있지만, 소박하면서도 너그러운 서풍은 후세에 따르기 힘든 미를 지니고 있다. 시기상으로는 후한의 말기에 해당되는 이 비는 용필이 방모(方模)하고 졸후(拙厚)한 맛이 있다. 서법은 위진의 팔분서체의 선구가 되었다. 소박하고 힘찬 점획, 완강한 네모꼴의 구성, 굵기를 모르는 단순한 선이 그 특징을 이루고 있다. 충분히 뻗은 점획, 자유롭고 메이지 않은 결체에 그 참맛이 있다. 필획의 기필과 수필이 곧바로 이루어지고 전절(轉折)이 항상 직각을 이루어, 장천비가 한예중 방필 웅강(方筆雄强)의 전형으로도 일컬어진다. 또, 후한 말에 나타난 이 비는 이미 해서의 형태에 매우 근접한 서체를 보이고 있어서 , 그 시기에 해서의 원형이 태동되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가치가 있다. 본문에는 이 비를 세우게 된 유래와 사자구(四字句)로 된 명분이 있다.

6) 위, 진(晋) 남북조(오체가 모두 완성 됨)

북위 - 해서(장맹용비. 정문공비)

북조 - 육조풍. 소박하고 힘이 있다.

남조 - 세련 온화 왕희지풍

왕희지-해서, 초서, 행서를 완성하고 서예를 예술로 승화시킴, 난정서(행서) 집자성교서(행서). 서성

*장 맹 룡 비 ( 張 孟 龍 碑 )*

육조 시대의 대표적인 해서이다. 서도에서의 힘은 적절한 조화가 따라야 한다. 결구법이 바로 그것인데, 장비액(張碑額)은 그런 것의 본보기라 하겠다. 본문도 점획의 배치에 따라 소박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이지적으로 당대(唐代)의 서와 같은 정제미 를 나타내고 있다. 경중의 배합, 각도의 변화, 그리고 글자의 흐름에 따라 그것들을 조절하는 의욕적인 필력, 이러한 모든 요소 가 큰 비석에는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흔적들을 표면에 나타나지 않게 할 것, 여기에 서도의 비결이 있다. 북위서가 유행하던 때의 이상형이라고 할 수 있다. 용문(龍門)의 강함과 예리함,정도소(鄭道昭)의 온화함, 고정비의 완성된 계획성 등이 함축되어 있는 훌륭한 유산으로 여겨진다. 비면은 해서로 26행,한 행에 24자씩 새겨져 있고, 비음은 이 비를 세움에 있어서 관계가 있었던 사람들의 관위 성명을 연서한 것이 10여단 있다. 이 비의 비액에서 '청송(淸頌:덕을 칭송한다)'으로 표현 되는 바와 같이 송덕비이다. 장맹룡은 당시 불교가 성행하고 있었지만, 공자와 맹자의 학문을 깊이 믿는 유교를 선양하였다. 그 공적이 컸기 때문에 향당(鄕黨)들이 이에 감탄하여서 장맹룡의 덕을 기리고자 비를 세웠고, 그의 일대기에 관한 것과 칭송이 그 내용이다.

* 왕희지(王羲之)307 - 365 *

중국 동진(東晋)의 서예가. 자는 일소(逸少)이다. 우군장군의 벼슬을 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왕우군이라고도 불렀다. 오늘의 산뚱성 린이현[臨沂縣]인 낭야 출신이며, 동진 왕조 건설에 공적이 컸던 왕 도의 조카이고, 왕 광의 아들이다. 중 국 고금의 첫째가는 서성(書聖)으로 존경받고 있으며, 그에 못지않은 서예가로 알려진 일곱째 아들 왕헌지(王獻之)와 함께 <이왕 (二王)> 또는 <희헌(羲獻)>이라 불린다.

16세 때 치감의 요청으로 그의 딸과 결혼하였다. 처음에 서진(西晋)의 여류 서예가인 위부인의 서풍을 배웠고, 뒤에 여러 가 지 서체의 장점을 두루 체득하고 종합하여, 한(漢)나라 위(魏)나라의 질박하고 옹훈한 서풍을 연미하고 유려한 서풍을 바꿈으로 써 서예를 예술로 끌어올리는 데에 눈부신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왕희지 이후의 역대 서예가들이 왕희지를 배우지 않고서는 안 되 었을 정도로 끼친 영향이 막대하였다.

