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동정

왕희지 난정서 평론

王羲之 <蘭亭集序> 평론

 

1. 文章名이다。東晉書法家 王羲之가 지은 것이다. 東晉 穆帝 永和九年(西元353) 三月三日,王羲之 謝安、孫綽(손작) 등 四十一人과 더불어 會稽山陰의 蘭亭에 모여, 眾人賦詩,羲之自為作序,以申其志。序中 記敘蘭亭景色之美,聚會之歡,抒好景不長,嘆生死無常.

줄여서 ‘蘭亭序’라고 하나, 원명은 난정집의 서문이므로 ‘蘭亭集序’이라 해야 정확하다. 또 다른 이름으로 《禊序》、《兰亭序》、《禊帖》、《临河序》、《兰亭宴集序》 등이 있다. ‘天下第一行书’로 칭하고, 晋代 书法 成就의 代表作이다.

A Historical Puzzle <Preface to the Poems Collected from the Orchid Pavilion>

*Pavilion: 큰 천막, 누각, 정자.

 

2. 왕희지(303~361, 一说321~379): 字逸少,王導之姪,晉臨沂(今屬山東)人,後南遷為會稽人。嘗為右軍將軍,世稱王右軍。善書法,所寫草隸,冠絕古今,以〈蘭亭集序〉、〈樂毅論〉等為最,後人稱為「書聖」。

중국 남북조시대 동진(東晉)의 서예가ㆍ문신. 동진 왕조 건설에 공적이 컸던 왕도(王導)의 조카로, 중국 고금(古今)의 첫째가는 서성(書聖)으로 존경받고 있음.

 

3. 353년(51세) 음력 3월 3일 작.

凡28行,342字,字有重者皆別体,就中之字最多。

王羲之與兒子王凝之、王徽之、王操之、王献之,孫統、李充、孫綽、謝安、支遁、太原王蘊、許詢、廣漢王彬之、高平郗曇、餘姚令谢胜等“少长群贤”共41人

明代书画家董其昌在<画禅室随笔>称:“右军《兰亭叙》,章法为古今第一,其字皆映带而生,或小或大,随手所如,皆入法则,所以为神品也。

 

4. 書法遒勁剛健,為絕世之作。唐太宗愛之,自王羲之七世孫僧智永之徒辯才處取得原稿,凡二十八行,三百四十二字,命趙模等摹刻真跡,分拓數本以送皇親近臣。太宗崩,高宗奉遺詔,將真本貯玉匣殉葬,自此「蘭亭帖」翻刻本甚多。傳世者有「開皇蘭亭」,書法樸拙遲重;「神龍蘭亭」,沉厚靜穆,鐫刻精湛;「定武蘭亭」,渾樸敦厚,為諸刻之冠。唐馮承素所摹,以點畫尚存隸書收筆停蓄之筆意,為最佳摹本。或稱為「禊帖」。

 

5. 48세 右軍將軍겸 會稽內史가 됨. 4년간 머묾. 東晉(317~419, 중국은 늘 황제의 나라였는데, 유일하게 이런 정치구도에서 벗어난 때가 바로 南北朝時代였다. 晋武帝 司馬炎이 魏나라를 폐하고 洛陽에 세운 晉나라(西晉)가 멸망하자, 귀족들은 지금의 난징에 東晉을 세웠다.) 당대 명사들의 시모음집인 난정서는 貴族文化, 南方文化를 잘 보여주는 글이다. 서예로 국보1호. 天下第一行書, 盡善盡美(完全無缺), 無價之寶 千古一帖. 서성 왕희지(왕족 출신의 귀족)의 서예이자 문학.  왕희지는 자신의 아들 7명을 포함한 당대의 명사 41명을 ‘난정’에 초청해 대규모 연회를 열고, 여기에서 쓴 시첩의 서문을 왕희지가 썼다. 한마디로 典雅한 필체의 극치. 26명이 쓴 37首의 시가 남아있다. 나머지 15명은 왕희지의 아들 포함하여 시를 남기지 못한 인사. 당시 왕헌지는 다만 10세. 15명은 벌주로 대신했을 듯. 

 

6. 淸談文學(이백, 春夜宴桃李園序도 비슷한 의경. 西晉의 石崇이 金谷園에서 음주문학인 修稽를 시작한 것으로 보임) 이때 老莊思想 대두(자연 위주). 佛敎思想 수용(미래지향적인 인간 중심). 儒敎思想 수용(현실적인 인간 중심).

