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최고위과정

죽간

죽간(竹簡)

도정 권상호

  2세기기 초엽에 종이가 발명되기 전까지 가장 많이 사용된 서사재료(書寫材料).

  종이 이전의 종이라고 할 수 있다. 죽간을 만들려면 우선 대나무의 마디를 잘라낸 다음 마디 사이의 부분을 세로로 쪼갠다. 이렇게 해서 된 대나무패를 불에 쬐어 기름을 뺀다. 이것은 글씨를 쓰기 좋게 하고 벌레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길이는 2025cm이며, 너비는 몇 cm로 한 줄밖에 못 쓰기 때문에 여러 장을 합쳐서 가죽 또는 비단으로 된 끈으로 편철(編綴)한다. 이와 같이 몇 장의 간()을 편철한 것을 () 또는 ()이라고 불렀다.

죽간은 그 실물이 20세기에 들어와서 중국 북서쪽 볜징[邊京]에서 유럽의 학술탐험대에 의해서 한대(漢代)의 것이 발견되었으며, 1951년 이후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 등지에서는 그 이전인 전국시대의 죽간도 잇달아 발견되고 있다. , 죽간을 모방해서 만든 목간(木簡)도 사용되었는데, 이것을 () 또는 ()이라고 불렀다. 중국의 북서쪽 볜징에서 발견된 것은 거의 목간이었으며, ()의 처방전(處方箋) 등이 적혀 있는 죽간이 약간 포함되어 있었다.

  죽간(竹簡)은 대나무를 엮은 뒤 그 위에 글씨를 쓰는 기록수단이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까지 가죽이나 비단과 더불어 사용되었으며, 무게가 무거워서 이동이 불편한 단점이 있었다. 진나라의 시황제의 문화 탄압인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 당시 유학자들과 더불어 탄압받는 비극을 당하기도 했다. 위편삼절(韋編三絶).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 그러나 당장 값이 싸므로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서 ‘공자의 3천 제자’가 죽간을 높이 들고 출연한 경이로운 공연으로, 죽간은 순식간에 세계 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죽간은 전국~위진 시기에 기원되었다.

  죽간의 영향: 갑골문과 금문은 재료의 국한을 광범위하게 전파될 수 없었다. 상층사회의 전유물이었던 문화와 사상은 죽간의 출현으로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다. 竹書와 紙書의 장정 방법은 완전히 다르다. 죽서는 길이가 다른 몇 개의 댓조각을 끈으로 묶어 이루어진 것인데, 이를 ‘冊’ 혹은 ‘簡冊’이라고 부른다. 오늘날은 레이저 조각공예로 양질의 대나무 재료 위에 정교한 문자를 새겨서 팔고 있다. ‘손자병법, 36, 이경, 금강경, 출사표, 난정서, 청명상하도, 이소, 악양루기’ 등 포장이 정교하고 우아하며 문장의 의미가 심오하여 수장가치를 높이고 있다.

  죽간은 중국 역사상 사용 기간이 가장 긴 서적 형식으로서 제지술 발명 전 및 종이 보급 전에 주로 사용된 서사도구이다. 죽간으로 인하여 百家爭鳴의 문화성황이 형성되었고, 공자, 노자 등의 성인들의 사상과 문화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 가로 약 1cm, 세로 약 28cm인 죽간. 한 줄 최대 28자씩 필사되어 있다. 죽간 14개가 모여 한 쪽을 이루니 한 쪽의 폭은 14.5cm, 길이는 약 28cm이다. 대학은 5쪽 분량, 중용은 11쪽 분량이다.