벼슬길에 나아가 비서랑으로부터 출발하여 유 양의 장사(長史)가 되고, 351년에는 우군장군 및 회계의 내사(內史)에 이르렀다 . 그는 명문출신이며, 경세(經世)의 재략이 있어 은 호의 북벌을 간(諫)하는 글과 사 안에게 민정(民政)을 논한 글을 쓰기도 하 였다. 그러나 일찌기 속세를 피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는데, 왕 술이 중앙에서 순찰을 오자 그 밑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355 년(永和 11) 벼슬을 그만 두었다. 그리고 경치가 아름다운 회계의 산수간에서 은사(隱士)와 청담(淸談)을 나누고, 또 도사(道士 ) 허 매를 따라 채약에 몰두하는 등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다가 한평생을 마쳤다.

그는 내사 재직 중이던 353년(영화 9) 늦봄에, 회계의 난정에서 있었던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연회에 참석하였다. 그 때 모 인 41인 명사들의 시를 모아 만든, 책머리에 그는 스스로 붓을 들어 서문을 썼다. 이것이 이른바 <<난정서(蘭亭序)>> 라는 그의 일대의 걸작이며, 산수문학의 남상(濫觴)이 되었다. 그는 예서를 잘 썼고, 당시 아직 성숙하지 못하였던 해 행 초의 3 체를 예술적인 서체로 완성한 데 그의 가장 큰 공적이 있으며, 현재 그의 필적이라 전해지는 것도 모두 해 행 초의 3체에 한정되어 있다.

해서의 대표작으로는 <<악의론(樂毅論)>> <<황정경(黃庭經)>>이, 행서로는 <<난정서>>, 초서로는 그가 쓴 많은 편지를 모은 <<십칠첩(十七帖)>>이 옛날부터 유명하다. 또 송의 태종이 992년에 조각한 < <순화각첩>>이라는 법첩에는 그의 편지가 많이 수록되었고, 당나라의 회인이라는 승려가 고종의 명을 받아 672년에 왕 희지의 필적 중에서 집자(集字)하여 세운 <대당삼장성교서비> 등도 그의 서풍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밖 에 <<상란첩>> <<공시중첩>> <<유목첩>> <<이모첩>> <<쾌설시청첩>> 등의 필적이 전하여 온다. 그러나 이것들은 왕희지의 육필(肉筆) 그대로는 아니고 진적(眞跡)과는 많이 다를 것으로 짐작된다.

당나라 태종이 왕희지의 글씨를 사랑한 나머지 온 천하에 있는 그의 붓글씨를 모아, 한 조각의 글씨까지도 애석히 여겨 죽을 때 자기의 관에 넣어 묻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전하여 오는 필적만 보아도 그의 서풍은 전아하고 힘차며, 귀족적인 기품이 매우 높다.

*난 정 서 ( 蘭 亭 序 )*

행서의 용(龍)이라 불리는 난정시서(蘭亭詩敍)는 왕희지가 51세 때에 '흥에 겨워서 쓴' 작품으로, 고금의 서적중에서 영원히 빛나는 밝은 별이라 하겠다. 동진의 목제(穆帝) 영화(永和)9년 3월에 명승지 난정에서 우군장군(右軍將軍) 왕희지의 주재하에 성대하고 풍아(風雅)로운 모임을 가졌다. 거기서 각지의 명사들이 모여 시를 지었는데 이것으로 난정집을 엮었다. 여기에 왕 희지가 전서(前序)를 보탰는데 이것이 유명한 난정서가 된 것이다. 즉석에서 시편의 서(序)를 짓고 쓴 것이지만 서(書)뿐만 아니고 문장이나 사상도 지극히 높은 수준의 작품이라 한다. 이 진적은 줄곧 왕가(王家)에 진장되어 7대째인 지영(智永)에게까지 전해졌다가, 당태종이 왕희지의 글씨를 몹시 사랑하여 이 난정서를 입수했다. 후에 당태종은 이를 존중히 여겨 "천하 제 일의 행서"라 명하고 죽을 때 관속에 같이 넣게 함으로써 아쉽게도 진적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집 자 성 교 서 ( 集 字 聖 敎 序 )*

