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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서(隸書)- 강의 자료

예서(隸書)

도정 권상호

  1. 隸書(예서)의 기원

  주가 멸망하고 천하는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 춘추전국시대에 접어들었는데, 이를 통일한 자가 바로 진의 시황제였다. 그는 비록 폭정으로 유명하였으나, 문자통일의 업적을 지나칠 수는 없다. 바로 전서를 가리키나 이는 실용적이지 못해, 실제로는 간소하게 한 약체가 사용되어 왔다. 이것이 예서의 발생이라 할 수 있겠다.

  ()의 始皇帝(시황제)때에 程邈(정막)이라는 사람이 죄를 짓고 옥중에 있기를 십년, 그 동안에 小篆의 번잡한 곡선의 문자를 직선문자로 고치고 書寫(서사)에 편리한 새로운 書體三千字를 창조하여 제왕에 헌상하였던 바, 제왕은 이것을 상하여 사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문자를 古隸(고예)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설이어서 그 진실성에는 의문이 있다. 古隸에 있어서도 어느 한 시기를 區劃해서 완성한 것이 아니고, 자연 발생적인 것을 程邈(정막)이 정리 마무리한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 예서의 명칭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으나, 小篆에 隸屬(예속)해서 생긴 것으로 新書體의 文字’라는 의미에서 이 명칭이 생긴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古隸가 생기고 얼마 안 되어, 王次仲(왕차중)이 八分隸(팔분예)를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예서의 두드러진 특징은 파책이다. 파책이라고 하는 것은 한 획에 큰 변화를 주어 波狀曲線으로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예서로 유명한 서적은 예기비, 서협송, 장천비, 조전비 등이 있다.

 

  2. 隸書(예서)의 정의

  예서를 배우는데 우선 중요한 점은, 예서라는 서체가 다른 서체, 즉 예서보다 오래된 전서나, 예서보다 새로운 해서, 행서, 초서와 서체상 어디가 어떻게 다른가를 명확히 파악하는 일이다. 이점을 분명히 밝히지 않고 붓을 들면, 소위 隸意(예의)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서다워지지가 않는다.

  여기서 먼저 주의해 둘 일은, 지금부터 말하는 예서라는 낱말의 뜻은, 古隸(고예)라는 예서의 고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八分(팔분)이라는 예서의 비교적 새로운 형식, 곧 조전비를 포함한 후한시대의 하고 많은 예서 전체를 하나의 개념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설명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우선 예서의 특징을 하나하나 밝혀보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예서체와 다른 서체를 비교 검토해 보는 것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 될 것이다.

 

  3. 隸書(예서)의 기본 형태

  예서의 기본 구조를 보면 한 획에 '波勢(파세)'라는 리듬이 흐르고 있는데, 파세는 예서의 가장 기본적인 특색이다. 파세란 한 획에 큰 변화를 주어 波狀曲線(파상곡선)으로 나타내는 것을 말하거나 또는 물결이 한번 치솟았다가 미끄러져 내리는 듯한 필체를 말한다.

  전서는 몽땅한데 몰아서 전서라고는 하지만 전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굉장히 종류가 많아서 좀 지나치게 막연한 표현이기는 하나, 이 경우의 전서라는 호칭의 초점을 전서의 가장 새로운 형태인 小篆(소전)에 맞추기로 한다.

  그 소전과 예서를 우선 형태상으로 비교해보면 소전은 그 자형이 아주 길다. 그와 대조적으로 예서는 일반적으로 아주 납작한 모양을 하고 있다. 전서는 생김새가 길므로 세로로 내리쓴 획이 강조되고 과장되기 쉽다. 그래서 세로로 내리그은 선이 눈에 잘 띈다. 그에 비해 예서는 납작하므로 가로로 건너그은 획이 눈에 띄기 쉽다. 즉 옆으로 길게 선이 뻗어 나가 있는 것이다.

  선과 선 사이 즉 分間(분간)의 경우도 전서일 때는 세로획과 세로획의 내려그은 간격이 필연적으로 긴밀한 반면, 예서일 때는 가로로 건너그은 획이 이에 해당하므로 가로획간이 아주 긴밀하다.

  획의 조합을 보면 전서의 경우 키가 커서 세로로 길 뿐 아니라, 세로로 내리그은 선이 대개 수직이고 가로획은 수평으로 되어있다.  이점은 예서도 같아서 세로는 수직, 가로는 수평이다. 즉 형태상의 특징으로서 길고 납작한 차이는 나지만 자획상의 균형법은 두 서체가 같다.