-------죽간은 옛날 중국에 대나무 쪽에다가 글을 써서 보관하였다. 죽간은 폭이 좁고 길이가 길기 때문에 죽간에 쓰면서 한자가 세-로형으로 변천 되었다. 그 죽간 모양을 본떠 책() 이라는 글자가 만들어졌습니다. 죽간은 곽점 등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2세기 초엽 사용도었다. 그 외에 비단에도 글을 써서 돌돌말아 보관하였는데 백서라고 합니다. 청년 백서(白書)할때 쓰이는 백서이다. 후대에 채륜이 종이를 발명하여 종이에 기록을 하는 것으로 변화하였다. 최근에 윌리엄 맥도너가 지은 요람에서 요람으로 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은 물에 넣어도 물에 적셔지지 않고 손으로 찢으려 하여도 안 찢어지는 책이다. 원래 종이를 다시 사용하는 것에서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새로운 방식의 재활용 을 선보였

.

 

----목간 (木簡): 중국에서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 죽간(竹簡)과 함께 문자 기록을 위해 사용하던 목편(木片).

  목독(木牘) 또는 목첩(木牒)이라고도 하였다. 나무를 폭 약 3 cm, 길이 약 2050 cm, 두께 3 mm 정도의 긴 판자모양으로 잘라 거기에 묵서(墨書)하였다. 원래는 대를 갈라서 한장 한장 끈으로 꿰어 사용하였던 것이나, 후에 목편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종이가 발명될 때까지 계속해서 썼다. 고서(古書)에 기록으로만 보이던 것을 1899년 스웨덴의 탐험가 스벤 헤딘(18651952)이 러우란 유적[樓蘭遺蹟]에서 처음 발견하였고, 네이멍구자치구[內蒙古自治區] 쥐옌[居延]에서 발견된 것은 쥐옌한간[居延漢簡]으로서 유명하다. 한국의 낙랑 채협총(樂浪彩塚)에서도 출토되었는데, 이들 목간에는 《논어(論語)》의 단편도 있고, 군대의 조직 ·우편제도 ·교통 및 여러 가지 물품의 이름을 기입한 것도 있어서 그 방면의 연구는 점차 중요시되고 있다.

 

 ----만드는 방법:

죽간(竹簡)

ㆍ대나무를 불에 구운 다음 잘게 나누어서 만듬

ㆍ붓으로 쓰거나 칼로 새기고 먹을 넣어 완성

ㆍ冊이라는 글자는 여러 개의 죽간에 구멍을 뚫어 끈으로 이은 모양을 본따 만듬

 

목독(木牘)

ㆍ목간(木簡), 목편(木片) 이라고도 함

ㆍ나무를 폭 약 3 cm, 길이 약 2050 cm, 두께 3 mm 정도의 긴 판자모양으로 잘라서 묵서(墨書)

 

견백(絹帛)

ㆍ죽간이나 목독에 비하여 글씨를 쓰기가 쉬우며 열람도 편리함

ㆍ길이 또한 임의로 줄이거나 늘릴 수 있는 장점

ㆍ재료가 귀하고 값이 비싸서 특수 계층에서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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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권상호
--- 노자 죽간 해독 사이트

http://blog.naver.com/net44?Redirect=Log&logNo=20122606029

---- <죽간 목간에 담긴 고대 동아시아> 권인한, 김경호, 이승률, 후지타 가쓰히사, 히라카와 미나미, 천웨이, 이누카이 다카시, 야나카 신이치, 천쏭챵, 리쥐밍 등 14인의 연구자들/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11. 1. 10.

나무 속 암호, 목간- 종이마저 스크린에 왕좌를 내어주고 매체 재로로서의 위력을 잃어가는 시점.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삼국에서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후 8-9세기에 이르는 기간에 제작, 사용된 다양한 용도와 형태의 목간 자료는 ‘문자와 문화’라는 라이트 모티브를 공유.

경주안압지에서 발굴된 목간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고대 목간, 고대의 행정적 상황을 판독케 하는 상서 里耶秦簡을 중심으로 한 秦代의 목간, 그리고 여러 형태의 일본의 고대 목간들을 심층 분석하고 있다.

