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교실

碑碣文을 통해 본 原三國時代의 新羅 書藝考

碑碣文을 통해 본 原三國時代의 新羅 書藝考

교사 權相浩(국어,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

Ⅰ. 들어가며

특정 시대의 時代精神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 당시의 文字 기록에 대한 이해가 앞서야 한다. 文字는 그 시대 사람들의 思想과 感情을 전달하는 道具이기 때문이다. 文字 중에서도 金石文은 時空을 초월하여 그 시대의 사상과 문화를 가장 정확하게 전해 준다는 데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金石文이라면 鐘鼎文과 같은 金文과, 碑碣文과 같은 石文을 함께 일컫는 말이다. 碑碣文이라면 흔히 볼 수 있는 네모 모양으로 만든 碑文과 자연석에 그대로 글자를 새긴 碣文을 동시에 지칭하며,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직접 이루어진 것이므로 가장 정확하고 진실한 역사적 자료가 된다.

그런데 統一 이전의 原三國時代 新羅 碑碣文은 오랜 풍상으로 마멸이 심하고 難澁한 故事가 많아 해석이 어렵다. 아무튼 이 당시의 書風을 논하기 위해서는 그 때에 만들어진 碑碣文에 대한 漢文學的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三國 중에서 그나마 新羅의 碑碣文이 가장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여기에 나타난 內容과 書風이 지리적 역사적 배경과 어떠한 상호 관련이 있는지 살펴보기에 용이하다고 판단된다.

書藝는 문자를 媒體로 표현하는 造形藝術이다. 표현된 문자 속에는 書體로서의 形式과, 그 속에 담긴 內容이 유기적으로 융합되어 이루어진다. 다시 말하면 書寫 內容에 따라 書體가 달라질 수 있다. 물론 書寫 내용이란 작가가 처한 객관 景物이나 상황에 좌우된다고 본다.

新羅는 신라대로 신라의 얼이 담긴 글씨를 썼을 것이고, 高句麗와 百濟는 그들 나름대로 그들의 넋이 어린 글씨를 썼을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다. 新羅는 신라만이 갖는 사회적․지리적․풍토적 차이로 인하여 신라만의 독특한 서예 문화를 낳았을 것이다. 신라는 결국 自國의 빛깔과 향기가 우러나는 新羅書風을 이룩했다고 본다.

흔히 三國을 鼎立하여 논하는 것이 상례이나, 여기서는 그 중 신라만의 書風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의 의의는 신라의 개성적 書藝 精神을 찾는 데에 있다. 신라인의 가슴에 흐르고 있는 美的 原型은 무엇일까. 이 글은 신라만이 갖는 서풍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신라인의 정서적 뿌리를 조금이나마 알아보자는 데에 있다.

원삼국시대 신라의 書藝資料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자료를 기준으로 연대를 추정해 보면 5세기 중엽에서 7세기 중엽까지 약 2백년 동안에 이루어진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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碑碣文 年代 性格 表現體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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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일냉수리비(迎日冷水里碑) 443, 503년? 財産相續碑 吏讀文體

2. 울진봉평비(蔚珍鳳坪碑) 524년 巡狩律令碑 吏讀文體

3. 영천청제비(永川菁堤碑) 536년 水利關係碑 俗漢文體

4. 단양적성비(丹陽赤城碑) 545~550년 巡狩管境碑 俗漢文體

5. 월성임신서기석(月城壬申誓記石) 552, 612년? 花郞盟誓碑 誓記體

6-1. 창녕진흥왕척경비(昌寧眞興王拓境碑) 561년 巡狩管境碑 正體

6-2. 북한산진흥왕순수비(北漢山眞興王巡狩碑) 568년 巡狩管境碑 正體

6-3. 황초령진흥왕순수비(黃草嶺眞興王巡狩碑) 568년 巡狩管境碑 正體

6-4. 마운령진흥왕순수비(磨雲嶺眞興王巡狩碑) 568년 巡狩管境碑 正體

7. 대구무술오작비(大邱戊戌塢作碑) 578년? 水利關係碑 俗漢文體

8.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591년 築城關係碑 吏讀文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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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原三國時代의 新羅 石文에 나타난 書風

1. 迎日冷水里碑(443, 503년?)

이 碑는 경북 迎日郡 神光面 冷水2里에서 발견되었으므로 迎日冷水里碑라 이름하며, 국보 264호이다. 현존 신라 最古의 것으로 추정되며, 앞면에 ‘至都盧葛文王’이라는 智證王(500~514년) 즉위 전의 호칭이 있고, 癸未라는 干支로 미루어 443년(訥祗王 27년) 또는 503년(智證王 4년)에 건립된 것이 분명하다.

오랜 세월 동안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다가 1989년 3월말 경 이곳에 사는 주민 李相雲이 자기 소유의 밭에서 발견하여 4월 11일에 당국에 신고함으로써 학술적인 조사 연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발견자에 의하면 이 비는 祖父代에 그 장소로 옮겨졌다고 하므로 정확한 원위치는 알 수 없는 실정이다. 1989년 9월 현재 영일군 신광면 面事務所에 보관되어 있다.

이 비는 사다리꼴 형태의 자연석에다 前面, 後面은 물론 上面에 까지 글자를 새긴 독특한 모양의 三面碑라고 할 수 있다. 제작 방법상 上面에다 刻字한 사실이 가장 주목할 만하다.