  이러한 자형법은 左右相稱이라 하여 옛 서체에서는 字劃構成上(자획구성상)의 기본이 되어 있었다. 이상이 형태상으로 본 예서와 전서의 다른 점과 같은 점이다.

 

  다음으로 예서와 해서를 비교해 보자. 해서의 경우 자형은 거의 네모가 반듯한 정방형에 가깝고 특히 길거나 납작하지 않다. 그러나 소홀히 보아 넘길 수 없는 중요한 점은, 해서의 가로 긋는 획이 오른쪽으로 치켜 올라가 있다는 사실이다.

  세로획이 수직인 점은 예서와 별로 다를 바가 없지만, 오른쪽 어깨가 치켜진 가로획은 해서의 특징이며 그것이 예서와 전혀 다른 점일 뿐만 아니라, 그것 때문에 예서와 전서에 공통되는 좌우상칭의 조립법이 해서에는 통하지 않고, 나아가서는 그 필법까지도 전혀 다르게 진전하게 된 것이다.

  전서와 예서는 수직 수평이라는 기본 원칙하에 다같이 左右相稱(좌우상칭)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필법도 그리 다르지가 않다. , 전서가 붓을 곧추 세우고 힘의 중심이 線劃(선획)의 중심을 통과하게 쓰는 서법, 즉 中峰(중봉)으로 쓰였는데, 이것은 거의 그대로 예서에서도 통용된다.

  단지 특수한 예로서 전서에는 없는, 예서의 '()'라고 불리는 부분 등에 가끔 그 중봉이 흐트러져서 측필이 되어가는 기미가 엿보이는데, 그것이 해서의 파임의 경우가 되면 측필의 특징이 한결 더 뚜렷이 두드러진다. 이렇게 보면 예서가 전서와 해서의 중간서체라는 사실이 더 명확히 드러나는 셈이다.

  해서는 가로획을 우상방으로 치켜 긋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관계로, 다른 획의 용필법도 측필이 되기 마련이며 波()에 해당하는 부분에서는 예서와 아주 비슷하면서도 힘을 주는 법이 달라, 이런 데서 예서와 해서의 용필법이 서로 다른 특징을 볼 수가 있다.

  더구나 꺾이는 부분에 이르면 이 특징이 더욱 명확해져서, 예서는 중봉, 해서는 측필이 원칙이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4. 隸書(예서)의 종류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秦隸(진예)인 古隸(고예)와 漢隸(한예)인 八分(팔분)이 바로 그것이며, 그 차이는 波法(파법)에 있다.

 

  . 古隸(고예): ()이 隸()로 변화하는 과도기적 특징을 나타내는데, 小篆(소전)보다 곡선이 적고 획이 간결하지만, 소전처럼 좌우대칭이며 팔분처럼 평평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소전처럼 장방형도 아니다.

 

  . 八分(팔분) : 고예를 미화하기 위하여 횡획의 끝부분을 누르고 힘차게 삐쳐 올리는 것이 波()인데, 이것이 있는 것을 팔분이라고 한다. 八字分背라고도 하는데 팔자처럼 좌우로 삐치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八分(팔분)은 前漢(전한) 무렵부터 사용되었으며, 그 末葉(말엽)부터 後漢(후한)에 걸쳐 성행하여 숱한 석각이 건립되어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5. 漢隸(한예)의 분류

  예서를 배울 때 첫째 한예에서 그 자료를 얻어야 한다. 한예의 원탁을 구하기가 매우 어려운 일이겠지만, 근래에 와서는 사진판 또는 체본용 법첩으로 만들어진 것이 많이 나와 있기 때문에 그다지 불편하지 않다. 이러한 漢隸(한예)는 보통 3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流麗形(유려형): 예기비, 을영비, 사신비, 조전비

方整形(방정형): 장천비

奇古形(기고형): 서협송

 

  ① 을영비- 전형적인 한의 예서로, 팔분의 파세가 아주 잘 나타나 있고 점획에는 흔들림이 없으며, 결체 결구는 크고 완강하며 약간 살이 찐 듯한 선이면서도 둔하지 않고, 건강하고 밝은 면을 구사하고 있다.