홍복사(弘福寺)의 승려 회인(懷仁)이 칙령에 의해 궁중에 비장(秘藏)된 왕희지의 법첩중에서 집자한 서이다. 몇몇 조수와 함께 무려 25년간에 걸친 비상한 각고끝에 집대성한 것이다.{감형 3년(672) 12월 8일 경성법려건립(京城法侶建立)} 변이나 방을 취합하거나 점획을 해체,합병시키거나 했는데, 사진술(寫眞術)도 없던 당시에 그 노고가 어떠했는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내용은 당태종이 명승 현장삼장(玄奬三藏)의 신역불전(新譯佛典)이 완성된 것을 기념하여 지은 성교서(聖敎序)와 당시 황 태자였던 고종이 그 경전 번역까지의 경과를 적은 술성기(述聖記)와 그리고 현장삼장이 번역한 반야심경(般若心經)이 함께 비문 을 이루고 있다. 30행에 각 행마다 80 여자씩 1904자로 되어 있다. 이 성교서는 당대(塘代)의 모본이기는 하나 왕희지 행서 의 진수를 파악하는데 불가결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서(書)는 왕희지의 진적으로부터 집자하여 새긴 천하의 명비로 품격 이 높고 형이 정제되어 습벽이 없다. 게다가 용필이 유려하고 다채로와 한없는 정기를 깊이 간직하고 있어 예로부터 행서 입문 에 필수적 교본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왕희지의 조형원리는 엄격히 정돈된 구조가 아니고, 부조화(不調和)라고 생각될 정 도로 비뚤어진 형태의 것들이 많다. 그러나, 그 비뚤림은 각도나 용필에 일정한 벽이 없이 종횡무진으로 변화하고 있다. 부 조화속의 조화와 변화의 원칙을 이 집자성교서에서도 잘 볼 수 있다. 집자성교서는 이때 만들어진 원비(源碑)와 송대의 탁본을 가장 귀하게 치는데, 명의 시대에 이르러 원비가 절단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 것을 미단본(未斷本), 그 이후 것을 기단본(己斷本) 이라 구분해 부른다.

7) 당 (통일 신라에 영향) : 해서의 전성기. 4대가(구양순, 안진경, 우세남, 저수량 )

구양순 - 구성궁예천명(해서의 법본, 깨끗, 근엄, 단정한 구조미)

안진경 - 제2의 서성. 안 근례비(해서), 쟁좌위고(행서)

우세남 - 공자묘당비

저수량 - 안탑성교서

손과정 - 서보(초서의 법본)

* 구양순(歐陽詢) 557 - 641 *

중국 당나라 초기의 서예가. 자는 신본(信本)이고, 담주임상 사람이다.

진(陳)나라의 광주자사였던 아버지 흘이 반역자로 처형된데다가, 태어나기를 키가 작고 얼굴이 못생겨서 남의 업신여김을 받는 등, 어릴 적부터 불행한 환경을 참고 견디며 자랐다. 그러나, 머리는 유난히 총명하여 널리 경사(經史)를 익혔으며, 수양제를 섬게 태상박사가 되었다. 그 후 당나라의 고종이 즉위한 후에는 급사중(給事中)으로 발탁되었고, 태자솔경령 홍문관학사를 거쳐 발해남으로 봉해졌다. 그의 서명(書名)은 멀리 고려에까지 알려졌으며, 이왕(二王), 즉 왕희지 왕헌지 부자의 글씨를 배웠다고 하는데, 현존하는 <<황보탄비>> <<구성궁예천명>> <<황도사비>> 등의 비와 <<사사 첩>> <<초서천자문>>을 보면, 오히려 북위파의 골격을 지니고 있어, 가지런한 형태 속에 정신내용을 포화상태 에까지 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의 글씨는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해법(楷法)의 극칙(極則)>이라 하며 칭송하고 있다. 그의 아들 통(通)도 아버지 못지 않은 서예가로서 유명하다.

구양순체는 구양순의 서체로서, 자획과 결구가 함께 방정(方正)하고 근엄하여 한 자 한 자를 쓰는 데에 순간이라도 정신적 이완을 불허하는 율법적인 특색을 가진다.

구양순은 왕희지체를 배웠지만 험경(險勁)한 필력이 왕희지보다 나아서 자신의 독창적인 서체를 창안했다. 구양순의 서적은 비서(碑書)와 서첩으로 전해지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왕희지체가 무색할 정도로 구양순체가 유명하였다.

*안진경 (顔眞卿 ; 709~785)*

중국 당나라 서예의 대가. 자는 청신이고, 노군개국공에 봉해졌기 때문에 안노공(顔魯公)이라고도 불렀다. 산뚱성 낭야 임기 출신이고, 북제의 학자 안지추의 5대손이다.

