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최고위과정

祝,孫炳哲臺灣展 / 筆墨의 再解釋을 위한 同行

祝,孫炳哲臺灣展



  대만, 이름만 들어도 내게는 가슴이 아린 곳이다. 예술을 알고 싶어서 미국으로 구라파로 쏘다니다가, 결국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서 初發心으로 다시 공부를 시작한 곳이 이곳이다.고궁박물원 등, 인간이 만든 보물을 가장 많이 지니고 있는 나라에서 나는 참으로 많은 작품들을 보면서, 내 40代를 불태우던 곳이다. 어찌 이 나라를 잊을 수가 있겠는가?

  이제, 그 나라에서 내가 아끼는 친구 손병철이 초대전시회를 갖는다고 한다. 우선 반가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가슴이 뜨거운 詩人 손병철을 만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내                            내내가 晩學으로 대만 유학을 마치고 한국서단을 맑혀보겠다고 한편 글을 쓰고, 한편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보겠다고 고심을 하고 있을 때, 釜山美術協會에서 事務局長을 하던, 의기심이 남달리 강한 이 청년이 자리를 박차고 서울로 와서, 역시 대만유학에서 돌아와 儒學敎授가 된 서예가 宋河燝博士와 함께 서예협회 창립 준비위원으로 노심초사하더니 그 귀중한 理事長의 자리를 나에게 넘겨주고 宋河燝博士는 학교로, 詩人 손병철은 한국서예협회의 사무국장으로 나를 誠心으로 도왔던 사람이다. 찬물을 얻어 마시고도 三代를 갚는 법인데, 나로 하여금 초발심을 잃지 않게 늘 詩로써 바탕을 삼아 忠言을 아끼지 않았으니 내가 어찌 그 공을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가 91년 어느날, 한국을 떠나면서 「思鄕」이라는 文人畵 한 폭을 나에게 남겨 주었는데, 일찍이 그 싹을 보았거니와 6년이 지나서 불쑥 북경대학의 철학박사를 갖고 나타나서 ‘物波’運動을 하면서 詩人의 前業을 팽개치고 散文쟁이로 변해서 손병철 특유의 毒舌로 마구 藝壇을 어지럽혀 놓았다. 贊反이 무슨 所用인가? 그렇게 저지르지 않고는 못 견디는 체질로 태어났으니 결과는 나중일이고, 잠자는 것들을 흔들어 깨워놓은 일만으로도 다행한 일로 보아야겠다.

  그런데 그의 그림은 人文精神을 놓치지 않고 있어서 풋풋한 냄새를 지니고 있으니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예술은 아직 피어나지 않은 자신을 과신하지 않아야 인간냄새를 유지할 수 있다. 또 성공에 집착하지 않아야 지금의 最善을 건질 수 있다. 道의 過不及을 짐작하고 있으니 손병철의 그림과 時代書는 刮目相對할 만 하고, 구태를 벗어 신선감을 잃지 않고 있으니 우선 그 礎石이 매우 놀랍다.

 物波에 있어서 가장 추상화 되어 있는, 그리고 그가 通常으로 말하는 ‘線의 無限性과 刹那性, 劃의 一回性과 多樣性’ 문제가 말로만 겉도는 한 서예의 본질적 생명을 잡기는 어렵다. 詩文學의 부속물로 만족하고 있는 서예에 생명을 불어넣는 길은, 이제는 제발 서예자체의 알몸으로 돌아와야 하는 일이다. 서예가 원래 가지고 있는 그 원시적인 서늘한 눈빛으로 回歸해야만 한다. 그 꿈틀거리는 생명요소 말이다. 그러자면, 그 긴긴 세월 안주했던 서예역사의 순탄한 공간에서 탈출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서예를 작은 가슴의 넋두리로 생각할 일이 아니라, 영원불변의 생명인 우주적 심장으로 향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재미로 튀는 것이 아니며, 즉흥적으로 무게를 떨어드리는 일도 아니며, 땀과 정성과 눈물이 함께하는 새로운 인간적 에너지를 되돌려 주어야 하는 절대 명제가 있는 것이다. 서예는 결국 심장의 문제이지,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詩心은 서예의 영혼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이 서예를 서예답게 하는 지름길이 될 것으로 믿는다.

  타고난 詩人이며 또 詩心을 서예의 심장으로 옮기고 있는 孫炳哲의 대만 전시회가 성공적인 결과를 갖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고, 아울러 나를 장학금으로 공부하게 하고 손병철을 초대해서 좋은 전시회를 마련해준 대만의 예술계와 국운이 불같이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1999년 6월 30일

韓國大邱藝術大學校 敎授 金 兌 庭(書藝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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筆墨의 再解釋을 위한 同行

                 ― 筆墨三人行展을 기획하며

                               

 羅石 孫炳哲(서예평론가/철학박사)


