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교실

서예의 흐름 - 한국 서예사, 중국 서예사

(1) 우리 나라 서예사


   우리 나라 서예의 흐름과 특징을 이해함으로써, 전통 문화에 대한 긍지를 높이고 주체 의식을 확고히 하며, 나아가 새로운 문화 창조에 이바지한다. 우리 나라 서예는 한자 문화권에서 발달해 온 예술 형태의 하나로서 중국의 영향이 크다. 그러나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이 서예 역시 지리, 풍토와 민족성에 의하여 그 예술적 경향은 달리 나타난다. 특히 우리 나라는 단일 민족으로서 민족 고유의 문자인 한글이 있기 때문에 민족 미술로서 한글 서예가 발달해 온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① 고구려의 글씨는 대륙적인 기상이 나타나서 장엄, 웅건하며 생동감이 넘치는 서풍을 띠고 있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광개토왕릉비(고예-웅혼,장엄), 모두루묘지명(해서-생동감), 중원 고구려비(예서와 해서의 중간 형태) 등이 있다.


  ② 백제의 글씨는 북위의 근엄,방정한 기품 속에 우아함과 유려함을 띤 서풍으로, 주요 작품으로는 무령왕릉 매지권(해서-우아,유려), 부여 사택지적당탑비(해서-근엄,방정) 등이 있다.


  ③ 신라의 글씨는 통일 이전에는 중국 육조 서풍의 영향으로 방정하고 소박하며, 삼국 통일 이후는 황희지의 행서와 구양 순의 해서 필법을 많이 따랐다. 주요 작품으로는 진흥왕 순수비(해서), 낭공대사비(해서,김생-왕희지 영향), 진감선사비(해서,최치원-구양 순체 영향) 등이 있다.


  ④ 고려 글씨는 신라의 서풍을 이어받아 해서는 구양 순의 필법을, 행서는 왕희지의 필법을 많이 따랐다. 후기에 와서는 원(元)과의 교류가 잦아짐에 따라 유려한 송설체(松雪體)가 크게 유행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진정대사비(해서,장단열-고아,창윤), 문수원중수기(행서,석탄연-안진경체), 문수사장경비(행서,이암-송설체) 등이 있다.


  ⑤ 조선의 글씨는 훈민정음 반포로 판본체가 성했으니 훈민정음과 동국정운은 전서를 닮아 원필이며,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 등은 예서의 필법이 있어 방필이다. 세조 이후에는 필사체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성종 때에는 기틀이 잡혔다. 조선 후기에는 궁중에서 내관과 상궁에게 우리 글씨를 전문적으로 쓰게 하였으니, 이로부터 궁체가 정립되어, 숙종 이후 계속 발전하여 정자, 흘림, 진흘림으로 발전하였다.


  조선의 한문 서체는 초기에는 송설체, 중기에는 송설체와 석봉체, 그리고 후기에는 추사체가 유행하였다. 대표적인 서예가로는 초기의 이용(안평대군-전아한 조맹부체), 김구, 성수침, 양사언, 중기의 한호(왕희지,안진경,조맹부체 종합), 허목(기이한 전서), 윤순, 이광사, 강세황, 후기의 신위(詩書畵 三絶,동기창체), 조광진(안진경체), 정약용(실학, 청아한 행서), 김정희(금석학, 우리 나라와 중국의 고법을 예술적으로 승화한 추사체 이룩), 권돈인(추사체), 이하응(흥선대원군,추사체) 등이 유명하며, 근세에는 김옥균(행서), 김성근(행서), 윤용규(해서), 민영익(기품 있고 웅건함), 오세창(전서) 등이 유명하다. 


   (2) 중국 서예사


   중국은 우리와 이웃한 나라로서 역사상 문화 전반에 걸쳐서 맥락을 같이해 왔다. 따라서 중국의 서예의 흐름을 앎은 우리 서예를 재인식함은 물론 새로운 창조를 위한 밑거름이 되리라 믿고 왕조별로 간단히 적어 본다.


