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처럼 내려오던 김생의 친필 6건 찾았다…260년 논쟁 무장사비와 이차돈순교비 등 포함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무장사비와 낭공대사비, 신행선사비의 서체 비교. 무장사비의 품격높은 서체가 신행선사비와, 그리고 집자자인 낭공대사비에 재현됐다.|박홍국 위덕대박물관장 제공

무장사비와 낭공대사비, 신행선사비의 서체 비교. 무장사비의 품격높은 서체가 신행선사비와, 그리고 집자자인 낭공대사비에 재현됐다.|박홍국 위덕대박물관장 제공

명성만 전해질 뿐 실물이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던 신라 명필 김생의 친필이 실제로는 6건이나 남아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1760년 무렵 경주부윤 홍양호가 발견한 이후 260년 가까이 글씨 주인공을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던 경주 무장사 비문과, 신라의 불교도입을 극적으로 웅변해준 경주 ‘이차돈 순교비’ 또한 김생의 작품이라는 주장이다. 또 이차돈 순교비의 건립연대 등으로 미뤄 김생의 탄생연대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서기 711년이 아닌 740~750년 사이일 가능성도 제기됐다.

■‘김생서 원화 3년’의 단서(김천 수도암비)

박홍국 위덕대 박물관장(65)은 1일 <신라사학보> 46집에 발표한 ‘김천 수도암 신라비의 조사와 김생 진적’ 논문에서 “지난 4~5월 발견해서 보고한 (경북) 김천 수도암비 뿐 아니라 같은 김천의 갈항사 석탑기, 경주 무장사아미타여래조상 사적비(이하 무장사비), 산청 단속사 신행선사비, 경주 이차돈 순교비, 창녕 탑금당 치성문기비 등 6건이 모두 김생의 진적”이라고 주장했다. 김생은 ‘왕희지의 재림’이자 ‘전설의 명필’로 이름을 날렸지만 친필은 1점도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왔다. 그나마 남아있는 ‘태자사 낭공대사탑비’와 ‘전유암산가서’(이하 산가서) 등은 김생의 글씨를 집자(集字·문헌에서 글씨를 모음)한 것으로 전해진다.

무장사비에 새겨진 유(有)자. 같은 비문에 같은 글자를 다르게 쓰는 것은 쓴 이의 높은 역량을 보여주고 집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웅변해준다.|박홍국 관장 제공

무장사비에 새겨진 유(有)자. 같은 비문에 같은 글자를 다르게 쓰는 것은 쓴 이의 높은 역량을 보여주고 집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웅변해준다.|박홍국 관장 제공

박홍국 관장은 “4~5월 김천 수도암에서 김생의 진적을 발견한 것이 이번 발표의 밑거름이 됐다”고 설명했다. 청암사의 부속암자인 수도암에 서있는 비석에서 ‘김생서(金生書·김생이 썼다)’, ‘원화 3년’ 등과 함께 200여자의 글씨를 확인한 것이다. 또 이 비문의 필체와 954년(고려 광종 5년) 김생 글씨 3000자를 집자(문헌에서 글자를 모음)해서 제작한 태자사 낭공대사탑비가 흡사했다. 당시 비문을 검토한 정현숙 박사(원광대 서예문화연구소 연구위원)는 특히 “비문의 대(大), 비(碑). 야(也), 자(者) 등의 글자는 획의 삐침 등 여러 면에서 낭공대사탑비의 글자와 닮았다”고 판단했다.

이차돈 순교비의 글자를 목판에 새긴 것을 탁본한 <원화첩>의 글씨와 김생글씨 3000여자를 집자해서 새긴 낭공대사비의 서체를 비교하면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김생의 글씨가 탁본과정을 거친 뒤에도 변형의 정도는 비슷했음을 알려준다. |박홍국 관장 제공

이차돈 순교비의 글자를 목판에 새긴 것을 탁본한 <원화첩>의 글씨와 김생글씨 3000여자를 집자해서 새긴 낭공대사비의 서체를 비교하면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김생의 글씨가 탁본과정을 거친 뒤에도 변형의 정도는 비슷했음을 알려준다. |박홍국 관장 제공

그러나 비문의 6행 중간에서 확인한 ‘원화 3년(元和三年)’이라는 연호가 걸렸다. ‘원화’는 당나라 헌종(재위 805~820)의 연호이니 ‘원화 3년’이라면 808년(애장왕 9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열전·김생전’은 “한미한 가문 출신인 김생은 711년(성덕왕 10년) 태어났고, 80이 넘을 때까지 붓을 잡았다”고 했다. 수도암비문이 김생의 작품이라면 김생이 97살 때 썼다는 얘기가 된다.