 

  ② 예기비- 예기비가 건립된 후한시대는 중국 서예사상 가장 建碑가 성행한 시대였다. 淸代의 금석학자인 翁方綱(옹방강) '한의 예서는 예기비로서 제일로 친다'고 단언하였다.  예기비는 서기 156년에 출토되었는데 曲阜(곡부)의 공자무덤 내부에 있다.  자체는 옆으로 길고, 필획이 瘦勁(수경)하여 힘있고 波()이한데, 한비이나 여러 가지 體勢(체세)가 나타나므로 여러사람이 나누어 썼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비 중 가장 근엄하고 가장 품위 있는 글씨로서, 精妙(정묘), 有神(유신)하고 評正(평정)하며, ()이 생동하는 것 같다.  예기비 문자의 비범함에 대해서 明代의 郭宗昌(곽종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자획의 훌륭함은 붓으로 쓴 것도 아니고 손으로 쓴 것도 아니다.  우아하기로는 그 이상의 것은 없다.  이것은 바로 신조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서 보통인간이 쓴 것이 아니다." 라고. 예기비는 비의 측면에 글자가 있고, 모든 기술적이 면을 종합하여 완성된 최고의 걸작으로, 무궁한 획의 변화는 가없는 맛을 주며 강조된 파책에 예기비의 특징이 있고, 종획에서 중후함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방정, 준엄한 느낌을 준다. 새김도 훌륭하고 글자의 수도 많아 습자본으로 알맞다.

 

  ③ 서협송- 서기 71년 甘肅(감숙) 成縣(성현)의 摩崖(마애)上에 새겼다.  한비에서는 대체로 글쓴이를 밝히지 않지만, 이것은 비의 끝에 '仇靖(구정)'이라는 글쓴이의 이름이 쓰여져 있는 것이 특색이다.  자체는 方整(방정)하고 問架(문가)가 평온하며 大字(대자)이나, 결체에서 긴밀을 잃지 않았는데 필세가 온후하여 순박하면서도 자연스럽다.  예기비의 정술된 결체나 팔분예법의 아름다움은 없지만, 소박하고 야성미가 많고 결체는 널찍하고 퍽 힘찬 書()이다.  漢隸(한예)중 刻()이 아주 잘 되고 용필도 명쾌하여 예서 입문서로 적당하다.   사물에 동하지 않고 유유한 모습에 이상한 매력이 있다.

 

  ④ 장천비- 장천비는 조전비와 더불어 後漢時代의 最後를 장식하는 일품이다.  서기 186년에 세워졌고 명말에 출토되었는데, 그 字體(자체)는 방형이고, 필획이 평정하여 파세를 극히 收斂(수렴)하였으며, 高長(고장)한 字()들이 많은 편이다. 장천비는 소박성을 잃지 않는, 점과 획, 다부진 方形(방형)의 구성, 거기에 너무 표정을 나타내지 않으려 하는 듯한 원시적인 풍모에 일층 매력을 느끼게 한다.  장천비는 다른 漢碑에 비하여 어딘가 굳세고  투박함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장천비의 독특한 맛이다.  한편, 파세를 가지지 않게 한 가로획 등은 세태의 변화를 부여하지 않고 긋는다.  그것이 도리어 효과적으로 소박한 맛을 내고 있다. 요컨대 기교를 부리지 않고 運筆한 것이 현대적인 우리들에게는 매력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건강하고 남성적인 서법으로 일관해 있다고 보여 진다. 그리고 장천비는 전서이면서 다분히 예서적이다. 따라서 전서와 같은 圓味나 건강을 나타내지 않고 펑퍼짐하고 자연스럽게 문자를 배합하고 있다. 

 

  ⑤ 조전비- 예서의 用筆結體의 특징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것  중 첫째가는 것이 조전비이다. 서기 185년에 세워졌으며, 明代에 陽에서 출토되었다.  결체는 역시 옆으로 납작하고, 필획이 섬세하여 파가 飛舞(비무)하며, 柔美(유미)하면서도 麗()한 풍격을 顯露(현로)하고 싶다.  全然(전연) 풍화작용을 받지 않았고, 刻法(각법)이 대단히 정밀했기 때문에 진책을 보는 것과 같이 筆路(필로)를 잘 알 수 있으며, 木簡(목간)은 요컨대 일상의 용건을 충족하는 문서가 많다.

  조전비의 서법은 삼백년을 지배하는 법칙을 그림을 그리듯이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眞蹟(진적)이 아니라는 흠은 면치 못한다.  그래서 木簡(나무판 글씨)을 되돌아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비에 새겨진 글씨는 字劃(자획)이 完好(완호)하고 형태가 매우 아름다울 뿐 아니라 筆力(필력)이 경건하다.

 

  ⑥ 석문송- 이것은 後漢(후한) 제일의 걸작이라 할 수 있으며, 소박한 서풍을 가지며 예기비, 조전비와는 반대로 예서의 법에 얽매이지 않는 자연스러움이 있다.