이 비에는 중국 문서에서 발견되는 신라의 옛 국명인 ‘斯羅’가 최초로 나오고, 또 최초로 임금[智證王]의 본명이 ‘智度路’라는 이름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喙部(훼부)․沙喙部(사훼부) 등 신라의 옛 지명과 阿干支․奈麻 등의 官等名이 나타나 신라 上代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 비의 내용은 節居利라는 인물의 財産所有와 사후의 財産相續 문제를 결정한 사실을 기록한 公文書的 성격을 지니고 있다. 至都盧葛文王에 의해 重臣會議가 주재된 것으로 되어 있는데, 학계에서는 이 중신 회의를 신라 최고회의였던 和白會議로 보고, 葛文王이 화백회의의 議長을 맡았다는 추론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 비문은 碑文은 吏讀 표기가 너무 많아 정확한 판독에는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이 비의 내용상 의의는 첫째, 현재까지 발견된 신라시대의 碑 중에서 연대가 가장 빠르다는 점, 둘째 節居利라는 인물의 재산 소유와 상속 문제를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어 이 시기의 경제 관계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점, 셋째 六部․갈문왕․사라․관등․촌주․도사 등 정치․제도사와 관련된 중요한 내용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 冷水里碑에서는 당시의 서울이었던 慶州 근처의 興海 지역의 節居利라는 지방민의 財産에 대한 보증을 하기 위해 신라의 왕이 두 번이나 회의를 한 모습이 기록되고 있다. 지방민의 재산 보증은 말이나 나무 등에 기록할 수도 있으나 영원히 남을 돌에 새겨서 지방민으로 하여금 신라 王室을 믿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고 쉽게 추정할 수가 있다. 국어학적 의의는 매우 커서 吏讀의 성립시기와 성립과정을 추정하게 하는 端緖를 제공하고 있다.

한편, 이 碑는 1988년 4월에 발견된 蔚珍鳳坪碑(524년)와 긴밀한 상보적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이 두 비는 5, 6세기 신라의 정치사․경제사․제도사 정리에 기본적인 자료가 된다.

沈載完은 이 비문에 대하여 ‘氣宇가 광활하고 筆勢가 유연하면서 대담한 선획으로 뻗어나가고 있다.’고 평하고 있어 비문을 쓴 사람의 정신적 氣槪를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나 迎日冷水里碑의 의의는 역시 멋대로 생긴 돌에다 눈비를 피할 수 없는 上面에도 글자를 새겨 놓았다는 점이다. 자연석에 가까운 碑面에는 자연스런 글씨가 어울린다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文字 조형의식과 한문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칼 가는 대로 당시의 신라 귀족 문자인 吏讀로 솔직하게 새겨 놓은 純粹性을 높이 사고 싶다. 이는 또한 신라인의 자연과의 調和意識이 남달랐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문체의 率直淡白함 외에 글자 배치상의 유연성에 있어서도 영일만 사람들의 높은 안목을 짐작케 한다. 本碑의 後面과 上面을 보면 글자를 새길 수 없는 곳은 피하고 刻을 하였으며 碑面의 종간, 횡간이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글씨의 크고 작음에 대중없이 새겨져 있음이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기의 碑刻 기술이 현대 우리의 想像을 초월할 만큼 고도의 능통한 기술로 새겼던 것으로 생각된다.

書寫 학습 소재로 金洋東은 ‘迎日冷水里碑는 신라 서체를 증언하는 훌륭한 금석 자료들로서 서예적 가치가 또한 매우 뛰어나며, 이 碑書를 臨書하면 독특한 신라서법과 拙朴한 書體美學을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고 언급하였다.

이 碑의 서체의 맥을 曺首鉉은 ‘글자는 結構나 間架가 고르지 않고 隸에서 楷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서체’로 보고 있다. 古拙한 楷書體로 쓰여졌으나 古隸의 맛이 상당히 남아있는 것은 사실이다.

貊族이나 고구려 유민이 따뜻한 동해안으로 내려와 이주하면서 익혀온 북방의 서체에 다소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고구려 廣開土好太王碑와 비교해 볼 때 劃의 泰細 차이는 있으나 結構상의 비슷한 점을 찾을 수 있다. 신라는 地理的으로 볼 때 서북쪽이 산맥으로 가로막혀 있어 遊移民 집단의 이주가 이웃 백제나 고구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활발하지 못하였으므로 외래 문화의 유입이 아무래도 늦었을 것이다. 다호리 붓의 발견으로 기원전 1세기경에 벌써 신라 땅에 붓이 들어왔다고 하나 진정 붓글씨용의 붓이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고, 結構나 間架도 고르지 않은 迎日冷水里碑로 미루어 볼 때 筆法이니, 書體니 하는 것은 인식하지 않고, 또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붓으로 밑글씨 없이 막바로 칼로 새겨나가지 않았나 생각된다. 오히려 거기에서 신라 書藝 특유의 野逸性과 質朴味를 찾을 수 있겠다.

 

2. 蔚珍鳳坪碑(524년)

이 비는 524년(法興王 11년)에 세워진 신라의 비석으로 1988년 1월 慶北 蔚珍郡 竹邊面 鳳坪2里의 논에서 客土 작업을 하던 중 발견되어, 4월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현재는 원래 발견된 지점에서 북서쪽으로 50m 옮겨 碑閣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국보 제242호이며 蔚珍鳳坪新羅碑 또는 그냥 鳳坪碑라고도 한다.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으므로 원래의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불규칙한 方形으로, 한 면에만 글자를 새겼으며, 이 면만 약간의 人工을 가하였다.