진사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평원태수가 되었을 때 안녹산의 반란을 맞았으며, 그는 의병을 거느리고 조정을 위하여 싸 웠다. 후에 중앙에 들어가 현부상서에 임명되었으나, 당시의 권신(權臣)에게 잘못 보여 번번이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784년 덕종 의 명으로 회서의 반장인 이희열을 설득하러 갔다가 연금당하 였고, 이어서 곧 살해되었다. 글씨는 처음에 저수량을 배우고 후 에 장욱을 배우고 중장(衆長)을 합도(合度)하여 해서와 행서에서 고법(古法)을 크게 변화시키는 등 새 풍격을 이루었는데. 남조 이래 유행해 내려온 왕희지의 전아한 서체에 대한 반동이라고도 할 수 있을만큼 남성적인 박력 속에, 당대 이후의 서도를 지배 하였다. 인품과 충절에서도 추앙받는 까닭에 더욱 글씨가 천고에 빛남을 후세에 보여준 사람이다.안진경이 남긴 행초서의 대표적 필적 세 가지, 즉 <<제질문고>> <<고백부문고>> <<쟁좌위고>>를 가리켜 안진경삼고(顔眞卿三稿)라고 하는데, 이들 글씨는 모두 글씨를 쓴다는 의식이 없이 졸연간에 휘갈겨 쓴 초고 그 대로의 필적이어서 더욱 자연의 묘미가 있고, 가장 진귀하게 여겨지는 글씨이다.

대표작은 해서의 <<안씨가묘비>>와 행서의<<쟁좌위>>가 있고, 이 밖에도 많은 금석문과 뛰어난 수적 ( 手迹)을 남겼다.

* 우세남(虞世南)558 - 638*

중국 당나라의 서예가. 자는 백시(伯施)이고, 여요출신이다. 6조(六朝)의 진(陳) 때부터 서와 학재로 알려지기 시작하여 수의 양제를 받들었으나 그리 중용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의 태종의 신임을 받아 홍문관 학사 비서감을 거쳐, 638년에는 은청광록 대부가 되었다. 왕희지의 서법을 익혀, 구양순 저수량과 함께 당초의 3대가로 일컬어지며, 이왕(二王)과 지영을 배워 원융(圓融 )하고 질박한 필치를 이루었다. 특히 해서의 제1인자로 알려져 있다. 태종은 우세남에게 서(書)를 배웠는데, <세남에게 5절( 五絶)이 있는데, 그 첫째는 덕행(德行), 둘째는 충직(忠直), 세째는 박학(博學), 네째는 문사(文詞), 다섯째는 서한(書翰)이다 > 라고 절찬하였다고 한다. <<공자묘당비>>가 그의 필적으로 가장 유명한데, 행서로는 <<여남공주묘지고 >> 가 있다. 또 시에서도 당시의 궁정시단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으며, 시문집 <<우비감집>>을 남겼다.

저술로 <<북당서초>> 160권이 있다.

*저수량( 遂良)596 - 658 *

중국 당나라때의 서예가. 자는 등선(登善)이고, 항조우 첸탕 사람이다. 우세남 구양 순과 아울러 초당(初唐) 3대가로 불린다.

아버지 양은 학문과 서도에 뛰어나 태종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저수량도 조정의 부름을 받아 시서가 된 뒤 충절과 엄정으로 역 시 신임이 두터웠다. 왕희지의 필적 수집사업에서는 태종의 측근에서 그 감정을 맡아 보면서 그 진위를 판별하는 데 착오가 없었다고 한다. 고종때 하남군공에 봉해졌으나, 만년에 황제에게 직간(直諫)한 것이 노여움을 받아 좌천된 지 3년 후 불우한 가운 데 생애를 마쳤다.

그의 글씨는 처음에 우세남의 서풍을 배웠으나, 뒤에 왕희지의 서풍을 터득하여 마침내 대성하였다. 그의 서풍은 아름답고 화 려한 가운데에도 용필(用筆)에 힘찬 기세와 변화를 간직하고 있다. 왕희지 이후 글씨체 변화의 새로운 시작을 연 인물로 평해지 며, 후세에 끼친 영향이 막대하였다.

대표작으로는 <<맹법사비>> <<이궐불감비>> <<안탑성교비>> 등이 있다.