   ① 은(殷, B.C.1120경)의 글씨는 거북의 등이나 짐승의 뼈에 새겨진 갑골문(甲骨文)이다.


  ② 주(周, B.C.1120-B.C.222)의 글씨는 청동기 문화의 발달로 종이나 솥에 주조된 종정문(鐘鼎文, 金文이라고도 함)과, 북 모양의 돌에 새겨진 석고문(石鼓文)이 있으며, 석고문은 고박하고 풍만한 필획으로 서체상 대전(大篆)이라 한다. 주요 작품으로는 산씨반, 모공정, 석고(石鼓) 등이 있다.


  ③ 진(秦, B.C.221-B.C.206) 시대에는 대전을 정리·통일하여 소전(小篆)을 만들었는데, 전서의 완성형으로, 전아, 장중, 원만하며 좌우 대칭적 결구가 특징이다. 주요 작품으로 태산각석, 낭야대각석 등이 있다.


  ④ 한(漢B.C.202-A.D.220) 시대는 예서(隸書)로 대변되는데 필의와 속도감이 붙은 방형이 특징이다. 전한· 후한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전한 때에는 전서가 실용에 불편하였으므로 점획이 생략되고 곡선이 직선으로 변한 소박한 고예(古隸)가 나타났고, 후한에 와서는 세련미와 파책의 미를 강조한 팔분예(八分隸)가 나왔다. 주요 작품으로는 예기비, 을영비, 사신비, 조전비, 장천비 등이 있다.


  ⑤ 위(魏), 오(吳), 촉(蜀)의 삼국 시대(A.D.220-A.D.280)에는 해서, 행서, 초서가 등장하여 글씨가 비로소 생활 서체로 이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⑥ 진(晉A.D.280-A.D.420) 시대에 와서는 이상적인 행·초서가 정리되어 온화하고 유려한 서풍이 나타났으니 난정서로 유명한 왕희지는 서성(書聖)의 칭호를 얻었고, 그 아들 왕헌지도 유명하다.


  ⑦ 남북조(南北朝) 시대(A.D.420-568)의 남조의 글씨는 왕희지의 영향으로 온화, 세련된 행서를 위주로 하고, 북조는 굳세고 질박한 필치의 해서를 위주로 하고 있다. 북조의 대표적 작품으로는 장맹룡비, 용문조상기 등이 있다.


  ⑧ 당(唐, A.D.618-A.D.907) 시대에 이르러는 서예의 전성기를 맞이하여 모든 서체가 완성되자 서체의 변천은 종식되고, 서풍의 변화만 있게 되었다. 엄정한 구양 순의 서풍과 웅혼·풍만한 안진경의 서풍이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구양 순의 구성궁예천명, 저수량의 안탑성교서, 안진경의 안근례비 등이 있다.


  ⑨ 송(宋, A.D.910-A.D.1279) 시대에는 행서와 초서가 주류를 이루고, 당의 엄격한 형식의 서법에서 벗어나 개성적 서풍이 일어났다. 주요 작가로는 채양, 소식, 황정견, 미불 등이 있다.


  ⑩ 원(元, A.D.1271-A.D.1368) 시대에 이르러는 고전의 존중과 개성적 서풍이 병행하였고, 송설체(松雪體)가 유행하였으며, 조맹부가 일가를 이루어 우리 나라에 까지 그 영향을 기쳤다.


  ⑪ 명(明, A.D.1368-A.D.1644) 시대에는 서법의 형식을 중시한 고전파와 창조적 변화를 중시한 개성파가 병행하였다. 고전파로는 축윤명, 문징명, 동기창 등이 있고, 개성파로는 장서도, 왕탁, 부산 등이 있다.


  ⑫ 청(淸A.D.1644-A.D.1912) 시대에 와서는 고증학의 영향으로 금석학이 발달하였고, 전서, 예서가 부흥되고, 전각이 융성하여 서예의 혁신을 가져 왔다. 고전 금석문 위주의 비파(碑派)와 법첩 중심의 첩파(帖派)로 나누어 지며, 등석여, 이병수, 오양지, 옹방강, 완 원, 하소기, 조지겸, 오창석, 제백석 등이 유명하다.