蔚珍鳳坪碑의 형태상 특징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거칠고 조잡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네 면이 거의 비슷한 폭을 가지고 있는 길쭉한 모양으로 高句麗의 廣開土好太王碑나 中原高句麗碑와 외형상 흡사하지만 비의 아랫부분이 한쪽으로 불쑥 튀어나와 있어서 비의 형태를 의도적으로 잘 다듬으려 노력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鳳坪碑보다 적어도 21년 이상 앞선 것으로 추정되는 迎日冷水里碑(443, 503년?)가 높이 67cm의 낮은 돌을 사용하고 돌의 윗면까지 글을 새기고 있는 것과 비교할 때 비교적 비의 격식을 갖추려고 노력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보다 뒤에 만들어진 자연판석인 永川菁堤碑나 거의 자연석에 가까운 굴곡을 지닌 丹陽赤城碑, 가분수형의 月城壬申誓記石 등에 비하면 비교적 빠른 시기에 어느 정도 碑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하겠다. 이렇게 볼 때 ‘이 蔚珍鳳坪碑의 형태는 전체적으로 5세기 이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中原高句麗碑의 형태를 많이 따르고 있어서 울진 지역이 신라가 진출하기 이전 고구려의 세력권내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碑文 자체는 대체로 양호하나 異體字를 많이 사용하고 또 일부는 磨滅되어 읽기 어려운 글자가 30여자에 달하며, 文體 또한 전형적인 한문이 아니라 新羅式의 독특한 한문, 곧 吏讀文을 사용한 까닭에 문장의 해석상 애매한 곳이 적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 파악은 상당히 어렵다.

그래서 논자에 따라 견해 차이를 심하게 보이는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짐작할 수 있다. 울진 지방이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뒤 이 비가 세워지기 얼마 전에 어떤 사건이 居伐牟羅와 男彌只 지역에서 발생하자 大軍(中央軍)을 동원해서 이를 해결한 뒤, 牟卽智寐錦王, 즉 당시 국왕인 法興王과 13인의 臣僚들이 모여 그에 대한 사후처리의 일환으로 이 지역에 대한 모종의 조처를 취하고, 소(斑牛)를 잡아 의식을 거행한 뒤 관련자에게 책임을 물어 杖六十․杖百 등의 형을 부과하고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방민에게 주지시킨다는 것이 기본 줄거리이다.

이 碑의 性格을 한마디로 규정짓기는 어렵다. 國王이 巡幸한 것으로 보고 이 점을 강조하여 巡狩碑로 보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律令에 관련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 것으로 보아 律令碑로 보려는 견해가 있는 등 한결같지가 않다. 이는 아직 碑文 전문에 대한 해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비의 書體에 대하여 金洋東은 백제 서예와 비교하여, ‘蔚珍鳳坪碑와 같은 시기인 백제 武寧王陵誌石(529년) 글씨는 南朝風의 서풍을 받아들인 流麗暢達하기 그지없는 명품인데 반해, 蔚珍鳳坪碑(524년)는 문자 습득기의 선머슴이 쓴 몽당연필과 같은 글씨 모습이다. 武寧王陵誌石 글씨가 비단옷이라면 봉평비는 갈옷이나 삼베옷과 같은 素朴한 글씨이다.’라고 하면서 백제의 비와 비교하여 蔚珍鳳坪碑의 野逸性에 관심을 두고 검토하고 있다.

尹賢洙는 평하기를 ‘木碑書에서 篆書의 자형과 기법이 접목되고 好太王碑書에서 보이는 과도기 예서의 형태와 筆意, 六朝楷書의 골격과 필세, 木簡에서 보이는 리듬과 변화, 章草의 자연적인 起筆과 收筆 등 변화다양함을 느낄 수 있다. 다만 轉折의 방법은 隸書의 필의를 구사하고 있어 好太王碑書와 닮았고 글자의 배자와 구성에서는 六朝의 形態와 通하는 점이 있다.’고 평하면서 결국 五體가 혼합된 轉換期 楷書體로 보았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고구려 廣開土好太王碑의 영향을 받았다든지, 中國 南北朝의 서체를 모방 내지는 배워 왔을 것이라는 이른바 追從說을 전면 거부하고, 그 이유로 ‘첫째, 삼국이 대립하고 있을 때 개성을 가지고 교류했으며 둘째, 東夷와 濊貊의 1, 2차 민족의 대이동으로 인한 文字文化 이동, 셋째, 新羅 서체가 南北朝 서체와 닮은 까닭은 상고시대 北方民族이 갈라져 이동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任世權은 ‘蔚山 川前里의 을사제명보다 1년 앞서는 것으로 비슷한 서체를 보여주는데 역시 北朝의 隸書風을 많이 가지고 있는 해서이다. 이는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긴 하지만 왕이 직접 이 지역까지 와서 법을 집행한 사실을 기록한 비이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중앙에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에서 제작된 비석이라 보아야 할 것’이라 하며 隸書風의 楷書로 경향간의 문화 수준에 관심하여 살피고 있다.

이 蔚珍鳳坪碑의 書體는 北朝風의 楷書를 근간으로, 字劃의 형태에는 부담없이 쓴 글씨로 앞의 迎日冷水里碑와 마찬가지로 筆劃의 굵기가 고른 점은 篆氣가 있는 것이요, 개개의 字形을 중심으로 보면 隸氣의 흔적이 다분히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서법이 정리되지 않은 早産의 楷書로서 不定形의 美的構造를 가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비유하자면 魚物廛에서 물고기를 보고 집에 와서 그리는데, 고등어와 꽁치를 잘 구분하여 그리지는 못하고, 또 꼭 구분하여 그리겠다는 특별한 意志도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그렸지만, 오히려 造形美가 넘치는 어떤 추상 물고기가 그려진 것과 마찬가지라 하겠다.

소박한 洗練味는 없으나 투박한 野性美는 넘친다. 大巧若拙의 風格을 지닌 글씨라 하겠다.

 

3. 永川菁堤碑(536년)

이 비는 慶北 永川市 道南洞 山7의 1番地에 있는 신라시대 農業水利關係碑로 보물 제517호이다. 곧 영천 청못[菁池]의 築造와 重修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두 개의 비이다.

