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교실

1~4 전서 예서 해서 행서에 대한 고찰

 

1. 篆書에 대한 고찰


 1. 전서의 유래

  문자문명이 시작된 이래 존재해온 書이니만큼 우리가 그 맥을 짚어감이 바람직할 것이다.  전서는 중국의 문자-상형문자에서 비롯된 것이다.  문자의 필요성의 인식이 바로 문자 창조에 이르게 되었고, 그 문자의 표현수법은 귀갑(龜甲-거북이의 등껍질)이나 짐승의 뼈에 새겨진 글자나, 동기(銅器)의 명문(銘文)에 새겨진 글자에서 알 수 있다. 이를 사랑하는 중국 민족은 글자를 표현함에 書의 천재에 의한 글자의 풍을 높이 평가하여,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전(篆) 예(隸) 초(草) 행(行) 해(楷)로 발전하여 書의 체계를 이룬 것이다.

  예서 이전의 문자, 즉 甲骨文, 金文, 石文등을 지칭하며, 좁은 의미로는 小篆만을 칭하기도 한다.   전서는 명문(銘文) 금문(金文) 초문(楚文) 등 동기나 석각(石刻)에 의해 표형되었다.  진(秦) 이전에는 여러나라가 분열된 상태에서 그 나라에 맞는 문자를 사용하다가 진나라에 들어와서 시황제에 의해 문자가 통일되었다.   그리하여 문자통일 이전의 진계문자인 주문 -대전(大篆)을 주축으로 이사(李斯)를 통하여 문자를 만들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소전(小篆)이며, 문자통일 이전의 명문(銘文) 금문(金文) 죽간(竹簡) 진공단(秦公段) 석고문(石鼓文)등이 대전에 속하고, 태산각석(泰山刻石) 낭사대각석(廊邪臺刻石)등이 소전에 속한다.

  대전은 일반적으로 그 모양이나 품세가 정방형이 많은 모양으로 전서의 기본골격인 좌우대칭은 어느 정도 이루었으나, 불안정한 모습을 한 것이 많고 약간 유동적인 움직임을 많이 볼 수 있다. 소전은 글자모양이 대전보다 세로로 약간 길어졌고 좌우대칭이 되면서, 움직임이 거의 없는 정적인 상태의 글씨로 엄숙하면서도 긴장된 느낌을 준다.

  따라서 전서라함은 일반적으로 소전을 말함이며, 소전은 그후 한전(漢篆)을 거쳐 원(元) 당(唐) 청(淸)에 이르기까지 많은 서예가(書藝家)들이 써 오고 있다.


 2. 전서의 종류

(1) 갑골문

1) 기원 : 현존하는 중국 최고의 문자는 모두 귀갑이나 수골(獸骨)에 새겨진 것이다. 이는 은(殷) 왕실 공문서의 문자기록이다. 귀갑과 수골을 갑골이라고 부르는데, 귀갑중에서도 글자를 새기기 쉬운 腹甲(복갑:거북이의 배껍질)이 주로 사용되었고, 수골에서는 牛甲(우갑:소의 뼈)가 일반적이었으나 사슴, 말, 양, 들소등의 뼈도 사용되었다.   이러한 갑골은 주로 인간생활의 길흉을 점쳐 그 정복의 결과를 기록하는데 사용되었기에 정복문자(貞卜文자字)라고도 불리우고, 복사(卜辭)를 기록하는 이외엔 당시의 제사 수렵 왕실의 대사건등을 기록했다.


2) 발견 : 3000년 동안 매장되어 있었던 갑골문이 19세기말 청에 이르러 발견되었는데, 문자학자인 유악(劉顎)과 왕의영(王懿榮)에 의해 연구되기 시작한다.


3) 서체 : 사용한 도구나 재료가 특수하였으므로 갑골 문자의 서법과 품격은 대부분 곧고 날카로웠다.  대체적으로 모나고 곧으며 가는 획이 많고, 둥글고 굽으며 퉁퉁한 획은 비교적 적다.  대부분 칼로 직접 판 것이며, 혹은 먼저 글씨를 쓴 다음에 판 것도 있는데 써놓고 파지 못한 경우도 있다.


(2) 금문(金文)

殷(은)의 쇠망과 함께 갑골문이 사라지고 금문이 고대 서체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1) 기원: 은왕조 시대에는 갑골문 이외에도 동기(銅器)에 새겨진 명문(銘文)이 전해오는데, 이 금문은 대다수가 문자와 그림의 중간쯤 되는 글자체였다.  이 글자는 어떤 뜻을 가지고 글자 위에 덧붙여 통통하게 그려 넣었으므로  글자모양은 그림에 가깝고 획의 굵기도 많이 다르다.   고대에 이르러 서체의 풍격이 여러방향으로 변화하였으나, 문자의 모양은 점차 그림의 형태를 벗어나서 성숙되어 갔다.   은대 금문과 비슷한 서고전기의 금문의 풍격은 그림의 맛이 있으나, 후기에 이르면 큰 변화가  생겨 글자수가 점차 많아지면서 획은 고르고 획일적으로 새겨진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산씨반(散氏盤)이 있다.  (글자 하나하나가 각기 한칸씩을 차지하는 이 변화는 후세에, 小篆에 큰 영향을 끼쳤다.)   춘추전국시대에 와서 지나칠 수 없는 것이 조서(鳥書)인데, 새를 그린 화문(花紋)이며 필서도 새의 깃모양으로 썼다.   이는 기원이 은대까지 올라가나 춘추전국시대가 전성기이며 병기(兵器)의 문식(紋飾)에 주로 쓰였다.

 

(3) 대전(大篆)

  대전은 籌文(주문)이라고도 하는데, 주(周) 선왕(宣王)때에 이전의 고문에 획을 가감하여 만든 것이라 전해지는데 확실한 것은 아니다.   후에 서진에서 성행하였고 후대인들은 秦이 통일한 이후의 서체인 小篆과 구별한다.   일반적으로 석고문(石鼓文)과 조초문(詛楚文)이 대표적이다.


1)석고문: 대전 자체의 가장 구체적인 작품이며,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 비교적 초기의 석각문자이다.   漢 이전에는 대부분 이러한 원주형의 갈(돌을 쪼아 만든 북모양)이었다가 漢이후에 와서 장방형의 비(碑)가 석고문이다.  석고는 모두 10개였고 높이가 40-90cm로 서로 다르며, 가로둘레의 평균은 210cm이다. 석고에 새겨 놓은 내용은 대부분 진나라 군주가 사냥하는 것이었다.   원문은 약 700자 정도인데 현존하는 송탁본(宋拓本)에는 465자가 있다.