 

  6. 隸書(예서)의 기본 점획 쓰기

  예서(隸書)는 전서의 엄정한 결구를 쓰기 쉽도록 변화시킨 서체로, 전체적으로 납작하고 수평적이며 가로획의 한 획이 파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예서가 발생한 것은 전서보다 쓰기가 편하고 아름답기 때문이었다.

  ① 파책(파임) = 蠶頭 + 雁尾

  ② 平捺(평날) +斜捺(사날)  * (누를 날, 파임 날) - 捺印(날인)

  ③ 挑法(도법) - 平鋪(평포) 또는 跳躍(도약) * (휠 도)

  ④ 左向點(좌향점), 右向點(우향점), 下向點(하향점)

  鉤劃(구획)  * (갈고랑이 구)

 

다른 비 해설.

  1) 을영비(乙瑛碑)

  후한의 환제(桓帝)때에 노나라의 재상 을영의 신청에 의하여 공자묘에 묘를 관리하는 사람을 두게 한 것을 기술하고, 을영 이하 그 일에 관계된 사람들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비문은 18, 각 행에 14자로 되어 있다. 결구가 잘 맞춰져 있고 용필이 날카로우며 그 파책은 특히 역동적이다. 조전비에서처럼 중심으로 밀집시키고 좌우 양면으로 세를 확장시켜 내는 결구 도 아니며, 장천비처럼 방형 안에 필획을 제한시키는 결구형식도 아니다. 평범한 모양이지만 힘이 들어 있고, 소박하면서도 경부 한 느낌을 주지 않는 충실한 서체로서 팔분서체의 정통으로 꼽힌다. 중량감과 균형미가 아낌없이 발휘한 한대의 걸작이라 할 수 있다.

 

  2) 예기비(禮器碑)

  예기비가 새겨진 것은 약 1800여 년 전 후한의 환제 영수(永壽) 2년의 일이며, 한래비라고도 부른다. 이 비문의 내용은 노나라의 제상이던 한래의 공적을 칭송한 글인데, 그는 공자를 존중해 그 자손 일족에게는 일반인과 다른 특별한 대우를 해야 한다고 주장, 징병이나 노역을 면해 주는 등, 진심어린 예우를 다했다. 또 그는 진시황제의 폭거 이후 산뚱성 취무에 있던 허물어진 공자묘(이곳은 한 이후 역대의 비가 많아 곡장비림(曲章碑林)이라 불린다.)를 수리하고 제사에 쓰이는 가장 중요한 기구류, 즉 예기를 정비하고 또 공자의 생가를 수복하고, 묘 주변의 배수 사업 등도 했다. 이와 같은 한래의 작업에 감동한 사람들이 그의 높은 덕을 기리고자 돌에 새긴 것이 바로 이 예기비이다. 한비는 중후한 것과 연미(硏美)한 것이 있는데 이 비는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 중용을 지키고 있다. 문자의 구성이 알맞고 운필이 정교하여 높은 품격을 지니고 있는 비로서 새김도 훌륭하고 글자수도 많아 예서를 익히는데 적당하다. 그리고 예기비의 선조(線條)에 관하여서는 유(여윔), (단단함), (맑음), (곧음)이 언급되어 진다. , 예기비는 선조가 여위어 신정(神情)이 넘치며 단단해서 골격이 튼튼하고 맑아서 모습이 명랑하며 곧아서 태도가 준수하다고 말해진다. 따라서 예기비에 대한 감상은 필획의 선조를 통해 그 신정과 골격, 모양, 자태를 터득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3)사신비(史晨碑)   이 비는 후한의 영제 시대에 노나라의 승상이 된 사신이 공자묘에 성대히 제사를 치르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로 현 재 산동성 곡부{공자묘의 비림(碑林)}에 있다. 이 비는 전후 양면으로 문장이 가득 새겨져 있는데, 앞면을 사신전비, 후면을 사신 후비라 칭한다. 사신전비의 내용은 대개 사신이 공자의 고향에서 노나라 승상의 직에 있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알고 아울러 상 서(尙書)에게 성상(聖上)으로 하여금 공자의 제사를 올리도록 청하여 주기를 간청한 것이다. 사신후비의 내용은 사신이 공자에게 제사 올릴 때의 성대한 정황에 대하여 기술한 것이다. 고박하고 후실(厚實)하며, 팔분예의 전형적인 것의 하나이다. 글자체는 3:2내지 4:3정도의 세로 구성이다. 서법을 확실히 지켜 늘씬한 맛이 있고 화려하고 기교 있는 필법에 신중하고 긴장미가 있으며 단아하게 자형이 잡혀 있어 예서를 배우는 입문으로 적당하다.

