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website is using a security service to protect itself from online attacks. The action you just performed triggered the security solution. There are several actions that could trigger this block including submitting a certain word or phrase, a SQL command or malformed data.
You can email the site owner to let them know you were blocked. Please include what you were doing when this page came up and the Cloudflare Ray ID found at the bottom of this page.
信一高 野球史
1975년
야구부의 창설
본교 고등학교 야구부는 1975년 8월 25일 교내외의 수많은 기대와 성원하에 창단되었다.
고교 야구부의 창단은 다른 운동부보다 그 운영 규모가 거대함으로 비용의 문제는 물론, 선수 확보 등에 이르기까지 어려움이 허다하였다. 그러한 중에서도 대망의 창단을 보게된 것은 교장의 꾸준하고 열성 있는 후원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창단팀으로서의 준비 과정은 기존 팀에 비하여 몇 배의 노력을 요하게 되는데 본교 야구팀은 훌륭한 선수 출신의 韓東和 감독을 창단 감독으로 초빙하게 되어 처음부터 희망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韓東和 감독은 야구 명문교인 선린상고를 졸업하였고 제일은행의 야구부에서 활약하였다. 건실한 내야 수비의 준족으로 톱타자의 표본이라고까지 불려진 바 있는 韓 감독은 제1회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와 6, 8, 9, 10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 한국 대표 선수로 출전한 것을 비롯하여 72년과 74년에 日本과 自由中國에 원정하는 등 화려한 경력을 가졌다. 그의 지도 목표는 희생정신과 협동정신, 감투 정신이 투철한 선수를 양성하는 것이며 공격과 수비는 물론 두뇌 플레이를 하는 야구팀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처럼 훌륭한 감독을 이미 사령탑에 앉힌 후에 창당이 이루어진 것은 실로 뜻깊은 일이었다.
1975년 8월 25일 조회 시간에 신일고등학교 야구부 창단식이 金三悅 교장을 위시하여 야구 관계자들, 본교 교사들 그리고 3천 신일인의 뜨거운 열망과 성원 속에서 성대히 베풀어졌다.
이날 식전에서 金三悅 교장은 “꾸준한 연습을 통해 진정한 스포츠 정신을 살리라.”는 간곡한 축사가 있었으며 뒤이어 앞에서 언급한 韓東和 감독에 대한 임명식과 신일 야구부의 상징인 야구부 기가 부장 宋錫英 교사에게 수여되었고, 대한야구연맹 총무의 축사가 있었다.
다음 순서로 선수들의 소개가 있었으며 중학교 야구부의 서울시 중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의 우승에 대한 시상식을 끝으로 창단식을 모두 마쳤다.
대표자 : 金三悅 단 장 : 李一天 주 무 : 林泰殷 부 장 : 宋錫英 감 독 : 韓東和 선 수 : 金貞洙, 金浩根, 朴鍾勳(이상 투수), 金男洙, 梁承虎, 盧承珍, 金南鉉(이상 내야수), 朴千洙, 李鍾浩, 정강석, 曺龍鉉(이상 외야수)
|
고교 야구의 ‘태풍의 눈’으로 등장
李奉守 이사장을 비롯한 네 분 설립자와 金三悅 교장의 아낌없는 후원 하에 역사적인 창단을 본 신일 야구팀은 창단후 첫 경기도 미처 갖기 전에 벌써 고교 야구의 “막강한 새 강자”로 이름이 오르내리게 되었다.
1974년 소년 체전 부산대회에서 서울 대표로 출전하여 준우승, 7월의 서울시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신일중학교 선수들이 고스란히 고등학교로 진학한 데다가 호남에서 광주일고의 위협적인 존재인 광주 동신고의 주전 선수 5명이 고스란히 신일팀에 합류하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서울 시내 중학교 야구의 최강자인 선린중의 崔洪錫과 당시 중학 야구계의 대형 투수였던 金貞洙(청주중 출신)가 가세하여 투수 4명에 9명 전원이 막강한 타력을 자랑하는 강타전을 이룩하였다.
특별히 야구에 많은 관심을 가진 金三悅 교장은 ‘우리가 우리 힘으로 기른 선수를 국가 대표로 까지 키워 보자’는 모토를 가지고 분전하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자급자족의 바탕이 없었던들 고교 야구계의 “태풍의 눈”으로 등장하는 신일야구팀의 신화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리하여 본교는 선수 18명 중 고3이 5명, 고2가 4명, 고1이 9명인 매우 이상적인 선수층을 구성하였다.
신일팀의 에이스로는 물론 車容甲이었지만 金貞洙도 그 스피드나 컨트롤이 결코 車容甲에 뒤지지 않았다.
본교팀은 어느 때나 내세울 수 있는 투수를 4명(車容甲, 金貞洙, 金浩根, 朴鍾勳)이나 가지고 있었는데, 이와 같은 파워는 고교팀으로서는 그리 흔치않은 일이었으며, 이것이 팀 창단만 하고 아직 출전도 해 보지 못한 신일팀을 타교 팀들이 두려움의 대상으로 보게 된 까닭이었다.
따라서 일반에서는 철도, 보성, 중앙, 휘문 등의 학교에서 주요 멤버가 다 졸업해 버렸기 때문에 별 문제가 안 된 것이고 에이스 李吉煥이 있는 선린고, 서울고, 유한공고 그리고 신일고를 4강으로 일찌감치 점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신일 야구팀은 경기도 일산에 있는 弟一銀行 코트에서 맹훈련에 돌입하였다.
기존 팀들이 대회 출전에 급급하고 승리감에 도취하기도 하며 때로는 패배감에 젖어 시간을 마냥 흘려 보내고 있을 무렵인 1975년 8월 5일부터 1차, 2차의 훈련에 돌입하였으며, 그해 겨울에 있었던 동계 훈련시에는 영하 15。C의 강추위 속에서도 훈련에 여념이 없었고 지방의 실전 경험을 쌓아 1976년 3월에 개최될 서울시 춘계연맹전에 대비하였다.