2)조초문: 전국시대 진나라의 석각이다.   이는 진과 초과 서로 공격하고 정벌하던 일을 서술한 것인데 진나라 사람이 초왕을 저주하는 내용이다.   붓의 획이 빼어나게 힘이 있고, 붓을 거둘때 대부분이 뾰족하다.   글씨체의 크고 작은 변화가 한결같지 않았고 자연스러웠으며 서사체(그림 그리듯 쓰는 서체)의 맛이 있다.  서체는 석고문이나 조초문이나 대략 비슷하였는데, 모두 진나라가 통일한 후의 소전체의 전신이다 .


(4) 소전(小篆)

  東周시대에 이르러 나라의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춘추전국시대를 맞이 하였는데, 각 제후들은 나름대로의 문자를 사용하게 된다.   진시황은 전국을 통일하면서 승상 이사(李斯)의 활약으로 진전(秦篆)을 이루는데 이것이 바로 소전이다.  전서의 좁은 의미를 이 소전에 두기도 한다.


1) 서체 : 정사각형에서 '장방형'이 되었고 획도 시종 굵기가 같으며, 사이가 포백이 고르고 형태는 좌우대칭을 이루며, 중심을 잡으면 평형을 이룬다.


2) 작가 작품 : 소전으로 내려오는 작품은 대부분 비각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진시황의 공덕을 찬양 기록한 , 태산각석(泰山刻石) 낭사대각석(廊邪臺刻石)등이 있는데, 모두 이사(李斯)의 글씨이다. 한대에서는 해서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전서는 비석이나 현판에 사용되었다.   전문이 전서로 된 '개모묘석궐명', '숭산소실석궐명', '사삼공산비', '원안비', '원창비'등이다.  그 후 오대시대, 송대, 원대, 명대를 거쳤지만 이 시대는 전서의 몰락기였다.  그러다가 금석학과 고증학이 발전한 청에 이르러 부흥기를 맞는데, 등석여(鄧石如)가 나와서 후세 사람들의 길잡이가 되었다.


2. 隸書에 대한 고찰


  1. 예서의 기원과 발생

  주가 멸망하고 천하는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 춘추전국시대에 접어들었는데, 이를 통일한 자가 바로 진의 시황제였다.  그는 비록 폭정으로 유명하였으나, 문자통일의 업적을 지나칠 수는 없다.  바로 전서를 가리키나 이는 실용적이지 못해, 실제로는 간소하게 한 약체가 사용되어 왔다.  이것이 예서의 발생이라 할 수 있겠다.   奏(주)의 始皇帝(시황제)때에 程邈(정막)이라는 사람이 죄를 짓고 옥중에 있기를 십년, 그 동안에 小篆의 번잡한 곡선의 문자를 직선문자로 고치고 書寫(서사)에 편리한 새로운 書體三千字를 창조하여 제왕에 헌상하였던 바, 제왕은 이것을 상하여 사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문자를 古隸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설이어서 그 진실성에는 의문이 있다.   古隸에 있어서도 어느 한 시기를 區劃해서 완성한 것이 아니고, 자연 발생적인 것을 程邈(정막)이 정리 마무리한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 예서의 명칭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으나, 小篆에 예속해서 생긴 것으로 新書體의 文字라는 의미에서 이 명칭이 생긴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古隸가 생겨 얼마 안되어서, 王次仲(왕차중)이 八分書를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예서의 두드러진 특징은 파책이다.   파책이라고 하는 것은 한 획에 큰 변화를 주어 波狀曲線으로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예서로 유명한 서적은 예기비, 서협송, 장천비, 조전비가 있다.


  2. 예서의 뜻

  예서를 배우는데 우선 중요한 점은, 예서라는 서체가 다른 서체, 즉 예서보다 오래된 전서나, 예서보다 새로운 해서, 행서, 초서와 서체상 어디가 어떻게 다른가를 명확히 파악하는 일이다.  이점을 분명히 밝히지 않고 붓을 들면, 소위 隸意(예의)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서다워지지가 않는다.   여기서 먼저 주의해 둘 일은, 지금부터 말하는 예서라는 낱말의 뜻은, 古隸(고예)라는 예서의 고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八分(팔분)이라는 예서의 비교적 새로운 형식, 곧 조전비를 포함한 후한시대의 하고 많은 예서 전체를 하나의 개념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설명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우선은 예서의 특징을 하나하나 밝혀보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예서체와 다른 서체를 비교 검토해 보는 것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 될 것이다.


  3. 예서의 기본구조

 예서의 기본 구조를 보면 한 획에 '波勢(파세)'라는 리듬이 흐르고 있는데, 파세는 예서의 가장 기본적인 특색이다.  파세란 한 획에 큰 변화를 주어 波狀曲線(파상곡선)으로 나타내는 것을 말하거나 또는 물결이 한번 치솟았다가 미끄러져 내리는 듯한 필체를 말한다.   전서는 몽땅한데 몰아서 전서라고는 하지만 전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굉장히 종류가 많아서 좀 지나치게 막연한 표현이기는 하나, 이 경우의 전서라는 호칭의 초점을 전서의 가장 새로운 형태인 小篆(소전)에 맞추기로 한다.   그 소전과 예서를 우선 형태상으로 비교해보면 소전은 그 자형이 아주 길다.  그와 대조적으로 예서는 일반적으로 아주 납작한 모양을 하고 있다.  전서는 생김새가 길므로 세로로 내리쓴 획이 강조되고 과장되기 쉽다.  그래서 세로로 내리그은 선이 눈에 잘 띈다.   그에 비해 예서는 납작하므로 가로로 건너 그은 획이 눈에 띄기 쉽다.  즉 옆으로 길게 선이 뻗어 나가 있는 것이다.  선과 선사이 즉 分間(분간)의 경우도 전서일때는 세로획과 세로획의 내려그은 간격이 필연적으로 긴밀한 반면, 예서일 때는 가로로 건너 그은 획이 이에 해당하므로 가로획간이 아주 긴밀하다.   획의 조합을 보면 전서의 경우 키가 커서 세로로 길 뿐 아니라, 세로로 내리그은 선이 대개 수직이고 가로획은 수평으로 되어있다.  이점은 예서도 같아서 세로는 수직, 가로는 수평이다.  즉 형태상의 특징으로서 길고 납작한 차이는 나지만 자획상의 균형법은 두 서체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자형법은 左右相稱이라 하여 옛 서체에서는 字劃構成上(자획구성상)의 기본이 되어 있었다.  이상이 형태상으로 본 예서와 전서의 다른점과 같은 점이다.