 


  ☞ 표구의 양식


  작품은 그 쓰임새와 형식에 따라 표구의 양식이 다르다.


◇ 현액(懸額) ; 대궐의 간판이나 집의 이름 등을 써 붙이는 것


◇ 족자(簇子) ; 세로로 길게 써서 축을 달아 두루말이로 만든 것


◇ 대련(對聯) ; 대구로 된 문구를 두 쪽에 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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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중후기의 한글 서예
http://blog.naver.com/attila2?Redirect=Log&logNo=40021161393

* 한글 서예의 변천
http://www.cnu.ac.kr/~spvirus/Mainframe.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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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예


1. 삼국시대의 서예

  

삼국시대의 서예를 살펴보면 먼저 고구려의 경우, 유물로는 전문(塼文) ·석각(石刻) ·묘지명(墓誌銘) 등이 있고 또 유명한 광개토경평왕호태왕비(廣開土境平王好太王碑)가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 부근, 즉 지린성[吉林省] 퉁거우[通溝]에 남아 있다. 이것은 높이 약 7m, 너비 약 2m나 되는 거대한 비석으로, 4면에 모두 문자가 새겨졌으며 고구려 영군(英君)의 훈적을 기록한 것으로 서체는 파세가 없는 고예(古隷)로서 특이하며 호탕 ·웅대하여 동양 서예사상 중요하다.


백제의 경우, 광복 후 부여에서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가 발견되었고, 1972년에는 공주의 무령왕릉(武寧王陵)에서 최고의 지석을 발견하였는데, 그 이전에는 불상명(佛像銘) 등 단편적인 것밖에 없었다.


신라의 경우, 통일 이전의 것으로는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창녕비(昌寧碑) ·황초령비(黃草嶺碑) ·마운령비(磨雲嶺碑) ·북한산비(北漢山碑)와 1982년에 발견된 충원비(忠原碑)가 있다. 모두 북조풍의 해서로 고졸(古拙) 청경(淸勁)하여 신라적인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한국의 서체는 그 당시 중국 서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통일신라시대의 서풍 가운데 해서는 주로 구양순법이, 행서는 왕희지법이 신라 ·고려 두 나라의 서예계를 풍미하였다. 따라서 통일 초기의 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 ·김인문묘비(金仁問墓碑)와 화엄사석경(華嚴寺石經) ·사천왕사비 등이 모두 구법으로 앞의 두 비는 쓴 사람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매우 뛰어난 글씨로 방정고아(方正高雅)하다. 그리고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은 흰 종이에 먹으로 쓴 사경(寫經)으로 한국 사경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김생(金生)은 각체를 모두 잘 썼다고 하며 고려 때 석단목(釋端目)이 집자(集字)한 낭공대사비(朗空大師碑)가 있지만 진적(眞蹟)이 없으므로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이 비만을 볼 때 왕희지의 아류(亞流)로서 과대평가되었다고 하겠다. 석영업(釋靈業)의 단속사신행선사비(斷俗寺神行禪師碑)도 왕희지풍으로 주경(藏寺碑)가 있다

2. 고려시대의 서예

고려시대에 남아있는 서예의 자료는 흔적비문 ·묘지명 ·사경 등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적다. 이 시대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보면, 전기는 거의 비석이고 후기는 비 ·묘지명 ·진적과 사경 등이 많다. 전기는 전대를 이어 해서(楷書)는 구양 순의 서풍이고 행서(行書)는 왕희지풍의 일색이며, 후기에는 특히 제25대 충렬왕 이후 조맹부의 서체가 들어와 크게 유행하여 조선 전기까지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이환추(李桓樞)의 광조사진철대사비(廣照寺眞澈大師碑)와 보리사대경대사탑비(菩提寺大鏡大師碑塔:보물 361 )는 구법(歐法)인데, 근직(謹直)한 필력으로 주경하면서 금석기(金石氣)가 넘쳐 흐른다.