*안 근 례 비 ( 顔 勤 禮 碑 )*

안씨가묘비와 더불어 안진경 해서의 2대 역작중의 하나이다. 비가 세워진 연도는 정확히 알 길이 없으나,비문 중에 기재된 사실을 감안해 입비(立碑)는 안진경의 말기의 글씨로 추정되어 진다. 비는 사면각이나 세째 면은 갈아 없어졌고, 약 1천 6백 여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비의 자획이 온전하며 특히 삼면의 글씨는 원필이며 강,유가 잘 조화되어 있다. 장봉의 표현이 세련되어 있으며 그의 해서중에서 가장 우수한 기교 표현 작품이라 한다. 안진경의 필법은 구양순의 경우와 다른 바 없으나 구 법(歐法)보다도 약간 붓을 세우며, 안서(顔書)의

가로획은 우상향세(右上向勢:손에 쥔 붓을 그대로 댄 후 일단 조금 띄웠다 오른 쪽으로 그음)의 수법을 사용한다. 구(歐)의 배세(背勢), 안(顔)의 향세(向勢)라고 부르는 이 상대적인 조형수법은 해서 기법의 양극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이 비의 내용은 안진경이 그의 조부인 안근례의 일대기를 써 놓은 것이다.

8) 송 : 형식보다는 필의를 중시(행서, 초서가 주류) 개성적, 활달한 서풍, 소식, 황정견, 미 불

* 황정견 [黃庭堅, 1045~1105] *

자 노직(魯直), 호 산곡(山谷). 홍주(洪州:江西省) 분녕(分寧:修水縣) 출생. 1066년 진사(進士)에 급제한 후 국자감 교수(國子監敎授)를 거쳐 각지의 지방관리를 역임하였다. 1086년에 비로소 중앙관직에 취임, 교서랑(校書郞)이 되어 국사편찬(國史編纂)에 종사하였다. 1095년 왕안석(王安石)의 신법당(新法黨)이 부활됨과 동시에, 구법당(舊法黨)인 그는 신법을 비난하였다는 죄목으로 검주(黔州:四川省 彭水縣)에 유배되었다. 1100년에 사면 복직되었으나, 1102년에 다시 무고를 당하고 의주(宜州:廣西省宜山縣)에 유배되어,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시인으로서의 명성이 높았으며, 스승인 소식(蘇軾:東坡)과 나란히 송대(宋代)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꼽힌다. 그의 시는 고전주의적인 작풍을 지녔으며, 학식에 의한 전고(典故)와, 수련을 거듭한 조사(措辭)를 특색으로 한다. 강서파(江西派)의 시조로 꼽히며, 《예장 황선생문집(豫章黃先生文集)》(30권)이 있다. 서(書)에서는 채양(蔡襄) ·소식 ·미불(米芾)과 함께 북송(北宋)의 4대가(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글씨는 단정하지만 일종의 억양(抑揚)을 지녔으며, 활력있는 행초서(行草書)에 뛰어났다.

* 미불 [米芾, 1051~1107] *

자 원장(元章). 호 남궁(南宮)·해악(海岳). 후베이성[湖北省] 샹양[襄陽] 출신. 관직은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에 이르렀고 궁정의 서화박사(書畵博士)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규범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고 기행(奇行)이 심했다. 수묵화뿐만 아니라 문장·서(書)·시(詩)·고미술 일반에 대하여도 조예가 깊었고, 소동파(蘇東坡)·황정견(黃庭堅) 등과 친교가 있었다.

글씨에 있어서는 채양(蔡襄)·소동파·황정견 등과 더불어 송4대가로 불리며, 왕희지(王羲之)의 서풍을 이었다. 그림은 동원(董源)·거연(巨然) 등의 화풍을 배웠으며, 강남의 운연(雲煙) 어린 아름다운 자연을 묘사하기 위하여 미점법(米點法)이라는 독자적인 점묘법(點描法)을 창시하여 오진(吳鎭)·황공망(黃公望)·예찬(倪瓚)·왕몽(王蒙) 등 원말 4대가와 명(明)나라의 오파(吳派)에게 그 수법을 전했다.

아들 미우인(米友仁)에 이르러 성립된 이 일파의 화풍을 ‘미법산수(米法山水)’라고 한다. 북송 말의 회화사상을 아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화사(畵史)》 외에도 《보장대방록(寶章待訪錄)》 《서사(書史)》 《보진영광집(寶晋英光集)》 《해악명언(海岳名言)》 등의 저서가 있고, 《초서9첩(草書九帖)》 《행서3첩(行書三帖)》 등의 작품이 있다.