  다음으로 예서와 해서를 비교해 보자.   해서의 경우 자형은 거의 네모가 반듯한 정방형에 가깝고 특히 길거나 납작하지 않다.  그러나 소홀히 보아 넘길 수 없는 중요한 점은, 해서의 가로 긋는 획이 오른쪽으로 치켜 올라가 있다는 사실이다.   세로획이 수직인 점은 예서와 별로 다를 바가 없지만, 오른쪽 어깨가 치켜진 가로획은 해서의 특징이며 그것이 예서와 전혀 다른 점일 뿐만 아니라, 그것 때문에 예서와 전서에 공통되는 좌우상칭의 조립법이 해서에는 통하지 않고, 나아가서는 그 필법까지도 전혀 다르게 진전하게 된 것이다.   전서와 예서는 수직 수명이라는 기본 원칙하에 다같이 좌우상칭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필법도 그리 다르지가 않다.  즉, 전서가 붓을 곧추 세우고 힘의 중심이 線劃(선획)의 중심을 통과하게 쓰는 서법, 즉 중복으로 씌여졌는데 이것은 거의 그대로 예서에서도 통용된다.   단지 특수한 예로서 전서에는 없는, 예서의 '波(파)'라고 불리는 부분등에 가끔 그 중봉이 흐트러져서 측필이 되어가는 기미가 엿보이는데, 그것이 해서의 파임의 경우가 되면 측필의 특징이 한결 더 뚜렷이 두드러진다.   이렇게 보면 예서가 전서와 해서의 중간서체라는 사실이 더 명확히 드러나는 셈이다.  해서는 가로획을 우상방으로 치켜 긋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관계로, 다른획의 용필법도 측필이 되기 마련이며 波(파)에 해당하는 부분에서는 예서와 아주 비슷하면서도 힘을 주는 법이 달라, 이런데서 예서와 해서의 용필법이 서로 다른 특징을 볼 수가 있다.  더구나 꺾이는 부분에 이르면 이 특징이 더욱 명확해져서, 예서는 중봉, 해서는 측필이 원칙이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4. 예서의 종류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秦隸(진예)인 古隸(고예)와 漢隸(한예)인 八分(팔분)이 바로 그것이며, 그 차이는 波法(파법)에 있다.


가. 고예 : 篆(전)이 隸(예)로 변화하는 과도기적 특징을 나타내는데, 小篆(소전)보다 곡선이 적고 획이 간결하지만, 소전처럼 좌우대칭이며 팔분처럼 편평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소전처럼 장방형도 아니다.


나. 팔분 : 고예를 미화하기 위하여 횡힉의 종부를 누르고 힘차게 삐치는 것이 波(파)인데, 이것이 있는 것을 팔분이라고 한다.  八字分背라고도 하는데 팔자처럼 좌우로 삐치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팔분은 전한 무렵부터 사용되었으며, 그 말엽부터 후한에 걸쳐 성행하여 숱한 석각이 건립되어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漢隸(한예)의 종류

예서를 배울 때 첫째 한예에서 그 자료를 얻어야 한다. 한예의 원탁을 입수 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겠지만, 근래에 와서는 사진판 또는 체본용 법첩으로 만들어진 것이 많이 나와있기 때문에 그다지 불편하지 아니할 것이다.  이러한 한예는 보통 3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流麗形(유려형): 예기비, 을영비, 사신비, 조전비

方整形(방정형): 북해상경군비, 장천비

奇古形(기고형): 서협송, 하승비


  이중 예서로 유명한 書跡(서적)은 을영비, 예기비, 서협송, 장천비, 조전비가 있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ㄱ. 을영비- 전형적인 한의 예서로, 팔분의 파세가 아주 잘 나타나 있고 점획에는 흔들림이 없으며, 결체 결구는 크고 완강하며 약간 살이 찐 듯한 선이면서도 둔하지 않고, 건강하고 밝은 면을 구사하고 있다.


ㄴ. 예기비- 예기비가 건립된 후한시대는 중국 서예사상 가장 建碑가 성행한 시대였다. 淸代의 금석학자인 翁方綱(옹방강)은 '한의 예서는 예기비로서 제일로 친다'고 단언하였다.  예기비는 서기 156년에 출토되었는데 曲阜(곡부)의 공자무덤 내부에 있다.  자체는 옆으로 길고, 필획이  瘦勁(수경)하여 힘있고 波(파)이한데, 한비이나 여러 가지 體勢(체세)가 나타나므로 여러사람이 나누어 썼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비중 가장 근엄하고 가장 품위있는 글씨로서,  精妙(정묘). 有神(유신)하고 評正(평정)하며, 獲(획)이 생동하는 것 같다.  예기비 문자의 비범함에 대해서 明代의 郭宗昌(곽종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자획의 훌륭함은 붓으로 쓴 것도 아니고 손으로 쓴 것도 아니다.  우아하기로는 그 이상의 것은 없다.  이것은 바로 신조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서 보통인간이 쓴 것이 아니다." 라고.  예기비는 비의 측면에 글자가 있고, 모든 기술적이 면을 종합하여 완성된 최고의 걸작으로, 무궁한 획의 변화는 가없는 맛을 주며 강조된 파책에 예기비의 특징이 있고 ,종획에서 중후함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방정, 준엄한 느낌을 준다.  새김도 훌륭하고 글자의 수도 많아 습자본으로 알맞다.


ㄷ. 서협송- 서기 71년 甘肅(감숙) 成縣(성현)의 摩崖(마애)上에 새겼다.  한비에서는 대체로 글쓴이를 밝히지 않지만, 이것은 비의 끝에 '仇靖(구정)'이라는 글쓴이의 이름이 쓰여져 있는 것이 특색이다.  자체는 方整(방정)하고 問架(문가)가 평온하며 大字(대자)이나, 결체에서 긴밀을 잃지 않았는데 필세가 온후하여 순박하면서도 자연스럽다.  예기비의 정술된 결체나 팔분예법의 아름다움은 없지만, 소박하고 야성미가 많고 결체는 널찍하고 퍽 힘찬 書(서)이다.  漢隸(한예)중 刻(각)이 아주 잘 되고 용필도 명쾌하여 예서 입문서로 적당하다.   사물에 동하지 않고 유유한 모습에 이상한 매력이 있다.