당시 韓東和 감독은 출사표를 인터뷰로 대신했는데 그 요지는 “해 봐야 알겠지만, 우선 상위권에 뛰어들자는 것이 제 욕심입니다. 투수진이 안정되어 있는 것이 무엇보다 큰 자랑이죠. 또 타격에 있어서도 주축 타자는 없지만 전원이 고른 타격을 보여주고 어느 타선에서나 득점할 수 있다는 것이 또한 장점입니다.”였다.
1976년
첫 우승
1975년 창단된 이래 중앙 무대에서의 첫선인 대통령배 서울시 예선 겸 춘계연맹전에서 감격의 우승을 차지하여 처녀출전 팀의 처녀우승으로 세인을 놀라게 하였다.
이 대회의 첫 게임에서 경기고를 막강한 타력으로 7 : 0, 7회 콜드게임으로 격파하고 연이어 성남고와 대전에서 매회 득점, 고교 야구의 기록을 세우면서 14 : 4, 7회 콜드게임으로 역시 제압, 올해 고교야구계의 ‘태풍의 눈’이 될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약체 경기고, 배문고 상문고를 연파하고 준결승에 뛰어오른 신일은 투수 李吉煥이 이끄는 강호 선린고를 4번 金炅勛의 좌월 1점 홈런으로 기선을 제압하고, 7회말 김정수가 2점 홈런을 치는 등 맹타를 퍼붓고 金貞洙가 역투하여 7 : 0으로 완봉하고 대망의 결승전에 올랐다.
이날 역시 신일은 2회말 4안타와 1·4구를 집중, 2점을 선제했으나 서울교가 3회초 2점을 만회, 8회초까지 불꽃튀는 접전을 벌였다. 드디어 행운의 8회말 金弘鉉의 안타후 3번 崔洪錫이 중전타로 후속하고, 金洙男의 사투로 2사만루의 찬스에서 6번金男洙가 鮮干大泳으로부터 4구를 탈취, 대망의 결승점을 올려 창단 후 전승을 거두고 감격의 첫우승을 차지하였다.
대통령배, 청룡기 등 전국대회 본선 진출과 화랑대기 준우승
1. 대통령배 대회 선수 진출
1976년도 서울시 춘계연맹전 및 대통령배 예선전에서 상문고에 승리, 2관왕이 되었다.
곧이어 대통령배 본선에서는 부산시 우승팀인 전통의 경남과 1차전에서 격돌했다. 초고교급 투수 金貞洙와 崔東原의 대결로 7회까지는 신일이 1:0 승, 그러나 8회초 이날의 영웅 金洙男이 등장, 최동원의 제1구를 강타, 신일 응원석으로 통쾌한 2점 홈런을 날려 승기를 굳혀 경남의 추적에 찬물을 끼얹고 3:0으로 8강의 대열에 올랐다. 이어 우승 후보인 군산상고와의 대전에서는 1:0으로 기선을 잡았으나 끈질긴 군산상고에 3:1로 역전되어, 다시 이를 맹추격 3:2까지 접근하였으나 뜻밖의 홈런을 맞아 4:2로 분패를 하고 말았다. 이날 경기에서는 경험 부족 및 연륜 부족에서 오는 패배라는 평이어서 이 점만 극복하면 정상에 도달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2. 청룡기 대회 본선 진출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제31회 청룡기쟁탈 전국고교 야구선수권 대회(朝鮮日報社 주최)가 1976년 6월 14일부터 6월 20일 까지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베풀어졌다.
이 대회에서 서울 대표(信一, 善隣, 尙文)로 출전한 본교 야구팀은 제1차전에서 만만찮은 전력을 갖춘 馬山商高팀을 맞아, 고전 끝에 9회말 투아웃에서 6번 타자 金貞洙군의 회심의 일타가 그대로 포물선을 그리면서 홈런!
대세는 역전되어 3:2로 신일이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제2차전에서 경북의 강자인 경북고를 맞아 분전했으나 아깝게도 3:1로 패하여 1천여 재학생 및 동문 응원단의 눈물을 삼키게 했다.
3. 花郞大旗 준우승
항도 부산에서 해마다 베풀어지는 화랑대기 쟁탈 전국고교 야구선수권 대회(제28회)가 구덕체육관에서 열렸는데, 본교 야구팀은 결승전에서 부산상고 팀과 싸워 3:0으로 패하여 준우승에 머무르고 말았다. 그 당시의 전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1차전 對 大田高 2 : 0 승 제2차전 對 釜山高 12 : 1 승 제3차전 對 慶南高 2 : 0 승 제4차전 對 釜山商高 3 : 0 패
|
한편 이 대회에서 본교 야구팀의 에이스인 車容甲군이 對 부산고전에서 주자 일소의 만루 홈런을 날려 만장의 박수 갈채를 받았다. 이 홈런은 본대회 7호인 동시에 본대회사상 최초의 만루 홈런이어서 항도 야구팬들을 열광시켰다. 그리고 본교의 정통파 투수인 金貞洙군이 필사적으로 복수전을 다짐하며 덤벼드는 경남고의 도전에 찬물을 끼얹은 회심의 솔로․홈런으로 숙적인 경남고는 서을 대회에 이어 또다시 2:0으로 무릎을 끓고 말았다.
비록 이 대회에서 우승은 못하였지만 본교 야구팀과 임원 일동은 그야말로 최선을 다한 경기였었고, 멀리 서울에서 내려오신 金三悅 교장 교내, 宋錫英 부장, 韓東和 감독 둥은 근 10일간을 부산에 머물면서 온갖 수고를 다했으며 부산이 고향인 金東和 교사가 합세하여, 신일 야구 가족은 객지에서의 외로움을 털고, 화기로운 분위기를 만끽하였다.