 

  4)서협송(西狹頌)

  서협송은 마애각으로 무도(武都)의 태수가 서협의 각도(閣道)를 수리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원형, 사각형의 결구로 시작하거나 끝나고, 파책이 다른 비석처럼 강조되지도 않은 소박하고 야성미 넘치는 글씨, 굵고 가늠이 없이 똑같은 굵기로 글씨를 쓰고 있지만 무미건조하지 않고 마음에 다가오는 박력이 있다. 장천비에서처럼 단순하고 소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감서성 성현 이궁협의 절벽에 새겨져 있는데, 처음에 오단크기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다시 오단 크기의 유래가 적혀 있다. 이 왼쪽에 서협송의 본문이 있다. 글의 끝에 구정(仇靖)이란 글쓴이의 서명이 있다. 한비는 대체로 글쓴이를 밝히지 않지만, 이 작품은 서명이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서풍은 중앙 도시의 전형을 약간 벗어났지만 의지적인 늠름한 붓놀림은 모든 한비 가운데 단연 돋보인다.

 

  5)조전비(曺全碑)

  조전비는 흙속에 매몰되어 오다가 명나라 때 섬서성 부양현의 옛 성터에서 발굴되었다. 그전에 이 비는 한비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였으나, 20C 영국 고고학자인 스타인이 한인들의 진적(眞蹟)을 발견함으로써, 조전의 우려한 서풍이 한말의 퇴폐한 풍조와 일치하지 않다는 것과 이 비의 자형이나 필화의 모양새는 예법이 완성된 극치점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 비의 서법은 300년간의 정칙을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진적이 아니라는 아쉬움은 면할 길이 없다. 또 하나 조전 비의 단정한 모습에서 결체나 용필의 비밀을 엿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단장하면서도 아리땁고 중후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풍 모와 중심 밀집과 좌우서전(左右舒展)의 결구를 특징으로 하고 있는 이 비는 몇 단점에도 불구하고 한비의 치보(致寶)라 일컬어지고 있다. 조전비의 내용은 정확히 알 길이 없으나, 상황증거를 추리하건대 부양현 장관이던 조전의 희망에 따라 그의 창덕비가 세워지기로 되어 며칠 후면 입비식까지 갖게 될 무렵 돌연 조전이 실각한 것으로 보인다. 비의 뒷면에는 관계한 사람들의 이름과 기부한 금액까지 명기되어 있는데, 바로 그들이 연루되는 것이 두려워 증거품이 될 비를 땅속에 묻어 버렸을 가능성이 짙다. 이 비를 세운 날짜는 중평 2 10월이고 사서에 의하면 그해 9월 삼공,즉 최고 권력자중의 한 사람인 사공 양사가 죽었다. 동시에 그 참모격이던 간의대부 류도는 갑자기 실각하고 다음날 처형되었다. 조전도 그 일당에 속해 있었던 것 같다. 조전의 동생 영창 태수 조란도 당쟁 때문에 죽고 조전도 그 때문에 벼슬을 버리고 7년간이나 숨어 지내던 일이 기록되어 있다.

 

  6)장천비(張遷碑)

  낙음현의 현령이었던 장천의 공덕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본문에는 가차자(假借字)나 오자가 더러 있어서 후세의 모각이 아니냐는 논란도 있지만, 소박하면서도 너그러운 서풍은 후세에 따르기 힘든 미를 지니고 있다. 시기상으로는 후한의 말기에 해당되는 이 비는 용필이 방모(方模)하고 졸후(拙厚)한 맛이 있다. 서법은 위진의 팔분서체의 선구가 되었다. 소박하고 힘찬 점획, 완강한 네모꼴의 구성, 굵기를 모르는 단순한 선이 그 특징을 이루고 있다. 충분히 뻗은 점획, 자유롭고 메이지 않은 결체에 그 참맛이 있다. 필획의 기필과 수필이 곧바로 이루어지고 전절(轉折)이 항상 직각을 이루어, 장천비가 한예 중 방필웅강(方筆雄强)의 전형으로도 일컬어진다. , 후한말에 나타난 이 비는 이미 해서의 형태에 매우 근접한 서체를 보이고 있어서 , 그 시기에 해서의 원형이 태동되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도 가치가 있다. 본문에는 이 비를 세우게 된 유래와 사자구(四字句)로 된 명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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