9) 원 : 형식을 존중. 조맹부(왕희지 서법의 송설체 ;규형 잡힌 해서 + 유려한 행서)

고려말 조선초에 영향

* 조맹부(趙孟 )1254 - 1322 *

중국 원나라의 화가 서예가. 자는 자앙(子昻)이고 호는 집현(集賢) 송설도인(松雪道人)이다. 시호는 문민(文敏). 저장성 우싱 현 태생이다.

송나라 종실 출신이며, 원나라 세조에 발탁된 뒤 역대 황제를 섬겼고, 벼슬은 한림학사승지 영록대부에 이르렀다. 죽은 뒤에 위 국공(魏國公)에 추봉되었다. 송나라 태조의 후손이면서도 원나라를 섬겨 영달하였으므로, 후세에 명분상의 비난을 면하지 못하 였다. 당시의 대표적인 교양인으로서 정치 경제 시서화에 넓은 지식을 가졌으며, 특히 서화에 뛰어났다.

서예에 있어서도 왕서(王書)로의 복귀를 주장하였으며, 글씨와 그림은 근원이 같다는 '서화동원(書畵同源)'을 주장하였다. 서 풍은 단정하고 경건한데, 우리나라 고려와 조선시대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림에 있어서는 남송의 원체(院體) 화풍을 타파하 고, 당 북송의 화풍에 되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그림은 산수 화훼 죽석 인마 등에 모두 뛰어났고, 서예 는 특히 해서 행서 초 서의 품격이 높았으며, 당시 복고주의의 지도적 입장에 있었다. 그의 아내 관도승(管道昇)은 묵죽에 이름이 있었고, 아들 옹 도 산수 화조 화가이며 서예에도 탁월하였다. 또 화우 문인이라 할 수 있는 전선 진중인 왕 연 등이 있어, 우싱파라는 한 파를 이루었다.그림으로 <<중강첩장도>> <<사마도권>> 등이, 글씨 유품으로는 <<여중봉명본척독>> 등 이 있다. 그림은 오 진 황공망 왕 몽과 더불어 원대의 4대가로 손꼽힌다.

10) 명 : 형식을 중시한 고전파(문징명. 동기창)와 창조적 변화를 중시한 개성파(장서도, 왕학)가 병행

문징명 : 원의 송설체를 계승발전

동기창 : 단정한 해서와 자유분방한 초서를 많이 남김

* 문징명 [文徵明, 1470~1559] *

자 징명(徵明) ·징중(徵仲). 호 형산(衡山). 이름 벽(璧)·소주부(蘇州府). 장주(長州:장쑤성[江蘇省] 우현[吳縣]) 출생. 1495년부터 1522년까지 몇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학문과 인덕이 세상에 알려져 1523년 54세 때 한림원시조(翰林院侍詔)를 제수받아 《무종실록(武宗實錄)》의 편수에 임하고, 3년 후인 1526년 관직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가 시문서화(詩文書畵)로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다.

그림은 동향 사람인 심주(沈周)에게 배운 외에도 곽희(郭熙)·이당(李唐)·왕몽(王蒙) 등 원(元)나라 말기 4대가를 사숙하여 그들의 화풍을 절충한 경향이 있으나, 본령은 남종(南宗)의 산수화에 있으며 심주와 함께 남종화 중흥의 중심인물이었다. 글씨는 이응정(李應禎)에게 배웠는데 왕희지(王羲之)·조맹부(超孟)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일족 중에는 문인·화가가 많았는데, 차남 가(嘉), 조카 백인(伯仁)이 유명하다.

*동기창 [董其昌, 1555~1636] *

자 현재(玄宰). 호 사백(思白) ·향광(香光) ·사옹(思翁). 시호 문민(文敏). 장쑤성[江蘇省] 화팅현[華亭縣] 출생. 1589년에 진사가 되고, 남경예부상서(南京禮部尙書)가 되었으나 환관의 횡포와 당쟁 때문에 사임하고, 1631년 옛 자리로 복귀하여 3년 후 태자태보(太子太保)가 되었다가 사임하였다. 사후에 태자태부(太子太傅)의 벼슬이 추증되었다. 관리로서도 명성이 높았으나 문명(文名)도 높아 시인 ·서가 ·문인화가로서 널리 알려졌고, 감식(鑑識) ·감장(鑑藏) ·임모(臨模) 등에도 업적을 남겼다.