장단열(張端說)의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鳳巖寺眞靜大師圓悟塔碑;보물 172)는 한국 서예사상 드물게 우세남(虞世南)의 서풍으로서 수윤(秀潤) ·근정(謹整)한 명품이며, 고려 비 중에서는 최상급이다. 채충순(蔡忠順)의 현화사비(玄化寺碑)는 골기가 통달하고 정채(精采)가 비등하다고 하나 과찬한 것으로 여겨진다. 김거웅(金巨雄)의 거돈사승묘선사비(居頓寺勝妙禪師碑)와 민상제(閔賞濟)의 칠장사혜소국사비(七長寺慧炤國師碑)는 모두 구체로서 당당한 것들이다.


안민후(安民厚)의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국보 59)는 구법이나 우(虞)에 가까운 것으로 근엄 ·정정하며 품격 높은 일품으로 일류에 속한다. 이원부(李元符)의 반야사원경왕사비(般若寺元景王師碑)는 《금석고(金石攷)》에 “신라 ·고려 양조에 있어서 금석의 서체는 대부분 구법으로 일관한 경향이 있는데, 홀로 원부의 우법(虞法)이 있음은 실로 새벽하늘의 샛별에 비할 수 있는 진귀하고 중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앞에서 언급했듯이 장단열도 있었으며 또 완전한 우법도 아니며 송나라 휘종의 수금체(瘦金體)처럼 자획(字劃)을 가늘고 길게 뽑는 독특한 필법이다. 유려하고 운필이 자재(自在)하며 청경(淸勁)한 점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서명(書名)이 매우 뛰어난 석탄연(釋坦然)은 처음으로 안법의 해서를 썼고 왕법(王法)의 행서를 겸했으며 문수원중수기 액제(額題)와 승가사중수비(僧伽寺重修碑)를 썼는데 명실이 상부하다. 오언후(吳彦侯)의 영통사대각국사비(靈通寺大覺國師碑)는 구법으로 근엄 ·주경하고 단아하여 당당한 명품이다.


그 밖에 석영근(釋英僅)은 구법의 해서를 잘 썼고, 석혜소(釋慧素)도 안법을 섞은 듯한 해서를 잘 썼다. 김효인(金孝印) ·김순(金恂) 등은 구법이고, 전양고(錢良古)와 이군후(李君候)는 왕법의 행서를 잘 썼으며, 전원발(全元發)의 법주사혜정국사비(法住寺慧淨國師碑)는 전아한 해서이다. 제26대 충선왕(忠宣王)은 양위한 후 연경(燕京)에 가서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당시 원(元)의 명사(名士)들과 교류하였으며 특히 조맹부와 친교가 두터워 그의 영향을 크게 받은 듯하다. 충선왕이 고려로 귀국할 때 문적과 서화를 많이 들여왔으므로 이에 따라 조맹부의 서체 즉, 송설체(松雪體)가 들어와 고려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 이후 고려는 물론 조선 초기의 서를 풍미하였으며, 이 시기는 송설체 일색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 중에서 행촌(杏村) 이암(李慶壽) 형제는 원(元)나라 사람으로 원 말에 고려에 귀화한 사람으로서 송설체를 썼다. 권주(權鑄)의 신륵사대장각장경비(神勒寺大藏閣藏經碑)는 아윤 ·청아한 것이다.


그리고 신라의 명필로 이름 높은 김생(金生)의 글씨를 석단목(釋端目)이 집자(集字)하여 세운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낭공대사비)가 있으며 이는 왕희지체의 행서이지만 서명 높은 왕희지의 서에 비하면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다. 또 왕희지 글씨를 집자한 인각사보각국사탑비(鱗角寺普覺國師塔碑)와 직지사대장각전비(直指寺大藏閣殿碑)가 있다.