김천 수도암비와 김생 글씨의 집자비인 낭공대사비의 서체비교.  놀랍도록 흡사하다.|박홍국 관장 제공

김천 수도암비와 김생 글씨의 집자비인 낭공대사비의 서체비교. 놀랍도록 흡사하다.|박홍국 관장 제공

박홍국 관장은 이에 대해 “<삼국사기> 열전에 등장하는 69명의 인물 중 출생연대가 기록된 경우는 김생과 김유신(595~673) 등 2명 뿐”이라면서 ‘기록의 오류설’을 제기했다. 박관장은 “심지어 국왕인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의 경우도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같은 역사서에 탄생연도를 기록하지 않았다”면서 “‘한미한 집안출신이었다’는 김생의 출생연도가 기록된 게 오히려 이례적”이라고 주장했다. 박관장은 “따라서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김생 출생 연도의 근거로 삼은 원전이 정확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추정했다.

박관장은 “바로 이 오류일 가능성이 존재하는 <삼국사기>의 ‘김생 출생연도=711년’설 때문에 ‘서기 800년대 이후의 신라 금석문=김생’으로 비정하는 것 자체가 원천봉쇄됐다”고 주장했다. 박관장은 “수도암비에 분명히 새겨진 ‘원화 3년(808년)…김생 쓰다(金生書)’는 7단어가 바로 ‘수수께끼 인물인 김생’을 푸는 열쇠였다”고 말했다.

박관장은 이 수도암비문과 김생의 글씨 3000여자를 집자해서 새긴 낭공대사탑비 등을 토대로 김생 발자취를 더듬어갔다.

■260년 해묵은 논쟁 종식되나(경주 무장사비)

‘원화 3년 김생서’의 발견으로 선입견을 버리자 200년 논쟁의 중심에 선 경주 무장사비가 다시 보였다.

이 비석은 1760년(영조 36년) 경주부윤 홍양호(1724~1802)가 경주 암곡촌 무장사터에서 그 일부분을 찾아냈다. 홍양호는 이때 발견된 비석의 앞면만 탁본했는데, 이때의 탁본자료를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중국에 소개해 유명세를 탔다. 이어 1817년(순조 17년) 경주를 방문한 추사가 이 비석의 다른 부분을 찾아냈다. 추사는 이때의 감격을 무장사비의 옆면에 새겼는데, “무장사터를 답사해서 수풀 더미에서 부러진 편석 한덩이를 찾아 놀라고 기뻐해서 크게 부르짖었다”고 했다.

무장사비와 신생선사비의 팔(八자)자를 김생의 집자비인 낭공대사비의 팔(八)자와 비교했다.|박홍국 관장 제공

무장사비와 신생선사비의 팔(八자)자를 김생의 집자비인 낭공대사비의 팔(八)자와 비교했다.|박홍국 관장 제공

이 비문의 탁본을 본 추사의 스승이자 절친인 청나라 금석학자 옹방강(1733~1818)과 그의 아들인 옹수곤(1786~1815)은 ‘왕희지 집자비’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왕희지 집자비’설은 일제강점기에도 유력한 학설로 통용됐다. 일본학자 가쓰라기 스에지(葛城末治)도 “무장사비는 왕희지 집자비가 확실하다”고 단언했다. 비문의 첫번째 대목에 ‘대나마 김육진’이 등장하는 것으로 미루어 ‘김육진 작품’이라는 설과, 또 비문에 나오는 ‘황룡사’ 표현 때문에 ‘황룡사 소속 승려’라는 설까지 등장했다.

