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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문(金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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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 권상호

1. 명칭:

金文이란 殷周時代의 청동기 위에 鑄造되어 있거나 새진 글자를 가리킨다. 동기 중에는 종()과 정()이 비교적 중요하여 이 때문에 鐘鼎文이라 부른다. 금문의 대다수는 鐘鼎이나 彝器(나라의 의식에 쓰는 그릇) 주조되어 있거나 새겨진 銘文이다.

 

  ( 부어 만들 ), 鑄物: 쇠붙이를 녹여 거푸집에 부은 다음, 굳혀서 만든 물건. 

  (, 떳떳할 ): 종묘에 비치해 두는 제기의 가지. 영구히 변치 않는 .

  : 일종의 樂器로 받침대 위에 걸어 놓고 나무망치를 쳐서 소리를 냈으며

  : 祭器로 세 발과 두 귀가 있고 향로와 비슷하게 생겼다.

  金文 = 鐘鼎文. 제기(祭器), 악기(樂器), 무기(武器) 등에 새긴 명문(銘文).

  九鼎: 중국 ()나라의 우왕(禹王) 때에, 전국의 아홉 ()에서 쇠붙이를 거두어서 만들었다는 아홉 개의 . ()나라 때까지 대대로 천자에게 전해진 보물이었다고 한다.

 

2. 시대적 배경:

  ()는 서주(西周:BC 1122~BC 770)와 동주(東周:BC 770~BC 222)로 구분

  동주는 또 춘추시대(BC 770~BC 481)와 전국시대(BC 480~BC 222)로 구분된다.

  ()의 쇠망과 함께 갑골문이 사라지고 ()와 함께 금문이 고대 서체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서주시대는 이전의 것을 지켜왔으나, 춘추시대를 거쳐 전국시대에는 자체(字體)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으며 지방적 특색을 갖게 되었다.

  물론 殷代에 갑골문 이외에도 동기(銅器)에 새겨진 명문(銘文)이 전해오는데, 이 금문은 대다수가 문자와 그림의 중간쯤 되는 글자체였다. 이 글자는 어떤 뜻을 가지고 글자 위에 덧붙여 통통하게 그려 넣었으므로 글자모양은 그림에 가깝고 획의 굵기도 많이 다르다.

  고대에 이르러 서체의 풍격이 여러 방향으로 변화하였으나, 문자의 모양은 점차 그림의 형태를 벗어나서 성숙되어 갔다.

  은대 금문과 비슷한 서주 전기의 금문 풍격은 그림의 맛이 있으나, 후기에 이르면 큰 변화가 생겨 글자 수가 점차 많아지면서 획은 고르고 통일성을 추구하게 된다.

 

3. 내용:

사전(祀典, 제사의 예법으로 규정한 책), 사명(賜命), 정벌(征伐), 약계(約契)에 관한 내용이 많다. 그리고 명문이 없는 것도 있다. 은대(殷代)의 금문은 대부분 자수(字數)가 많지 않은데 그것은 명문이 있는 청동기가 적기 때문이다. 명문은 또 길지도 않은데 보통 두세 자이다. 명문의 길이가 십여 자 혹은 몇 십자까지 있는 것은 아주 적으며 대부분 은대 말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주대(周代)에 이르러 명문이 많아지며 보통 2~300자 적혀 있다. 유명한 선왕(宣王)시대의 모공정(毛公鼎)은 무려 499자에 이른다.

  銘文: 金石ㆍ器物 등에 새겨 놓은 .

 

4. 명문 형식:

명문은 요()로 된 것이 관()이고, ()로 된 것이 지()이다. 종정의 주조는 시기와 지역에 따라 다르고 자체(字體)도 서로 다르다. 이 중에는 갑골상형문자(甲骨象形文字)도 있고, 고문(古文)과 육국이문(六國異文)도 있다.

 

5. 서체적 특징:

金文은 甲骨文에서 유래한 것으로 종정문의 형태나 결구는 商代 末年의 갑골문과 비슷하다. 갑골문(甲骨文)은 귀갑(龜甲)·수골(獸骨)에 칼로 글자를 새겼기 때문에 직선(直線)과 절선(折線)이 많지만 金文은 틀[鑄型(주형)]에 글자를 써서 새기고 이 틀에 금속을 녹여 부어서 주조(鑄造)한 것이다.

 

원필(圓筆), 전획(轉劃)의 필사체(筆寫體)와 가깝다.

② 명문 의 대다수는 본()을 보고 새겨서 주조(鑄造)한 것인데, 이 때문에 글자의 필획은 갑골에 비해 조장(粗壯)하고,

③ 자체(字體)도 비교적 응중(凝重)되어 있으며, 곡선과 직선은 변화가 많아 비교적 자유롭고 개방적이다.

결구(結構)는 조화(調和)와 호응(呼應)이 중시되었고 크기도 점차로 균형이 잡혀 가고, ⑤ 전체적으로 여유롭고 아름다운 느낌을 주고 있어 당시의 심오한 미감과 기교를 엿볼 수 있다.

⑥ 成王, 康王 이후의 명문에 이르러서는 이미 발전하여 성숙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점획은 원혼(圓渾: 획질이 둥글고 물 흐르듯 함)하고, 體勢는 옹용(雍容:옹글고 넉넉함)하여, 골력(骨力)이 있어 비교적 자유롭다.

⑦ 그 중에서 후세에 추앙을 받는 것으로 모공정(毛公鼎), 송정(頌鼎), 대우정(大盂鼎), 산씨반(散氏盤)이 있는데 가장 정미(整美)하다. 산씨반(散氏盤)은 글자 하나하나가 각기 한 칸씩 차지하는데 이는 小篆에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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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조충서(鳥蟲書): 춘추전국시대에 와서 지나칠 수 없는 것이 조충서(鳥蟲書)이다. 기원이 은대까지 올라가나 춘추전국시대가 전성기이며 병기(兵器)의 문식(紋飾)에 주로 쓰였다.