창단 11개월만에 황금사자기 쟁취와 일본 원정
신일이 이루어 놓은 세 번째 신화!
그것은 대학 입시, 농구에 이어 1976년 7월 20일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일어났다.
제 30회 황금사자기 쟁탈 전국지구별 초청 고교야구대회(東亞日保社 주최)에서 청룡기대회 우승팀인 경남고, 대통령배 우승팀인 군산상고를 차례로 물리치고, 오랜 전통의 팀, 황금사자기를 세 차례나 차지했던 선린상고를 零封(영봉)하여, 전국 대회 출전 5개월만에 명실상부한 전국의 패자가 된 것이다.
1975년 8월 25일 창단될 때만 해도 신일 야구가 전국을 제패하리라곤 아무도 예측을 못하였다.
감독은 젊은 韓東和씨, 그리고 선수들은 신일중학교 3학년 선수들, 그러니까 76년에야 고등학교 1학년이 되는 어린 선수들로 구성된 팀이니 누가 그런 예측을 했겠는가?
약 5개월 간에 고된 연습 중에 광주 동신고등학교의 야구부가 해체됨에 따라 5명이 신일 야구부로 오게 되어 전력을 강화할 수 있게 되었다.
76년 3월, 모든 신일인은 가슴을 조이며 서울시 춘계연맹전 겸 대통령배 예선대회를 지켜보았다.
첫 게임이래 승승장구하여 마침내 첫 우승을 거두었을 때 선수들은 운동장에 끓어 앉아 기도드렸고, 1천여 명이 참가한 신일 응원석에서는 일제히 함성이 터졌던 것이다. 그 뒤 몇 차례의 전국 대회 우승에의 도전이 좌절되는 쓰라린 상처를 와신상담 끝에 빛나는 승리로 맞바꾸었던 것이다.
특히 이 대회에서 본교 팀은 대통령배 覇者인 군산상고를 7:0으로 격파 전대회에서의 敗北를 깨끗이 설욕했고, 다음 청룡기 敗者인 강호 경남고를 1:0으로 제압했으며, 결승전은 야구의 명문 선린상고를 맞아 통쾌한 장․단 안타를 터뜨려 2 : 0으로 완파, 드디어 전국의 왕자로 군림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때의 상황을 소개하여 일간지들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 창단 첫 출연의 신일고가 대망의 황금사자기를 차지했다. 지난 해 8월 팀을 조직하고 올 봄부터 대회에 출전하며 전국 대회 석권을 벼르던 신일고는 19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제30회 전국 지구별 초청 고교 야구 쟁패전 7일째 최종일 결승전에서 명문 선린상고를 2:0으로 완봉, 꿈을 이룬 것이다. 이날 신일의 에이스 金貞洙는 이 대회에서 4번째 우승을 노리는 선린상고 공격진을 강속구와 드롭․커브로 무력하게 만들었고 6번 타자 金男洙는 적시타를 날려 수훈을 세웠다. 이 대회 제패로 신일은 8월 중순에 있을 일본 원정 자격을 얻었다. 서울팀 끼리의 대결이라 이날 관중은 2만, 이 대회에서 최근 서울팀의 우승은 6년만의 일이다.
金貞洙와 李吉煥을 선발로 등판시킨 양팀의 승리 예상은 다소 신일 쪽에 기울었지만 선제 기회는 전통의 선린상고에 먼저 왔다.
金貞洙와 겨루어 본 적이 많은 선린상고는 1회초 선두 타자 金亨坤이 깨끗한 우전 안타로 돌파구를 열고 보내기 번트로 2루까지 진출.
다음 타자 鄭宗鉉의 타구는 오른쪽으로 세게 부는 바람을 타면서 중견수 앞 행운의 안타가 됐고 4번 李吉煥은 포볼을 골라 1사 만루의 절호의 득점 기회.
선린상고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에 구장은 흥분됐고 신일 벤치와 마운드간에 전령이 오락가락하면서 초비상.
관중이고 선수고 모두 다음 타자와 투수에만 정신이 쏠려 있을 때 1루에 견제구를 던지자 감독의 사인에만 정신을 쏟던 이길환은 어이없이 태그 아웃.
위기를 넘기고 이 대회 초반부터 불이 붙은 신일의 방망이는 2회말에 터졌다. 1사후 5번 金貞洙가 포볼을 고른 뒤 매 게임 수훈을 세운 金男洙는 중견수 머리 너머로, 7번 최홍석은 좌익수 옆으로 빠지는 통렬한 2루타를 갈겨댄 것이다. 이날의 승패를 가른 2득점
이후 신일은 3, 6회말에, 선린상은 4, 5, 6회초에 각각 선두 타자가 진출하고 득점의 기회 일보 직전까지 몰고 갔으나 金貞洙, 李吉煥 양팀 투수의 호투에 눌려 범타나 삼진, 또는 포수 견제구를 물러났다.
‘황금사자기는 신일고에’
― 신일, 金貞洙 호투 선린타선 봉쇄 ―
포효하는 황금 사자가 아로새겨진 진홍의 깃발이 온통 땀과 흙 먼지로 범벅이 된 신일고 선수들의 머리 위에 힘차게 펄럭였다.
청룡기대회 우승 팀인 경남고를 준준결승에서, 그리고 대통령배 우승 팀인 군산상고를 준결승에서 각각 물리치는 등 내노라 하는 강호들을 차례로 물리치고 대망의 결승전에 올라온 신일고는 1회초 맹렬한 기세의 선린상고의 공세를 근근히 모면한 뒤, 2회말 폭죽이 터지듯 집중타가 작렬, 승기를 굳혔다.(東亞日報 76. 7. 21字)
한편 The Korea Herald는
― Shinil Nine grabs golden Lion Flag ―
(The Korea Herald 76. 7. 20字)
한편 이 대회에서 일루수 金男洙는 최우수 선수로 선발되었고 金貞洙 투수는 우수투수상을 중견수로 활약한 崔洪錫은 수훈상을 받았고, 韓東和 감독은 감독상을 金三悅 교장은 공로상을 수상하여 시상식장은 신일 일색으로 장식하였다.