  20세기 전반기 서구미술의 입체주의와 초현실주의를 잇는 다리 역할의 예술가로 평가받는 파울 클레는 「예술영역에 있어서 정밀한 시도들」이란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확신에 찬 판단을 내리고 있다. 즉 “음악에서 이미 18세기말에 실행되었던 것이 미술 부문에서는 지금까지도 고작 시작에 머물러 있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클레의 논지에 따라 20세기 서구미술과 동양서예의 관계항에 적용시켜 본다면, 20세기 구미미술에서 실행되었던 많은 이즘운동이 서예 부분에서는 아직까지도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말은 또 역설적으로 금세기 서구현대미술의 다양 다기한 실천적 경향과 개념들이, 수천년 역사에 걸쳐 고도로 양식화 되고 추상화의 길을 걸어 온 동양서예의 필묵정신과 문인화적 문필정신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대응논리를 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20세기 초반까지의 서구미술의 수준이 모차르트의 음악에 미치지 못했다는 클레의 지적처럼, 세기말의 서양미술이 여전히 모차르트의 음악 수준에 미달하고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금세기 서양미술이 동시대의 동양서예에 비해 그 수준이 뒤떨어졌다는 판단은 곤란해 보인다. 동양쪽 우리 서예가들 모두 금세기를 보내며 반성해 보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

  80년대의 한국서예는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도록 하나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官展에서 民展으로 바뀐 것을 필두로 대학 서예과가 처음으로 신설되고, 예술의전당에 동양 유일의 전문서예관이 개관되었다. 뿐만 아니라 보수적 서단에 반기를 든 혁신적 사고의 서예단체가 생겨나기도 했다.

  이처럼 80년대 한국서단은 아직 이념성은 부족했지만 크고 작은 협회전과 회원전이 빈번히 열리기 시작한 시기였다. 비록 창립전도 창간호도 성사시키지 못하고 불발로 끝나긴 했지만, 83년 세모에 필자를 비롯한 박원규, 선주선, 조수현, 정충락 등이 모여 새로운 갑자년(1984) 출발을 기념하는 뜻에서 『갑자서단』그룹을 창립하고 무크지 「甲子集」을 내기로 했던 적이 있었으며, 88년에는 중견서가들의 「三人行展」이 개최되기도 했다. 미술쪽에서는 민중예술이 한창 불을 당기고 있었고 수묵화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을 무렵이었다.    

  이같은 때에 달구벌 한켠에서도 의식있는 청년 셋이 모여 行萬里의 길을 감행키로 하였으니, 오늘 「筆墨三人行」의 吾廬 孫曉鎭, 文鼎 宋鉉秀, 昧軒 洪乙植이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63년생 甲長으로 명민하고 재기 넘치는 토끼띠들이다. 그러나 “가르침이 없으면 닦고 배울 수 없다(敎無未修學)”는 성훈의 말씀처럼, 수학함에 반드시 스승이 없을 수 없으니,  一斯 石龍鎭선생이 그 역할을 맡게 된 데는 아무리 인연법에 따라 맺어졌다손쳐도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법하다.

  따라서 三人行은 ‘三人行必有我師’의 본래적 의미와는 별개의 것으로 전시기획을 맡은 필자가 임의로 붙인 명칭일뿐이다. 물론 강산이 한번 반이나 변하도록 三人行을 하노라면 서로 ‘修學問答’하는 가운데 동지로서 뿐만 아니라 스승처럼 본받을 만한 좋은 점도 발견될 수 있었으리라 본다. 그런데 이들 三人을 도와 筆墨生涯를 동업으로 삼은 一斯(그의 아호는 一思이나 최근 一斯로 바꾸었다)형은 타고난 천성이 호방한 데가 있어 그들에게 있어 권위적인 스승이라기 보다 同道의 同志요.  同氣의 兄弟에 더 가깝다.  실제로 이들은 사석에서 가까운 친구처럼 呼兄呼弟한다. 의아하게 생각한 필자가 一斯兄에게 묻자 그는 단호한 어조로 답한다. 그가 다년간 몸담고 있던 미술교사직에서 전업작가로 탈바꿈 하던 ‘92년 어느날, “우리는 서로 보지도 말고 닮지도 말자”며 사제의 인연을 끊기로 하였다는 것이다.󰡑83년에 만나 三人에 一師를 보태 四人帮이 된 84년부터 필묵연마에 용맹정진하기 시작한지 9년만의 일이다.

 지난3월, 매주 쉬지않고 도올아트 신춘기획시리즈전이 열리고 있던 바쁜 때에, 대구를 방문하여 그의 후원회 총무가 경영하는 멋진 주점‘솟대마을’에서 내가 먼저 우연히 말을 꺼낸 것이 이 전시의 발단이긴 하나, 이처럼 그들의 필묵인연시작은 남다른 데가 있다. 그당시 손/송/홍 三人은 막 군복무를 끝내고 각자 이미 연구실을 열고 있었으나, 정작 그들의 코치이자 우두머리인 一斯兄은 ‘接長’신세여서 퇴근후 보따리장사마냥 吾廬서실에서 昧軒서실로 다시 一鼎(이창수)서실로 接主답게 몇해씩 떠돌이를 해가며,잡식성의 그의 독서편력만큼이나 오만 잡동사니를 다 가르쳤던 모양이다.