무장사비문의 서체가 왕희지와 흡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박홍국 관장은 “‘김생 711년 출생’이라는 선입견을 털고 무장사비문을 살펴보면 이 비문에서는 ‘집자’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무장사비’에 세 개의 유(有)자가 등장하는데 그 모양이 모두 다르다. 같은 글자를 다르게 쓰는 것은 글씨 주인의 높은 역량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사실 김생과 왕희지의 글씨는 예부터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흡사했다. 단적인 예로 사신을 이끌고 송나라를 방문한 고려 중기의 서예가인 홍관(?~1126)이 중국인들에게 김생의 작품을 보여주자 한결같이 “왕희지(306~365)의 글씨인데 무슨 소리냐. 거짓말 말라”고 했다는 내용이 <삼국사기> ‘열전·김생조’에 실려있다.

같은 듯 다른 왕희지의 글씨(왼쪽)와 김생 글씨. 힘, 절제, 자유분방함이 김생 글씨의 특징이다.|박홍국 관장 제공

같은 듯 다른 왕희지의 글씨(왼쪽)와 김생 글씨. 힘, 절제, 자유분방함이 김생 글씨의 특징이다.|박홍국 관장 제공

박홍국 관장은 “이 비석글씨의 여러 자는 김생의 글씨 3180자를 한자 한자 잡자해서 새긴 낭공대사비문(보물 제1877호)가 비슷하다”면서 “김생이 직접 쓴 무장사 글자를 낭공대사비에 재현한 것”이라고 단정했다. 박관장은 이어 “무장사비 글씨는 아무래도 집자와 탁본과정에서 최소 2~3차례 변형된 낭공대사비와 격이 다르다”고 밝혔다. 오죽하면 추사 김정희가 이 무장사 비문 옆에 ‘이 비석의 서품(書品)은 낭공대사비의 위에 두는 것이 마땅하다(此石書品當在白月碑上)’는 글을 새겼을까.

신행선사비와 이차돈 순교비와 김생 글씨의 집자비인 낭공대사비 서체 비교. 특히 신행선사비의 글자들이 낭공대사비애 집자된 것임을 알 수 있다.|박홍국 관장 제공

신행선사비와 이차돈 순교비와 김생 글씨의 집자비인 낭공대사비 서체 비교. 특히 신행선사비의 글자들이 낭공대사비애 집자된 것임을 알 수 있다.|박홍국 관장 제공

따지고보면 이 비석을 처음 발견한 홍양호도 “‘무장사에 김생의 글씨를 쓴 비석이 있다’는 경주 노인들의 증언을 듣고 무장사 답사에 나서 비석을 발견했다”(<이계집>)고 전한 바 있다. 또 추사 김정희는 “무장사비는…집자비가 아니”라고 술회한 바 있다.(<완당전집>)

그렇다면 ‘김육진’ 설과 ‘황룡사 (스님)’설은 어찌된 것일까. 비문에 ‘대나마’ 신분으로 등장하는 김육진은 809년(애장왕 10년) 대아찬 신분으로 당나라 사신으로 간 기록(<삼국사기>)이 있다. 그러나 변화무쌍과 유려함, 그리고 힘이 줄줄이 표출되는 이 절품의 글씨를 쓴 이가 왜 당나라에서 명성을 날리지 못했을까.

지난 5월 김천 수도암 비석에서 확인한 ‘원화 3년’과 ‘김생서’ 명문. 이 7자를 단서로 박홍국 관장은 김생의 진적을 찾아다녔다. |박홍국 관장 제공

지난 5월 김천 수도암 비석에서 확인한 ‘원화 3년’과 ‘김생서’ 명문. 이 7자를 단서로 박홍국 관장은 김생의 진적을 찾아다녔다. |박홍국 관장 제공

무장사비를 쓸 정도 였다면 당나라 사신으로 간 김육진의 명성은 하늘을 찔렀을 것이다. 그러나 한·중 양국의 어떤 문헌에도 명필 김육진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박홍국 관장은 “아마도 비문에 등장하는 김육진은 비문글의 지은이이고, 글씨는 김생이 썼을 것”이라고 단정한다.

‘황룡사 승려’설도 마찬가지다. 왕희지를 능가할 정도의 서품을 자랑한 ‘무장사비’를 남긴 사람의 이름이 ‘황룡사 승려’라 해도 놀랄 일은 아니라는게 박홍국 관장의 주장이다. 평생 호불불치(好佛不娶), 즉 부처를 신봉해서 결혼하지 않고 사찰을 돌며 살았던 김생이기에 승려를 자처했을 수도 있다. 예컨대 김생의 글씨를 판각한 서첩인 ‘전유암산가서’의 끝부분에도 ‘보덕사 김생서(報德寺金生書)’라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무장사비문의 주인공은 ‘황룡사 김생’일 수도 있다.