이날 운동장 안팎은 온통 신일인의 축제 무드에 휩싸여 버렸으며, 재학생 응원단(지도 邊仁植 교사)과 동문 응원단(단장 明桂南)은 혼연일체가 되어 이 기쁨을 만끽하였고, 다소 흥분한 동문들은 그라운드로 뛰쳐나가 선수들을 기마전하듯 무등을 태워서 운동장을 한바퀴 돌았다.
李奉守 이사장, 李永守 이사 그리고 金三悅 교장이 응원석까지 찾아와 손을 흔들어 승리를 축하하는 것으로 축제 무드는 절정에 달하였다. 이리하여 신일 야구는 모교의 품안에 또 하나의 신화를 안겨 준 것이다.
그 후 본교 야구팀은 황금사자기 우승팀의 자격으로 한일 친선 야구대회 참가차 일본 원정 길에 올랐다.
단장 鄭起勝(대한야구협회 이사) 부단장 金三悅(신일고등학교장) 섭외 宋錫英(신일고야구부장) 감독 韓東和(신일고야구감독)
|
이상 임원진과 車容甲(투수 고3)외 15명의 선수가 참가한 첫 날의 게임은 岐阜선발 팀과의 대전이었는데, 본교 팀이 2:1로 첫 승리를 기록하였다.
2차전은 日本 야구의 메카인 甲子園大會 8강 팀인 智弁(치밴)와 대전하여 5:3으로 분패하였다.
3차전은 大鐵고 팀과 대전했는데, 1:0으로 분패하였다.
한편 본교 야구 팀은 일본원정에 앞서 국내에서 거행된 환송전 경기에서는 라이벌 팀인 선린상고 팀을 10:5라는 더블 스코어로 가볍게 물리친 바 있었다.
고교 야구 추계연맹전 우승
본교 야구부는 창단 11개월만에 전국을 제패, 대망의 황금사자기를 움켜잡은 뒤, 일본 원정으로 국내 대회인 봉황대기 대회에는 출전하지 못하고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76년도의 시즌의 굿바이 게임인 ‘서울시 고교야구 연맹전’에 산뜻한 백색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성동원두에 자리잡은 서울 그라운드에 그 용자를 나타내었다.
본교 응원단과 동문 응원단의 열화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으며 등장한 본교 야구부는 11월 5일부터 18일까지 14개 팀이 雌雄을 겨룬 서울시 고교 야구 추계연맹전 예선리그에서 성동고를 8 : 1로 물리치고, 배명고와 1 : 1로 비김으로 약간의 불안을 느끼게 했으나, 강팀으로 알려진 서울고와의 대전에서 삼진 14개를 빼낸 金貞洙 등의 활약으로 단 한 개의 안타만을 허용하고 2 : 0으로 눌러 이겼다.
결승 토너먼트에 진출한 본교 야구부는 15개의 삼진과 6회초 솔로 홈런을 날린 金貞洙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강력한 우승 후보로 등장한 동대문상고를 4 :2로 제압 결승전에 진출했다. 새로 많은 선수들을 스카웃하여 막강한 타력을 과시하는 충암고와 결승전을 가진 본교 야구부는 12개의 삼진과 7회의 안타를 쳐서 1 : 0으로 물리치고 우승했다.
한편, 金貞洙군은 이 대회에서 최우수선수상과 우수투수상을 받았다.
특히 이 대회에는 졸업반(고3)선수들(金炅勛, 金洙男, 曺晟榮, 金弘鉉子 등)이 불참한 가운데 진행된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우수한 성적을 낸 것은, 명년의 고교 야구 실력 평가에도 관계되는 것이어서 더욱 주목되는 바 컸던 것이다.
― 영광과 상처, 그리고 침체의 늪을 건너뛴 신일 야구의 실상(1977~1986)―
1976년은 본교가 개교 10주년을 맞이한 축제의 해였다. 1975년 8월 25일 신일고 야구부가 창단된 이래 꼭 1년만에 전국 대회의 패권을 잡아 개교 10주년의 선물로 바쳤기에 더욱 값진 해가 되었다. 전국 대회 출전 5개월만에 이룬 ‘황금사자기’ 쟁취는 세인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부터 10년간의 신일 야구사는 반드시 영광으로 점철된 승리의 기록만은 아니었다. 물론 그 기간에도 전국 대회의 패권을 2회나 움켜쥔 쾌거가 있었다. 하지만 호사다마랄까, 순풍에 돛을 달고 쾌적한 항해를 신일 야구 앞을 가로막는 첫 번째 암초가 있었다. 그것은 1977년 5월 16일에 일어난 일로 본교 야구팀은 ‘전국 고교 야구 대회 사상 첫 기권패’를 당하는 불상사를 초래하고 만 것이다. 여기에 대한 기록은 다음 항에서 자세히 서술하겠지만 그것은 신일 야구의 첫 번째 깊은 상처였다. 이러한 상처를 딛고서 다음해인 1978년 제32회 황금사자기대회에서 패권을 잡은 것은 신일 야구의 불사조 근성을 발휘한 것이기도 했다.
1977년 11월 7일은 본교 팀의 에이스이자 강타자인 김정수군이 개인 타격 부문에서 고교 야구 최다 홈런 기록을 수립하였다.
1981년에는 항도 부산에서 베풀어진 화랑대기에서 우승, 본교 팀은 세 번째 전국 패권을 장악하였다.
이후부터는 신일 야구의 침체기로 준우승(4강) 진출이 최대의 전과였을 뿐이다. 이 10년 동안에 강산도 변한다는 말처럼 야구 부장은 1대 宋錫英, 2대 李錦山, 3대 張在榮 교사로 바뀌었고, 감독의 경우도 1대 韓東和, 2대 金星根, 3대 박용진, 4대 최주현, 5대 朴千洙 감독으로 5대에 걸쳐서 사령탑이 바뀌었다.