  중국의 목간: 대나무와 비단과 나무는 보편과 특수를 기준으로 분류하면 모두 보편적인 서사재료에 속한다. 대나무를 폭 0.4~1cm 정도로 가늘고 길게 다듬고 殺靑하여 서사용으로 만든 다음 그 우에 먹이나 朱沙로 문자를 쓰거나 그림을 그린 것을 ‘竹簡’이라고 하는데, 특히 簡‘이라고 할 때에는 보통 一行用을 의미한다. 복수의 행으로 서사할 수 있도록 너비를 좀 더 넓게 다듬어 놓은 것은 ’竹牘‘이라고 한다. 죽독의 경우는 원통형의 대나무의 형태적 특징상 타원형의 모양이 된다. 대나무의 경우 현재까지 출토된 예를 보면 죽간이 거의 대부분이다.

  한국의 목간: 1975년 4월 한국 경주 안압지 유적에서 51점의 목간이 출토되었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종료 이전 평양(옛 낙랑군) 漢代 유적에서 출토된 목간을 제외하면, 근년에 한반도에서 발굴된 가장 오래된 목간이자 한국인이 한사를 서사한 최초의 유물이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목간 중에는 ‘策事’로 추정되는 문자가 서사되어 있는 두 점의 목간이 있다. ‘책사’란 본래 황제와 신료 사이에서 박학을 겨루는 유희 문화의 한 종류로서 중국 南朝 시기에 출현하였다. 그 후 점차 士人들의 재능과 학문을 평가하는 察擧 시험으로 이용되면서 우수한 관리를 선발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렇다면 신라 왕조의 궁원지에서 ‘책사’ 목간 발견된 이러한 특이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8세기 신라왕조에서 ‘책사’가 갖는 의미와 본질은 과연 무엇인가?

----------2009년 충남 태안군 근흥면 마도 해역에 대한 수중발굴조사중인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여러 종류의 곡물, 도자기, 죽제품 등 1,400여점을 인양했고, 고려 선박 1척을 인양중이다.

특히 선박의 선적·출항일자, 발신지(자), 수신자, 화물의 종류와 수량 등을 기록한 목간과

죽간 64점을 수습했는데 이중 고려시대 죽간(竹簡, 대나무에 글을 적은 것)은

우리나라 최초로 발굴했다.

---- 노자도덕경 /  죽간본(대나무에 쓴 책)  백서본(비단에 쓴 책)

 저작:  민중들의 집단창작, 기록은 노담/  老萊子

 발굴:  1993년 궈덴郭店, 楚墓 / 1973년 후난성湖南省 마왕두이馬王堆, 漢墓

 내용:

(1) 36장 / (1) 81장

(2) 철학적이고 반유가적인 내용이 없음 / (2) 노장학파의 원전.

(3) 1, 5, 6, 8, 42, 80장 등 강령적 문장이 누락됨 / (3) 『장자』․『한비자』․유안의 『회남자/도응훈편』․『사기/화식열전』․왕필의 『노자』에 인용한 내용이 백서본임

(4) 공통되는 내용도 전혀 기조가 다름 / (4) 2천 년 동안 인류가 읽어온 『노자』의 원본은 백서본임.

 

 

 

隸書의 變遷 過程

  1. 진나라의 예서

  지금까지  발견된 진나라의 예서로 雲夢睡虎地의 秦簡 또는 長沙馬王堆에서 발견된 일부분의 帛書는 모두 이 시기에 쓰여진 예서이다. 1975년 湖北省 雲夢縣 垂虎地의 진나라 고분에서 발견된 일련의 竹簡과 木牘은 전국 말기에서 진시황30년(기원전217년)사이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발견된 죽간은 전서가 예서로 변천하는 과정에 씌어진 古隸로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전서의 결구를 제외하면 모두가 예서의 형체를 가지고 있다. 글자의 형태는 정돈되어 있으면서도 수려하고, 필획은 질박하면서도 온후하고, 결구는 모나고 둥근 것을 서로 보완하여 성길고 조밀한 것을 이루고 있고, 용필에 있어서는 圓轉의 특질을 찾아볼 수 없으며 거의 붓을 꺾고 누르는 직선을 주로 사용하였고, 예서의 특징인 파책의 초기 형태도 보여 진다.