ㄹ. 장천비- 장천비는 조전비와 더불어 後漢時代의 最後를 장식하는 일품이다.  서기 186년에 세워졌고 명말에 출토되었는데, 그 字體(자체)는 방형이고, 필획이 평정하여 파세를 극히 收斂(수렴)하였으며, 高長(고장)한 字(자)들이 많은 편이다.  장천비는 소박성을 잃지 않는, 점과 획, 다부진 方形(방형)의 구성, 거기에 너무 표정을 나타내지 않으려 하는 듯한 원시적인 풍모에 일층 매력을 느끼게 한다.  장천비는 다른 漢碑에 비하여 어딘가 굳세고  투박함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장천비의 독특한 맛이다.  한편, 파세를 가지지 않게 한 가로획 등은 세태의 변화를 부여하지 않고 긋는다.  그것이 도리어 효과적으로 소박한 맛을 내고 있다.   요컨대 기교를 부리지 않고 運筆한 것이 현대적인 우리들에게는 매력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건강하고 남성적인 서법으로 일관해 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장천비는 전서이면서 다분히 예서적이다.  따라서 전서와 같은 圓味나 건강을 나타내지 않고 펑퍼짐하고 자연스럽게 문자를 배합하고 있다. 


ㅁ. 조전비- 예서의 用筆結體의 특징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것  중 첫째가는 것이 조전비이다.  明代에 세워졌으며, 서기 185년에 陽에서 출토되었다.  결체는 역시 옆으로 납작하고, 필획이 섬세하여 파가 飛舞(비무)하며, 柔美(유미)하면서도 麗(려)한 풍격을 顯露(현로)하고 싶다.  全然(전연) 풍화작용을 받지 않았고, 刻法(각법)이 대단히 정밀했기 때문에 진책을 보는 것과 같이 필로를 잘 알 수 있으며, 木簡(목간)은 요컨대 일상의 용건을 충족하는 문서가 많다.    조전비의 서법은 삼백년을 지배하는 법칙을 그림을 그리듯이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眞蹟(진적)이 아니라는 흠은 면치 못한다.  그래서 木簡(나무판 글씨)을 되돌아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비에 새겨진 글씨는 字劃(자획)이 完好(완호)하고 형태가 매우 아름다울 뿐 아니라 筆力(필력)이 경건하다.


ㅂ. 석문송- 이것은 後漢(후한) 제일의 걸작이라 할 수 있으며, 소박한 서풍을 가지며 예기비, 조전비와는 반대로 예서의 법에 얽매이지 않는 자연스러움이 있다.


ㅅ. 하승비- 이는 글씨에 전서의 글체가 혼입되었고 결구에서도 전서의 체가 자주 보인다.


3. 楷書에 대한 고찰


   1. 해서의 기원

  해서는 書體의 하나로써 올바르게는 楷書體라 해야 한다.  문자가 창시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5천년 전이라 한다.  현존하는 가장 오랜 것으로 殷代(은대)의 甲骨文字(갑골문자), 周代(주대)의 鍾鼎文字(종정문자)가 있다.  어느것이나 소박한 繪文字(회문자)이다.  秦代(진대)에 大篆(대전), 소전이 만들어지고 소전은 다시 略화 되어 예서가 되고 이것이 漢代(한대)에 들어서서는 速書에 적합하도록 近隸(근예)가 생겼다.  근예가 다시 간략화외어 소위 해서체가 되었다고 한다.  한대의 예서가 쇠퇴하여 삼국 시대로 들어서면서 찬보자비와 찬룡안비를 필두로 비로소 해서가 된다.


   2. 해서의 특징

  점획이나 형이 간결하고 분명한 소위 間架結構(간가결구)가 정돈된 서체이다.  따라서 가장 쓰기 쉽고, 읽기 쉬우며 실용서로서 중심적 존재가 되었다.  해서는 이 서체 본래의 성격에서 스스로 정제, 엄정, 침착, 강건이라는 방향의 아름다움을 특질로 하고 있다.  해서의 점획은 하나하나가 명료하고 더구나 직선이므로 이것을 쓸때에 있어서도 현대 건축처럼 일획 일획을 차례차례로 쌓아나가는 것이다.  더구나 그 쌓아나가는 방식은 수평, 평형, 수직, 등분할 등의 원리에 의해 엄격히 해야 하는 것으로 그 결과도 엄정하고 더욱이 정제한 미가 표현되고, 침착 부동의 느낌이 강하게 나타난다.  또 한점 한획이 직선이므로 운필에 있어 한점 한획에 起筆(기필), 送筆(송필), 終筆(종필)의 삼요소를 뜻대로 가할 수 있는 일이 가능하고, 따라서 沈靜(침정) 강건한, 힘에 찬 작품이 많다.


   3. 해서의 書風(서풍)

  해서는 정제의 아름다움을 각기 개성적으로 나타내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수종을 연대별로 들어보면 오랜 것일수록 소박하고 대범하며, 시대가 새로워짐에 따라 실용성이 강조되어 평행, 수직, 수평, 등분할의 원리가 엄정하게 구사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해서의 성립을 나타내는 유력한 자료는, 한대의 현존하고 있닌 碑인 개통보사도석각, 石門誦(석문송), 禮器碑(예기비), 孔宙碑(공주비), 西狹頌(서협송), 曹全碑(조전비) 중에서, 공주비에 나타난 漢隸(한예)의 특징인 파책이 삼국시대의 대표작인 谷朗碑(곡랑비-서기 272)에서는 한예 특유의 파세가 아주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서체적 구조는 아직도 남아 있어서, 한자의 형이 4각이며 점획은 수평, 등분할을 엄격히 지키고 점획의 굵기도 일정해 있다.  아리의 몇가지에 대해 알아보면서 해서의 서풍에 대해 좀더 알아보기로 하겠다.


   4. 해서의 종류

1. 찬보자비와 찬룡안비

  이 두비(이를 이찬이라 부른다.)를 놓고 과연 해서라 말할 수 있는가 아니면 예서인가하는 문제는 아직도 큰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글자의 기필법(起筆法)이 해서와 같으므로 해서라고 말함이 옳을 것이다.  찬보자비는 중국의 운남서 변경에서 발견된 것으로 동진(왕희 원년 서기 405년)때 세워진 것이나 필자는 알 수 없다.  이와 풍격이 같은 것으로 458년에 세워진 찬룡안비가 있는데 이 두비는 해서의 시초가 되었다.


2. 九成宮醴泉名(구성궁예천명)

  해서는 書法(서법)의 기본적인 結構(결구)와 用筆(용필)을 갖추고 있어서 각 서체의 서법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중에서도 구성궁은 교본으로서 이상적이다.  字形(자형)이 크고 정규적이며 端嚴(단엄)하여 해서로서의 기본조건을 모두다 충족시키고 있다. 또 이것은 구양순의 대표작이며 背勢(배세)구성의 대표적 작품이기도 하다. 