특히 초대의 한동화 감독의 경우는 그 무렵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충암고의 김성근 감독과 맞바꾸는 케이스로 당시 야구계의 화젯거리가 되었었다.
또한 85년 말부터 감독직을 맡은 박천수는 본교 야구 선수 출신으로 사령탑을 맡은 첫 케이스가 되었다.
1978년에는 학교 후문쪽 산밑에 훤칠한 터전을 닦아서 ‘신일중고등학교 야구장’을 건립했다. 이 구장은 아늑한 숲 속에 그림처럼 파묻혀 있는 경관 좋은 운동장이다. 백운대, 인수봉, 도봉이 병풍처럼 둘러 쌓인 다이아몬드 구장에서 나는 백구의 포물선은 신일 야구의 꿈을 키우는 곳이기도 했다. 이곳에 세워진 대형 비닐하우스에서 신일 선수들은 계절을 초월하여 맹연습을 하였다.
1977년
제11회 대통령배쟁탈 전국고교 야구대회 준결승전(대 공주고 3:3 12회 연장)에서 돌연 기권, 부전패
1977년 5월 16일 서울운동장에서 벌어진 준결승전 제11회 대통령배쟁탈 전국고교 야구대회에서 본교 야구팀은 신예 팀인 공주고와 3시간 10분간에 걸쳐 숨막히는 격전을 벌였으나 연장 12회까지 3:3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해 대회 규정에 따른 회수 제한으로 ‘서스펜디드 게임(일시 정지 게임)’이 선언됐었다. 이 날 경기에서 본교는 에이스 金貞洙를 공주고는 吳英世를 각각 마운드에 내세워 연장 12회까지 서로 완투하는 투수전 끝에 두 팀은 끝내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이 날 두 팀은 5회까지 득점 없이 투수전을 벌이다 본교팀의 6회말 공격에서 1사후 슬러거 4번 朴鍾勳이 센터를 넘는 장쾌한 2루타로 돌파구를 연 뒤 7번 박천수가 우전 적시타로 뒷받침을 해 주어 선취점을 뽑아 냈다.
반격에 나선 공주고는 7회초 2번 朴勇煥이 내야 실책으로 출루한 뒤 3번 이근식이 4구를 골라 1사 2루가 되자 5번 宋錫昌의 스퀴즈가 야선으로 처리되어 1점을 만회했고 계속된 4구로 2사 만루의 찬스에서 8번 李秉勳이 중전 적시타를 때려 2점을 추가 3대 1로 앞섰다. 추격에 나선 본교 팀은 8회말 2번 梁承虎가 내야 실책으로 진루한 뒤 3번 崔洪錫이 우중간 2루터를 날려 1점을 만회하고 9회말에도 1번 김정수의 좌전 적시타로 1점을 배 내 극적으로 3:3 동점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이후 연장전에 들어가 두 팀은 12회까지 투수전을 벌인 끝에 결국 득점 없이 비겼다. 본교 팀은 9개의 안타 공주고는 7개의 안타를 날렸으며 본교의 김정수는 8개의 삼진을 탈취했다.
전국 고교 대회 사상 첫 기권패를 불러온 신일 유격수 김경표 무학적 사건
제11회 대통령배쟁탈 전국고교 야구대회를 주최한 중앙일보의 기사(1977년 5월 17일자) 내용을 발췌하여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신일고 김삼열 교장은 신일 야구팀이 학교 사정으로 기권한다고 17일 대한야구협회에 통보해 왔다. 16일 공주고와 준준결승전에서 연장 12회까지 3:3으로 비겨 서스펜디드 게임을 가지려던 신일고가 돌연 기권한 것은 유격수인 金京杓가 무학적 선수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대한야구협회 金鍾珞 회장과 崔寅哲 부회장 및 야구협회 상임이사들은 긴급 이사회를 갖고 신일고 김경표 선수가 신일고 학생이 아님에도 대 군산상고전과 대 광주상고전에 출전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신일고의 기권을 받아들이고 공주고의 부전승을 결정, 결승전에 진출시켰다. 대한야구협회의 선수 등록 규정에는 경기 도중 부정 선수가 밝혀졌을 때는 남을 경기에 출전할 수 없으며 부정 선수가 있는 팀에 패한 팀이라도 소생할 수는 없다고 되어 있다. 신일고의 김경표 선수가 무학적인 부정 선수로 밝혀진 것은 공주고와 연장 12회를 가진 후 일부 팀의 어필로 확인된 것이다. 한편 대한야구협회는 전국고교 대회 사상 첫 기권 사태를 빚게 한 신일고 팀의 징계 문제를 추후 이사회에서 논의키로 했다.
|
이 사건은 같은 해 6월 3일 대한야구협회 이사회의 결의로 신일고 야구팀과 한동화 감독에게 1년간 자격 정지 처분을 내렸다.
한편 본교 재단 이사회는 김삼열 교장에겐 감봉 처분, 송석영 교사는 징계위원회에 회부하는 선에서 이 사건을 매듭지었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2일 대한야구협회는 신일고 야구팀과 한동화 감독에게 내렸던 징계 조치를 1개월만에 해제하였다. 대한야구협회는 ‘팀의 동향이 개전의 정이 짙고 다른 팀에 경고를 주었을 뿐 아니라 징계의 본질적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사료되어 해제한다.“고 해명하였다.
이 사건과 관련되어 본교 야구팀의 초대 부장으로 일해 왔던 송석영 교사가 물러나고, 이금산 교사가 임명되었다.
1977년 황금사자기대회에서 9회말 대역전극 연출
1976년 본교 야구부는 개교 10주년을 기념 선물로 모교에 황금사자기를 바침으로써 ‘영광 신일’을 대내외에 과시하였다.