  그리고 1980년 四川成의 郝家坪에서 출토된 전국 시기의 것으로 보이는 木牘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의 많은 글자들이 예서의 필법으로 씌여지고 또한 그러한 형체와 필세가 나타난다. 특히 진한대의 竹 ․ 木簡들은 주로 당시의 서민들 사이에서 진솔하게 씌어진 자료라는 점에서 더 서예사적 의의가 있다.

  중국 문자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형체나 결구 또는 용필 등의 요소에서부터 서체의 발전과정 중에 글씨를 쓰는 사람이 추구하는 심미안이 그대로 나타나는 문자이다. 전서에서 예서로 발전하는 과정 중에도 이와 같이 그대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 시기의 古隸는 均衡과 疏密, 長短, 輕重, 굵고 가는 변화와 통일을 매우 중시하여 극치의 예술적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2. 西漢時代의 隸書

  漢 帝國을 세워 올린 전한시기인 서한시대는, 광대한 국토와 비견하는 문화적인 발전이 있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서예에 있어서는 시대에 걸맞는 진전이 없었다. 이 시대의 서예 자료는 대단히 부족하다. 앞선 시대에서와 같은 훌륭한 金文은 자취가 없어졌으나, 남아 있는 몇 개의 금문에는 진대의 전서의 풍취가 있고, 또 다른 것들은 모두 옆으로 길어 전서와 예서의 중간 형태를 띠었다.

  이 시대의 각석은 몇 개가 지금도 전하지만, 아직 전서의 영향을 완전히 탈피 못한 것이 대부분이다. 예서로 쓴 것들은 예서의 완성된 형태인 파책이 있는 글씨가 아니다. 이외에도 당시의 서예자료들로는 거울의 名文이나 銅印의 文字나 瓦當의 文字를 들 수 있다. 이것들은 둥근 맛을 가진 篆書를 圖式化 한 것이며, 모두 전서의 풍취가 있다.

  금세기 초두에 들어서 발견되기 시작하여 50년대와 70년대에 많은 양이 발굴된 木簡류와 帛書들은 漢 代의 서예자료로서의 서체의 변천 연구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한나라의 간서는 예서 墨蹟이 가장 풍부한 寶庫와도 같다. 출토된 자료를근거로 할 때 선진시대의 전적과 공문서에 단정하면서도 근엄한 예서가 나타나고 있다.

  예서의 발전은 서한 말기에 이르러 古隸가 이미 과도기의 사명을 완수하고 마침내 성숙한 예서로 자리 잡게 된다. 이때의 중요한 특징으로는 표현에 있어서 점과 획이 우러러 보고 굽어보면서 呼應을 이루었고, 필세에 있어서는 파책과 갈고리가 확립되었다. 형체에 있어서는 세로로 긴 사각형에서 가로로 넓적한 형태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형세도 從에서 橫으로 바뀌었고, 풍격에 있어서는 고박하고 온후한데서 단정하면서도 장엄하고 수려한 풍으로 변모되었으니 이러한 것이 예서가 성숙된 단계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이다.

  1973년 하북성 정현의 40호 고분에서 출토된 한나라 宣帝(기원전73년~기원전49년)  시기의 簡書와 1978년 청해 대통현 115호 고분에서 출토된 역시 선제 때의 간서, 그리고 敦皇에서 출토된 서한 천봉원년(기원전14년)의 木牘 등은 모두 이 시기의 예서가 이미 성숙된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들이다. 이것들에 의해서 파책의 서법이 이미 西漢 때 존재하였으며, 예서를 간략화 하여 빠르게 쓰는 초예, 일종의 초서인 章草가 쓰이고 있었다는 것이 알려 졌다. 이 한간들의 내용은 주로 변방의 기록들이므로 초서체가 일반 민간에 널리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당시의 정식 서체로는 대부분 예서(파책이 있는)가 사용되었고, 일상의 서사체는 예서의 속서로 章草와 草隸가 쓰이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제까지 한 대의 서체에 대한 연구는 돌에 새겨 영구히 후세에 전하려는 의도에서 엄격하게 씌어진 漢碑가 주종을 이루어 왔지만, 汗簡의 발굴로 그 연구  영역은 한층 더 확대된 셈이다.