  구성궁이란 唐帝室(당제실)의 離宮(이궁)의 이름으로서 挾西省(협서성)의 麟遊(린유), 즉 현재의 붕양부산중에 있었다.  이 離宮(이궁)은 隋(수)의 文帝(문제)가 조영한 것으로 隋(수)가 가까워온 후에는 한동안 황폐되었던 것을 당태종이 개축을 하고 舊名(구명)인 仁壽宮(인수궁)을 구성궁이라고 고쳐 불렀다.  그러나 지세가 높은 탓인지 물이 결핍된 흠이 있었다.  언젠가 태종이 황후와 함께 궁내를 산책하는데, 우연히도 아지랭이 피는 곳이 있어 그곳을 파 보았더니 샘물이 솟아 나왔다.  그래서, 실로 당 제실의 덕에 따른 一大祥瑞(일대상서)라 하여 이 사실을 적어 碑에 刻(각)을 하게 된 것이다.  選文(선문)은 (위징)에게 명하고 구양순에게 명령하여 쓰게 한 것이 바로 九成宮醴泉名(구성궁예천명)이다.

  구양순은 隋(수) 그리고 당나라 초엽에 걸친 서예가로 新舊(신구)에는 그의 사적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구양순(557-641)- 字는 信本(신본), 潭州(담주)의 臨湘(임상)사람.  구양순은 얼굴이 아주 흉측하게 못생겼으나 두뇌만은 비상하게 총명하여 책을 볼때면 언제나 네댓줄을 한눈에 내리 읽었다.  널리 학문을 닦아 수나라의 太常博士(태상박사)라는 벼슬을 살았다.

  구양순은 처음에는 왕희지의 글씨를 배웠으나 후에 서풍이 차츰차츰 변하여 필력이 힘차기로는 당대에 따를 사람이 없었다.  구양순은 隋代에 자라난 사람이다.  書學을 깊이 연구하여 젊은 시절에는 왕희지의 <黃庭經(황정경)>을 공부한 적이 있다.  더욱 貞觀初(정관초)에는 <蘭亭敍(난정서)>마저 배웠다.  따라서 結體(결체)가 晉法(진법)답게 건강하고 힘차고 또 잘 정돈되어 있다.  그것은 南派(남파)의 특징이다.   그러나 구양순의 준엄하고 세찬 점, 즉 붓을 댈 때 면도날을 베고 도끼날로 찍듯하는 그 명쾌한 날카로운 맛은 분명히 北派(북파)의 영향이다.  그가 쓴 房彦謙(방언겸)의 碑(비)는 그가 북파의 書家(서가)임을 잘 보여준다.  그 해서와 예서의 필법을 범벅한 것 같은 서체, 칼을 꺾듯한 落筆法(낙필법)등이 그것을 증명한다.   점과 획의 符仰向背(부앙향배). 分合聚散(분합취산)이 힘의 균현에 맞고, 빽빽한 데, 빈 곳, 곧은 데, 흰 곳이 적절히 놓여져서 변화가 다채로워졌다.  그의 글씨는 복잡하든 혹은 단순하든지간에 견실하고 차분하다.  마치 몸을 굽히고 빨리 달리는 모습이 안정되고 아름답게 보이며 또 결코 넘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구양순書의 결체의 멋진 묘미가 바로 이런데 있다.  결국 그의 특징은 왕희지 父子의 기법에 北碑의 꿋꿋함, 그리고 漢隸, 章草(예서를 간략하게 쓴 초서의 別體) 등의 갖가지 요소를 섭취하고 과갑하게  새로운 양식을 창조해 낸 데 있다.  한가지 양식에 사로 잡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쓴 글씨는 모나면서도 붓자국이 둥글둥글하고 온화하면서도 힘차다.  그는 이렇듯 南北 쌍방의 좋은 점을 겸해 가졌고,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書法藝術에 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고도 할 수 있다.

   九成宮醴泉名(76세의 書)은 황제의 명령에 의해 쓴 작품이다.  구양순이 특히 심혼을 기울여 휘호한 만큼 用筆  結構에 추호의 어김이 없다.  그 심경은 높고 품경은 아름답다.  구양순書의 碑중에서는 字體도 비교적 크고 字形도 가장 잘 정리 되어 있다.  물론 다른 碑들도 아름답게 째어 있기는 마찬가지나, 字形이 背勢(배세)를 따르는 內逼法(내핍법)을 좇았기 때문에 점이나 획은 모두 가운데를 향해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이 碑는 결체에 여유가 있고 용필도 쥐락펴락 자유자재로 발휘되어 있다.  가장 빼어난 점은, 꺾거나 휘는 데서 붓이 나가다가 멈추고 그대로 자연스럽게 거둔다.  그러면 모가 선 것 같으면서도 모나지 않고 둥근 듯하면서도 둥글지 않은, 즉 黃庭(황정)이나 樂毅(락의)에서 보는 것같은 筆意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 碑는 너무나도 유명해서 수많은 拓本(탁본)을 떴기 때문에, 어지간히 좋은 탁본이 아니면 이런 미묘한 변화를 좀처럼 맛볼 수가 없게 됐다.


3. 顔勤禮碑(안근례비)

  해서의 창안자인 顔眞卿(안진경)은 중국 산동성의 사람으로 호는 應方(응방)이고 字는 淸臣이다.  그리고 顔勤禮(안근례)는 안진경의 증조부로서 字는 敬이다.  안진경은 貞元 元年(정원 원년 785) 77세때 사망하였는데, 晩年에 이르러서는 그 서의 명성은 더욱 높아지고 心手가 다함께 丹熟(단숙)했을 것이니만큼 그러한 것을 보고자 하는 기대는 컸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약 半世紀(반세기) 前인 民國 11년(1922)에 長安의 舊藩(구번)해고, 즉 布政使(포정사) 소속의 창고 뒤 쪽 땅속에서 顔碑 一基가 발견되었다.  이것이 안근례비이다.