 

7. 板本: 유명 필사본만 500여 종. 馮承素(풍승소)의 神龍本(向搨 shadow copy, 雙鉤 사용, 極細極細筆 사용, 唐太宗이 최고로 여김, 황궁에 머물게 함, 眞迹에 가장 가까움), 歐陽詢의 定武蘭亭序’, 虞世南의 ‘張金界奴本’, 褚遂良의 ‘臨本’ 등이 있다. 이 사본만은 千眞萬確. 唐太宗은 왕희지 글씨 모아 昭陵Zhao Mausoleum에 부장. 

 

8. 眞迹(眞蹟)이 아닐 가능성으로 眞僞 논란- ‘난정서는 왕희지의 저작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 하태형 전 현대경제연구원장은 <난정연회(蘭亭宴會)> 출간(한길사, 신국판 328쪽, 3만원). 그는 ‘난정서’의 진위 논란과 관련하여 추사 김정희의 ‘계첩고(稧帖攷)’까지 살핌. 당태종은 당대 유명 서예가를 시켜 난정서를 그대로 본뜨게 함. ‘난정서가 위작’이라는 중국학자 郭沫若의 논문. 추사 김정희의 논지도. 梁나라 武帝때의 황태자인 昭明太子(501~531)가 천하의 명문장을 모두 모아 펴낸 <文選>에 난정서가 실리지 않은 점, 연희 중에 쓴 난정서에는 도교의 인생무상을 이야기하는데 나중에 쓴 난정서에는 도교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 등을 그 근거로 제시. 

*王岳川 解密: 7개 一자: 一如千里陣雲(그의 스승 위부인), 天人合一, equate life and death. 

고친 자리 10곳은 韻字 때문 -

* 대련의 경우 couplets - 평평측측평평측

                         측측평평측측평

 

평성 level tone

측성 oblique tone

 

*疏密有度 安排有序- 그런데, 앞부분은 성글고, 뒷부분은 빽빽하다.

첫 3 줄(rows)은 넉넉. 나중은 restrain(다시 당기다, 억누르다).

 

9. 전반부는 ‘行楷’, 후반부는 ‘行草’로서 densely arranged(빽빽하게 정렬)- 이는 魏晉의 不衫不履(너절하다, 외관에 개의치 않다), 自自然然, 自然天成 철학의 발현.

 

10. 天下第一行書인 이유

- 왕희지가 다음날 sober up(술에서 깨다), 10여 폭을 써보았지만 원본만한 것이 나오지 않음.

aesthetic view point(미학적 관점)에서 보면 ‘中和之美’=中庸之美(The beauty of golden. Never go to extreme.) 偏激의 필획이 없다. extreme strokes(갑작스런 長劃)도 없다. dry brush(枯筆)도 없다. mild(溫潤). jade(玉)에 비유함은 어디에도 어두운 구석이 없기 때문(切磋琢磨 - 톱으로 자르고, 줄로 쓸고, 끌로 쪼고, 숫돌로 갈고닦음 - 玉에 비유. 詩經에서는 잘 생긴 남자를 뜻했으나, 大學의 시경 인용과, 論語의 孔子와 子貢의 대화에서는 切磋는 학문, 琢磨는 수양을 뜻함). 이것을 溫潤의 光澤이하 함.

 

11. 왕희지의 독특한 서법 용구

1. 蠶繭紙. compacted silkworm cocoons(빽빽하게 짠 누에고치)≒熟宣. 먹물이 번지지(洇yīn) 않음. vigorous(정력왕성한, 강력한) 종이. 명, 청대 이후 화선지는 먹물이 번짐. 

2. 鼠鬚筆. 특별한 붓. yellow weasel’s whisker(족제비 콧수염, 구레나룻) 오늘날은 羊毫 (goat’s hair), 狼毫笔(족제비털붓). 黄鼠狼(족제비).

결론: hard paper, hard brush.

*王羲之 이후 행서는 죽고, 顔魯公 이후 해서는 죽었다. surpass(능가하다, 초월하다)하는 사람 없음.

중국 서예는 기본적으로 漢代에 5체 완성. 행서의 정점은 왕희지. 만년에 쓴 十七帖은 행초서가 섞여있으나, 난정서만은 순수한 행서.

 

12. 蘭亭序 眞迹不知去向(行方): 说法견해 1:埋于昭陵, 2:埋于乾陵, 3:流落坊間

authentic work(眞迹)은 제3대 황제 唐高宗 李治가 substitute바꾸었다는 설이 있다. 그렇다면 武则天과 합장된 乾陵에 묻혀있을 수도. 또 다른 설로는 五代十國 때 溫韜의 도굴? 9세기 黃巢도 도굴 실패, 20세기 국민혁명군 孫連仲도 실패. illiterate(무식한, 문맹의) 坊间거리(市井) 또는 골목의 book market(책 시장)에 떠돌아다닐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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