3. 조선시대의 서예

  

조선시대 초엽의 서예는 고려 말의 경향이 그대로 계승되어 조맹부의 서체, 즉 송설체가 유행하였다. 송설체로 된 증도가(證道歌) ·천자문(千字文) ·적벽부(赤壁賦) 등이 왕부의 명령으로 간행되어 일반에게 전습(傳習)되었다. 1435년(세종 17)에는 승문원(承文院) ·사자관(寫字官)의 자법(字法)이 해정(楷整)하지 못하였다 하여 왕희지체로서 궤범(軌範)을 삼게 하였으므로 이로부터 양체가 안행(雁行)하였으나 주류는 역시 송설체였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은 중망(衆望)을 한몸에 모은 예원(藝苑)의 중심 인물이었고, 당시의 최고 화가인 안견(安堅)이 그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의 발문(跋文)은 30세라는 약년(若年)의 서(書)이나 호매(豪邁) 늠늠하고 품위 또한 높다. 따라서 당시 천하제일이라 하였다.


선조(宣祖) 이전에 서명(書名) 높은 사람으로는 강희안(姜希顔) ·김종직(金宗直) ·정난종(鄭蘭宗) ·소세양(蘇世讓) ·김구(金絿) ·성수침(成守琛) ·이황(李滉) ·양사언(楊士彦) ·성혼(成渾) 등이 있다. 대체로 조선 전기는 조맹부 ·왕희지 이외에도 명나라 문징명 ·축윤명의 서풍도 들어와 혼류(混流)되어 행하여졌다. 성종(成宗) 때의 권발(權撥)은 수윤(秀潤)한 행 ·초서의 대가로 초서는 조선시대를 통하여서도 가장 뛰어났다.


선조(宣祖) 때에 한호(韓濩)가 나온 후로는 조선시대의 서풍이 크게 변모하였다. 즉 한호는 한국 서예사상 매우 이름 높은 사람으로 진체(晉體:왕희지풍의 체)를 연수한 듯하며 적공(積功)하여 해 ·행 ·초서에 능하였으나 누기(陋氣) ·속기(俗氣)가 많았다.


그 후에는 삼대가(三大家)라 불리는 백하(白下) 윤순(尹淳) ·원교(圓喬) 이광사(李匡師) ·표암(豹庵) 강세황(姜世晃)이 있으며, 미불(米) ·백송(白松) 지창한(池昌翰) 등이 유명하며 이들의 필적은 오늘날에도 전해진다.


4.  한글 서예

  

서예는 한자를 대상으로 하여 시작되었다. 한국에는 한글이라는 고유문자가 15세기에 만들어졌으며, 당시로는 그것이 심미(審美)의 대상으로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서예라고 하면 먼저 한자를 생각하였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 오면서 한글 서예가 발달하고, 또 조선말엽에 궁체(宮體)라는 서체가 이루어지면서 한자와 함께 서예의 한 영역이 되었다. 궁체는 맑고 단아한 아름다움을 지닌다. 다만 여러 체로 다양하게 발달하여 폭넓은 예술성을 지닌 한자와는 성격적으로 다르다. 그러므로 한자 필법이 원용(援用)되기는 하나, 문자 구조상의 단순성으로 인해 발달에 한계가 있다. 최근 이러한 제약성을 탈피하기 위해 몇몇 서예가들이 한글 서예의 새로운 형태화를 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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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호
* 고구려 서예사 간계
지리적으로 북방에 위치하면서 한족과 북방민족과의 접촉을 통해 발전하고 쇠퇴하였다. 고구려의 문화는 강인하여 굳센 진취적 기상이 나타나고 있다.
① 광개토대왕비 : 높이 7m의 4면에 빈틈없이 글자가 꽉 차여 있으며 1800여자에 달한다. 서체는 예서체이고 가로획이 수평에 가까운 직선으로 파책은 인정되지 않았다. 고구려 특유의 정신이 잘 나타나고 있음.
② 모두루 묘지명 : 모두루란 사람의 묘지로 장수왕 때의 것이며, 묘지 벽 위에 쓴 해서체이며 육조풍을 느낌.
③ 고성각석 : 평양성 수축 때 성벽에 각한 27자임. 예법을 갖추고 있으나 육조의 예가 변하여 해로 이루는 것을 볼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