1968년 한국일보사 주관 新羅三山學術調査團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 비는 흔히 ‘菁堤碑’라고 부르는데, 비의 양면에는 각기 시대가 다른 비문이 새겨져 있다. 丙辰年(536년, 法興王 23년)의 銘文이 있는 것은 청못을 처음 축조할 때 새긴 것이고, 반대 면의 貞元十四年(798년, 元聖王 14년)의 명문이 들어 있는 것은 청못을 새로 수리하였을 때에 刻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청못은 자그마치 15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 永川菁堤碑 바로 옆에는 1688년(肅宗 14년)에 세워진 ‘菁堤重立碑’가 있다. 丙辰年銘 碑文과 貞元十四年銘 碑文이 있는 비석은 花崗巖 自然板石의 양면을 가공한 직사각형 비석으로 蓋石과 基壇石은 처음부터 없었던 듯하다.

 

(1) ‘丙辰年’으로 시작되는 碑文은 築造碑文로서 全文 10행, 各行 9~12글자, 字徑 4~5cm, 전문 약 105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판독할 없는 글자가 31자 달하고 있어 명확한 해석이 어렵다.

文體는 吏讀를 넣은 俗漢文體이다. 여기서 ‘俗漢文體라 함은 文脈을 보다 分明하게 하기 위하여 正體 사이사이에 誓記式 또는 吏讀式 문장 表記體系가 삽입되어 있는 混用體를 말한다. 이 俗漢文體는 漢文 수용의 초기적 양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특히 統三 이전 신라의 石文에 다수 나타나고 있다.’

이 비문의 내용은 비를 세운 연월일, 공사의 명칭, 공사의 규모, 동원된 인원수, 청못의 면적, 청못으로 인해 혜택을 입을 수 있는 농지 면적, 공사를 담당한 인물의 이름 등이다. 이 비문이 쓰여진 연대는 丙辰이라는 干支로 보아 536년(法興王 23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2) ‘貞元十四年’으로 시작되는 碑文은 重修碑文으로서 全文 12행, 各行 4~2글자, 字徑 4~6cm의 전문 130자가 새겨져 있다.

이 비문의 내용은 청못의 수리가 완료된 연월일, 비문의 표제, 수리하게 된 경위, 수리한 둑의 규모, 수리기간, 공사에 동원된 인원수, 관계한 담당관 이름 등으로 되어 있다. 비문이 쓰여진 연대는 貞元十四年이라는 절대 연대로 보아 798년(元聖王 14년)임을 알 수 있다.

 

永川菁堤碑는 앞의 築造碑銘을 통하여 水利施設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고, 나중의 重修碑文을 통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중앙집권체제와 지방 호족과의 관계 등 신라 사회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6세기 전반에 벌써 벼농사를 귀하게 여기고, 또 자연 災害를 극복하고자 하는 집단적 노력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청못과 청제비를 아끼는 사람들의 마음을 重立碑를 통하여 헤아릴 수 있으며, 따라서 오늘날까지 우리들은 永川菁堤碑라는 귀중한 금석문을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金膺顯은 ‘서법으로는 後碑가 특히 嬰體楷와도 같고 石門銘에 흡사한 걸작이고 또 磨崖刻의 대표적인 비’라고 평하였다.

金洋東은 앞의 두 비를 함께 신라 고비의 범주에 넣고, ‘서체를 의식하지 않고 단순히 기록하기 위해 鄕民의 손에 의한 地方書이기 때문에, 세련미는 없어도 土俗的인 文字 조형으로 획의 표현이 質朴하다. 醇朴하고 그윽한 신라인의 모습을 읽을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는 그런 서예 세계’라고 보고 있다.

曺首鉉은 戊辰銘에서는 필치가 불규칙하고 자형도 일정하지 않아 같을 글자라도 글자마다 형태가 달라 정확한 자를 알아보기 어려운데, 7년 뒤에 세워진 昌寧碑는 자형도 비교적 품위를 갖추고 있음을 들어, 이 당시 신라는 급속도로 문화가 진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글자를 새기면서 옆줄은 고사하고 밑줄마저 전혀 고려치 않고 부지깽이로 마당에 낙서하듯이 부담 없이 써 내려간 永川菁堤碑 刻字의 모습에서 신라 民草들의 건강한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여 자연스런 획을 구사하여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먼 훗날, 民意를 합하여 국론이 통일되고, 나아가 삼국통일의 礎石이라도 만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樵夫의 지게목발 장단에 汲婦가 물동이 두들기는 소리처럼 촌티가 흐르는 소박한 글씨이다. 굳이 古拙한 六朝楷書體 형태라면 衒學的 표현이 되고 말아 맛이 떨어진다.

 

4. 丹陽赤城碑(545~550년)

이 비는 忠北 丹陽郡 丹陽邑 下坊里에 있는 545(眞興王 6년)~550년(眞興王 11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시대의 古碑로 國寶 198호이다.

1978년 1월 6일 단양읍 하방리 뒷산인 성재산 赤城內에서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하여 발견, 조사되었고 그리하여 丹陽赤城碑로 이름 붙여졌다. 花崗巖 自然石의 곱고 판판한 면을 이용하여 비문을 새겼는데 얕게 음각하였으나 오랫동안 땅 속에 묻혀 있었으므로 비면이 깨끗하여 字劃이 생생하다. 전체의 명문은 도합 430자로 추산되는데 지금 남아 있는 글자는 284자로 거의 판독이 가능한 상태이다.

이 비의 字體는 隸書風이 있는 楷書로서 서예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중국 南北朝(439~589년) 초기의 것과 유사하며, 굴곡을 지닌 율동적인 글씨로 隸書에서 楷書로 옮겨가는 과정의 餘韻이 그대로 나타난다. 생생한 劃質에서 붓을 움직인 선율의 산뜻한 감각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文體에 있어서는 新羅古碑 중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문장이다. 吏讀式도 아니며 그렇다고 漢文體로도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삼국시대 新羅碑로는 가장 긴 글이다.