* 鳥蟲書(或稱鳥蟲文、鳥蟲篆, 蟲書、鳥書、鳥篆、魚書), 是中國春秋中期 至戰國時代盛行於中國南方的一種文字。的特點是其字型 類似鳥蟲魚的形狀, 故有此命名。許«說文解字»中 有提到鳥蟲書說,「六曰鳥蟲書, 所以書幡信也」.

  주대(周代)에 들어서면서 갑골의 사용이 쇠퇴하고 동기(銅器)의 제작이 성행하였는데, 이러한 금문은 점차로 기록적 사명을 확대하여 장문화되었다. 처음에는 얼마쯤 상형성을 유지하나 마침내 필획은 복잡해지고 곡선형이 많아져 좌우 대칭의 호쾌한 기상을 띠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기에는 상당한 장식성조차도 가중된다. 또한 대체로 점획으로 구성되어 있고 전아한 풍취가 있어 후대에 내려올수록 균정미를 갖춘 유려한 모양으로 바뀌었다. 동주는 소위 춘추전국시대인데 시대가 바뀔수록 지방화하여 대체로 금문의 전형이 점점 붕괴, 도락하였으나 서방 秦 지방에서 일어난 주문은 매우 특성 있는 미를 갖춘 것이며 대표적인 것이 石鼓文(석고문)이다.

 

* 은 왕조의 금문

  문자자료는 앞서 지적했듯이 은왕조 22대 반경왕 이후부터 등장했다. 이때는 청동기 시대의 정점에 도달해 있었다. 그래 서 안양(安陽)을 중심으로 그 당시의 많은 동기(銅器)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 시대의 동기는 위로는 조종(祖宗)을 기념하며 아래로는 유급자손(留級子孫)하기 위해서 주조(鑄造)된 것으로 거의 일상기물이다. 금문이란 이들 동기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말하는 것이다. 거의가 은말 이후의 각으로 갑골문보다는 뒤에 것으로 갑골문에 비해서 문자로서의 조형이 한층 뛰어나고 또한 필력(筆力)도 능히 엿볼 수 있다. , 은기의 명문은 동시대의 갑골문 보다는 획이 많고 자형(字型)이 복잡하다. 은왕조의 동기에는 명문이 있는 것이 적다. 그리고 이때의 명문은 회화적인 성격이 뚜렷하고 상형(象形) 또는 그에 가까운 것이 많고, 일품(一品)의 자수가 적다.

 

* 서주(西周)의 금문

  은망주흥(殷亡周興)에 미쳐 갑골의 사용은 급격히 쇠하고, 반대로 동기 제작이 성행하여 명문이 갑골과 자리를 바꾸어 문장기록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로 와서는 동기제작의 사유도 확대되어 여러 씨족들이 무공, 훈공을 세워서 왕실에서 은상을 받음을 기념하는 내용 등 세속적인 내용이 동기에 새겨졌다. 그리고 은대와는 달리 명문이 장문화(長文化)되었다.

  이 시대의 금문은 초기에는 주() 특유의 의례적인 엄숙함이 있는 가운데 은대의 서풍(書風)을 이어 비후(肥厚)함이 있어 생명의 약동이 보인다. , 자체가 차차 정제되고, 자간, 행간이 정해지고 상하좌우의 자연스러운 구성이 좌우편방의 균형을 가져오게 하여 자형은 고정화 되었다. 그러나, 후기에 접어들수록 점차로 생기를 잃어가고 형식화해 가는 경향이 있다. 이는 주() 왕실의 쇠퇴와 보조를 같이하고 있다.

 

* 고문의 정리

  금문이 통용하던 시대(서주(西周) 선왕(宣王)때로 추정)에 사관 주가 사주편(史籒篇)을 만들었는데 그 이유는 문자를 정연하고 획일적으로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서체를 결합, 정리하기 위하여 점획을 증익(增益)하여 혼돈하지 않게 하였다. 이를 주문이라 하는데, 획이 복잡하고 문체는 방정하다. 주문의 번중(繁重)함은 당시 문자의 필연적인 현상이지 사주가 인위적으로 글자를 복잡하게 만든 것은 아니다. '사주'에 의한 문자 정리를 기점으로 그 이전에 통용되었던 모든 서체는 고문(古文)으로 통칭되었고, 주문은 진()제국의 서체인 소전(小篆)과 구별하기 위해서 대전(大篆)이란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 서체의 혼란과 문자 통일

  춘추 전국시대는 중국에서 이때까지 오래토록 계속되어 오던 고대 사회가 크게 변화를 일으킨 시대이다. 산업의 발달과 상공업의 발흥, 그리고 자유로운 언론의 성행과 이에 따른 제자백가(諸者白家)의 등장 등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시대의 상황에 걸맞게 서예 역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이 시대의 서예의 자취는 금문(金文), 석각(石刻), 죽간(竹簡), 백서(帛書) 둥에서 엿볼 수 있다. 이때의 금문은 서주 시대의 금문이 정제되고 고정화되어 가는데 비하여 이와는 반대로 지방적인 특색을 지닌 것으로 분화해가는 경향으로 변화해 갔다. 그 자체는 주문(籒文)이다. 전국시대에 접어들어서는 청동기 문화가 급속히 쇠퇴하고 새로운 철기문화가 유입됨에 따라 동기(銅器)의 수가 갑자기 줄어들고 발견되는 금문 또한 아주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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