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새 정음 인류문자’를 연구하시는 김세환 선생은 ‘황색 인종인 이족(夷族)은 몽골 반점이 있는데 우리가 97%이고 중국민족이 86%, 일본민족이 81%이며 인디언이 62%라고 밝혔다. 오늘 일본 민족의 80% 이상이 우리 한민족의 DNA라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일본 민족의 혈통은 고대부터 지도급은 모두 한국에서 건너간 유민(流民)이었고 중국 역시 왕을 비롯한 고대 국가의 지도자급 수장(首長)은 우리 한민족에 의해 형성은 됐다는 게 사실이다. 고대 중국과 일본의 왕들은 우리 한민족 혈통이었고 그들이 양국을 지배했다.
그러나 일본 사가(史家)와 중국 사가는 한국역사를 거꾸로 ‘패배와 수치’의 역사로 날조했다. 한국사를 뒤집어 놓지 않으면 자기들 나라 중심의 역사를 쓸 수 없기 때문에, 되레 한국을 지배하고 예속시켰다는 거짓 주장을 자기네 역사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중국은 역사위작(歷史僞作)으로 고대사를 조작하고 더 큰 위작(僞作)을 계속 추진하고 있는 것이 바로 ‘동북공정(東北工程)’의 본질이다. 일본은 우리역사를 은폐하고 없애려고 조작, 왜곡했는데 호태왕릉비까지 변조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중일 두 나라는 고대부터 우리 고대사를 지우려고 혈안이 돼 있었던 나라들이다. 그러나 우리 역사는 엄연히 세계시원국(世界始原國)으로 외국학자에 의해서도 찬란하고 자랑스러운 역사로 재조명받고 있으며, 왜곡된 고대역사들도 낱낱이 밝혀지고 있다.
일본이 명치유신이후 왜곡 변조한 호태왕릉비 비문은 더러는 악의로 없어지고 더러는 회(灰)로 메워지고 다른 글자로 위각(僞刻)돼 문제점을 안고 있지만 고구려의 건국이념을 드러낸 부분은 대체로 그대로 남아 있다.
오늘은 중국과 일본의 역사 위작과 변조 왜곡의 단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호태왕릉비에 나타난 고구려 건국 이념은 ‘이도여치’
호태왕릉비는 고구려 건국이념을 ‘이도여치(以道輿治)’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같은 이념은 광개토태왕(재위 391~413)비에 새겨져 지금도 남아 있다. 정인보선생의 논문에 실려 있는데, 정인보, 유승국, 두 선생은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옛날 추모임금(東明王)의 터를 처음 만드실 제 북부여의 천제(天帝)아들로 태어나서… 하늘에 오르실 세(별세(別世)하심에) 세자 유류왕을 돌아보시고 이르사 바른길(도)로써 다스리게(이도여치(以道輿治) 하셨다.
대 주류왕(대무신왕)이 기업을 받들어 제17대손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호태왕에 이르러 18세에 재위에 오르사, 영락태왕(永樂太王)이라고 호 하셨다. 은택(恩澤)이 하늘에 사모치고 위의(威儀)가 사해를 덮어(포악한 왕들이 부정, 불의를)말끔히 쓸어 없애어 민중의 안정을 얻어 각각 자기의 업에 편히 종사하여,
나라가 부하고, 인민이 은성(殷盛)하고 오곡이 탐스럽게 여물더니, 하늘이 불쌍하게 알게 아니 하심인지 29세에 이 나라를 버리사 갑인년 9월29일 을유에 산릉(山陵)으로 옮겨가시니, 이에 비를 세우고 그 업적을 비에 새겨서 후세에 전한다...”는 내용이다.
위의 비문은 단군의 자손, 고구려 시조 동명 왕(東明王)이 부여의 왕자로서 고조선에서 부여와 고구려로 이어졌음을 밝히고, 영락태왕이라 호하여 독립자주 대국임을 과시하고, 모든 악을 제거하고 나라를 부강하게하고 인민으로 하여금 평안하고 이롭게 하여 홍익인간의 이념을 구현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태왕의 비를 추잡하게 변조한 일본의 치졸함은 유구무언의 경지다.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침략과 중국 동북지방 침략을 구체화하면서, 일본학자들은 역사 왜곡에 나서 1500년 전에 신라와 백제가 일본의 속국이었다고 명언한다.
있지도 않은 일본사 무이(無二)의 보전(寶典) 뿐만 아니라 동아상대사(東亞上代史)라는 보물을 통해 일본의 허수아비인 만주국을 국보로 지정해야 한다고 쓰고 만주침략 합리화에 이용했다.
한편 중국의 역사왜곡은 공자로 비롯되었지만 그도 한국을 동경했다.
공자는 중국을 위해 역사를 왜곡하는 우(愚)를 범하였다. 공자는 ‘춘추(春秋)’를 저술 할 때 ‘위중국휘치(爲中國諱恥)’라는 수법을 창안한 장본인이다. 즉 중국이 타민족에 패배한 사실을 삭제하고 도리어 승리라고 위조하는 일을 했다.
고대 중국 한족의 왕들은 거의가 동이족이었다. 배달국 시대에 치우천황과 73회의 싸움을 한 헌원(軒轅)도 동이족이 아닌 화하족(華夏族)의 왕이나 그 역시 우리 한민족이었다. 상고시대는 화하족(華夏族)의 왕은 없었다. 모두 한민족을 왕으로 모셨다.