丹陽赤城碑文의 내용은 缺落된 銘文이 많아 비문의 완전한 해독은 더 많은 연구를 필요로 한다. 대체적인 윤곽은 진흥왕이 이사부 등 10인의 고관에게 하교하여, 신라의 拓境事業을 돕고 목숨까지 바쳐 충성을 다한 적성인 也尒次(야이차)의 공훈을 표창하고, 장차 야이차와 같이 신라에 충성을 바치는 사람에게는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국가정책이 포고인 것 같다. 곧, 새로 개척한 지방의 有功者의 功績을 새기고, 동시에 장차 신라에 忠誠을 바치는 사람에게는 褒賞을 하겠다고 선언한 점에서 巡狩碑의 선구적 형태로 拓境碑의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건립 연대는 비문 첫머리 연대부분의 4자가 缺落되었으므로 절대연대는 알 수 없고 다만 추정 연대뿐인데, 이 추정에는 당시 赤城 지방을 중심한 역사적 상황과 비문에 보이는 인물들을 분석해 보면, 丹陽赤城碑 건립연대는 545년(眞興王6년)에서 550년(眞興王 11년) 사이로 추정된다.

丹陽赤城碑는 신라가 죽령을 넘어 북쪽의 고구려세력을 축출하고 첫발을 디딘 요충지에 세웠다는 점에서 또한 의의가 있다. 北方經略에 있어 죽령 너머 최초의 기지인 적성에 유공자의 공훈을 새기고 충성을 다하는 자에게 포상을 약속한 拓境碑를 새운 것은 새 영토에 대한 신라의 국가시책의 천명인 것으로, 뒤에 세워진 巡狩碑 정신의 최초 표현인 것이다. 따라서, 적성비는 비록 국왕의 직접적인 巡幸碑는 아니나 拓境碑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巡狩管境碑의 선구적 형태라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

金世豪는 ‘백제 武零王陵買地券의 글씨가 완전히 위진남북조시대의 글씨를 따르고 있지만, 赤城碑는 隸書의 조형의식을 갖고 있어 예서에서 위진남북조시대 楷書로 넘어가는 過渡期에 있다’고 하였으니, 곧 隸楷의 과도기에 해당하는 금석문으로 보고 있다.

이 글씨의 특징은 약간 옆으로 퍼져 있어 진흥왕 때에 세운 다른 비문의 正方形體와는 다른 취향을 보이고 있다. 중국 北朝의 비가 대체로 方筆을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圓筆을 사용하여 南朝의 영향을 받았음을 곧 알 수 있다. 가로와 세로의 간격을 맞추어 썼는데도 글자의 크기가 일정하지 않고 自由奔放한 맛을 풍기는 것도 더욱 높은 품격을 보여주어 書藝史上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특히, 비문에 보이는 많은 異體字들은 그대로 중국 남북조 초기에 이루어진 碑碣들의 글자와 일치하여 그 시대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文體가 아직도 완전한 한문 문장을 구사하지 못하고 俗漢文體에 머물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서체에 있어서도 외국의 영향력보다 자생적 뿌리가 더 강하다고 보는 쪽이 타당하리라 본다. 왜냐하면 원삼국시대의 新羅書에서 이전 隸書의 흔적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예서에서 해서로의 과도기 형태라고 보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5. 月城壬申誓記石(552, 612년?)

이 비는 儒敎經典을 습득하고 실행할 것을 盟誓한 것을 새긴 신라 때의 비석이다. 비석의 첫머리에 ‘壬申’이라는 干支가 새겨져 있고, 또한 그 내용 중에 忠誠을 서약하는 글귀가 자주 보이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34년 5월 慶北 月城郡 見(현)谷面 金(금)丈里 石丈寺터 부근 언덕에서 발견되어 현재 國立慶州博物館에 보관되어 있다.

글자는 모두 알아 볼 수 있으며, 순수한 한문식 문장이 아니고 우리말식의 漢文體이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壬申年六月十六日二人幷誓記天前誓今自

三年以後忠道執持過失无誓若此事失

天大罪得誓若國不安大亂世可容

行誓之又別辛未年七月卄二日大誓

詩尙書禮傳倫得誓三年

 

󰡒壬申年 6월 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여 기록한다. 하느님 앞에 맹세한다. 지금으로부터 3년 이후에 忠道를 執持하고 과실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이 일(맹세)을 어기면 하느님께 큰 죄를 지는 것이라고 맹세한다. 만약, 나라가 불안하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지면 모름지기 忠道를 행할 것을 맹세한다. 또한, 따로 먼저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맹세하였다. 곧, 詩․尙書․禮記․傳(左傳 혹은 春秋傳)을 차례로 습득하기를 맹세하되 3년으로써 하였다.󰡓

 

비의 제작 연대는 맨 앞의󰡐壬申年‘이라는 干支와 詩․尙書․禮記․傳 등 신라 국학의 주요한 교과목 습득을 맹세한 점을 근거로 하여, 신라의 國學이 651년(진덕여왕 5년)에 시작하여 682년(신문왕 2년)에 완성되었으므로, 651년 이후의 壬申年인 672년(文武王 12년)이거나, 아니면 682년 이후의 壬申年인 732년(聖德王 31년)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국학 설치 이전부터 儒敎經典이 신라에 수용되었을 것이라는 점과 비문 내용 중에 忠道를 실천할 것을 맹세한 점, 나아가 이것이 花郞道의 근본정신인 점을 고려하여 화랑도가 융성하였던 中古 후반의 어느 壬申年, 즉 552년(眞興王 13년)이거나 612년(眞平王 34년) 중의 어느 한 해일 것으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이 비의 意義는 무엇보다도 신라 융성기에 靑少年들의 강렬한 儒敎道德 實踐意志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壬申誓記石은 刻이라기보다 끌로 그어 놓은 인상을 주어 완전한 線刻이며 서체는 楷書이나 삐침과 파임 및 갈고리가 나타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稚拙하면서 자연스러움의 妙를 지니고 있다. 結構에 있어서도 이치를 초월한 자연의 妙를 보여주고 있다. 그야말로 法을 초월한 法 이전의 원시형태가 나타나 있다. 剛氣가 있으면서도 直勢로 새겨 나간 서품이 誓記라는 내용과 잘 어울린다고 하겠다.