■입신의 경지에 오른 김생의 작품(산청 단속사 신행선사비)

그런 점에서 산청 단속사 신행선사비도 주목을 끈다. 이 비석은 신행선사 입적 후 36년만인 813년(헌덕왕 5년) 9월 세워졌는데 글자는 무려 1776 자였다. 비문을 지은 이는 김헌정이며, 글씨의 주인공은 ‘동계사문 영업’이다.

박홍국 관장은 ‘기(氣)’ 자의 예를 들면서 “서풍은 왕희지와 닮았지만 힘과 절제, 자유분방함 둥 모든 분야에서 왕희지를 뛰어넘는 수준”이라고 평한다. 글자의 크기와 곡직(曲直)의 변화무쌍함은 다른 서예가들이 흉내내지 못할 전인미답의 경지라는 것이다. 또 비문의 ‘본(本)’ 3글자를 보면 ‘대(大)’변 아래에 ‘십(十)’의 간격이 조금씩 다르다. 이를 보면 같은 필자가 같은 필의로 글씨를 쓰더라도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박관장은 또한 “신행선사비의 ‘무(無)’자를 보면 김생 필체의 변화무쌍함을 실감할 것”이라면서 “이 신행선사비와 낭공대사비를 비교하면 신행선사비의 몇글자를 집자해서 낭공대사비에 새겨넣은 흔적이 보인다”고 주장했다.

김생의 글씨를 나무에 판각한 것으로 알려진 ‘전유암산가서’에는 ‘보덕사 김생’이라는 서자(書者·글쓴 이)가 젹혀있다. 사찰에서 생애의 대부분을 살았던 김생이 법명을 갖고 있었을 가능성을 높인다. 박홍국 관장은 “김생의 진적이 확실한 산청 단속사 신행선사비에도 글쓴이가 ‘동계사문 영업’이라 했는데, 이 영업이 바로 김생”이라고 주장했다.|박홍국 관장 제공

김생의 글씨를 나무에 판각한 것으로 알려진 ‘전유암산가서’에는 ‘보덕사 김생’이라는 서자(書者·글쓴 이)가 젹혀있다. 사찰에서 생애의 대부분을 살았던 김생이 법명을 갖고 있었을 가능성을 높인다. 박홍국 관장은 “김생의 진적이 확실한 산청 단속사 신행선사비에도 글쓴이가 ‘동계사문 영업’이라 했는데, 이 영업이 바로 김생”이라고 주장했다.|박홍국 관장 제공

이 비문 덕분에 글씨의 주인공인 ‘영업(靈業)’은 김생·최치원(857~?)과 더불어 신라 명필 3인중에 1명으로 <해동명적>에도 올라 있다. 그러나 명필 ‘영업’의 생애는 미상으로 남아있다. 왜일까. 박홍국 관장은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은 간단하고도 명쾌하다”면서 “바로 ‘영업(靈業)이 곧 김생의 법명’이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신행선사비문의 품격은 김생의 제자나 임서자(臨書者·베껴쓰는 사람)가 흉내내어 쓸 수 있는 수준의 글씨가 아니라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창림사 비문탁본을 본 원나라 조맹부(1254~1322)가 “‘신라 승려 김생(金生)이 쓴 그 나라의 창림사비이며, 자획이 매우 법도가 있다’고 했다”(<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조’)는 기록이 있다.

박관장은 “탁본의 상태가 양호한 1776자의 신행선사비를 보면 이미 813년 무렵 입신의 경지에 오른 김생이 얼마나 다양한 글씨체를 선보이는 지를 알 수 있다”고 평가했다.

박홍국 관장은 김천 수도암에서 확인된 ‘원화3년(808년)김생서’라는 7글자를 단서로 6건의 김생 진적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박홍국 관장 제공

박홍국 관장은 김천 수도암에서 확인된 ‘원화3년(808년)김생서’라는 7글자를 단서로 6건의 김생 진적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박홍국 관장 제공

■김생의 탄생연도까지 추론할 수 있는 이차돈순교비

박홍국 관장은 또 경주 백률사에 있다가 1974년에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진 이차돈 순교비의 글씨 또한 김생의 진적이 맞다고 주장했다. 이 순교비의 건립연대는 817년 혹은 818년으로 기재됐다.