  안진경은 왕희지 이래의 서예와는 달리 아주 다른 용필법을 가지고 그 독특한 서풍을 형성하였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正鋒(정봉)의 전면적 채용이다.  晉(진) 이래 唐(당)에 이르는 용필법을 指掌法(지장법)이라고 해서, 팔만 쓰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도 움직이고 붓끝을 사방 팔방으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이야말로 변화에 풍부한 필법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안진경은 지장법에 의하지 않고 정봉, 즉 수직으로 붓을 세운 채로 쓴 부완법을 사용했다.  그의 글씨는 藏鋒(장봉: 鋒芒(봉망)을 획 안쪽으로 하여 밖으로 노출되지 않게 하는 형식) 이라고 한다. 장봉이라는 것은 보통 붓끝이 획의 중심을 지나간 것이라고 풀이되고 있으나 正鋒(정봉)으로 쓰면 자연히 안될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지장법에서도 장봉을 원칙으로 한다.  장봉을 정봉으로 쓰려는 경우에는 直上으로부터 압력으로 힘을 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위로부터 힘을 가감하는 것이나 운필의 減速(감속)등에서 안진경의 독특한 필법이 생겨나는 셈이다.


4. 안탑성교서

  저수량 54세 때의 글씨이다.  구양순의 글이 정사각형이며 무표정한 배세미인데 반해 편평하몀 銳利多變(예리다변)한 향세미의 대표이다.  마른선에 정묘한데다가 골격의 강렬함과 탄력이 있는 아름다움을 특질로 하고 있다.  정문공비, 구성궁예천명, 공자묘당 등의 온화한 정형에 대하여 동적인 구성법을 취해 해법에 일분야를 차지했다.  성교서란 정관 212년 (648) 8월, 태종이 현장, 삼장법사의 청에 응하여 그 新譯(신역)의 불전에 대하여 쓴 서문으로 불교원리의 심원한 것, 현장의 비범한 재능, 노력을 칭찬한 것이다. 


5. 마고선단기(麻姑仙壇記)

  당대의 서풍은 왕희지 글의 전통에서 태어난 것이다.  따라서 우세남의 공자묘당비나 구양순의 구성궁예천명이나 또 저수량의 안탑성교서나, 정제로 잘 정돈된 귀족적 풍격이 강한 데가 있다.  이에 반하여 안진경의 글씨는 씩씩한 힘, 감동과 기백이 나타나 강쾌한 것으로 실로 서도사상에 있어 혁신적 존재이다.  마고선단기에는 大字, 中字와 小字의 세 종이 있으나 여기에 든 것은 대자로 안진경(62세) 大曆(대력) 6년작으로 女仙麻姑(여선마고)에 관한 기술이다.  마고선단기에서 비류가 없는 강직한 그의 성격과 풍부한 창조력을 느끼게 한다.


6. 장맹룡비(張猛龍碑)

  북위 정광 3년(522년)에 건립된 것으로, 필자는 알 수 없고, 지금은 곡부(曲阜)에 있는 孔子의 묘소안에 모두 있다.  방필법(方筆法)의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전문 26행에 매행 46자로 되어있다.  그 필획이 방준경리(方峻勁利)하여 운필이 엄근(嚴謹)하며 결구에 있어서는 평정(平正)속에 곡(曲)함이 있고 풍격은 웅강무밀(雄强茂密)하다라고 말 할 정도로 힘이 있고 엄정한 글씨이다.


7. 고정비(高貞碑)

  북위 정광 4년(523)의 글씨로써 필자는 미상이며 청 건륭때에 산동에서 출토되었다.  송덕비(頌德碑)이며, 방필로써 점획이 날카롭고 모가 나며 힘 있는 것이 북비의 정방한 아름다움을 특구(特具)하고 있다.


8. 조상기(造像記)

  조상기란 어떤 건축물의 건축과정을 샅샅이 기록한 것으로 용문석굴(龍門石窟)의 것이 가장 유명하며 용문 50품이란 말에서 느낄 수 있는 바와 같이 그 수효와 형태가 매우 방대하다.


1) 우궐조상기(牛厥造像記) : 용문조상의 하나로써 북위태화 19년(495)때의 작품이다.  자형은 편평(扁平)하며 특히 어깨부분의 전철에서 이곡절을 이룬 것이 특징이다. 


2) 시평공조상기(始平公造像記) : 북위(서기498)때에 양각으로 새겨진 것으로 필획이 방준능려(方峻稜廬)하여 마치 칼로벤 듯한 풍격이 중후하다.  청의 조지겸이 애호한 것으로 유명하다.


9. 석문명(石門銘)

  자연석에 새긴 것으로 북위 영평 4년(509) 왕원(王遠)의 글씨이다.  필획이 운원(運圓)하고 결체는 횡편(橫扁)하면서 기울어 있는데 자유분방한 면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돈되어 있어 엉성하지 않은 느낌은 높이 사야할 것이다.  그래서 康有爲(강유위)는 '飛逸渾禾宗之宗(비일혼화종지종)'으로써 神品으로 평하였으며 梁啓超(량계초)는 '可賞玩不可學(하상완불가학)'이라 평한 훌륭한 작품이다.


10. 정문공비(鄭文公碑)

  이 비는 북위에서 높은 벼슬을 지냈던 정희의 셋째아들 정도소(鄭道昭)의 글씨이다.  도소는 정문공비 이외에도 '雲峯山論經書詩', ' 登雲峯山海童詩', '夫柱山東湛石室銘', '白駒谷題名' 등 많은 비가 있는데 그것의 대부분은 마애비(자연석을 갈아서 만든 비문)이다.  서법은 원필로써 전서나 장서(초기의 草書)의 서법과 마찬가지로 붓끝을 비교적 가운데에 두고 있어 둥그스름한 맛이 풍기는 용필법이다.  이 비는 오랫동안 그 존재가 잊혀졌다가 청의 원운(阮云)이 탁본을 소개하고 포세신(包世臣)이 추상(推賞)한 이후 유명해져서 북위書家의 대표적 이물로 인식되었다.  포세신이 '篆勢 分韻 草情이 모두 갖춰져 있다'라고 격찬한 바와 같이 원필이 있고 방필이 있으며 곡이 있고, 직이 있으며 느슨한데가 있고, 급한데가 있어 힘있고 율동이 풍부하여 대범하고 정취가 있어 강경하고 자미(姿媚)하다.


11. 묘지명(墓誌銘)

  석판(石版)이 지상에 세워지면 묘비이고 장사지낼 때 묘중에 들어가면 묘지(墓誌)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출토되었을 때 완호(完好)한 것이 많다.  묘지의 서체는 蘊藉姸華(온자연화)한 것이 특징인데 비각이나 조상기와는 다른 특색이 있다.  묘지의 대표적인 것은 방준(方峻)한 원우(元羽)와 원유(圓柔)한 장흑녀(張黑女)가 있다.


1) 원우묘지명(元羽墓誌銘) : 서기 501년에 새겨졌으나, 1918년에 출토되었다.  왕릉의 것으로 각(刻)도 정교한 것이 걸작으로 평가된다.