동이족은 중국 본토에 선주(先住)하고 동이족인 우리 한민족이 중국에 공헌한 바는 매우 크다. 동아시아에 제일 먼저 ‘요하문명’을 비롯하여 여타문명을 일으키고 문화를 건설한 동이족은 하(夏), 은(殷), 주(周)이전 중국의 초기문화보다 앞선 문명을 지녔다.
공자는 ‘서경(書經)’;‘상서(尙書)‘에 “순임금은 중국에는 전에 없던 신명(神明)에 제천보본 하는 예식을 마련하였다”고 썼다. 맹자도“순임금은 동이족(조선사람)이라고 썼다.”
요(堯)임금도 동이족이며 그는 순(舜)과 같은 산동출신으로 둘이 한 동내사람이다. 중국은 당시 자기 힘으로 홍수를 다스리지 못하니 요임금은 자기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지 않고 딸을 둘씩이나 주며 치수에 능한 동이족 순을 데려다 왕위를 계승시켰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고대 중국과 문화도 우리가 주도했다는 점이다. 중국의 하(夏), 은(殷), 주(周) 이전에도 중국 한족의 문화보다 우리한민족의 문화권이 선재(先在)해서 우월한 동부 문화가 서부인 중국으로 진출했다.
그 후 공자가 은(殷), 주(周)의 문화를 집대성한 유교를 한인(韓人)이 받아들이면서 우리 선조가 만든 한자 등 여러 가지 문명이 중국에서 역수입됐다. 이 같이 양자(兩者)가 서로 영향을 받았지만 각각 그 독자적 전통을 형성해 왔다.
공맹(孔孟)이 인의(仁義)를 내세운 유교는 한국의 사상을 계승하고 공자역시 중국정사(中國正史)와 경전(經典)에 한국을 “군자국”이라 찬양했다.
그러나 유교사상에 맹종하는 사람들은 공맹(孔孟)이 말하는 인의(仁義)사상의 원천이 요순(堯舜)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도 동이 사람들이다. 한국이 공자의 이상(理想)인 군자(君子)의 나라이고(논어 자한편 외), 공자도 동이족으로 우리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러나 공자는 ‘춘추’를 쓰면서 “동이족은 선주(先住)도 주력도 아니다. 주(周)가 중심세력이다.”며 우리가 동방의 군자 나라임을 인정하면서도 그 활약했던 바를 감추어 역사를 중국 한족 위주로 세우고 동이를 배제하며 터무니없이 우리 역사를 왜곡했다.
그러나 당시 우리가 선진 기술과 활 등 무력에서도 앞서 있었음은 물론, 우리가 세계의 중심임을 잊지 않고 있어 중국의 주(周)나라를 중심으로 한 공자와 충돌한다. 원래 [중국(中國)]이라는 국호도 가락국이 먼저 쓴 것이다. (三國遺事, 卷二 伽羅國記).
‘춘추’ 필법의 공자는 중국은 세계 중심에 한족에 있다하고 우리까지 오랑캐라 하면서 “사실은 예맥(朝鮮族) 떼거리가 많아서 걱정이다”라고 했다. 3천 년 전의 예맥조선은 동주(東周)시대로부터 한무제(漢武帝)시대까지 천년동안 중국을 정벌, 정복, 지배했던 우리 한민족의 선조다.
공자가 중국을 위해 우리 역사를 왜곡한들 우리가 중국역사에 밀릴 나라가 아니다. 분명한 것은 고대 중국은 2천 년간 고시(楛矢), 석족(石鏃)을 진물(珍物)이라고 칭하면서 앞을 다투어 수입한 나라다. 당시 중국인들은 조선을 우러러봤다.
위와 같은 특수한 경제적 여건에서 우리 한민족은 특수한 문화사상을 창조했다. 다시 말해서 석기시대에 석기와 철기를 파괴하는 고시(楛矢), 석족(石鏃)을 발견한 한민족(韓民族)은 사방 원시민족을 정복하고 대국(大國)으로 등장했다.
당시 다른데 없는 인삼(人蔘)이 한국에서 생산된 것도 한민족이 천명(天命)을 받았다는 자존심을 북돋았고, 인류사상 최초로 대국으로 등장하는데 도움이 컸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자존심을 더한 우리 한민족은 천신(天神)의 피를 받았다는 ‘천민사상(天民思想)을 창조해 인류의 대표를 자처하며 황제(皇帝)의 문물제도(文物制度)도 창안, 그 어느 나라보다 앞선 선진국이 되었다.
이런 사실은 중국사(中國史)에 명기 되어 있다. 또한 한무제가 우리 한민족을 지배한 적이 없음도 중국역사에 명기돼 있다.(三國志, 論語), 그러나 공자의 ‘춘추’가 역사를 중국 중심으로 뒤집었다. 공자는 그 답지 않게 중국 역사의 개조(改造)자가 되고 있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신용하, ’고조선국가형성의 사회사‘.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홍윤기,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유우찬 ‘마두부활과 되마사상’.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조희승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南帝 ‘命理속의 哲學’. ’태백과 압록‘.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朴炳植 ‘日本語の悲劇’.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石井進外, ‘詳說日本史,‘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田邊昭三 ‘謎の女王卑彌呼-邪馬臺國とその時代’. 和歌森太郞) ‘大王から天皇へ’. 近江昌司 外 5人著 ‘ヤマト王權の成立’. 上井久義, ‘日本古代の親族と祭祀’. Georges Duby : L'HISTOIRE CONTINUE, 松村剛 譯 ‘歷史は續く’. 坂本泰良, ‘明治維新から現代へ’.외 다수서책을 참조, 본문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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