신라 서예의 흔적 중에 蔚州川前里書石이 있는데 이 壬申誓記石과 더불어 花郞의 발자취를 알 수 있다. 전자는 楷行이 뒤섞여 여유로운 풍류를 느끼게 하지만 후자는 直勢의 楷書로서 盟誓의 의지가 담겨 있다.

 

6. 眞興王巡狩碑

신라 眞興王이 국토확장을 위한 拓境과 巡行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들로 昌寧眞興王拓境碑(561년, 국보 제33호)․北漢山眞興王巡狩碑(568년, 국보 제3호)․黃草嶺眞興王巡狩碑(568년)․磨雲嶺眞興王巡狩碑(568년) 등을 일컫는다.

진흥왕대는 신라가 종전의 미약했던 국가체제를 벗어나 일대 팽창, 三國統一의 기틀을 마련한 때이다. 진흥왕은 540~576년의 37년간 재위 동안 낙동강 서쪽의 伽倻 세력을 완전 병합하였고, 또 한강 하류 유역으로 진출하여 서해안 지역에 橋頭堡를 확보하였으며, 東北으로는 함경남도 이원지방까지 經略하는 등 국토의 팽창을 이룩하였다. 이렇게 확대된 영역을 진흥왕이 직접 순수하면서 민심을 살피고 국가에 忠誠과 節義를 바친 자에 대한 공로의 포상을 선포하고 君臣이 함께 경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또한 이러한 戰勝紀念碑에는 征服集團의 신통한 能力과 정복사업의 偉業을 자랑하고 征服地 백성을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다고 선전함으로써 被征服民을 회유하는 고대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선전의 역할도 겸하였다고 본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은 모두 4개인데, 이들을 약칭하여 昌寧碑․北漢山碑․黃草嶺碑․摩雲嶺碑라고도 한다. 해서체로서 음각된 이들 네 순수비는 신라의 강역뿐만 아니라 臣僚의 명단과 소속부명․관계명․관직명 등이 기록되어 있어 진흥왕 당대의 금석문 자료로서 이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이상에서 살펴본 迎日冷水里碑, 蔚珍鳳坪碑, 永川菁堤碑, 丹陽赤城碑, 月城壬申誓記石 등은 엄밀한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碑의 형태와는 사뭇 다르다.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한쪽 면을 조금 다듬은 정도이다. 眞興王巡狩碑 중에서도 昌寧眞興王拓境碑(561년)는 자연석의 한쪽 면을 다듬어서 이용하였고, 나머지 北漢山眞興王巡狩碑(568년), 黃草嶺眞興王巡狩碑(568년), 磨雲嶺眞興王巡狩碑(568년) 이 세 비는 7년의 거리밖에 없으나 형태적인 면에서 크게 다르다. 이 셋은 모두 머리에 碑蓋, 곧 비석의 지붕돌이 올려졌던 흔적이 남아 있고 비의 아랫부분은 座臺에 박혀 있던 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오늘의 비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신라의 금석문의 시기를 둘로 대별한다면 眞興王 29년(568년) 北漢山碑, 黃草嶺碑, 磨雲嶺碑가 세워진 때를 기점으로 하여 전후기로 나눌 수 있다. 이 세 碑로부터 비의 양식도 碑蓋, 悲辛, 碑座 등의 비의 三要素를 갖추고 있지만, 그 이전은 자연석을 그대로 또는 일부분을 갈아서 사용하는 초보적인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6-1. 昌寧眞興王拓境碑(561년)

이 비는 慶南 昌寧郡 昌寧邑 橋上里에 있으며, 건립연대는 비문에 보이는 ‘辛巳年二月一日立’으로 미루어 561년(眞興王 22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척경비는 본시 昌寧郡 昌寧面 火旺山麓에 있던 것을 1924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으로 大伽倻를 멸망시키고 기념한 최초의 巡狩管境碑이다.

花崗巖으로 된 自然板石를 갈아서 새겼으며, 앞면을 간 다음 外緣[가장자리]에 비석 형상을 따라 윤곽선을 돌렸다. 그리고 비의 윤곽만을 두른 것은 4비가 모두 동일하나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것은 昌寧碑뿐이다. 윗면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斜面을 이루고 있으므로 후반부는 1행씩 낮추어 계단식으로 되어 있는데, 石面을 끝까지 이용한 것은 그 유례를 찾지 못할 만큼 진기하며 또 古樸하고 친근한 맛을 자아낸다.

서체는 楷書體로 음각하였고, 4종의 眞興王巡狩碑의 서체는 ‘서로 공통성을 들어 동일인의 筆致’로 보기도 한다.

인물의 열기는 속부(屬部)․인명(人名)․관직(官職)․직위(職位)를 표기하여 삼국시대 신라비문의 통식을 따르고 있다.

다른 3개의 진흥왕 순수비의 내용도 대개 이와 같은 순서로 이루어져 있다.

 

6-2. 北漢山巡狩碑(568년)

이 비는 서울特別市 鐘路區 舊基洞 北漢山 碑峰에 있었으나 景福宮에 옮겨져 졌다가 파손이 우려되어 國立中央博物館에 보관되고 있다.

