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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서

전서(篆書)<?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본래 전서(篆書)는 대전(大篆)과 소전(小篆)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전서의 대표격은 소전(小篆)을 주로 말합니다.

  그러나 진시황(秦始皇)의 전국통일로 인해 모든 문화와 문물의 인위적 통일까지 이어집니다. 역사에 등장하는 진시황의 문자통일(文字統一)이라는 것이 바로 소전(小篆)의 서체로 획일화시킨 것입니다. 사료에 의하면 진시황이 승상(丞相)이었던 이사(李斯) 등이 이전에 흩어져 있던 복잡하고 불편한 문자들을 통일시키게 됩니다.   大篆 - 혹은 주의 태사가 만든 글이라는 의미로 주문(籒文)이라고도 함,

  小篆 - 혹은 '진나라의 전서'라는 의미로 진전(秦篆)이라고도 함

  소전의 사용 시기는 그리 오래지 않고 곧 새로운 금문자의 서체인 예서(隸書)가 등장하게 됩니다.小篆의 특징   앞서 소전(小篆)의 특징이 인위적인 통일이라는 점으로 인해 서체가 거의 획일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갑골문과 금문이 지닌 단점 중의 하나인 동일 글자의 다양한 이체자(異體字)들로 인해 통일성이 부족한 아쉬움이 있는 것에 비해 소전은 인위적으로 통일을 시켰기 때문에 자형의 불일치를 완전하게 해소해 여불위(呂不韋)의 말대로 '一字千金(일자천금)'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한 소전은 자형 자체로 보더라도 이전의 갑골문이나 금문보다 상당하게 상형(象形)의 회화적 성격을 탈피하고 문자의 기호적 성격으로 전환하고 있는 특징을 보입니다.   이와 같이 자형의 일치로 인해 하나의 완전한 글자들로 형태를 지니게 된 소전은 현재까지 문자학(文字學) 연구의 기본적인 자형으로 이어오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 완전한 문자의 특성을 지닌 것은 아닙니다. 가장 미흡한 점이 서체에서 획이 꺾이는 부분을 모두 둥글게 표현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小篆의 가치

  전은 아직 완전한 문자로서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최초로 통일된 한자의 틀이 완성되었다는 점에서 큰 가치를 부여해 왔습니다. 바로 문자학 연구의 중심 자형으로 이어져 왔다는 점이 소전에 대한 바른 이해의 중심이 되고, 현대의 한자를 이해함에 있어 소전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서는 바른 자원(字源)을 얻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문헌이나 금석문에서는 소전의 자형이 가장 오래된 자형이기도 합니다. 또 우리가 접하는 자전들 역시 고서체(古書體)로 소전체를 제시하고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한자의 자원을 해설하는 학설은 다양하게 있습니다. 어떤 하나의 학설만이 옳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견강부회식(牽强附會式) 해석의 함정이나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한자 자원의 바른 접근이 있어야 합니다. 갑골문이나 금문이 자원 연구의 중요한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지만, 자형(字形)의 불일치나 글자 수의 미비로 인해 다수의 한자를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전의 가치는 한자 이해의 필요불가결한 요소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대전 (大篆)    주문( <?xml:namespace prefix = v ns = "urn:schemas-microsoft-com:vml" /> ) 또는 주서( )라고도 하는데 <사주편()>에 기록된 데서 생겨난 이름이다.   주나라(BC1100~770) 선왕 때 태사 주( )는 갑골. 금석문 등 고체를 정비하고 필획을 늘려 대전의 서체를 만들었으며, 주 왕실이 동쪽으로 천도한 후 진()이 주 땅에 자리 잡음으로써 춘추전국시대(BC770~221)에 진나라에서 통용되었다.

  대전이 자연스럽고 질박하다면 소전은 반듯하고 중후한 감을 준다. 소전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진시황의 공적을 기록한 태산각석, 낭야대각석, 역산비가 있다. 소전은 모두가 원필이며 자형이 아래위로 길다.