해서체 비문의 1면에는 이차돈이 처형된 순간 꽃비가 내리고 땅이 진동하는 모습이, 다른 5면에는 정간(井間·바둑판 모양의 칸)을 음각하고 그 안에 1글자씩 새겨놓았다. 그러나 지금은 비면의 표면이 뭉그러져 육안으로 쉽사리 판독할 수 있는 글자는 10여자에 불과하다.

이차돈 순교비의 명문은 상태가 지금보다는 훨씬 좋았을 때 글자를 목판에 새긴 것을 탁본한 <원화첩>이 있어 절반 정도의 내용을 알 수 있다. 박관장은 “그런데 이 비석의 글자들을 봐도 김생의 해서 글씨가 많이 쓰인 낭공대사비 집자에 사용되었음을 간단히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원화첩’의 위(爲) 유(遺) 중(中) 재(在) 여(如) 언(言) 등의 글자와 김생 글씨를 집자해서 만든 낭공대사비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박관장은 “무엇보다 <원화첩>에 실린 이차돈 순교비의 글씨는 낭공대사비의 글씨와 인쇄된 글자처럼 같아 보인다”고 전했다. 그리고 <원화첩> 9쪽의 시작부분 우측 상단에 ‘김생(金生)’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점도 심상치 않다.

이차돈 순교비 덕분에 김생의 탄생연도도 어느 정도 추론할 수 있다. 이차돈 순교비는 지금까지 적시된 김생 친필 비명 중에 가장 늦게 조성됐다. 따라서 친필 비명(817년 혹은 818년)과 80이 넘도록 붓을 잡았다는 <삼국사기> 기록 등을 감안한다면 대략 820년 무렵에 70~80세 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김생의 출생연도는 740~750년 사이로 추정된다.

■김생 해서체의 진면목(창녕 탑금당 치성문기비)

박관장은 또 경남 창녕읍내의 추정 인양사지에 있는 창녕 탑금당 치성문기비(보물 제227호) 역시 김생의 글씨가 맞다고 본다. 810년(헌덕왕 2년) 건립된 이 비석의 탁본을 보면 김생 집자비인 낭공대사비의 글자와 자형이 같은 ‘보(寶)’자, ‘종(鍾)’자가 있다. 그 외에도 김생 글씨 특유의 찌그러진 듯한 ‘오(五)’자, 그리고 ‘탑(塔)’자와 세로 획이 유난히 짧아서 납작한 모양의 ‘중(中)’자가 새겨져 있다. 박관장이 김생 친필비문으로 보는 이유다.

또 햇살이 옆에서 비칠 때 비교적 상태가 좋은 남면 최상부의 글씨를 보면 탁본과 다르게 힘있고 단정하면서도 구양순체와는 다른 글씨임을 알 수 있다. 박관장은 “이 비석이 김생 해서체의 진면목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다”고 밝혔다.

■가장 이른 시기의 김생 작품(김천 갈항사 석탑기)

김천 갈항사 석탑기도 마찬가지다. 명문에 ‘경신(敬信)’이라는 원성왕(재위 785~798)의 이름이 나온다. 조성시기가 원성왕 재위기임을 알 수 있다. 해서가 대부분이지만, ‘묘(妙)’ ‘적(寂)’ ‘법(法)’ ‘사(師)’ ‘경(敬)’ 자 등 행서도 포함되어 있다. 불과 54글자의 짧은 문장이므로 찬자와 서자(書者)의 이름은 보이지 않으며, 명문의 여백에 서자(書者)의 이름을 새길 곳도 없어 보인다.

박홍국 관장은 “이 갈항사 명문에 해서와 행서가 섞여있고, 서체가 낭공대사비와 닮았으며, 서품이 높다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면서 김생작이 틀림없다고 보았다. 박관장은 “이 명문은 북위풍의 해서처럼 ‘십(十)’과 ‘중(中)’자의 세로획이 유난히 짧은 김생 글씨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원성왕 재위시(785~798)에 새겨진 이 갈항사석탑기는 “경주 무장사비(801년)와 김천 수도암비(808년)와 산청 신행선사비(813년), 창녕 치성문기비(810년), 이차돈 순교비(817~818년)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쓰여진 김생의 진적”이라고 주장했다.