2) 장흑녀 묘지명(張黑女墓誌銘) : 서기 351년의 작품으로 원석은 지금 없어지고 1825년 何X基가 산동에서 구탁본을 구하였는데 이미 전표(剪標 : 가위로 잘라 책을 만듦)되어 있었으며 행관(行款 : 행서로 낙관한 것)도 불분명하였다.  장현(張玄)묘지명이라고 하는 특징이 있는 이 묘지는 운필에 방필과 장로(藏露)가 어우러져 있고, 결체는 납작한 편이다.

 

4. 行書에 대한 고찰


 1. 서론

  현재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서체는 해서와 행서이다.  그중 행서는 간편히 빨리 쓰기도 쓰거니와 읽기도 편해널리 쓰여지고 있는 서체이다.  행서는 여러 방면으로 탁월하여 형의 마무름법도 비교적 자유로우며 運筆여하에 따라서는 변화가 풍부한 妙味가 깊은 線修(선수)를 만들기 쉬우므로 예술서도 분야에서도 매우 중시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행서는 실용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매우 발전성 있는 서체라 하겠다.


 2. 행서의 성립

  일반적으로 行書라 하면 楷書(해서)를 얼마간 흐트려 놓은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초기 행서의 성립은 隸書의 비능률성과 草書의 난해성을 해결하고자 하는데서 비롯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행서의 효시는 後漢 桓靈(환령)때의 劉德昇(유덕승)의 것이 정설이다.   그밖에 행서의 명칭이나 유래는 왕의지(王義之)와 함께 書의 명인으로 추대되고 있는 魏(위)의 鐘繇(종요)(151-230)라는 書家가 行神書(행신서)를 잘썼다고 하는데, 행서란 명칭은 바로 이 '행신서'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3. 행서의 역사

1) 漢代

  한 대는 아직 행서다운 행서는 아니었다.  이 시대는 이른 바 波勢(파세)의 시대로 당시 유행한 예서는 한점 한확을 일일이 떼지 않고 이어 써가는 행서와는 근본적으로 달랐고 행서다운 면은 보이지 않는다.


2) 삼국시대 이후의 東晉(동진)

  위에서 언급한 행신서가 이 시대에 출현하여 행서의 탄생을 알리며 발전하여 書星 왕희지의 시대를 맞이한다.   그는 喪亂帖(상난첩)을 그의 너무나도 유명한 서첩을 남겨 행서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이 시대의 행서를 보면 右回折(우회절)이 강하게 작용하는데, 그 위에 점과 획의 자율성이 강화되고 필획의 技巧가 발달하여 예리하고 섬세한 것을 보여주어 한글자 마다의 마무리가 특별한 것을 보여준다.   또한 波勢와도 완전히 인연을 끊고 三折의 骨法을 기본으로 삼게 된다.


3) 初唐

  초당은 古典主義, 즉 왕희지 형태의 서체의 절정기로 毆陽詢(구양순), 諸遂良(제수량), 오세남이 이 시대의 대표적인 서도가이다.   작품으로는 구양순의 史事帖(사사첩)과 오세남의 汝南公主墓誌名(여남공주묘지명), 제수량의 枯樹賦(고수부) 등이 대표적이다.


4) 中唐

  제수량에 의해 흔들리기 시작한 古典主義가 안진경의 반고전주의에 의해 격동되는 시대이다.  안진경은 그의 해서의 골법 그대로 행서의 필세도 필획의 겉과 속을 그대로 드러내는 고전주의와는 다르게 비튼 듯하는 기법으로 말하자면 中鋒적인 기법으로 붓을 잡아돌려 의지적인 통일력이 전체에 나타나게 하는 완전히 새로운 행서의 표현을 만들어 내고 있다.


5) 末唐

  안진경 이후 이렇다할 만한 대가의 탄생을 보지 못한 시대이다.  柳公權의 聖慈帖(성자첩), 정번즉의 最燈張來目錄跋(최등장래목록발), 杜牧(두목)의 張好詩幷序(장호시병서) 등이 유명하다.


6) 宋代

  송대에는 蘇軾(소식), 黃庭堅(황정견), 미비라는 걸출한 대가들이 출현한다.  소식(1036~1101)은 詩, 詞, 故, 書畵에 모두 능한 천재로 東波道人이라 불리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黃州寒食詩 등이 있다.  또한 송대 최고의 서가로 불리우는 그의 글씨를 보고 筆意를 느껴 폭넓은 공부를 하여 自成一家한 유명한 사람이다.   이 시대는 이러한 대가들을 배출한 것과 더불어 강한 의지, 강한 주관을 표출하는 表出主義가 주류를 이루게 된다.


7) 元~淸

  이 표출주의의 탄생이후 南宋으로부터 元으로 또 明으로 反古典의 바람은 확산되어 간다.   원의 趙子昻(조자앙)이나 明의 文徵明(문징명) 같은 훌륭한 고전주의 작가가 나타나서 세상에 큰 영향을 끼치지만, 반고전의 운동은 끊임없이 생겨나 명말에는 浪漫主義의 흥성과 더불어 草書의 기법인 蓮綿勢(연면세)의 도입과 金石學의 행서 필법에의 도입등이 나타난다.  명말의 낭만주의는 해서 필세인 연면세를 행서에까지 도입하여 행서의 신경지, 즉 楷書적 구성을 초월하여 유동감을 가미하게 된다.   이 신경향은 명말부터 청초에 걸쳐 널리 유행하게 된다.   청대에서는 老古學古文書學의 한부분이라 할 수 있는 금석학의 필세에의 도입이 시도된다.   이러한 시도를 한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趙之謙(조지겸)으로 古法을 사랑하는 자의 눈에는 '파괴의 무법자'로 보여 많은 배척을 받았다.   원래 북위의 石刻이라면 해서로 극한되는데 그는 여기서 찾아낸 유형을 다시 행서의 형까지 끌어들여 북위의 석각에서 볼 수 있는 뛰어난 지성으로 새로운 행서를 등장시킨다.  조자앙의 출현은 중국적 현대의 출발을 의미한다.


8) 現代

  지금 중국은 커다란 회전을 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館閣體(관각체)를 해방하라는 소리가 널리 외쳐지고 있다.  관각체란 관공서의 체, 즉 관료체로서 이것은 곧 전래의 고법을 의미한다.  옛날 魯邊(노변)이란 사람은 중국을 구하기 위해서는 中華의 사상을 박멸해야 한다고 말한적이 있다.  관각체의 추방운동과 이 사상을 비교해서 본다면 아주 흥미있는 일이다. 