명나라 말 제일의 인물이었으므로 당시의 화단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고 화풍이나 소론(所論)은 후세 오파(吳派) 문인화가에게 결정적 감화를 주었다. 저서인 《화선실수필(畵禪室隨筆)》에서 남종화(南宗畵)를 북종화(北宗畵)보다도 더 정통적인 화풍으로 한다는 상남폄북론(尙南貶北論)을 주창하였다. 그림은 동원(董源) ·거연(巨然)을 스승으로 모셨고 송(宋) ·원(元)의 화가들의 장점을 빠짐없이 수집하고, 심석전(沈石田) ·문징명(文徵明) 등의 오파문인화(吳派文人畵)의 남종화풍을 계승 발전시켜 근거를 원나라의 황공망(黃公望)에게서 찾았다.

스스로 고아수윤(古雅秀潤)이라고 부르던 화풍으로, 먹물 빛깔의 변화가 풍부하고 간명한 산수화를 많이 남겨 창작과 실제화업(實際畵業)을 화론(畵論)과 병행하여 전개하였다. 문학에도 능통하였고, 서가로서도 명대 제일이라고 불리며 형동(邢侗)과 어깨를 겨루어, 북형남동(北邢南董)이라 불린다. 서체는 왕희지(王羲之)를 주종으로 삼으면서도 글씨 체형보다 내용을 더 추구하여 당시 제일의 문인으로 각 방면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저서로 《산수화책(山水畵册)》 《용태집(容台集)》 등이 있다.

11) 청 : 고증학 금석학의 발달로 비학존중. 전서, 예서유행, 전각유행 (조선말기에 영향)

비파 - 비문(비첩 ; 비문 금석문으로 만든 교본)중시. 조지겸. 오창석

첩파 - 법첩(명필의 글씨를 만든 교본)중시. 유용

* 조지겸 [趙持謙, 1639~1685] *

본관 풍양(豊壤). 자 광보(光甫). 호 우재(迂齋) ·구포(鳩浦). 경기 광주 출생. 1663년(현종 4) 진사가 되고, 70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 정자(正字) ·검열(檢閱) ·이조좌랑 ·지평(持平)을 역임, 1683년 사간(司諫) 때 서인 김익훈(金益勳)이 남인의 모반사건을 허위조작하여, 남인을 해치려 하자 이를 탄핵하여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때 서인의 송시열(宋時烈)이 김익훈을 비호하자 재차 송시열을 공박하여, 노론 ·소론으로 분당됨으로써 윤증(尹拯)과 함께 소론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부제학 ·대사성 ·형조참의를 거쳐 1685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광주(廣州)의 명고서원(明皐書院), 고성(高城)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우재집(迂齋集)》이 있고, 편저에 《송곡연보(松谷年譜)》가 있다.

* 오창석 [吳昌碩, 1844~1927] *

근대 이전 중국 전각의 마지막 대가이기도 하다. 호는 부려(缶廬)이고 저장성[浙江省] 안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전각을 좋아하여 역대 전각의 장점을 취한 새로운 전각법을 개발하였다. 특히 석고문자(石鼓文字)를 모방한 글씨를 잘 썼으며, 30세 이후에는 전서(篆書) 필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50세가 넘어서 시작했으며, 특히 화훼화를 잘 그렸다. 화풍은 서위(徐渭)나 석도(石濤)를 모범으로 삼아 독특한 경지를 열었고, 글씨 쓰는 법으로 그림을 그려 힘찬 느낌을 준다. 소나무·대나무·매화나무의 세한삼우(歲寒三友)와 기석(奇石) 그림은 호방하면서도 참신하다. 화풍은 보기 드문 구도와 소재를 택하고 서체의 필법을 최대한 구사하여 독특한 선의 느낌을 자아낸다. 또한 중후한 필선의 화법을 창출하여 동양 회화미술사상 새로운 문인화의 경지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인보(印譜)에는 〈삭고려인존〉 〈오창석인존〉 등이 있고 서화집에는 《고철쇄금》 등이 있다. 그림으로는 《자등도(紫藤圖)》 《벽도개화도(碧挑開華圖)》 《등화난만도(藤華爛漫圖)》(1916), 《옥란도(玉蘭圖)》 《파초장미도》 《모란목련도》(192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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