  한나라의 예서는 형세를 취하고 필획을 활짝 넓혔으며 여기에 파책의 변화를 가미하여 서법이 다채로워 져서 둥글게 꺾으면서 단정한 풍격을 지니는 소전과는 다른 풍격이 있다. 서법예술의 발전으로 볼 때 이러한 묵적의 출토는 전서에서 서법이 더욱 풍부해진 예서의 시기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을 확인 시켜주고 있다. 또 전서에서 예서로, 예서에서 초서로 변화되는 전환기의 서체까지도 엿 볼 수 있다는  데 그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다.

  3. 東漢時代의 隸書

  동한시대는 예서가 가장 완숙하게 무르익는 상태로, 또한 예서가 예술적인 면에서도 가장 화려한 시기이다. 즉, 중국 서예사에 있어서 원시 서예에서 참다운 서예로 옮겨 가는 일대 전환기이다. 또 이때에 와서야 비로소 다른 형태의 예술과 동등한 지위를 얻게 되었다. 특히 동한의 桓 ․ 靈帝 대에는 예서의 아름다움이 절정을 이룬 시기였다. 이때의 특징으로는 용필의 技巧가 더욱 풍성해지고 波磔과 갈고리에도 붓털의 변화를 충분히 발휘하였으며, 붓을 꺾고 누르고 당기고 끌면서 붓털이 지나간 방향으로 다시 돌아와 蠶頭燕美⁴⁾의 형태를 나타내는 등 예서의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 結構上에 있어서는 疏密의 안배를 이루고 점과 劃이 서로 呼應하면서 예서의 복잡 다양한 변화의 면모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이시기의 예서의 風格은 매우 다양한데 이러한 것은 동한 시기의 석각에 잘 나타나 있다. 비교적 자연스러우면서도 거친 간서에 비해 장엄하면서도 고박한 맛을 풍기는 碑碣은 비석에 큰 글씨로 쓰기 때문에 용필의 기교와 변화가 간서보다는 풍부한 편이다.

  한나라를 대표하는 예서 예술은 마땅히 동한의 碑碣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淸나라의 王澍 는

  “예서의 서법은 한나라 때가 그 극치를 이루고 있다. 각 비갈마다 각자의 기이함이 나오는데 하나도 서로 같은 것이 없다.”

라고 하였으며, 何紹基 도

  “동한의 刻碑는 . . . 변화가 무궁하다.”

라고 하였다.

  동한, 즉 후한 시대에는 비석을 세우는 풍습이 성행하여 예서체로 씌어진 비석들이 많이 출현하게 되고, 예서는 예술적으로 점점 그 아름다움을 발휘하였다.

  한나라의 碑刻 서예는 모두가 글씨의 도움으로부터 나오는데 그것을 썼던 사람들은 당시 이 방면에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서예가로 그들은 크고 넓은 비석위에 자기의 서법예술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4) 필획의 특징을 형용한 용어로 일반적으로 예서의 가로획과 삐침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예서의 가로획은 첫 부분은 누에머리, 끝부분은 제비꼬리 모양을 한다는 것이다. 잠두연미의 특징은 날아 움직이는 기세를 취하는 것으로 예서의 획을 표현하기에 적당하다.

  한나라의 碑刻書藝는 지금까지 수백종류가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이중에 어떤 것은 원석이 이미 없어지고 탁본만 전해오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華山碑> 와<劉態碑> 등이 이에 속하는 것들이다. 또 어떤 것들은 겨우 殘石만이 존재하고 있는 것도 있는데 <熹平石經> 과 <安陽殘石> 등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원석의 보존이 지금까지도 완전하게 전하는 것들도 적지 않다.