1977년을 맞이한 본교 팀은 정신적인 부담 속에서 2연패의 고지를 향해 과감히 진출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투수 김정수의 연습 부족, 내야 수비의 불안 하위 타선의 부진 등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본교 야구부는 제31회 황금사자기쟁탈 전국 지구별 초청 고교 야구 대회에서 서전에 전국 대회 처음 출전한 대구고를 맞아 잘 짜여지지 않은 팀워크와 결정적인 실책으로 초반에 고정 3회까지 1:0으로 뒤졌으나 박종훈의 포볼과 박천수의 적시타 등으로 2점을 얻어 전세를 역전시킨 후 제 페이스를 되찾아 8회말 집중 4안타로 4:1로 힘겹게 승리하였다.
곧 이어 열린 충암과의 준준결승 경기는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감격의 일전이었다.
“딱!”
경쾌한 금속성 파열음이 성동원두를 울리는 순간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볼은 좌측 펜스를 거침없이 넘어갔다. 충암고 투수 기세봉의 제5구를 통타한 김남수의 굿바이 홈런이었다.
초반에 2점을 내 준 채 8회말까지 줄곧 밀리던 신일 라인은 담담하게 9회말 마지막 공격을 맞았다. 1사후 양승호가 무안타 기록을 깨더니 이어 박종훈의 회심의 중전 안타로 주자는 1·3루, 여기서 이날 대역전 드라마의 주인공이 金南洙가 힘껏 방망이를 휘둘러 댄 것이다. 그때까지 2:0으로 열세에 처해 다소 위축되어 있던 신일 응원석에서 홈런임이 확인되자 성동원두가 떠나갈 듯한 함성과 함께 모자, 책가방 등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서로서로 부둥켜안고 벅찬 감격을 나누는 학생들, 어느 학생은 두 손 모아 하늘을 향해 “오, 주여 감사합니다.”라고 외치며 눈물이 글썽하였다.
동문 응원석에서도 明桂男 응원 단장을 비롯하여 열광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 게임은 한국고교 야구사에 명승부전으로 기록될 것임에 틀림없을 만큼 극적인 대역전극이었다.
그러나 승리의 여신은 우리 팀에게만 계속 미소를 보낸 것은 아니었다. 전교생의 열렬한 응원 속에 인천고와의 준결승전에서 9회초 집중 5안타를 얻어맞고 2:3으로 역전패의 슬픔을 맛보았다. 줄기찬 ‘0의 행렬’은 8회말에 가서 깨어졌다. 김정수의 투런 홈런으로 대세를 결정지은 듯하여 신일 라인과 전교생이 승리의 기쁨에 도취된 것도 잠시 9회초 인천의 공격에서 김정수의 피칭 난조로 2루타를 포함한 5안타를 내 주어 귀중히 얻은 선취 2점을 무산시키고 만 것이다.
김정수 고교 야구 최다 홈런 기록
1977년 11월 7일 서울 운동장에서 베풀어진 서울시 추계 고교 야구 연맹전 제2일째 경기에서 梁承虎의 솔로, 김정수의 연타석 등 3개의 홈런 등 장단 14안타를 날린 본교가 동대문 상고에 7:4로 역전승, 2연승으로 단독 선두에 나섰다.
이로써 신일고는 나머지 한 게임인 성남고와의 대전에서 비기기만 해도 우승이 확정되는 유일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이날 3회말에 2점 호머(홈런)를 친 뒤 계속해 4회말 솔로 호머를 날려 신일고 승리에 결정적인 수훈을 세운 金貞洙 선수는 이날 2개의 홈런으로 한 시즌 통산 홈런 11개를 기록, 고교 야구에서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경신했다. 종전 기록은 75년 당시 광주 일고 소속이던 金允煥이 기록한 10개.
△ 김정수 프로필 … 고교 야구 한 시즌 홈런 최고 기록 보유자가 된 김정수는 타자보다는 투수로 한층 잘 알려진 선수. 청주 중학 때 대형 투수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아 신일고에서 스카우트, 1학년 때(76년)부터 에이스로 활약하면서 제30회 전국 지구별 초청 고교 야구 쟁패전(황금사자기)에서 신일고를 우승으로 이끈 주역이기도 하다.
신장 1미터 74센티, 체중 75킬로그램의 다부진 체격의 소유자인 김선수는 만 17세. 그는 올해 춘계 연맹전 때 2개의 홈런을 친 것을 시작으로 대통령배 쟁탈전 전국 고교 야구 대회에서 1개, 봉황기쟁탈 전국고교 야구대회에서 2개, 황금사자기쟁탈 전국고교 야구쟁패전에서 1개 그리고 이번 추계 리그전에서 한꺼번에 5개를 쳐 11개의 신기록을 수립한 것이다.
서울시 고교 야구 추계 연맹전 2연패
1977년 11월 9일 폐막된 77년도 서울시 고교 야구 추계 연맹전에서 본교 야구부는 9전 전승 중 5개 콜드게임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으로 우승, 1976년에 이어 2연패를 차지하였다. 이번 대회에서 본교 야구팀은 타력의 놀라운 신장(팀 타율 3할 4푼)과 안정된 투수 진을 갖추었다.
이 대회에서 최우수 선수상에 양승호, 최우수 투수상에 송영수, 최다 출루상 및 타격상에 김정수, 최다 안타상과 타점상에 김남수, 도루상에 조용현 등 개인상 부문 전 종목을 휩쓸고 김정수군은 고교 홈런 신기록(11개)을 수립하는 등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한 대회였다.