 

  석고문(石鼓文)

  대전 자체(字體)의 가장 구체적인 작품이며, 중국역사상 가장 오래된 각석으로 북 모양으로 다듬은 돌에 새겨져 있다하여 석고문이라 부른다. 돌의 수는 10개이고 표면에 700여자가 실려 있으나, 판독이 가능한 글자 수는 270여자, 현재 통용되고 있는 글자 수는 470여자 정도이다.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나, 동주의 위열왕 4(기원전 481)에 진나라에서 만들어졌다고 하는 설이 유력하다.

석고문은 4언구로 현재 내용이 완벽하게 이해되어 있지는 않지만, 대체로 전국시대의 진나라 군주가 사냥을 하는 것과 영토의 개척으로 도읍을 세운 것, 제사에 관한 일들이 기술되어 있다. 석고문은 금문과 소전의 중간에 속하고 금문보다 잘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소전보다 방편(方遍)하고 복잡한 것이 있고 자체는 대체로 정방형을 이루고 있다.

  태산각석(泰山刻石)

  태산각석은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후, 동방의 군현을 순회하면서 세운 송덕비의 하나로 낭야대각석과 더불어 소전의 표준 이라 불릴 만큼 유명하다. 이 각석을 탁본해 본 결과 2 23자의 전문을 얻을 수 있었는데, 명시대의 탁본에는 29자만 남아 있었고, 청조 때는 화재로 파손되어 그 패석에 겨우 10여자가 보일 뿐이었다.

  낭야대각석(瑯耶臺刻石)

  진시황제는 태산각석을 세운 해에 산동의 낭야에 올라가 제대를 쌓고 돌에 각하여 진의 덕을 기리었다. 이 각석의 글자는 뭉개지고 떨어져나가 겨우 탁본으로 10행정도 전해지고 있다. 이 비석의 패석은 북경 박물관에 일부 소장되어 있다. 이사의 서()로 전해지며, 태산각석이 정제된데 비해 용필이 좀 부드럽고 좌우 상칭의 균제가 잘 잡힌 힘찬 표현의 장중감을 준다.

 

 

 

 

  , (BC202~AD280) 이후 예서, 팔분체가 성행한 이래 예서와 팔분체의 서법으로 소전을 쓴 것이 많은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삼국시대(. . AD220~280) () <천발신참비>이다.                                                     <천발신참비>  북조(AD439~589)와 당(AD618~907)초의 비석머리에도 역시 소전은 팔분체와 같은 체제로 많이 썼다.  성당(盛唐)에 이르러 이양빙이 나와 팔분체의 기세를 모두 없애고 이사를 종()으로 삼은 이후 1000여년간 소전 서법의 명가로 대개 이들 두 이가(이사와 이양빙)을 꼽는다. (AD1644~1911)대 중, 말기의 등석여, 윤병수, 조지겸 등이 측필로봉(側筆露鋒)을 사용함으로써 비로소 새로운 풍격이 출현하게 되었다.         <등석여의 전서>  <조지겸의 전서>  <제백석의 전서>(5) 우리나라의 전서   단군시대의 옛 비로 전하는 황해도 구월산의 '고전비(古篆碑)'가 중국에서 창힐의 필적으로 전하는 것과 같아서 연구 대상이 되고 있으며,   <신라태종무열왕릉비>는 오()나라의 <천발신첨비>의 전과 비슷한 예봉필법()으로 되어 있어 정방형의 특색을 보인다.  또 신라말기 학자인 고운 최치원(AD857~?)의 필적인 <진감선사비>의 전액(篆額) <당해동진감선사지비> 9자는 예봉필법으로 초전의 맛이 짙어 중국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진감선사비>  <진감선사비 두문 탁본> <최치원 영정>    <최치원 친필>      또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미수 허목(AD1595~1682)은 초전의 특색을 살린 독특한 전서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허목의 수고본>     <허목의 초상> <허목의 광풍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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