현재 많은 부분이 절단 또는 손상되어 있고, 비신의 뒤쪽에는 무수한 총탄 흔적이 남아 있다. 비문에 明記되어 있었을 연호 干支가 磨損되어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이 비가 건립된 북한산지역은 진흥왕이 551년에 백제의 성왕과 합세하여 한강 상류지역을 차지하고, 2년 뒤인 553년에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유역을 빼앗아 新州를 설치함으로써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진흥왕 16년에 북한산에 巡幸한 사실이 있으나 이를 곧 비의 건립연대로 보기는 어렵고, 남아 있는 글자의 내용을 검토하면 黃草嶺碑와 같은 字句가 많아, 568년(진흥왕 29)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문은 비신을 硏磨한 후 정면에 12행을 새겼으나 윗부분은 심하게 마멸되었고 제12행은 판독이 불가능하며, 그 밖에도 자획이 분명하지 않은 곳이 많다. 따라서 1행의 字數도 확실하지 않으나 32자로 추정되며, 字徑은 3cm이다.

字體는 六朝式의 楷書이고, 글뜻은 다른 3비의 비문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전반부는 순수의 事蹟에 관한 것이고, 후반은 수행한 人名을 列記한 듯하다.

비석 좌측면에는 1816년(순조 16년)과 그 다음해에 秋史 金正喜가 實査한 사실이 다음과 같이 追記되어 있다.

 

此新羅眞興大王巡狩之碑 丙子七月金正喜金敬淵來讀, 己未八月三十日李濟鉉龍仁人 丁丑六月八日金正喜趙寅永同來審定殘字六十八字

 

이 이전에는 無學의 비로만 알려져 왔으나, 추사의 판독으로 제대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6-3. 黃草嶺眞興王巡狩碑(568년)

이 비는 568년(진흥왕 29년) 진흥왕이 咸南 咸州郡 下岐川面 眞興里에 세운 순수비이다. 원래 이 비는 黃草嶺의 정상에 있던 것을 1852년(철종 3년) 함경도관찰사 尹定鉉이 정상에서 남쪽인 中嶺鎭 부근인 지금의 하기천면 진흥리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咸興歷史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그 내용은 변경지역을 순수한 사실과 정복지에 대한 왕도정치를 실현하려는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수행한 신하들의 이름과 관등․관직은 당시 사회와 인물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이 비는 선조때 車天輅의 󰡔五山說林󰡕과 金誠一의 咸鏡道 旅行記事 등에 이미 나타나며, 본격적인 연구는 金正喜에서 비롯되었다.

이 비문은 문자의 마멸도 적고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기 때문에 6세기 신라 문자문화의 수용형태를 붙잡는 귀중한 자료의 하나라고 생각하다. ‘이 비는 南北朝時代 특히 北魏의 자형이 중심이어서 偏과 旁에 있어서 新舊混淆가 보여지고, 자획의 생략 또는 첨가 등이 있고, 廴․辶, 竹머리, 艹머리 등의 부수가 통일 표기되어 있는 특징을 보인다.’

 

6-4. 摩雲嶺巡狩碑(568년)

이 비는 568년에 건립된 咸南 利原郡 東面 寺洞 雲施山 摩雲嶺에 세워졌던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이다. 그러나 碑身은 山頂의 남서쪽 경사지로 굴렀고 蓋石은 그 아래 溪谷으로 굴러 있어 1930년 초에 이를 收拾하여 福興寺 윗부락 한 모퉁이에 移建하였다. 지금은 북한의 함흥 本宮 本館에 보관되어 있다.

이 비는 楷書體로 음각되어 있으며, 글자의 마멸이 심하지 않아 대부분을 읽을 수 있다.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眞興王이 568년 8월 21일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국경지대인 이원지방을 순행한 뒤 군신이 더불어 경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이 비는 당시 신라의 국경․관직․제도․지명 등을 밝혀주는 고대사 연구의 귀중한 금석문 자료이다.

이 비는 1929년 9월에 典籍 조사일로 현지에 나가 있던 崔南善이 현지 유지들의 협력을 얻어 본격적으로 조사하여 소개하면서부터 알려지게 되었다. 이 비문에는 ‘帝王建號’니 ‘朕’이니 ‘巡狩’니 하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어서 당시 신라의 自尊意識을 엿볼 수 있게 한다.

 

金洋東은 진흥왕대의 금석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진흥왕대의 금석문은 4개의 巡狩碑 이외에 1978년에 발견된 丹陽赤城碑가 있는데, 글씨가 草率한 楷書로서 南朝風의 素朴한 운치가 감도는 느낌을 주고 있다. 신라 초기의 금석물들은 정리되지 못한 拙朴함, 신라 특유의 순수 서체미를 지닌 것들이라고 한다면, 眞興王代의 금석문은 신라 서예가 중국의 북조풍의 雄建한 書風과 남조풍의 溫潤한 楷書美가 混融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진흥왕대의 정리된 書風의 경지에 어울릴 만하게 내용적 발전도 있다는 것이다. 이 때에 와서야 비로소 어법에 맞는 漢文다운 漢文으로 작성된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백제는 한 세대 전에 이미 武寧王誌石과 같은 爛熟한 글씨를 썼지만 신라는 이 때에 와서야 겨우 모양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7. 大邱戊戌銘塢作碑(578년?)

이 비는 어느 戊戌年에 영동리촌(另冬里村)에 저수지를 만들기 위해 塢壁 곧, 堤防을 쌓은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이다. 1946년 大邱 大安洞에서 任昌淳에 의하여 발견되어, 전란 등으로 우여곡절을 겪다가 현재는 大邱 慶北大學校 博物館에 보존되어 있다. 戊戌塢作碑라고도 하며, 另冬里堤防築造碑인 이 비는 보물 제516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문의 문자는 大小와 간격이 일정하지 않고 줄도 바르지 못하다. 필치는 소박하고 또한 古拙한 풍을 보이고 있다. 북위의 계보라 하겠으나, 경주와 그 부근지방에서 발견된 古新羅의 古碑들과 더불어 신라의 토속적인 고아한 격조를 보이고 있다.