■<삼국사기>를 바꿔야 할 연구

박홍국 관장은 “954년(광종 5년) 낭공대사탑을 세울 때 앞서 인용한 무장사비와 신행선사비, 갈항사비, 치성문기비 등의 김생 글씨를 집자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박관장은 “<삼국사기> ‘열전·김생조’의 711년 출생설이 선입견이 되어 연구자들의 눈과 귀를 가렸다”고 덧붙였다. 박관장의 연구가 사실이라면 200년 이상 이어진 무장사비 논쟁과,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이차돈순교비 연구가 분수령을 맞을 것 같다.

특히 이번 연구결과가 학계의 인정을 받는다면 실물이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신라명필 김생의 진적이 6건이나 발굴된 셈이고, <삼국사기>의 오류까지 수정하는 셈이 된다.

서예연구가인 손환일 대전대 서화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박홍국 관장의 논문에 나오는 다른 비문은 김생의 것일 가능성이 없지만 신행선사비 정도는 한번쯤 김생과의 관련성을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손연구원은 ‘적(寂)’자의 경우 신생선사비(갓머리가 둥글고 자형이 갸름·왕희지 필법)와 낭공대사(갓머리 직선이고 자형이 정사각형·김생 필법)가 다르지만, 중(中)자의 경우 두 비석의 자형이 흡사하다는 것이다. 통통하고 정사각형 형태의 중(中)자로 보아 김생이 왕희지의 필법 그대로 신행선사비를 썼지만 중(中)자의 경우 자신의 필법대로 썼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서예연구가인 손환일 대전대 서화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박홍국 관장의 논문에 나오는 다른 비문은 김생의 것일 가능성이 없지만 신행선사비 정도는 한번쯤 김생과의 관련성을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손연구원은 ‘적(寂)’자의 경우 신생선사비(갓머리가 둥글고 자형이 갸름·왕희지 필법)와 낭공대사(갓머리 직선이고 자형이 정사각형·김생 필법)가 다르지만, 중(中)자의 경우 두 비석의 자형이 흡사하다는 것이다. 통통하고 정사각형 형태의 중(中)자로 보아 김생이 왕희지의 필법 그대로 신행선사비를 썼지만 중(中)자의 경우 자신의 필법대로 썼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근거가 부족하다. 그러나 신행선사비는 연구해봐야”

그러나 논문을 본 손환일 대전대서화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논문이 김생의 진적이라고 단정한 내용의 근거가 부족하다”면서 “김생 글씨의 집자비인 낭공대사비의 글씨와 인용된 대부분의 비문글씨는 다르다”고 밝혔다.

박홍국 관장의 언급대로 탁본과정에서 필획이 굵어질 수 있지만 ‘쓴 자’의 특징을 말해주는 글자의 기울기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손연구원은 “집자비가 아니라 승려 ‘영업’이 썼다는 신행선사비의 경우 김생과의 관련성을 깊이 있게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 근거는 “신행선사비에 등장하는 중(中)자가 낭공대사비에 등장하는 중(中)자와 짧고 통통한 모습에서 흡사하다”는 것이다. 정사각형 형태인 ‘중’자의 자형이 김생의 집자비인 낭공대사비에 등장하는 게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김생이 왕희지의 필법 그대로 신생선사비를 직접 썼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승려 영업’은 김생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손연구원은 “따라서 한번쯤 낭동대사비와 신행선사비, 그리고 4~5월에 찾았다는 김천 수도암비 등을 비교연구해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김생의 작품 여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질 것 같다.


Today`s HOT
UCLA 캠퍼스 쓰레기 치우는 인부들 호주 시드니 대학교 이-팔 맞불 시위 갱단 무법천지 아이티, 집 떠나는 주민들 폭우로 주민 대피령 내려진 텍사스주
불타는 해리포터 성 해리슨 튤립 축제
체감 50도, 필리핀 덮친 폭염 올림픽 앞둔 프랑스 노동절 시위
인도 카사라, 마른땅 위 우물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 노동자의 날 집회 경찰과 충돌한 이스탄불 노동절 집회 시위대 케냐 유명 사파리 관광지 폭우로 침수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