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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6일- 산행(첨부화일로 인쇄하세요)

山 行

塗丁 權相浩

당나라 말기 豪放(호방) 淸新(청신)의 시인 두목(杜牧, 803~852)의 ‘산행(山行)’이 있다. 이 시는 최고의 단풍 시로 칭송 받고 있다.

 

遠上寒山石徑斜(원상한산석경사) 아득한 한산 비탈진 돌 길 오르니

白雲生處有人家(백운생처유인가) 흰 구름이 이는 곳에 인가가 있네.

停車坐愛楓林晩(정거좌애풍림만) 수레 멈추고 저녁 단풍 숲을 보니

霜葉紅於二月花(상엽홍어이월화) 서리에 물든 잎, 봄꽃보다 더 붉네.

 

그런데, 젊은 시절에 이 시를 접하면서 결구에 대한 의문이 사라지질 않았다. 상엽(霜葉), 곧 서리 맞은 단풍잎이 어쩌면 이월 화, 곧 봄꽃보다 아름다우랴. 그 의문은 나이 들면서 풀렸다. 결구에서 단풍이 봄꽃보다 더 붉다고 한 것은 노년이 청춘보다 더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단풍이 어느 이름 모를 바람에 느닷없이 핑그르르 떨어지듯이 그렇게 죽는 것이, 오복의 하나인 고종명(考終命)이다.

나이 들면 외적인 변화로서는 머리털의 색깔은 변하고, 머리카락의 숫자는 줄어들며, 눈은 원시안으로 바뀐다. 내적인 변화로는 보거나 들은 것을 오래 기억하는 힘이 줄어든다. 다시 말하자면 총명(聰明)함을 잃어 간다는 뜻이다. 썩 영리하고 재주가 있을 때, 총명하다고 한다. 이 말의 문자학적 의미를 살펴보면, 총(聰)은 귀가 밝다는 의미요, 명(明)은 눈이 밝다는 의미이다.

우리 조상들이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엮은 책인 사자소학<四字小學>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父母呼我(부모호아)어시든 唯而趨進(유이추진)하라. 부모님께서 나를 부르시거든 빨리 대답하고 달려 나가라. 효도의 첫째는 대답 잘 하는 일이다. 총명한 자신의 기준으로 볼 때 했던 소리 또 한다고 짜증내기 일쑤인데 늙으신 부모님의 입장에서 보면 기억에서 했던 말도 금새 사라졌으니 늘 처음처럼 하시는 말씀이다.

태어날 때에는 주먹을 쥐고 태어나는 것은 세상에 대한 욕심을 나타내지만 죽을 때 손바닥을 펴고 죽는 것은 다 돌려주고 떠난다는 의미이다. 죽음은 가장 큰 가르침이다. 돌아가시는 분은 '너희를 끝을 보았느냐?'라고 이심전심으로 깨우쳐 주고 눈을 감는다. 그렇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떠나가는 '空手來空手去'가 인생인 것이다.

그대, 비운 만큼 채울 수 있다. 執之兩個 放則宇宙(집지양개 방즉우주)이다. 엄밀히 말하면 두 손으로 잡아 보았자 두 개일 뿐이요, 놓으면 편안히 우주가 내 것으로 다가온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을 때, '불알 두 쪽만 달그락달그락한다.'는 말을 한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태어날 때에는 불알 두 쪽밖에 없었는데, 지금도 너무나 많이 넣고 걸치고 챙기고 있다. 더구나 불의의 방법으로 많은 물건을 차지하고 있다면, '불알 차인 중놈 달아나듯' 그곳에서 떠나야 한다.

  10여 년 전을 돌이켜 보면, 새천년이 온다고 온 세상이 떠들썩했다. 온통 화두는 숨 막히는 뉴밀레니엄이었다. 지구의 부가가치가 한껏 업그레이드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세상은 환경과 온난화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오리려 금융위기로 심리적 불안감만 가중될 뿐이었다. 80년대에 인터넷이 등장하고 공산주의가 물러났으며, 90년대에는 세계화를 화두로 보냈다. 우리는 너무 빨리 달려오다가 보니 귀중한 것 하나를 빠뜨리고 왔다. 마음이다. 온 길 돌아가서라도 마음을 챙기고 차분히 살아나가자. ‘저탄소 녹색성장’은 몰라도 ‘저고민 행복성장’은 필요하다.

  세상은 변화하는 관점에서 보면 변하지 않는 것이 없고, 변화하지 않는 관점에서 보면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시간과 공간은 늘 그렇게 있을 뿐인데, 우리의 생각이 변할 뿐이다. 2011년 남은 두 달 동안에는 지난 일을 들추어내어 걱정하지 말고, 미래의 일을 앞당겨서 걱정하지도 말자. 내 마음의 수면이 흔들릴 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비춰볼 수 없다. 호랑이처럼 당당하게 느린 박자로 삶의 터전을 지키며 기지개 켜는 정도로 운동하고, 배가 고파 먹이 사냥을 할 때에만 민첩하게 움직이자. 虎視牛步(호시우보)로 살아가자. 불의를 보면 토끼처럼 토끼자.

  아마 중학교 시절로 기억된다. 국어 교과서에서 읽은 나다니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이란 소설이 떠오른다. 주인공 어니스트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로부터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위인이 이 마을에 태어나리란 전설을 들으며 자란다. 어니스트는 커서 그런 사람을 만나보았으면 하는 소망을 가지고 진실하고 겸손하게 살아간다. 평생 재물만을 모은 인색한 개더 골드, 평생 전쟁터에서 살며 장엄함은 보이지만 온화함이 없는 장군 올드 블러드 앤 썬더, 정치적으로 성공했지만 교만하고 세 치의 혀만을 믿는 올드 스토니 피스, 큰 바위 얼굴을 닮았지만 실천이 없는 시인이 차례로 이 마을에 등장한다. 사람들은 특히 시인에게서 매력을 느끼지만, 그는 스스로 자기가 큰 바위 얼굴을 닮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이 네 사람에 대하여 어니스트는 결국 실망하고 만다.

  전설 속의 인물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실망하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어니스트가 평소대로 설교하고 있던 어느 날, 시인이 소리친다.

“어니스트다! 어니스트야. 보라, 그가 큰 바위 얼굴을 닮았다!”

마을 사람들이 기다려 온 큰 바위의 얼굴을 닮은 사람은 바로 그들과 함께 살아온 어니스트였던 것이다.

올 가을에는 듬직한 水佛山(수불산)을 자주 바라보자.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산을 닮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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