이 비는 내용으로 볼 때, 312인의 인원이 13일간 공력을 들여 넓이 20보, 높이 5보, 길이 50보의 堤防을 축조하고 그 기록을 남긴 것이다.

이 비도 ‘자연석인 화강암에 古拙한 楷書로 刻字되어 一見하여 확대된 壬申誓記石과 같으며, 菁堤碑에 비하면 稚拙함이 앞서고 비문이 가지런하기가 眞興王巡狩碑와 南山新城碑와는 대비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다’. 이 비는 ‘중국 南北朝時代 北朝風의 楷書體로 隸書의 운치가 남아있다’. 비문은 순수한 漢文體가 아니고 거의 吏讀式의 문체로 되어 있다. 건립연대를 자세히 알 수 없으나 統一 이전의 碑로 추정된다. 공사관계 및 인명에 관한 직명․출생지․성명․관위 순으로 列記하여 南山新城碑와 형식이 같다.

이 비의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都唯那라는 신라의 僧職으로 그 연대 추적의 근거가 된다. 都唯那라는 직제는 眞興王時에 설치되어 그 이전으로 올라갈 수 없으며 또 자체가 진흥왕순수비보다 더욱 古拙한 까닭으로 戊戌은 진흥왕대에는 해당되지 아니하여 眞智王 3년(서기578년)으로 추정한다.

비문을 읽어보면 문체는 당시 신라의 특유한 서술법으로 순수한 한문이 아니고 후세에서 말하는 吏讀 표기이고 어순대로 읽으면 거의 해석이 된다. 물론 완전한 吏讀로 보기는 어렵다.

 

8. 慶州南山新城碑(591년)

慶州南山新城碑는 眞平王 13년(591년)에 경주 남산에 新城을 쌓으면서 성을 튼튼하게 築造할 것을 서약한 비이다. 이 碑는 신라시대 경주 남산에 城을 쌓고 세운 기념비로 1934년부터 1975년에 걸쳐 경주 부근에서 모두 6기가 발견되었다. 이 비석이 발견된 지점은 각각 다르나 모두 남산에 성을 쌓고 세운 비이기 때문에 발견된 순서에 따라 南山新城 제1비에서 제6비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제1비는 완전한 형태이나 제2비와 제3비는 상하 두 조각으로 절단되었고, 제4․5․6비는 단편적으로 발견되었다.

형태와 크기는 일정하지 않으며 재료는 自然板石을 사용하였고 刻字할 부분만 약간 磨硏하여 비문을 새기고 밑에는 공간을 남겨두어 땅에 묻어서 설 수 있게 하였다.

내용은 各碑가 3단으로 구분되는데 모두 동일한 체제를 취하고 있다.

제1단 : 建立年月日과 誓約文으로 모두 辛亥年 2月 26日로 동일하게 되어 있으므로 동시에 건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南山新城이란 명칭은 󰡔三國史記󰡕에 文武王 3年條에 보이지만 󰡔三國遺事󰡕 文虎王法敏條에 있는 “別本에 말하기를 建福 8년 辛亥年에 南山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2,850步였다.”라는 기사에 의하면 신해년을 591연(建福 8년, 眞平王 3년)에 比定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비석들은 591년에 세워졌다고 할 수 있다. 또한, 碑文에 의하면 築造 후 3년 이내에 崩破되면 벌을 받을 것을 서약하고 있다.

제2단 : 서약하고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職名․出身地․人名․官等名의 순서로 기재되어 있다. 參與人員들은 대체로 세 부류로 구성되었는데, 첫째는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 둘째는 지방관의 명령을 받아 직접 노동력을 동원하고 또 그들의 축성작업을 실제로 일선에서 지휘 감독한 사람들이며, 셋째는 인력동원된 사람들이다.

제3단 : 作業分團의 축성 거리를 명시하고 있다. 각 작업분단마다 축성 거리가 7보 8척에서 21보 1척 정도로 차이가 나는데, 이는 지형에 의한 공사 자체의 난이도를 감안한 결과로 보인다.

이상에서 판단하면 南山新城碑는 현재 발견된 것보다 훨씬 많은 수가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南山新城碑는 비록 소형이지만 삼국시대 金石文으로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우선 이 비는 신라 中古期의 지방통치체제와 役力 동원체제 및 지방민의 신분구성, 촌락민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社會史적인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 碑文은 古拙한 서체로 陰刻하였고 行數와 각 행의 字數는 일정하지 않다.

蔡龍福은 南山新城碑는 永川菁堤碑, 大邱戊戌塢作碑와 더불어 土木建築石文으로 이는 貯水池․堤防․山城 같은 촌락생활과 都城 수호의 전략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신라비를 성격별로 구분하고 있다.

崔完秀는 이 비는 ‘眞興王巡狩碑보다 더 拙朴하여 鄕趣가 강하다’고 했다. 33년의 거리를 두고 있지만 비의 형식면에서는 王碑와 民碑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巡狩碑만큼은 온전하지 못하나 글씨 자체는 상당히 세련되어 典雅한 느낌마저 든다.

書風으로 볼 때, 백제는 적어도 그 당시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 있었지만 신라는 반도의 구석에서 이웃의 발전된 문화에 간접적으로 접하기는 하나 쉬이 동화되지 못하고 나름대로 自生力을 기르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山城 築造라는 거대한 토목공사를 하면서 일정한 거리마다 잘 보이는 자리에 안전 공사에 대한 다짐을 自然石의 花崗巖에 새겨놓고 국가적 숙원사업에 임하는 신라인들을 생각할 때, 不實工事가 만연하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결국 이런 응집력은 77년 후에 삼국통일이라는 위업으로 나타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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