  이러한 비각서예를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첫째, 자형이 방정하고 서법이 근엄하면서 파책이 분명한 정통적인 예서와

  둘째, 글씨와 각이 모두 비교적 자유스럽고 서법도 그다지 근엄한 편이 아닌 것으로 방종과 자연스러운 의치를 풍기는 예서,

  첫째의 유형도 두 종류로 나뉘는데 단정하면서도 수려한 것과 강하면서도 고박한 맛을 지닌 것들로 나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禮器碑>와 <乙瑛碑>, <史晨碑> 등이 있다. 이 3비를 “孔廟3碑”라고 하여 가장 모범적인 碑들이다.

  또한 강하면서도 고박한 맛을 지닌 것들로 이에는 <長遷碑> <幽洲書佐秦君闕> <西狹頌>등이 있다.

  두 번째 유형은 글씨와 각이 비교적 자연스러운 것으로 마치 손으로 쓴 듯하여 순박하고 자연스러운 의취를 나타낸다. 대표적인 비각으로는 <三老忌日碑> <倉頡廟碑側> <禮器碑兩側> 이 있다.

  磨崖는 천연의 암벽에 직접 문자를 刻入하는 것인데, 일반 비석처럼 매끄럽고 고르지 못하기 때문에 반드시 그  형세에 따라 刻石을 해야 하므로 결구가 왕왕 종횡으로 길어지기도 하고 필획 또한 마음 놓고 자연스럽게 나아갔기 때문에 천진난만한 서법예술을 이루고 있다. 이에 속하는 것으로는 <開通襃斜道刻石> <石門頌><楊淮表紀> <右扶風丞李禹刻石> 등이 있다.

  그 밖에 瓦當이나 印章, 封泥 등도 예서의 아름다움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예서는 동한의 憲制(189년~220년)에 이르러 館閣體⁵⁾式으로 발전하여 점점 古拙하면서도 영활한 맛을 잃게 된다. 구성과 용필에 있어서도 평범하고 일률적으로 되면서 글자의 형체는 점점 方正한 모습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예서는 魏 ․ 晉에 이르러 더욱 千篇一律的으로 변하여, 마침내 漢隸의 神韻을 상실하게 되면서 서체도 장차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4. 漢나라 이후의 隸書

  東漢 말기에 황건적이 실패한 후 중국은 장기간의 분열로 들어가면서 계속되는 전쟁을 하였으니 이 시기를 魏晉南北朝라고 부른다.

 

5) 명 ․청 시대 유행했던 서체로 臺閣體라고도 한며 당시의 관료들이 즐겨 썼던 글씨체를    말한다.

  위진 남북조는 중국 역사상에 있어서 가장 혼란하고 변화가 많았던 시기이다. 이시기에는 전쟁과 분열로 인하여 兩漢이래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儒家의 統治가 붕괴되고 문화적 제도도 쇠약해졌다. 사상은 점점 자유개방 쪽으로 치달았으며, 철학은 현학적인 풍이 일어났고, 불교의 수입과 淸談의 풍기가 성행하였다. 이때의 의식형태는 소극적인 일면과 적극적인 일면이 있었으나 개관적으로 볼 때 이것은 위진 남북조시기의 학술과 문예를 발전시키고 번영을 하는데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서법예술이야 말로 급진적인 발전을 하여 書藝史에 있어서 그 찬란한 빛을 마음껏 발하고 있다.

  위진 남북조는 각종 서체가 발전한 시기로 한나라 말기까지 정식의 문자로 발전을 계속해오던 예서는 말로를 걷게 되고 대신에 楷書가 점점 성숙한 발전을 하게 된다. 行書 또한 隸楷의 변천과정을 거쳐 점점 성숙한 발전을 하게 된다.

  《宣和書譜》에서 말하길

  “서한 말기에 예서로 石刻을 하는 가운데 간간이 正書가 섞이었다.”

라고 하였다. 「古隸」시기의 예서는 파책과 갈고리의 서법이 매우 드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