1978년
서울시 고교 야구 춘계 연맹전 우승
1978년 4월 2일 본교 야구팀은 5승 1무의 전적으로 무패를 기록하던 충암고를 열화 같은 타선을 작렬시키면서 4번 김정수의 3점 홈런 등 9안타와 9개의 포볼을 뺏어 내면서 11:1, 5회 콜드게임 승을 거두고 결승에 진출한 것이다. 한편 앞서 있었던 예선 리그에서 본교는 상문고를 11:1, 6회 콜드게임으로 물리치고, 명지고를 8:1, 8회 콜드게임으로 물리치고, 3승을 기록하고 있었던 성남고마저 10:0, 5회 콜드게임으로 물리쳤었다. 또 일몰로 연기되었던 경기고와의 경기에서도 8:2로 승리를 해서 예선 리그에서 유일한 전승 팀이 되었다.
제32회 황금사자기대회 우승으로 2년만에 다시 전국 제패
1978년 7월 18일. 오랜 장마 끝에 활짝 갠 이날 양교의 3천여 응원단이 열띤 제32회 황금사자기쟁탈 전국 지구별초청 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2년전 이 대회에서 우승했던 본교 야구팀은 공수의 핵 金貞洙가 발군의 호투로 서울고의 타선을 완전 봉쇄하며 초중반에 맹타를 터뜨려 6:0으로 완승, 78년도 시즌 전국 대회 첫 우승을 차지하였다.
초고교급 투수 김정수의 역량이 다시 한번 돋보인 일전이었다. 외곽으로 빠지는 낮고 높은 직구와 슬라이드는 가히 일품이었다. 비교적 야무지다고 평이 나 있는 서울고의 타선도 김정수의 슬라이드에 완전히 꺾여 범퇴, 중반인 5회까지 무안타로 눌렸다.
반면 본교 야구팀은 김정수가 5회까지 3타자를 연속 3진으로 잡는 등 6개의 안타를 날려 단연 타격의 활기를 보였다. 공수 파워에서 우열이 뚜렷했다. 2회말 2후 주자가 견제구에 걸려 찬스를 놓쳤던 본교는 3회말 선두 曺龍鉉이 좌전 안타를 때려 득점의 발판을 만들었다. 2번 타자가 정석대로 보내기 번트를 댔으나 3번 金京杓가 내야 땅볼로 아웃, 2사가 되어 찬스는 반으로 줄었다. 그러나 4번 투수 김정수가 초구를 강타, 빗맞은 타구는 투포수 사이에 떨어졌는데 포수가 잡아 1루에 잘못 던지는 바람에 내야 안타가 되었고 이 사이 조는 여유 있게 홈을 밟아 선제점을 올렸다.
본교 팀의 타선은 계속해서 다이너마이트 타선이 폭발하였다. 4회말 7번 盧承珍이 좌전안타로 나가고 8번 朴東圭는 포볼, 9번 姜昌一이 보내기 번트를 하여 1사 2·3루, 1번 조용현이 또 포볼을 골라 1사 만루가 되었다. 2번 梁承虎가 플라이로 잡혀 2사가 되었는데 3번 김경표가 볼카운트 21에서 제4구를 강타, 2타점 좌전적 시타를 만들어 2점을 추가했다.
서울은 6회초에 9번 타자가 첫 안타를 때렸으나 후속 타자의 안타성 타구가 본교 외야수의 좋은 수비에 걸려 모처럼의 기회를 놓쳤다. 신일은 6회말 좌전안타 하나와 金京杓의 2타점 적시 좌중월 2루타로 간단히 2점을 또 보태어 5:0으로 크게 리드, 대세를 결정했다.
신일은 8회말 양승호의 통렬한 우월 3루타에 실책까지 얻어 1점을 가산, 6:0으로 완봉승을 거두었다.
이날 게임에서 3번 김경표는 5타수 3안타(2점타 2개) 4타점을 올리는 좋은 타구를 보였다.
< 최종일 결승 스코어 >
서울고 0 0 0 0 0 0 0 0 0 0
신일고 0 0 1 2 0 2 0 1 × 6
이날 시상식에서 <신일고 영광의 트리오>는 김정수(우수투수상), 김남수(타점상, 타격상), 김경표(우수선수상)의 3김 선수가 차지하였다.
◇ 개인상
▲ 최우수 선수상 : 金京杓 (유격수)
▲ 최우수 투수상 : 金貞洙 (투수)
▲ 타점상 : 金男洙 (1루수) 4타점
▲ 타격상 : 金男洙 (1루수) 18타수 9안타 타율 0.500
▲ 수훈상 : 盧承珍 (포수)
▲ 지도상 : 韓東和 (감독)
▲ 공로상 : 金三悅 (교장)
본교 야구부 주축 서울시 고교선발팀 미국·캐나다에 원정, 개선
1978년 8월 17일 ~ 9월 6일 본교 야구부 주축의 서울시 고교 선발 팀은 미국·캐나다 등지를 방문 친선경기를 가져 미국 경기에서 10전 8승 1무 1패, 캐나다 경기에서 2승(1게임은 강우로 취소)을 거둬 총 전적 12전 10승 1무 1패의 좋은 기록을 세운 후 개선 귀국했다.
원정 경기 내용을 살펴본다면, 8월 19일, 20일 양일간에 걸쳐서 미국 스탠포드 선발 팀과 2차례의 경기를 벌여 6:2, 3:5 등 1승1패를 기록했는데 유일한 1패를 스탠포드에 당한 것은 서울 선발 팀이 공격에서 2루타를 치고 나갔을 때, 1루를 밟지 않았다는 괜한 시비로 아웃되는 등 많은 관용과 아량을 베푼 끝에 져 준 억울한 경기였다. 어디까지나 친선경기였으므로 빚어진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 45개팀 중에서 선발된 메리던 팀과는 22일부터 25일까지 4차례의 경기를 가져 6:2, 15:2, 7:0, 1:0 등 4전승을 거두었다. 23일 가진 메리던 팀과의 2차전에서는 양승호의 3루 홈런을 포함한 에러 1개, 안타 2개, 4구 3개 등을 묶어 대거 7점을 뽑아 내는 등 마음껏 타력을 과시했다.