 삼인대면(三人對面을 중국어에선 三人對質이라 한다. ‘面’보다는 ‘質’이 더 신뢰적이며 본질적이다)에 의한 필자가 들은 바로는 대충 다음과 같은 커리큐럼이었다고 한다. 일주일에 1회씩 전각 一方과 200×70cm 전지 2장씩 숙제를 하되 임서 1장과 창작 1장씩을, 강행군일 때는 1주일에 법첩 1권씩을 떼던 때도 있었으며, 87~78년에는 「중국서론대계」를 발췌 강독하는 가운데 레포트 제출과 주제에 대해 발표토록 시키기도 했다 한다.

  초기에  「張遷碑」와 「石門頌」을 많이 썼던 기억과 특히 「篆文集」에서 조충전․인전등 다양한 전서체를 공동연구 한 탓에 이번 三人行展에 출품된 작품에서도 각기 이러한 공부의 흔적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一斯兄이 ‘89년 서협주최 제1회 대한민국서예대전에서 大賞을 수상하고 (그때 아직 그의 문하였던 三人도 각기 입선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소위 초대작가라는 졸업장과 함께 실험적 작업으로 ’현대서예‘에 몰두하게 됨으로서 이들 三人도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본다.

  하지만, 이들 三人은 서로 공통된 좋은 점만 각기 나눠 가지고 있으면서도 三人三色이다. 대학에서의 전공 역시 다양하다. 손호진은 문리학을, 송현수는 산업디자인을, 홍을식은 건축과를 졸업했다. 게다가 그들의 안내자역의 一斯형은 동양화 전공이고 보면 역시 선생다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는 셈이다. 一斯兄과 三人의 筆墨同行에서 7년전 이미 방관자처럼 사승의 관계를 떠났다고는 하지만, 이미 불혹을 넘어선 맏형에 비해 아직 30대 후반의 아우들인  三兎生일진데 그 영향권에서 그리 먼 거리까지는 벗어나지 못했음도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렇다고 각자 개성의  차별성이 약화되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3인의 작품들을 직접 보면 관전자는 금방 알아 차릴 수 있겠으나, 이 전시를 기획한 평자로서 한 마디씩(가나다순) 사족을 붙인다면, 吾廬는 물리학도 답게 자획의 결구와 공간구성이 치밀하며 文鼎은 디자인전공 영향인 듯 장법에 있어 감각적이고, 昧軒은 건축미학에서 찾아볼 수 있는 중후한 미감을 느끼게 한다. 오려의 陽村先生詩 「蘭竹章」과 현대서형식의 「無用之用」과 「妙」시리즈 작품이 그러하고, 문정의 전/행/초필의를 살린 「東坡赤壁賦」12폭과 장지에 쓴 200호 크기의 대작 「愼獨」 및 「光風霽月」이 그러하며, 매헌의 예서에 조충전필의를 섞은 李白詩 「春夜桃李園序」와 전지에 두 글자를 쓴 「致寬」이 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각기 지양해서 보완해야 할 단점과 결점이 있는 것도 당연하다 할 것이다. 오려는 많은 부분에 있어 측필이 발견되고 있고 공간경영에 있어서도 여백처리의 묘가 부족해 보인다. 문정은 「적벽부」에서도 볼 수 있듯 長幅의 연작형태일 때 필요되는 호흡조절과 묵법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며 자획의 收筆부분에도 유의해야 될 줄 믿는다. 그리고 매헌은 필자가 주장하는 서예의 네가지 특성, 즉 시간적 선의 무한성과 찰나성, 공간적 획의 일회성과 다양성에 있어 특히 찰나성이 부족해 보인다. 찰나성이란 필세의 속도만을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은 筆鋒의 一點에 모아진 의식의 집중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이 결여되면 동양서화예술의 핵심인 氣韻生動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이점은 비단 매헌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 서예가 대/소를 망라한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문제라 할 수 있다.

 아무튼 오려/문정/매헌의 「필묵3인행」은 서울에서의 처음 전시이자 21세기 세계무대를 향한 첫 출발점인 만큼 고전연구의 탄탄한 기초 위에서 조심스럽게 자기 빛깔을 내보이고 있는 셈이다. 고전서법에서 현대서예로 진입해 가는 과정의 일단을 보여주는 필묵에 의한 청년작가들의 三人展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 못지 않게 장차 기대되는 바 또한 자못 크다할 것이다.

  비록 아직은 중국고전의 전통서법과 一斯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脫甲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이번 전시로 재분발을 다짐하는 계기로 삼는다면 기획자의 보람은 더 이상 없겠다. 거듭 말해 脫傳統과 脫一斯까지의 三人行展은 당분간 유효하다 할 것이다.健勝健筆을 心祝한다.


                       1999년 6월 18일 비오는 한강노들가  二黙齋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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