  4. 행서의 필법

  행서는 楷書를 本으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그 書法도 해서의 그것과 크게 틀리지 않는다.  書藝의 모든 書體가 외따로 튀어나온 것이 없으므로 서법이란 것이 전체를 꿰어 통한다고도 볼 수 있다.  우선, 해서와 행서의 다른점을 살펴보면, 해서는 주로 藏鋒(장봉)으로 쓰지만 행서는 露鋒(노봉)으로 쓴다.  藏鋒(장봉)을 감추어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써 붓끝의 흔적일 날카롭게 나타나지 않게 된다.  반대로 露鋒(노봉)은 붓끝을 드러내어 쓰기 때문에 끝이 드러나게 된다.  다음으로, 해서는 붓을 대고, 밀고, 들고해서 한획 한획을 쓰지만 행서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기필(起筆), 행필(行筆), 수필(收筆)이 이루어져야 한다.  요컨데 행서는 해서와는 달리 외연적 연결성이 뚜렷하므로 筆順을 잘 알아서 한꺼번에 써 내리는 것이 좋다.  다음으로 행서에는 미약한 虛劃이 있다.  해서에서도 갈고리를 할 때 허획이 생기지만 행서보다는 덜하다.  행서에서 연결성은 허획으로 강조되는 경우가 많응데 이 허획을 實劃과 구분하여 쓰지 않으면 그야말로 주객이 전도되어 좋은 글씨가 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행서를 쓸 때 문제점은 中鋒과 側鋒(편봉이라고도 함)인데 해서는 거의 중봉으로 쓰지만 행서나 초서는 중봉으로만 쓰기에는 묘미가 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런 표현은 상당히 조심스럽게 된다.  초심자는 당연히 중봉을 따라야 하며 스스로 연륜이 쌓였다고 느낄 때 조심스레 편봉에 눈을 돌려야 하리라 본다.  행서를 꿰뚫는 대원칙의 하나가 행서를 쓰면서 잘 이해가 되지 않거나 막히는 곳이 있으면, 해서를 찾아보면 쉽게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5. 행서의 대표적 작품

1) 蘭亭敍(난정서) : 왕희지의 난정서는 행서뿐만 아니라 서예의 대표적 작품의 하나로 晉(진)의 穆帝(목제)때인 永和 9년 (353) 3월 3일, 강남의 문인, 묵객 41명이 會稽山陰(회계산음)의 蘭亭(난정)에 會合하여 契事(계사)를 지내고, 流觴曲水(유상곡수)의 연을 베풀어 시를 지으며 봄날을 즐겼다고 한다. 이때 왕희지는 서빈필로 蠶繭紙(잠견지)에 시의 서문 초고를 썼다고 하는데, 이것이 곧 난정서로 그 자신도 마음에 들어 하였다.   그러나 당 태종은 이것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유언으로 그의 무덤에 같이 묻게 하였으므로 진본은 남아 있지 않고, 후세에 전하여 오는 것은 당시의 능서가들이 임서한 것이며 여러 종류가 있다.


2)集字聖敎序(집자성교서) : 집자성교서는 당의 僧(승)인 현장법사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친히 태종이 서문을 짓고 고종이 그 記(기)를 적어 현장이 번역한 心經과 같이 새긴 것으로 글씨는 흥복사의 승려인 懷仁(회인)이 왕희지의 진적 행서중에서 한자씩 모아 비에 새긴 것이다.   글자수는 무려 1792자나 되며 회인 반생에 걸친 노력의 결정이라고 한다.  청아한 선과 기품이 높은 이 글씨는 난정서와 더불어 행서의 쌍벽을 일컬어 온다.   다만 한자한자 집자한 것이기에 글자사이의 필의가 이어지지 않으나, 왕희지의 행서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3)枯樹賦(고수부) : 고수부는 저수량이 35세때 쓴 것이라고 하는데, 운필에 미묘한 변화가 있고, 탄력이 있으며, 부드러운 느낌이 난다.  그리고 글자가 약간 기울어진 것 같아 보이고, 글줄기가 굽어 있으나 필의가 잘 이어져 있기 때문에 부자연스럽게 보이지 않으며, 전체의 균형이 잡혀 있다.


4)爭坐位帖(쟁좌위첩) : 쟁좌위첩은 草稿(초고)로 쓰여진 것으로 고래 안진경의 삼고중의 하나로서 유명하나, 왕희지의 난정서와 더불어 행서의 쌍벽으로 알려져 있다.   용필에 꾸밈새가 적고, 장봉, 원필로서 선이 비교적 굵고 둥근 맛이 난다.  그리고 운필의 속도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보통의 속도라 할 수 있고 한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이 서첩에는 행초중에 많은 해법이 섞여 있다.  넓고 소박한 마음으로 대범하게 써 나가면 이 서첩과 서로 호흡이 맞을 것이다.


5) 松風閣詩券(송풍각시권) : 황산곡이 58세때(1103) 流謫(유적)의 몸으로써 湖比鄂城縣(호비악성현)의 樊山(번산)에서 쉴 때 이 지역의 토지의 풍경을 사랑하고 산중의 노송사이에 있는 한 누각에 松風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쓴 것이다.   이 시구에'東波道人(동파도인)이 이미 샘물에 잠기고 張候(장후) 언제라도 눈앞에 떠오르네'라고 있는데 이 때에 소동파는 이미 죽고 장후가 오게 되었지만 아직 오지 않는다.  하룻밤 비에 젖어 추워진 계곡을 바라보고 오로지 거듭되는 궁핍한 역경을 벗해 여러 친구와 酒遊(주유)할 수 있을 거라고 비탄한다.  황산곡이 만년, 憂悶(우민)의 생각을 품과 四川地方에 있었던 때의 작품은 기상이 매우 높은 우수성을 지니고 있다.


6) 范滂傳(범방전) : 崇年(숭년) 4년(105) 산곡이 의주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정치상의 신구양당의 싸움이 있어, 정권을 취하고 있는 신법당의 세력이 맹위를 떨치고 구법당의 사람들은 탄압을 받고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황산곡도 그 중 한사람으로 만년에는 이와같은 가장 궁벽한 시골로 추방되었다.  거기에서 한 대에 있어서 청절이 높은 일로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인물인 范滂(범방)의 전기를 휘호하는 일을 그 지방관리를 지낸 여씨가 청탁했다.  그때 산곡은 범방전을 암송하여 대서했다.  끝마칠 때는 겨우 2-3자의 오자만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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