26일에는 리메트로 선발 팀은 9:0으로 웨스트워위크 팀을 9:4로 이겼고 다음 날에는 워시스러 선발 팀과의 경기에서 팽팽한 접전 끝에 4:4의 무승부를 기록했다. 고별전으로 가진 호리닥 팀과의 경기에서는 11:0으로 대승을 거둬 미국에서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캐나다에서는 8월 31일 빅토리아 팀을 18:6으로 대파했고 9월 1일 바바이모 팀과의 대전에서는 1회에 강우가 내려 노게임이 선언됐고, 2일 밴쿠우버 팀을 11:3으로 이겨 2전 전승을 거두었다.
미국 고교 팀은 학교 단위로 팀이 구성되지 않고 클럽 팀으로 되어 있어 미국 고교 야구는 우리 나라와는 그 상황부터가 달랐다. 따라서 미국 선수들은 연습 시간도 짧았고 야구 기술도 우리 팀보다 훨씬 뒤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다만 현재는 단순한 힘의 야구로써 앞으로 강력한 팀이 될 것이라고 서울 선발 팀의 韓東和 감독이 내다보았다.
그러나 연이은 게임과 원정 경기에서 오는 피로에도 불구하고 보여준 우리 선수들의 투지와 훌륭한 플레이는 그곳 사람들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고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고 한다. 특히 서울 선발 팀의 끈질긴 내야 수비는 미국 사람들의 기를 꺾기에 충분했다고 평가를 받았다. 이번 원정 경기에서 본교 선수들은 투타의 주축을 이뤄 맹활약을 했는데 투수로는 김정수, 박흥식이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고 타격에 있어서는 최홍석, 김남수, 김정수, 김경표 등이 예리한 타봉을 휘둘러 고교 야구의 스타답게 미국·캐나다 고교팀의 마운드를 무력하게 만들어 버렸다.
서울시 고교 야구 추계 연맹전 3연패
1978년 11월 19일 막을 내린 서울시 고교 야구 추계 연맹전에서 본교 야구팀은 상문고팀을 8:1로 대파 대회 3년 연속 우승을 기록했다. 본교는 상문과의 결승전에서 송영수의 호투로 상문 타선을 단 2안타로 막아내고 박흥식, 김경표, 김운영 등이 11안타, 포볼 9개를 얻어 78년도에 유일하게 본교를 꺾은 바 있는 상문고에게 설욕했다.
이 대회에서 개인상 부문에서도 10개 부문을 휩쓸었으며, 춘계 연맹전의 우승에 이어 추계 연맹전도 석권하여 78년도 춘계, 추계 연맹전을 모두 우승으로 이끌었다.
시상식에서 최우수 선수상에 김경표, 최우수 투수상에 송영수, 도루상에 박흥식, 맹활약, 타격상 및 최다 안타상, 최다 출루상은 구천서가, 타점상은 김운영이 각각 받았다. 지도상에는 이금산 부장, 감독상에는 한동화 감독이 받았다.
1979년
서울시 고교야구 춘계연맹전 겸 대통령배 서울 예선대회 우승
1979년 3월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서울시 고교 야구 춘계 연맹전 겸 제 13회 대통령배 쟁탈 전국고교 야구대회 서울예선대회에서 본교 야구팀은 C조에 속해 성남고와 우신고를 각각 콜드 게임으로 누르고, 상문고를 3:0으로 제압한 후 본선 대회 우승팀인 선린상고 역시 2:1로 격파했으나, 동대문상고에게 5:1로 패하여 4승 1패를 기록, C조 수위로 준준결승에 올라 강호 서울고를 9:1 7회 콜드 게임으로 누르고 준결승에서 다크호스로 등장한 대광고와 접전 끝에 1:0으로 승리, 보성고과 결승에서 강력한 타격으로 보성 투수 진을 난타 6:3으로 대승해 이 대회의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본교 야구팀은 서울시 예선 우승 팀이라는 영예를 걸고 79년 4월 18일부터 4월 25일까지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제13회 대통령배쟁탈 고교야구대회에 출전했으나, 첫날 벌어진 공주고와의 경기에서 9:1, 7회 콜드 게임으로 참패함으로써 2년전 이 대회에서 공주고에게 당한 패배를 설욕치 못했다. 이날 게임에서 투수 송영수의 난조와 김경표, 김운영, 박흥식 등 장타선의 불발로 1회전 탈락이라는 오명과 함께 공주고에게 약한 징크스를 낳았다.
서울시 학도 체육대회 우승
본교 야구부는 1979년 11월 7일부터 서울 운동장에서 개막된 서울시 학도 체육대회에서 서울의 강호들을 모두 물리치고 우승, 서울에서만 4관왕(춘계 연맹전, 대통령배 예선, 전국체전 예선, 학도 체육대회 우승)의 명예를 누렸다.
본교 야구팀은 대회 첫 날 벌어진 명지고와의 대전에서 3:2로 승리하고 계속해서 서울의 강호인 선린, 배재를 5:2, 5:0으로 각각 격파하고, 결승에 올라 성남고를 5:0으로 완봉, 우승을 따내었다.
이어서 벌어진 서울시 추계 연맹전에서도 본교는 막강한 타격과 우세한 마운드로 강력한 우승 후보로 등장했으나 뜻밖의 복병 충암과 대광에게 각각 0:3, 5:6으로 무릎을 끓고 말아 대우 신전 10:0(5회 콜드 게임), 대 중앙전 2:1, 대 배명전 10:4로 승리를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충암, 중앙과 함께 3승 2패 동률을 기록, 추첨 결과 예선 리그 탈락이라는 크나큰 불운을 겪었다.
1980
부산 화랑대기 및 대구 대붕기
전국체전
This website is using a security service to protect itself from online attacks. The action you just performed triggered the security solution. There are several actions that could trigger this block including submitting a certain word or phrase, a SQL command or malformed data.
You can email the site owner to let them know you were blocked. Please include what you were doing when this page came up and the Cloudflare Ray ID found at the bottom of this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