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최고위과정

고2문학- 이생규장전

*** 李生窺墻傳(이생규장전) ***


*
갈래 : 한문 소설, 전기 소설, 애정 소설(남녀간의 사랑이 결연과 이별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는 소설, 조선 후기에 이러한 애정 소설이 대거 등장하면서 폭넓은 독자층 형성)

       屍愛(시애) 소설  - 주검과 사랑하는 이야기

       冥婚(명혼) 소설  - 저승의 귀신과 혼인하는 이야기

 

* 특징 :

  ① 한문 문체의 미사여구(美辭麗句) - 매우 아름다운 한문 문장이 구사되었다.

  ② 재자 가인(才子佳人)적 주인공 등장 - 주인공들이 뛰어난 재능과 감성을 지녔으면서도 현실에서 뜻을 펼치지 못하고 있다.

  ③ 초현실적 내용 - 일상적 경험의 세계를 넘어선 신비로운 상황 및 사건 요소가 많다. - 전기적 요소

  ④ 운문(삽입 시)을 이용한 정서 표현의 극대화

  ⑤ 설화에서 소설로 이어지는 발전 단계를 알게 해 준다. - 이 글이 소설인 이유는 운명에 저항하는 인간의 의지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어려운 여건을 뚫고 연애와  결혼을 성취하고, 죽음을 앞에서도 사랑은 더욱 빛났다.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배경 : 시간 - 고려 공민왕 때의 '홍건적의 난'

         공간 - 송도(개성)

         사상적 배경 - 김시습의 '금오신화'는 불교적 인생관을 바탕에 깔고 있다.

* 구성 : 세 차례의 '만남-이별'의 구조로 전개되고 있다.

* 주제 : 죽음을 초월한 남녀간의 사랑.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넘어선 간절한 소망과 사랑

* 출전 : 금오신화(金鰲新話)

 

** 단어

홍건적(紅巾賊) 중국 원나라 말기에 허베이(河北)에서 한산동(韓山童)을 두목으로 하여 일어났던 도둑의 무리.

행랑(行廊)[-] ①대문간에 붙어 있는 방

횡액(橫厄)[-/-]=횡래지액. 

횡래지액(橫來之厄) 뜻밖에 닥쳐오는 재액. [준말]횡액.

환신(幻身)불교허깨비같이 허망하고 덧없는 몸이라는 뜻으로, 사람의 몸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관련 단어

일장춘몽(一場春夢) 한바탕의 봄꿈처럼 헛된 영화(榮華)나 덧없는 일.

overlap [óuvərlæ̀p] n. 영화O.L. (오버랩, 한 장면과 다음 장면의 겹침)

 

*** 김시습에 대하여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

생육신 [生六臣]은 조선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탈취하자 세상에 뜻이 없어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여섯 사람이죠.

 

사육신의 대칭으로 생육신이라 하는데, 김시습(金時習)·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조려(趙旅)·성담수(成聘壽)·남효온(南孝溫)이다. 사육신이 절개로 생명을 바친 데 대하여 이들은 살아 있으면서 귀머거리나 소경인 체, 또는 방성통곡하거나 두문불출하며, 단종을 추모하였다.

 

김시습 : 본관 강릉(江陵). 자 열경(悅卿). 호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청한자(淸寒子)·벽산(碧山). 법호 설잠(雪岑). 시호 청간(淸簡).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서울 성균관 부근에 있던 사저(私邸)에서 출생하였으며, 신동·신재(神才)로 이름이 높았다.

 

3세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른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無雨雷聲何處動黃雲片片四方分)”라는 시를 읊었다 하며, 5세 때 이 소식을 들은 세종에게 불려가 총애를 받았다.

 

15세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에 몸을 의탁했으나, 3년이 채 못 되어 외숙모도 별세하여 다시 상경했을 때는 아버지도 중병을 앓고 있었다. 이러한 가정적 역경 속에서 훈련원 도정(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나 그의 앞길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이어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책을 태워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이라 하고 전국으로 방랑의 길을 떠났다. 북으로 안시향령(安市香嶺), 동으로 금강산과 오대산, 남으로 다도해(多島海)에 이르기까지 9년간을 방랑하면서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 등을 정리하여 그 후지(後志)를 썼다.

 

1463(세조 9)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유로 잠시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 일을 보았으나 1465(세조 11) 다시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입산하였다. 2년 후 효령대군의 청으로 잠깐 원각사(圓覺寺) 낙성회에 참가한 일이 있으나 누차 세조의 소명(召命)을 받고도 거절, 금오산실에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고, 《산거백영(山居百詠)(1468)을 썼다.

 

이곳에서 67년을 보낸 후 다시 상경하여 성동(城東)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거백영 후지》(1476)를 썼다. 1481(성종 12)에 환속(還俗),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1483년 다시 서울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나섰다가 충남 부여(扶餘)의 무량사(無量寺)에서 죽었다.

 

그는 끝까지 절개를 지켰고, 유·불(儒佛)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1782(정조 6) 이조판서에 추증, 영월(寧越)의 육신사(六臣祠)에 배향(配享)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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